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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존 웨슬리의 생애와 신학
조경완목사(화진포교회)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Ⅰ. 존 웨슬리의 생애
역사란 과거의 사건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모습을 반영하며, 미래를 향한 문을 열어준다. 이것은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교수인 E.H. 카의 역사관이 반영된 표현이다. 존 웨슬리의 생애는 오늘날 감리교회의 원형이며, 미래를 향한 감리교회의 비전이다.
1. 존 웨슬리의 어린 시절
하버트 웨슬리 (도싯셔의 귀족) | ||||||||||||||||||||||||||
바돌로매 웨슬리(1595~1680) 옥스퍼드대 졸, 비국교도 목사 웨스리의 증조부 | ||||||||||||||||||||||||||
존 웨슬리(1636~1678) 옥스퍼드대 졸, 비국교도 목사 웨슬리의 조부 | 사무엘 앤슬리(1620~1696) 옥스퍼드대 졸, 비국교도 목사 수산나의 아버지 | |||||||||||||||||||||||||
사무엘 웨슬리(1662~1735) 옥스퍼드대 졸, 성공회 목사 웨슬리의 아버지 | 수산나 앤슬리(1669~1742) 웨슬리의 어머니 | |||||||||||||||||||||||||
1 사무엘2세 | 2 수산나 ⁀유아기에사망‿ | 3 에밀리아 | 4 아네슬리 ⁀쌍둥이 / 유아기에사망‿ | 5 제디댜⁀쌍둥이 / 유아기에사망‿ | 6 수산나 | 7 메리 | 8 메히터블 | 9 무명⁀출생직후사망‿ | 10 존⁀출생직후사망‿ | 11 벤저민⁀출생직후사망‿ | 12 무명의 쌍둥이⁀출생직후사망‿ | 13 무명의 쌍둥이⁀출생직후사망‿ | 14 안 | 15 존 | 16 무명⁀출생22일만에사망‿ | 17 마르타 | 18 찰스 | 19 케지아 |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1703년 6월 17일 성공회 사제인 사무엘 웨슬리와 경건한 어머니 수산나의 15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19명의 형제 자매가 태어났으나 불행하게도 그중에 9명의 형제자매는 어릴 때 사망하고 10명(형제3, 자매7)만 생존하였다. 웨슬리가의 뿌리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에 따르면, 웨슬리의 선조들은 수백년 동안 학식, 경건, 도덕, 시문학, 음악, 그리고 충성심과 기사도 정신을 탁월하게 갖추고 국가와 교회
<웨슬리의 가문과 계보>
와 사회를 지켜온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웨슬리의 어원을 알아보도록 하자. 1066년 영국 동남부에 있는 해스팅스에서 일명 센라크라고 하는 전쟁이 있었다. 이 전쟁으로 16세 이상의 남자들이 모두 생명을 잃게 되자, 과부가 된 여인들과 어린아이들은 서머싯 백작의 영지 안에 있는 웰스베(Welswe) 또는 웰스레(Welslegh)라는 농장으로 피신하였다. 이 지역은 영국 서남 해안에 있는 도싯셔에 속해 있었다. 1420년 이후부터 웰스베 또는 웰스레가 웰레슬레(Wellesleigh)로 변했으며, 그 후 웰레슬리(Wellesley)와 웰스리(Welsly)라고 불렸다가 1539년부터는 웨슬리(Wesley)로 불리게 되었다. 발음이 잘못되어 한때 웨스트리(Westley)로 불리기도 하였다.
존 웨슬리의 아버지 사무엘과 어머니 수산나는 청교도 전통의 기독교 신앙을 지닌 가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사무엘이 성공회로 전향한 후, 교리의 문제로 사무엘과 수산나는 종종 가정에서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어머니 수산나는 매우 강직한 신앙과 자녀에 대한 엄격하고도 교양 있는 교육으로 존과 자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수산나는 자녀들을 교육함에 있어 세 가지 원리의 철저한 규칙을 강조하였다. 첫째는 규칙의 철저한 준수이고, 둘째는 철저한 통제성, 셋째는 빈틈없는 기민성이다. 수산나에게 받은 어린시절의 교육은 이후 존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709년 2월 9일 목용일 밤 11시 웹워드 사제관의 화재는 존 웨슬리의 평생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철저한 소명의식을 지니게 하는 전기가 되었다. 이 화제에서 존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화재의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불만을 품은 교구민들이 방화하였을 것이라고 역사가들은 추측한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한 것은 웹워드에서의 또 다른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웹워드 주민들은 존의 아버지 사무엘의 목회를 반가워하지 않았다. 왕궁에서 자신들의 토지를 개간하여 1/3은 왕이 차지하고, 1/3은 개간한 회사가 차지하고, 나머지 1/3을 주민들에게 주었기 때문에 웹워드 주민들은 왕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다. 그러므로 토리당(왕실)의 비호를 받는 사무엘 웨슬리가 웹워드에 들어오자 주민들은 사무엘과 수산나의 접근을 싫어하였고, 가능한 한 웨슬리 집안을 괴롭혔다. 주민들은 사무엘의 가정이 경작한 농작물을 불태우고, 젖소를 찔러 죽이거나 가축을 불구로 만드는 등 박해를 가하였다. 이 화재 사건을 통해, 웨슬리는 평생 스스로를 “타다가 남은 부지깽이”로 부르며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 이후로 마을주민들은 화재 속에서도 용감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사무엘가족들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고 한다.
웨슬리의 어릴적 삶은 정말 가난하고 어려운 삶이었다. 그런 중에도 사무엘과 수산나는 자녀교육을 철저하게 시켰다. 사무엘은 비록 가난하였지만 웨슬리에게 정신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전문학을 가르쳤고 애정 어린 친구이자 선생으로서 편지를 통해 그를 양육하였다. 특히 책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어 웨슬리에게 독서를 장려하였다. 또한 어머니인 수산나는 가난과 싸워야 했지만 언제나 온순하고 엄격하였으며 어머니로서의 임무를 다하였다. 수산나는 가정에서 자녀들을 훌륭하게 교육시켰다.
웨슬리는 자신의 모친 수산나를 위대하게 보았다. 여성적이고 부드럽고, 깨끗하며 정숙한 여인이었다. 웨슬리는 여성에 대해 깊은 존경심과 신뢰를 가졌는데, 이런 태도는 그의 모친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다. 정신적 위기와 신학적 의문에 빠졌을 때 박식했던 수산나에게 직접 또는 서신을 통해 상담하는 것이 웨슬리에게는 기본적이 삶이었다. 이와 같이 웨슬리는 신학적이며 철학적인 여러 문제들을 먼저 어머니 수산나와 상담하여 풀어갔다.
2. 옥스퍼드에서의 경건 운동
18세기 초 영국의 종교적 상황은 합리주의가 모든 종교 분야에 깊이 침투해 있었다. 합리주의는 기독교를 도덕 체계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18세기 말 영국은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전환 될 산업 혁명의 시작이 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산업 혁명의 영향 역시 기독교에 미치는 합리주의의 영향을 가속화 시켰다. 그러나 18세기 초는 경건한 복음주의 운동이 영국에서 일어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특히 윌리엄 로오는 합리주의적인 기독교인 “이신론”에 반대하며, 존 웨슬리의 신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존 웨슬리는 1720년 옥스퍼드 대학교의 클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1724년에 인문학 학사를 받고, 1725년 9월 19일에는 영국 성공회 감독 포터에 의해 목사안수를 받게 된다. 존 웨슬리는 1726년 3월에는 옥스퍼드 대학교 링컨 칼리지의 교수로 선발되고, 1728년에는 엘더 목사 안수를 받아서 영국 성공회의 사제로 임명된다.
이 시기에 장차 영국을 변화시킬 감리교 운동의 씨앗이 웨슬리의 삶에 뿌려지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영적 일기쓰기와 독서였다. 1725년 4월 기록도기 시작한 존 웨슬리의 영적 일기는 그의 신앙과 신학, 그리고 초기 감리교 운동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1729년 11월에 시작된 옥스퍼드의 신성클럽(Holy Club, 홀리클럽)은 성서읽기, 금식과 기도, 전도와 선교를 위해 존 웨슬리가 그의 동생 찰스, 모간, 커크햄등과 조직한 모임으로 감리교운동의 효시가 된다. 당시 옥스퍼드의 사람들은 이들을 “규칙쟁이”(Methodist,메도디스트)라 불렀고, 이것은 후일 감리교회의 명칭이 된다. 1735년에는 위대한 복음 설교가 조지 휘트필드가 “신성클럽”에 가입하였다. 조지 휘트필드는 이후 존 웨슬리와 결별하였지만, 미국의 영적 각성 운동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3. 조지아 선교 시대
웨슬리 형제는 1735년 10월 미국 조지아 선교를 떠나게 된다. 항해 중 폭풍을 통해 목격한 모라비안 교도의 침착한 태도와 경건은 존 웨슬리의 신앙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된다. 이들 모라비안 교도는 1467년 독일에서 시작된 개신교 운동으로 성서의 권위, 개인구원, 십자가의 구속을 강조하는 신앙공동체이다.
존 웨슬리는 조지아의 선교 활동을 통해, 가난한 사람, 아이들, 그리고 인디언들의 교육과 구제에 힘을
썼다. 그는 평신도 지도자를 임명하고, 즉흥적 설교와 즉흥적 기도를 예배에 도입하여 예배의 갱신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유럽에서 이주한 현지인들과 인디언들과의 어려운 관계, 소피아 홉키 양과의 결혼 좌절 등으로 1737년 12월 2일 발에 먼지를 털고 조지아를 떠나게 된다.
4. 회심 이후 감리교 운동
1738년 2월 1일 영국에 도착한 후 모라비안 교도의 지도자인 피터 뵐러와 친분을 쌓으며,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적 진리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 올더스케잍 거리의 조그마한 집회에 참석 하였다가 존 웨슬리는 뜨거운 영적 회심을 하게 된다.
“그날 저녁에 나는 올더스케잍 가에 있는 기도모임에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참석했다. 거기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고 있었다. 밤 8시 45분, 그 낭독자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변화를 가져오시는 일을 묘사하는 말을 듣는 중에 나는 내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음을 느꼈고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위지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없이 하였다는 확신이 생겼고 나 같은 자의 죄를 다 사하시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존 웨슬리 “회심의 날 일기” 중에서)
회심 후에 존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들을 더욱 깊이 알기 위해, 독일로 2주간 여행을 하며 진젠도르프 백작을 직접 만나보고, 1738년 10월 런던으로 돌아왔다.
모라비안 교도에게 존 웨슬리는 많은 도움을 받았으나,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의 경건이 너무도 주관적이며, 진젠도르프 자신이 지나치게 숭배된다고 생각하여 완전한 모라비안 교도가 되지는 않았다.
거룩한 체험을 한 웨슬리는 1739년 4월 1일 브리스톨에서 산상수훈강해로 야외 설교를 시작하였고, 그의 야외설교는 영국 전역에 놀라운 성령체험의 물결을 일으켰다. 초기 감리교 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신도회(Society,소싸이어티)는 1739년 7월 11일 웨슬리와 휫필드에 의해 브리스톨에서 시작되었다. 영국 성공회 예배와 중복되지 않도록 모임 시간이 신중하게 결정되었고, 예배와 친고, 기도와 교육이 신도회에서 행해졌다.
1742년에는 웨슬리의 부흥운동을 뿌리 내리고 성장하게 하는 “속회”(Class meeting)가 조직되었다. 약 12명 단위로 구성된 속회는 1명의 속장을 세워 매주 금요일에 모여서, 영적 생활을 점검하고 성경말씀을 공하며 기도와 교제를 나누는 소그룹 운동이었다. 속회에서는 2~3개월마다 시험을 치러 회원자격을 부여했으며 “충고와 견책”이 이루어지는 철저한 신앙훈련이 실시되었다. 존 웨슬리는 감리교 운동의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그의 “신약성서 주해”와 “표준 설교”를 깊이 강독하게 함으로 감리교 운동의 교리적 기준으로 삼게 하였다. 속회는 새 회당의 빚을 갚기 위해 결성되기 시작하였으나, 감리교회를 성장시키는 중요한 조직이 되었다. 속회는 1777년 런던 씨티로드에 봉헌된 “웨슬리예배당”의 기초가 되기도 하였다.
1944년 6월 파운더리에서 웨슬리 형제와 다른 네 명의 성직자, 그리고 네 명의 평신도 설교자들이 모인 가운데 최초의 연회가 개최되었다. 연회에서는 믿음과 의인(義認, 의롭다고 인정하다), 확신과 성화에 관한 교리와 감리교 운동의 규율과 조직, 지도자의 역할 등이 주된 의제가 되었다. 1767년 런던연회, 1770년, 1777년, 1786년의 브리스톨 연회, 1787년의 맨체스터 연회로 이어져 나가면서, 감리교회는 크게 부흥하였고, 존 웨슬리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 영국 전역을 순회하며 전도하여 감리교 운동의 범위를 확장시켰다.
그러나 존 웨슬리는 감리교회가 영국성공회에서 분리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1767년 뉴욕에서 미국 최초의 감리교회가 창립된 후, 1776년 미국이 독립했을 때 15,000여 명의 감리교회 신자가 있었으며, 존 웨슬리는 이들의 성만찬과 세례를 위해 1784년 토마스 콕 박사를 미국 감리교회의 초대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1791년 3월 2일 오전 10시 존 웨슬리는 선교사업과 구제 사업을 위해 모든 사재를 다 쓰고,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일세”라는 고백 후에 시티 로드에서 88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온 세게는 나의 교구다”라는 말을 몸소 실천한 존 웨슬리는 평생 5천마일(8046㎞)을 돌며 전도하고, 54,400여회의 설교를 하였으며, 135,000여명을 전도하여 예수님을 믿도록 결신시키며, 500여명의 순회전도자를 길러내었다.
Ⅱ. 존 웨슬리의 신학(이론)
1. 웨슬리 신학의 네 가지 원천
첫째, 성경은 웨슬리 신학에서 기독교 교리를 위한 가장 중요한 원천이요 표준이 된다. 웨슬리는 “모든 일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옷입기 위해” 1725년부터 자신을 “한 책의 사람”으로 선포한 이후, 1730년에는 “성경 외에는 어떠한 책에도 관심을 두지 안겠다”고 선언 하였다. 감리교회의 신앙 전통에 따르면, 성경의 저자들은 성령의 감동하심에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세상과 화해하게 된 사실을 증언한다. 웨슬리 신앙 전통 속에서 “성경은 구원에 필수불가결한 원천이요, 믿음과 실행의 참된 법도와 안내이며, 모든 믿음에 대한 해석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
둘째, 웨슬리는 신앙에 대한 이해를 깊이 있게 하기 위하여 교회의 전통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다음은 웨슬 리가 미국으로 선교를 떠난 항해 중인 1735년 10월 21일(화) 일기의 한 부분이다.
새벽 4시에서 5시까지는 우리 각자의 개인기도 시간으로 했고, 5시에서 7시까지는 함께 성경을 읽었는데, 우리 자신의 이해에만 의존하지 않으려고, 초대 교회의 문헌들과 세심하게 비교하여 연구하였다.
웨슬리는 기독교 공동체의 유산으로 내려오는 전통, 특별히 초대 교부들과 영국교회의 전통을 존중하고 이러한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이해하는 참고 자료로 활용하였다.
셋째, 웨슬리는 성경적 진리의 증거를 일상적 삶의 체험과 결된 상식적인 지식에서도 찾았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이성의 빛 아래 진리를 추구하였으며, 이성을 통해 알게 된 것을 믿게 하는 힘을 성령의 역사로 인정하였다.
웨슬 리가 말하는 이성이란,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영혼이 지닌 능력으로 사물을 이해하며, 사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이것을 언어(생각의 언어를 포함)로 표현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넷째, 웨슬리는 체험적 신앙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실한 신뢰이며 성령의 내적 증거와 외적 열매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다. 올더스케잍에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 곧 종교적 경험을 한 웨슬리는 경험이란 성경적 진리를 확증할 수 있는 시험장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적 경험은 “성령 안에서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경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계시되어 있는 권위의 원천이 된다. 전통은 성경과 함께 기독교 신앙의 건전성을 조명하여 주다. 신앙경험은 성경의 진리를 확증하며 신앙에 놀라운 활력을 불어 넣어준다. 그리고 이성은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며 판단하고, 이것을 합리적으로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웨슬리는 성경, 전통, 이성, 경험 이 네 가지 신학적 원천의 조화와 균형을 강조한다.
2. 웨슬리의 구원론
첫째. 선재적 은총(혹은 선행 은총)이란 구원의 과정 중 칭의(稱義)의 앞선 단계로서, 하나님의 행위가 항상 앞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선재적 은총의 사상은 빌립보서 2장 13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웨슬리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설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구원을 위한 거룩한 사역을 하는 것ㅇ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구원을 위한 사역을 하지 않으신다면, 당신 자신을 위한 구원의 사역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구언을 이룸“에 관한 웨슬리의 설교문) 웨슬리의 설교는 구원 사역에 하나님의 앞선 은혜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주고 있다.
둘째, “회개”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 된 자신을 인식하고 주님 앞에 겸허한 자세로 참회의 심정을 내어 놓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존 웨슬리는 “감리교인의 원리”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의인되기를 기대하기 전에 겸허하고 참회해야 하며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지는(즉 자기 안에 형성된 그리스도를 지녀야 하는) 것이 옳고 당연하다. 따라서 이 참회와 통회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이다.(존 웨슬리의 “감리교인의 원리” 중에서)
웨슬리는 인간 본성의 전적인 타락을 강조한다. 이러한 웨슬리의 인간이해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는 창세기 6장 5절의 말씀에서 기초한 것이다. 인간을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이해하였던 웨슬리는 그러한 인간 본성 안에 “선을 향한 거룩한 충동”이 있음도 확신하였다. 웨슬리는 “회개”의 원인이 되는 “선을 향한 인간의 거룩한 충동”을 선재하는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살아있으신 현존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 장로교인들이 보지 못했던 웨슬리의 독특한 통찰이요 이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회개할 수 있는 것은 그 역시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에 따른 결과라 할 수 있다.
셋째, 칭의(稱義, 의롭다 일컬음)에 관하여 웨슬리의 그의 설교,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대하여”에서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칭의라 함은 우리가 죄책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으로 복귀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존 웨슬리의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대하여” 설교 중에서)
그리고 이러한 칭의의 과정에서 웨슬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다. 결국 “칭의”의 중심에서 빛나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인 것이다. 웨슬리는 “신앙으로 얻는 칭의”(1746년)라는 그의 설교에서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의 구원 사역을 로마서 4장 5절 말씀을 근거로 설명한다. “일을 아니 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결국 칭의는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죽임을 당하신 그 십자가의 공로로, 그러한 사실을 믿는 우리 모두가 용서함 받는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원 사건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넷째, “신생” 이란 “거듭남” 혹은 “중생”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신생”, 곧 “거듭남”이란 성화의 첫 단계이며, 성화와 함께 발생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이끄실 때 하나님께서 영혼 안에서 역사하시는 위대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음은 웨슬리가 1760년에 설교한 “신생, 곧 거듭남”의 설교문의 한 부분인데, 웨슬리는 요한복음 3장 7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는 말씀 “신생”의 근거 구절로 삼았다.
신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으로 모든 영혼 안에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시생은 의와 참된 성결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워지고’, 세상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교만이 겸비로, 거친 마음이 온유한 마음으로, 미움 시기 악의가 모든 인류에 대한 신실과 온유와 희생적인 사랑으로 변화될 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존 웨슬리의 “신생” 설교 중에서)
칭의(稱義, 의롭다 일컬음)에서 사역의 중심에는 단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이 위치한다. 반면 “신생”의 과정에서 빛나는 불꽃은 단연 “성령의 역사”이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는 이것을 보다 분명히 보여 준다.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 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 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요 3:4-5)
다섯째, “성화”란 웨슬리에 따르면, “우리가 죄의 권세와 뿌리로부터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웨슬리의 성화에 대한 이해는 1739년 9월 12일 일기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성화란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성화란 신적 본성에 참여하는 것(벧후1:4)이며, 그리스도께서 안에 있는 마음(빌2:5)이며,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을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마음에 갱신하는 것(골 3:10)이라고 나는 믿는다.
결국 성화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는 것”이며 “하늘 아버지가 거룩하듯이 우리도 거룩해 지는 것”으로, 신자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변화와 은혜 속에서의 지속적인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섯째, “완전”은 웨슬리 신학 사상의 꽃이다. 웨슬리 신학 사상의 꽃인 “완전”을 한마디로 다시 표현한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다음은 완전에 대한 웨슬리 자신의 답변이다.
문: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무엇인가?
답: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악한 성품과 사랑에 역행하는 것이다. 영혼 속에 잔재하지 아니하고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순수한 사랑으로 지배되는 것을 의미한다.(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 중에서)
존 웨슬리의 완전에 대한 이해는 그가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1752년 출판한 찬송시의 내용을 요약한 다음의 글에서 보다 분명하게 제시된다.
(1)그리스도인의 완전은 하나님과 윌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서 모든 죄로부터의 구원을 뜻한다는 것, (2)이것은 신앙으로만 받는다는 것, (3) 그것은 순간적으로, 한 순간에 주어진다는 것, (4) 우리가 그것을 기대하는 시간은 임종시가 아니라 매 순간이며, 지금이 허락된 시간이고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는 것이다.(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 중에서)
Ⅲ. 존 웨슬리의 신학(실천)
1. 웨슬리와 전도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중단 없는 사명이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장 19-20절). 감리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88세를 살며, 5천마일(지구전체 길이의 4분의 1)을 50년 넘도록 전도를 위해 다녔고, 135,000명을 전도하여 결신시켰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명을 충성스럽게 실천한 주님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웨슬리로 하여금 열정적으로 전도하게 하고, 전도의 결실을 낳게 한 비결은 무엇인가?
첫째로, 웨슬리는 “성령의 확신”을 믿었다. 성령께서는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자녀 됨, 예수님의 사랑하심, 죄사함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해됨을 증거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성령의 확신은 하나님께서 웨슬리와 함께 하심의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되었던 것이다. 웨슬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의 평생 전도하였던 것이다.
둘째로, 웨슬리는 전도를 위한 조직을 구성하였다. 그는 조직이 전도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미국 선교지에서 안수 받은 목사의 요청에0 따라, 콕 목사를 미국 선교지로 파송하고, 애즈베리를 안수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조치는 영국 성공회에서는 반대하는 조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전도를 위해 조직 운영에 있어 개방적이며 신축성 있는 태도를 취하였던 것이다.
셋째로, 웨슬리는 전도와 신앙 교육을 항상 병행하였다. 다시 말하면 “교회 밖으로 나가는 선교”와 함께 “교회 안에서의 신앙교육”을 함께 강조하였던 것이다. 웨슬리는 전도와 신앙교육을 통해 교회의 질적이며 양적인 부흥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웨슬리가 강조한 감리회의 전도 운동은 불신자를 교회로 인도하여, 불신자를 성경의 사람으로 교육하여, 그들을 통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사회개혁의 의지라 할 수 있다.
넷째로, 웨슬리의 전도 운동은 “속회 운동”의 결정판이다. 감리회의 신앙 운동에서 속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속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신도의 역할이다. 웨슬리는 말씀의 교육과 실천을 위해 속회를 조직하였다. 책임 있는 평신도 지도자들은 지속적인 전도를 통해 속회를 부흥시켰고, 속회의 부흥은 새로운 속회를 낳게 하였던 것이다. 감리회가 건강하게 부흥하기 위해, 속회의 부흥은 필수적인 것이다.
다섯째, 웨슬리는 전도에 있어 매우 포용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의 전도 대상자는 “가난한 자, 병든 자, 감옥에 있는 자 등, 모든 소외계층”을 포괄하였다. 웨슬리의 전도 운동은 당시 영국 사회에 매우 큰 파장이 되었다. 사회가 돌보지 않는 이들을 웨슬리는 주님의 품에서 양육하였던 것이다.
전도는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닌, 주님의 제자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절대적인 주님의 명령이다. 전도는 교회의 부흥은 물론,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혁신적인 사회개혁운동이다. 웨슬리의 전도운동이 당시 영국을 변화시킨 역사적 유물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 웨슬리의 전도 운동은 오늘 우리나라의 교회와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진정한 의미의 교회 부흥과 사회 혁신의 운동이 되어야 한다.
2. 웨슬리의 재물관
존 웨슬리는 그의 평생 설교와 저술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다. 연간 수입이 1,400파운드를 넘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자신을 위한 사용에는 연간 28파운드만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구제 기금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나의 모든 돈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믿었다. 웨슬리는 신자들은 소득의 100퍼센트를 하나님이 지시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돈에 대한 웨슬리의 실제적인 지침은 첫째, “벌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벌어라”이다. 둘째, “할 수 있으면 최선을 다해 저축하라”이다. 셋째, “줄 수 있다면 , 최선을 다해 나누어줘라”이다. 웨슬리는 헌금 생활은 십일조에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그는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 “당신은 의심할 여지없이 당신의 마음을 황금에 두고 있다”고 말하였다. 크리스천의 헌금은 십일조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십일조는 기본이고 십의 구조가 더 중요하다.
웨슬리는 재물 사용에 대한 네 가지 성서적 원칙을 제시한다. 첫째는 “당신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필요한 것을 공급하라”(딤전 5:8)고 하였다. 웨슬리의 아버지 사무엘은 가난한 교회의 목사였다. 어린 시절에 웨슬리는 자신의 아버지가 빚 때문에 감옥에 갇히는 것도 보았다. 그래서 어렵고 힘들게 사는 것이 어떤지를 알 수 있었다. 둘째는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라”(딤전 6:8)고 했다. 만족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족함은 감사의 생활로부터 비롯된다. 감사할 때, 돈이 주는 유혹에서 승리할 수 있다. 셋째는 “정직하게 거래하고 빚을 지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넷째는 “잉여 자금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사용하라”고 설교하였다.
웨슬리는 돈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첫째, 이 돈을 사용함에 있어서, 나는 나 자신이 이 돈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돈을 맡은 청지기처럼 행동하고 있는가? 둘째, 하나님께서는 의의 부활 때에 내가 쓰는 이 돈으로 인해 나에게 상을 주실 것인가?
1791년에 그가 임종할 때, 그의 유서에 언급되어 있는 돈은 그의 주머니와 옷장 서랍에 남겨져 있는 동전들 뿐 이었다. 웨슬리는 평생 부유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돈으로 자신만을 위해 산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살았다. 웨슬리는 돈에게 지배당하지 않고 돈을 지배하며 살 수 있는 신앙의 통찰을 제시해 주고 있다. 돈의 소유는 하나님께 있다. 우리는 돈을 관리하는 주님의 청지기일 뿐이다. 내가 지금 사용하는 이 돈으로 하늘에서 큰 상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3. 웨슬리와 성령체험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 올더스케잍 작은 집회에서의 존 웨슬리의 성령 체험은 감리회 역사의 최고봉에 위치한다. 웨슬리의 성령체험은 그가 속해 있던 성공회와 감리회의 결정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신학적 기준이 된다. 20세기 웨슬리 연구의 대가인 알버트 아우틀러 박사는 성공회에서 강조하는 “성서”, “전통”, “이성”의 삼중구조에 성령체험을 “경험” 차원에서 정립한 것이 바로 웨슬리의 공헌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성서, 전통, 이성, 경험 이 네 가지가 감리회의 근본적인 신학적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웨슬리는 올더스케잍에서의 성령체험을 성서, 전통, 이성과의 지속적인 조명을 통해, 감리회의 예배 속에 정착하였다. 웨슬리는 성공회와 장로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야외설교, 즉흥기도, 순회설교, 속회, 그리고 찬양의 열정을 예배의 순서 속에 도입하여 예배에 참된 활력을 불어 넣었다. 오늘날 교회 부흥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찬양사역과 열린 예배의 기원을 우리는 웨슬리의 “성령체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웨슬리에게서 “성령 체험”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결정적인 내적 증거가 된다. 웨슬리는 "성령체험“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속에서 강력하게 일하시는 증거라고 설교 하였다. ”성령체험“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식을 증대시킨다. 웨슬리는 교회의 역사 속에서 간과되어왔던 성령에 대한 이해를 교회의 살아 움직이는 제도 속에 정립한 목사이며 신학자이다. 웨슬리는 성령께서는 성도에게 영적 생명을 나눠주며,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의와 평강과 기쁨과 행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설교하였다.
웨슬리의 “성령체험”은 교리에 갇혀 있는 “성령론”이 아니다. 목회를 통해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이다. 웨슬리의 신학과 실천 속에 살아 숨쉬는 “성령체험”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이웃을 향한 섬김으로 나타난다. 웨슬리의 “성령체험”이 여기 속초 북지방에 있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자리 잡게 될 때,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교회마다 넘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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