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 불교의 목표는 아니다
스님이 BTN TV에서 법문을 한 6개월 했는데
내 법문 내용을 트집 잡아서 조계종 선불교에서 더 하지 못하도록
BTN사장에게 무서운 외압을 가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만 두었는데 그 이면에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를 시해하려고 하는 두 개의 어떤 집단이라고 할까?
그런 일이 있어서 우리 화엄성중 쪽에서 미리 알고 적절히 대처했어요.
그랬는데 그 이유는 두세 가지입니다. 크게 보자면 3가지입니다.
① 마음이 부처인데 심즉시불(心卽是佛)인데 즉심시불인데 자재만현 스님은
부처님이 절대계에 32상으로 여여히 계신다고 하니
이건 선(禪)의 사상에 정면으로 위배되니까 용서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 선불교가 한국불교로 1300여 년을 내려왔잖아요.
1300년을 내려왔습니다. 자기들로서는 용서가 안 되지요. 이해가 안 되지요.
저 사람이 법문을 하도록 놔두면 큰일 나지요.
선(禪)의 기반이 무너져버립니다.
② 부처님께서는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삼법인 사법인을 말씀하시면서 제법무아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이냐? 이 현상세계의 모든 물질과 정신은 모두 인연으로
가화합된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인연이 모여서 형체를 이루고 인연이 다하면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이것을 인연 가화합(假和合)이라고 해요.
‘인연으로 모여서 인연이 다하면 흩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空)인 것이다. 본래는 공(空)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현스님은 영혼체를 이야기한다.
영혼체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인간의 주인공이라고 한다.
이건 용서할 수 없다.’ 이렇게 나옵니다. 크게 나누자면 그렇습니다.
여러분, 두 가지의 큰 명제로 나를 더 이상 TV법회에 못나오도록 조치한 거예요.
그런데 정말 어리석습니다.
이것은 전번에도 비유했지만 초등학생이 나사(NASA)에 있는
공학박사의 강의를 헐뜯는 격이어요. 왜 그런지 압니까?
왜 여러분에게 이런 엄청난 비유를 한줄 압니까?
선(禪)에서는 깨달음이 불교의 목표라고 합니다. 수행의 목표라고 합니다.
불교는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깨달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합니다.
자, 이게 선불교예요. 기존 불교도 거의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음, 깨달음이 불교라고 합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불교상의 종교상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우주본체인 공(空), 본체계에서 현상세계가 나왔잖아요.
쉽게 말하자면 현상세계를 낸 본체, 이걸 불교에서 공(空)이라고 합니다.
빌 공(空)자, 공이라고 해요. 이것을 선불교에서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 여러분은 스님이 지금 말하고 있는 마음의 의미를
잘 모를 거예요.
선불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마음, 이것은 여러분들이 지금 나를 보고,
내 목소리를 듣고, 누가 옆구리를 쿡 찌르면 느끼고, 고약한 냄새가 나면
냄새 맡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 맛을 알고, 생각을 하고 이런 분별하는 의식이
아닙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눈은 분별하잖아요? 전부 분별하잖아요?
저 사람은 ‘아! 예쁘다. 아!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밉게 생겼나?’
이렇게 분별하잖아요?
분별하는 마음이나 분별하는 의식은 마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꼭 알아 두십시오.
이것은 《능엄경》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망심(妄心)이라고 그래요. 허망한 마음 망령된 마음입니다.
그건 진심(眞心)이 아닙니다. 진심(眞心), 변하지 않는 분별하지 않는,
그러나 알아차림 알아차리는 힘입니다.
그것을 진심, 마음이라고 합니다. 아셨지요?
그러니까 선불교에서는 이 마음을 찾는 것이 목표입니다.
마음이 부처이니까. 마음을 찾아버린 사람을 붓다라고 합니다. 부처라고 그래요.
그래서 깨달은 분을 부처라고 그래요.
한자로도 ‘깨달을 각(覺)’ 자로 번역합니다.
‘부처 불(佛)’자를 깨달을 각(覺)자로 쓰거든요.
깨달음 사람이 부처라고 합니다. 깨달으면 부처다. 마음이 부처다.
이게 조계종의 사상입니다. 여러분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마음 찾는 것 마음 보는 것 마음 깨치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아요.
나도 조계종 스님으로서 몇 십 년 동안 40년 50년 동안
그 마음을 알려고 씨름했습니다.
마음을 선불교에서는 주인공이라고 합니다.
전번에 여러분들한테 이야기를 하나 했나요? 일물(一物)이라고도 해요.
하나 일(一)자하고 물건 물(物)자, 일물이라고도 해요.
그래서 선종을 개창한 초조(初祖)이신 혜능, 육조(六祖) 혜능스님.
어느 날 혜능스님이 법상에 올라가서 많은 대중들한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한테 한 물건이 있다. 나한테 한 물건이 있어. 오유일물(吾有一物)이어.
나한테 한 물건이 있어. 그런데 그 한 물건은 무명무자(無名無字)야.
이름 붙일 수도 없고-없을 무(無)자, 이름 명(名)자.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무자, 없을 무(無)자 글자 자(字). 그림 그릴 수도 없다. 모양 그릴 수도 없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있느냐?”
하고 어느 날 대중들한테 구두시험을 본 거예요.
그 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한 사람도 대답 못했어요.
한 사람도 대답을 못해요. 깨달으면 대답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훌륭한 제자 한 분이 8년을 궁구했습니다.
정말 열심히 궁구했어요. 회양스님이라고 있었습니다.
회양. 그래서 육조스님한테 와서 ‘한 물건이 나한테 있는데 이것은
이름 붙일 수도 없고 그림 그릴 수도 모양 그릴 수도 없다. 아는 사람 있느냐?’
이렇게 물었잖아요? 8년 만에 돌아와서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하더라도
즉부중(卽不中)이니라. 맞지 않습니다. 맞는 말이 아닙니다.’라고 하니까
‘하!~ 너 됐다. 깨달았다.’ 하고 인가해 준 거요.
자, 그 마음을 일물이라고도 합니다. 일물이라고 해요.
선(禪)은 거기까지입니다. 그래서 전번에 라디오를 들으니까
슬쩍 들려오는 소리가 ‘참선을 하면 해탈할 수 있습니까?’ 하고
어떤 사람이 질문한 것 같아요. 그 말이 들리더라고요.
‘참선을 하면 해탈할 수 있습니까?’ 물론 선에서는, 참선을 하는 선종에서는
‘그건 말도 아니지. 되지. 부처가 되어버렸는데.’ 그렇게 대답하겠지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은 생사를 마음대로 하는, 윤회생사를 벗어날 수 있는 충분조건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니까 저 조계종에서는 죽는다는 합니다.
깨달음은 윤회생사를 벗어나는데 필요조건이라고는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충분조건은 아니다.
자, 깨달았으면 두 가지 길이 있어요.
그중 하나는 ‘일상으로 돌아와서 음계 등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법을
철저히 지키고 두타행을 하라.
그래서 이 육신에 대한 착(着)을 비롯해서 온갖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그 경지에 이를 때 거기를 아라한이니라.’ 하고 나는 대답하고 싶어요.
이게 정답이어요. 그것도 외도 아라한입니다. 외도 아라한이지요.
이 말의 뜻을 알아야 되는데?
전 시간에도 많이 설명을 했는데 또 설명하기도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드릴 이야기가 많습니다.
지금 여러분들한테 꼭 들려 드려야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출처:2015년 자재 만현 큰스님 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