몸을 치장하는 수많은 화려한 장신구들이 있으나 '약속'을 상징하는 장신구는 '반지'가 유일하다. 그래서 결혼식뿐만 아니라 주교나 교황의 엄숙한 서약식에도 신과 맺는 계약의 상징으로서 반지가 등장한다. 보석상들은 다이아몬드 같은 '단단하고 빛나는' 사물이 '영원한 약속'의 의미를 강화하는 것처럼 광고하지만, 이 사물이 지닌 약속의 힘은 거기에 무엇을 새겼는가, 어떤 재질로 만들었는가, 어떤 보석을 박았는가 하는 것보다는 다른 데서 나온다.
한 연인이 들판을 걷다가 주변에 널린 풀잎과 꽃잎으로 즉석에서 만든 '풀꽃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주며 사랑을 맹세한다고 한들, 그 맹세가 다이아몬드 반지에 미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 사물의 본질은 '속이 비어 있는 둥근 고리(環)'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반지를 뜻하는 영어명은 그저 '둥근 고리(ring)'라는 뜻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 사물의 고리 형상은 서로 반대 방향(좌우)으로 향하던 한 직선의 양 끝을 구부려서 원의 형태로 '만난다'는 의미를 드러낸다.
직선의 좌우 양끝을 구부려서 둥근 고리를 만들려면 가운데가 '비어' 있어야 한다. 반지의 가운데 뚫린 데는 '구멍'이 아니다. 바꿔 말해 '비어 있어야' 만날 수 있다.
흔히들 반지의 계약적 성격이 손가락을 두르고 있는 이 사물 형상의 구속성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이건 오해다. '구속'이라는 강제성은 진정한 약속의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두 존재가 참되게 '만나는' 것이다. 그것은 어설픈 타협이 아니라 서로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무궁무진한 힘이다.
손가락이 끼워진 반지는 그래서 누구 손가락에 끼든 간에 하나의 반지만으로도 커플링이다. 이미 반지의 원환 자체가 두 존재의 만남을 뜻하기 때문이다.
반지의 형상은 손가락을 넣지 않아도 이미 뜨겁다. '둥근 입'처럼 생긴 원환은 비어 있는 공간을 통해 뜨거운 침묵으로 긍정의 만남을 얘기한다.
새로운 삶에 대한 국민적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은 1년이었으며, 사회적 갈등이 극한에 달한 연말이다. 우리는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