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업 신부의 사목 활동 중심지이며 치명자의 묘소가 모여 있는 곳
배티는 박해 시대의 유서 깊은 교우촌이며 순교자 묘소가 있는 성지다. 병인박해 때 인근에서 여러 명의 순교자가 탄생하였으며, 베르뇌 주교, 칼레 등의 프랑스 신부들이 박해를 피해 와 사목한 곳이다. 배티는 다블뤼 신부에 이어 이곳에서 신학 교육을 담당했던 최양업 신부의 사목 거점이기도 하다.
배티 산곡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39년 무렵이라고 볼 수 있다. 현존하는 《최우정 바시리오 이력서》(필사본)에 따르면, 최경환 성인이 1839년에 옥사한 뒤 그의 아들 중 셋째인 최우정 바시리오가 ‘동골’의 친척 집에서 양육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동골 교우촌은 그 이전에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1801년 신유박해 후 순교한 남인 양반들의 가족과 몰락한 양반들이 이곳에 피해 와 1866년 병인박해 때까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영위하였으나 박해가 닥치자 체포되어 혹형을 받아 죽은 이가 허다하였다. 1850년대 초부터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신부(1857년 주교),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德老, 1828~1866, 미카엘) 신부 등이 이곳을 중심으로 사목 활동을 하였고, 메스트르(Maistre, 1753~1821, 요셉), 페롱(F´eron, 權, 1827~1903, 스타니슬라오), 칼레(Calais, 姜, 1833~1884, 아돌프) 등의 프랑스 선교사들도 이 일대에서 사목 활동을 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1849년 12월 3일에 귀국하여 1851년 6월부터 약 4개월간 이곳 배티의 절골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면서 한국 순교자들의 행적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또한 다블뤼 신부에 이어 이곳에서 몇 명의 신학생 교육을 담당하기도 했다. 1853년 여름부터 1856년 여름 무렵까지 경상도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약 3년 동안은 배티의 동골을 사목 거점으로 삼아, 서양 선교사들이 다니기 어려운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오지의 교우촌들을 순방하였다.
병인박해는 배티 인근의 모든 교우촌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기록상 이 지역 출신이거나 거주자로서 1866~1868년 사이에 체포되어 순교한 신자들은 하느님의 종 오반지(吳盤池, 1813~1866, 바오로), 이 생원 등 모두 29명에 이르는데, 이들의 거주지가 바로 배티, 발래기, 지장골, 동골, 용진골, 정삼이골, 굴티, 절골 교우촌들이었다. 이 밖에도 순교자 박 바르바라와 시누이 윤씨의 무덤이 현재 백곡 공소 안에 있으며, 삼박골에 순교자 이 진사 가족의 무덤이, 배티 사적지 안에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다.
배티 일대의 교우촌은 박해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체포됨으로써 일시적으로 와해되고 신자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으나 박해가 끝나 가는 1870년 무렵부터 신자들은 다시 이곳에 모여 교우촌을 재건하였다. 그 결과 1888년에는 충청도를 전담하게 된 두세(Doucet, 丁加彌, 1853~1917, 가밀로) 신부에 의해 배티 공소가 설립되었고, 1892년에는 새울과 용진골이, 1893년에는 삼박골이 공소로 설정되었다. 이후 배티, 용진골, 새울 공소에서는 여러 명의 성직자를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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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사진과 글 모두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에서 옮겨 온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