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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성경이 말하는 영적전쟁
영적전쟁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단어는 상당히 자주 사용되고 있는데, 성경에서 영적인 전쟁과 유사한 개념을 찾아본다면 “씨름, 대적, 싸움, 승리, 군사”등의 단어로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영적전쟁'이라고 하였으니 육체적이거나 물질적인 싸움을 뜻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영적전쟁에 대해서 혹간은 이 세상을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구도로 보는 이원론적인 개념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 세상이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구도, 혹은 선과 악의 대결구도, 혹은 영과 육의 대결구도로 보는 이원론을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의 주장이 아니며, 이방적인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세상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천사를 창조하셨으며, 그 천사가 타락하여 마귀(사탄)이 된 것으로서 마귀(사탄)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종말적으로 멸망을 당할 피조물로서 하나님과 대결을 할 만한 존재가 아니다.
특히 베뢰아와 같은 곳에서는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구도를 주장하며, 예수가 마귀를 멸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주장하며, 혹은 인간이 마귀를 멸하는 도구로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모두 잘못된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본질적인 교리로서 사탄과의 전쟁, 싸움을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강조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사탄 마귀와 전쟁을 하여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러한 영적전쟁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성경은 사탄 마귀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로 인하여 패하게 되어있다고 말하며, 단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서 구원을 받기 위하여 그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말라고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더욱이 인간은 영(또는 영혼)과 육이 연합한 전인적인 존재이며, 영과 육이 분리되어서 서로 대결하며 싸우지 않는다. 인간은 오직 하나의 인격만을 갖고 있는 전인적이며 총체적인 존재이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영에는 성령이 거하고, 육에는 사탄이 거한다고 주장하며, 혼에는 인격이 거하는데, 사탄과 성령이 서로 인간을 점령하려고 싸운다고 말하는데 주로 이단적인 인간론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육'이라는 단어의 대부분은 고깃덩어리의 부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인간 자체'를 말하며, 영은 '성령하나님'을 뜻한다. 즉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육체로 표현한 것으로서, 사도바울이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서로 대조시킨 것은 "사람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의미한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성령이 내주하는 거듭난 성도들도 육체 안에 있다. 그러나 성경은 거듭난 성도를 "영에 있다"고 표현한다.
특히 사도바울은 성령이 거하지 않는 불신자를 "육에 있는 자"라고 말하며, 성령으로 거듭난 자를 '영에 있는 자'라고 말한다. 특히 살아있는 전인적인 사람을 장소적으로 분리하여, "영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육에는 사탄이 거한다"는 주장은 지방교회와 베뢰아, 구원파, 다락방, 변질된 세대주의등의 이단적인 주장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 마귀나 귀신은 들어올 수 없다.
혹간은 가계저주론등을 가르치며 그 저주를 없애는 방법을 영적전쟁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우리 안에 어떤 과거의 상처나 약점을 '견고한 진' 또는 '쓴 뿌리'라고 칭하여, 그것을 제거하는 내적치유를 영적전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혹간은 땅밟기기도, 대적기도, 선포기도등의 방법으로 귀신을 쫓아내거나, 그 저주를 극복하거나 치유하는 것에 영적전쟁이라는 단어를 적용시키기도 한다. 누구든지 기독교서점에 잠깐 들러 본다면, 이러한 제목의 책들을 수없이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며 영성운동, 내적치유, 신유축사를 하는 단체나 기도원들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성경을 주의깊게 살펴본다면, 성경은 이러한 것들을 영적전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과 전혀 다른 잘못된 내용이 한국기독교에 범람하고 있다. 이것은 귀신축사나 내적치유, 신유축사를 성경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일부 목사들에게 신학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는 어떤 집회나 어떤 단체나 어느 목사를 통하여 이상한 개념의 영적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주장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악한 영을 충분히 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씨름, 대적, 싸움, 승리, 군사”등의 단어들이 사용된 성경구절을 찾아보면 몇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육체적이나 물질적인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이다.
우리가 싸워야할 대상은 사탄, 마귀, 또는 귀신, 악한 영들이 분명하지만, 그 싸움은 사람의 어떤 부분으로 나누어진 육체적인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을 의미하는 것이다. 혹간은 귀신을 쫓아내어서 질병의 고침, 저주의 극복, 부의 이동등을 포함한 것을 영적싸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성경은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성경이 말하는 영적싸움은 사람의 육과 혈 또는 물질적인 질병이나 불행, 사고, 가난에 대해 싸우는 것이 아니며, 또 우리 안에 있는 영과 육에 대한 싸움도 아니다. 우리의 씨름은 우리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의 영적인 싸움이다.
또 영적싸움이라는 것은 질병치료, 마귀축사, 저주극복등이 아니라,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무너뜨리는 것으로서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 우리의 신앙적인 문제에 있는 것이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영적전쟁은 육신의 문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육신에 속한 것도 아니며, 개인적인 성화의 과정을 말한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고후 10:3-6)
특히 신사도운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가난의 영을 쫓아내면 부의 이동이 있게 된다고 주장을 한다. 이것이 과연 영적인 싸움인가? 그들은 또 모든 질병을 귀신때문으로 보고 육체의 질병을 고치는 것이 영적인 싸움이라고 본다.
또 신사도운동 단체들은 지역귀신을 쫓을 수 있다는 소위 영적도해를 주장하기도 하고, 믿는 자가 종말적으로 ‘요엘의 군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요엘서가 말하는 요엘의 군대는 하나님께서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는 이방인의 메뚜기를 상징하는 군대로서, 성경이 주는 멧세지는 우리가 요엘의 군대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 아니라, 범죄하고 타락한 이스라엘로 하여금 심판을 당하기 전에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다.
또 혹간은 딤후 2:3-4을 근거로 ‘예수의 병사’가 되어 사탄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딤후 본문에서 말하는 ‘병사’는 마귀와 전쟁을 하는 병사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 생활에 얽메이는 것이 없는 조직에 대한 개념을 뜻하며, 병사로 모집한 자가 주님이며 그를 기쁘게 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2) 마귀를 대적하는 권세의 근원
물론 우리는 사탄과 악한 영들에게 대적할 수 있다. 또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을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부정허고자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사탄, 마귀나 악한 영들에게 대적할 수 있는 어떤 능력을 우리 스스로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그 힘의 능력을 빌리는 것이다. 성경은 말하기를, 주 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 지며,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함”으로서 대적할 수 있다고 말한다.(엡 6:10-13) 성경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그 말씀의 공로를 힙입어 승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마귀와 전쟁을 하여 그들을 모두 멸절시킬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의 미혹으로부터 이기는 신앙적인 과정이 곧 영적 전쟁임을 알 수 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엡6:10-엡6:17)
즉 성경을 잘 살펴본다면, 마귀에게 대적한다는 것은 이원론적인 대결구도의 전쟁을 하여 그들을 하나도 남김지 않고 멸절시키자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된 전신갑주를 입는 것, 또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며(고후10:5-6),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성결한 마음을 갖는 것(약4:7-8), 혹은 믿음을 지키는 것(벧전5:9)등의 신앙적인 과정을 뜻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그리스도 보혈의 공로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에 힘입어,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성화적인 과정이 곧 영적인 싸움이며, 그것이 곧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성령의 도움으로 마귀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고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성화의 과정이 곧 영적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약4:6-8)
베드로전서 본문에서도 마귀를 대적하는 것은 “근신하고 깨어서, 믿음을 굳건케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벧전 5:8-9)
또한 선한 싸움이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갖는 것이며, 그 믿음과 양심을 버린다면 파선하게 된다고 말하며, 성경은 그 파선의 의미에 대해서 “이미 사탄에게 내 주었다”고 표현을 하는데 그것은 믿음을 지키지 못함으로서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을 뜻할 것이다. 특히 디모데전후서에서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것을 사탄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삶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딤전 1:18-20)
성경은 믿음을 지키는 것이 곧 싸움이라고 말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딤전 6:10-12)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딤전 4:1-3)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 4:7-8)
다른 성경과 같이, 디모데 전후서가 말하는 선한 싸움의 정의도 믿음을 지키는 것이며, 다시 말하면 개인의 구원에 대한 성화의 과정을 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곧 하늘의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며, 로마서 12장2절이 바로 우리가 갖어야 할 영적 분별력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마귀와 귀신이나 악한 영이 없다고 말하거나 그러한 부류들이 우리에게 아무 영향을 줄 수 없다고 하는 무관심도 분명히 비성경적인 주장이지만, 반대로 귀신과 마귀에 대한 관심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모든 질병과 가난, 저주, 불행, 사고가 모두 귀신과 악한 영때문이라고 주장하고, 귀신을 쫓아냄으로 이러한 문제가 모두 해결된다고 보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러한 주장은 귀신만 쫓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불필요한 것이 되고만다.
성경적인 예를 들자면, 예수님이 직접 파송하신 칠십문도들이 돌아와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예수님께 고한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10:17)
그 때에 예수님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눅 10:20)
다시 말하여 귀신을 쫓는 권세를 받은 것은 본질적으로 기뻐할 일이 아니며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음으로 하늘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이며 그것이 더욱 중요한 본질적인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귀신과 악한 영에 대적하고 싸워야 한다. 그러나 그 싸움의 목적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며, 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믿음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영적전쟁이다.
3) 거듭난 자에게 사탄이 들어올 수 있는가?
성경은 많은 곳에서 마귀의 미혹을 조심하라고 하거나 경고하라고 말하지만, 그 대상은 이미 성령으로 거듭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볼 수 없다. 우리는 일단 신자(信者)와 성령에 내주하는 중생된 자를 구별할 필요성을 느낀다. 신자(信者)는 믿음을 잃을 수 있지만, 중생한 자는 믿음을 잃을 수 없다. 오히려 성령이 내주하는 거듭난 성도들에게 귀신이 들어올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하기 때문이다.
물론 귀신이 사람에게 들어올 수 있다는 주장은 성경적으로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모든 질병과 불행과 사고가 귀신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전제조건이 먼저 제시되어야만 하고, 성령이 내주하는 거듭난 성도에게 귀신이 들어올 수 없다고 말하여야 한다.
필자는 성도에게 귀신이 외부에서 미혹할 수는 있지만, 거듭난 성도에게 들어올 수 없다고 본다. 물론 귀신이 성령이 내주하는 성도를 사로잡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만약 거듭나서 성령이 내주하는 성도들을 귀신(혹은 마귀)이 들어와서 그를 사로잡을 수 있다면,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작정한 하나님의 자녀의 구원이 취소가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주셔서 인도하고 보호하는 이유와 근거가 없어진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성경적인 근거로 볼 때에는, 성령이 내주하는 성도들에게 귀신이 들어올 수 없다는 견해가 옳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요일 4:4)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요일 5:18)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살후 3:3)
성경은 성령의 구원에 대한 보증, 즉 보호와 인도를 분명히 말하고 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너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 10:28-29)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빌 1:28)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0-35)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또한 아래 본문은 거듭난 사람에게 귀신이 들어올 수 없다는 내용이라고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것은 곧 성령과 마귀를 동시에 섬기지 못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
그러나 성도들에게 귀신이 들어올 수 있다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한다. 이것에 대해서 살펴보자.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눅 22:3)
과연 유다가 온전히 거듭난 성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행 5:1-5)
비록 성경은 아나니아가 성령을 속였다고 말은 하지만, 아나니아가 진정으로 거듭난 성도였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러한 경우가 성경에 있는데, 바로 히브리서 6장 4-6절이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 6:4-6)
“한번 비췸을 얻고, 맛보고, 참예한바 되고, 능력을 맛보고”라는 표현이 과연 온전히 거듭난 사람을 뜻하는지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을 온전히 거듭난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아나니아가 성령을 속였다는 내용만으로 그가 거듭난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아나니아가 그 자리에서 즉시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삼상 16:14)
어떤 사람들은 이 성경을 증거로 제시하는 경우도 있는데, 위 성경은 “여호와의 신이 떠났다”는 것과 그 악신이 여호와가 보낸 존재라는 것이므로 해당되지 않는다. 구약에서는 소수의 제한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성령을 보내 주셨으며, 신약의 오순절에 이르러서 성령은 모든 만인에게 부어주게 된 것이며, 영원히 내주하게 된 것이다.
성경은 성령이 거하는 거듭난 성도들에게 사탄 마귀가 들어올 수 있다고 언급하지 않으며, 오히려 ‘불신자들의 안에서 거하는 영’이라고 말한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엡 2:2)
사탄, 마귀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다.
특히 성경에서는 ‘귀신이 들리다’라고 표현된 단어가 사용되는데, 주로 ‘다이모니조마이’(demon-possessed, 마 4:24), 혹은 ‘카타뒤나스튜오’(dominate, 행 10:38), ‘데오’(bind, tie, 눅 13:16), ‘에코’(hold, 요 8:49)등이 사용되었으며, 귀신에게 사로 잡혀서 소유가 되는 것을 뜻한다. 즉 귀신의 내적 사역을 뜻하며, 성령이 내주하는 거듭난 성도들에게 해당될 수 없는 단어들이다.
4) 믿는 자는 누구나 귀신을 쫓을 수 있는가?
성경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귀신을 쫓고 병을 치료하며, 능력과 권세를 보여준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예수님이 귀신을 쫓으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준 사람들은 열두 제자들, 즉 사도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눅 9:1-2)
누가복음 9장1-2절은 열두제자에게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대상이 열두 제자라고 언급한다. 또한 성경은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하는 것을 사도의 표라고 말한다. 이러한 능력과 권위가 사도와 제자들에게 국한 된 것인지 혹은 모든 믿는 자에게 포함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사실 해석이 어렵다.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12:12)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막3:14-15)
그러나 보편적으로 믿는 자가 귀신을 쫓을 수 있다는 성경구절이 유일하게 나온 곳이 마가복음 16:17이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막 16:16-18)
그러나 우리는 이 성경구절에서 과연 "보편적으로 믿는 자”가 그 대상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믿는 자는 뱀을 집어 올리거나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을까?
우리는 누구라고 할지라도 이 질문에 대해서 "성경과 같다"라고 답변할 수 없을 것이다. 믿는 사람은 모두 귀신을 쫓을 수 있는가? 또 믿는 사람이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으면 모든 환자가 치료되지 않는가? 이것도 오늘날 현실과 다르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실제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시도를 하다가 독을 마시거나 뱀에게 물려서 죽은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는 사람들이 귀신을 쫓아낼 수 있으며 방언을 말할 수 있다는 것까지는 성경구절을 인용하지만, "뱀을 집거나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내용에 대해서 인용하지 않는다. 초대교회의 은사 중에는 치유에 대한 은사도 있었지만 모든 사람이 다 치유의 은사를 받은 것은 아니며, 모두가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도 아니었고, 은사란 공공체의 유익을 위하여 각 지체에게 나누어주는 선물로서, 지체마다 다른 은사적인 기능이었으며, 그 역할이 각각 다른 것이었다. 즉 성경은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른다"고 말했지만, "모든 믿는 자에게 항상 이런 표적이 따른다"고 말하지 않았다.
➀ 학자들은 이 성경구절이 보편적인 내용이 아니고, 장래의 어떤 특정한 사건의 표적을 의미하는 표현이라고 말한다.
사도행전 28:3-6에서 바울이 뱀에게 물렸지만 상함이 없었던 사건이 있었으며, 이 사건을 지칭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또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내용이 사도요한의 전승(Acts of John 20)이나 유세비우스의 교회사(3, 39, 9)에 기록되어 있는데, 유세비우스는 유스투스 바르사바스라는 사람이 독을 마셨는데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➁ 학자들은 믿는 자들의 권능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법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서 아래 마태복음에서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누구라도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구절은 보편적인 사건을 예로 든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강조하는 표현이 될 것이다. 본문은 믿는 자가 정말로 산을 옮길 수 있다는 내용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믿는 자들은 누구든지 독을 마셔도 죽지 않으며, 뱀을 만져도 아무 상관이 없을까? 누구든지 병을 치료할 수 있으며 누구든지 귀신을 쫓아낼 수 있을까? 이것은 믿는 자들의 표적과 권능, 즉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법이라고 보는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 볼 때에는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라고 성경은 말하며, 즉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다만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이 우리가 귀신과 전쟁을 하여 그들을 모두 멸망시킬 수 있다는 뜻이 아니며, 또한 본문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따르는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를 믿는 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불치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맞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불치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모든 믿는 자들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한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병에 걸려 죽은 사람들이 없어야만 할 것이다. 더욱이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떤 종류의 독을 마셔도 죽지 않고, 뱀에게 물려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볼 수 없음은 당연하다.
➂ 교회를 세우기 위한 초대교회의 한정적인 은사와 능력을 말하지만, 그러나 지금은 중지되었다고 보는 은사중단론이라는 견해가 있다. 물론 필자는 은사중단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은사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이러한 은사중단론의 주장은 워필드,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조나단 에드워즈, 메튜헨리, 헨드릭슨등의 주장이며 현재 일부 보수적인 신학 견해이기도 하다. 그 근거는 유사한 표현의 기록이 누가복음 10:17-19에 있는데 다음과 같다. 즉 주님이 칠십문도에게 한정적으로 부여해 준 권능이라는 것이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눅10:17-19)
➃ 시내산사본, 바티칸사본등 주요 사본에는 마가복음 16장9-20절까지가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후기에 추가된 내용이라는 주장이 있다.
물론 마가복음 16:9-10절의 내용이 주요사본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이 실제로 사실적인 사본적인 증거이지만, 필자는 우리가 보는 성경 내용을 부분적으로 삽입된 것으로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특히 본문이 후기에 첨가된구절이라는 주장에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권위있는 일부 사본에는 그 내용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네가지 학설 중에서 어떤 것이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2)번을 신뢰한다. 그러나 마가복음 본문의 내용은 모든 믿는 사람이 지금도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능력이 아니라고 볼 때에, 믿는 자가 귀신을 쫓을 수 있느냐는 내용은 현실적으로 보편성이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물론 귀신을 쫓는다는 것은 질병이나 불행, 사고같은 사건에만 국한되어 해당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감기 바이러스에 의한 감기를 귀신을 쫓는다고 하여 그 병이 나아질 수는 없다. 또한 사업적인 경영의 실패로 돈을 벌지 못한 것을 모두 가난의 영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특히 아래 성경구절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다고 하여도 모두 진실이 아니라는 내용이 분명하다. 즉 모두가 귀신을 쫓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1-2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행19:13-16)
5) 대적기도, 선포기도가 기도인가?
일반적으로 “대적”이라는 용어는 “적, 어떤 세력, 힘 따위가 서로 마주 대하여 섬”을 뜻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신약성경에서 사탄, 마귀나 귀신, 악한 영에게 대적한다는 것은 자신의 구원에 대한 과정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미혹에 넘어가지 않는 것 또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기도”라는 용어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이며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와 요청”을 뜻한다. 성경은 대적기도와 선포기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즉 성경이 말하는 영적싸움이란 "개인의 구원을 위하여 믿음을 지키는 것"이며, 영과 육의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싸움을 뜻하지 않는다. 또한 영적싸움은 세상을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구도의 전쟁으로 만들어놓고, 우리가 그 싸움에 동참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며, 귀신을 쫓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성경에서의 영적싸움 특히 대적이라는 의미는 개인의 구원에 대한 성화의 과정을 뜻한다.
만약 귀신을 쫓음으로서 우리가 가난으로부터 부를 찾게 되고, 질병으로부터 건강을 회복하며, 육체적인 불행과 사고로부터 축복을 불러올 수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부를 소유하여야 하며, 모두 질병에 걸리는 일이 없이 건강하여야 하고, 모두 불행과 사고가 없는 육체적인 축복을 누려야만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예수십자가를 부정하는 다른 복음이다. 단지 귀신만쫓으면 모두 해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사도들의 순교와 초대교회 성도들의 고난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물론 우리는 사탄과 마귀, 귀신의 미혹에 대적하기 위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성령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기도로 요청할 수 있으며, 우리의 질병을 치유할 수 있도록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여야 하는 이유는 이원론으로 그들을 쫓아냄으로서 우리가 사고나 불행을 막거나 질병을 치료함이 아니며, 그들을 쫓음으로서 육체적이며 물질적인 축복을 받기 위함이 아니며, 그 본질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기억하자.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고 미혹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신앙의 "목적"이 아니라, 신앙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또한 대적기도나 선포기도를 함으로서 어떤 효력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한 기도는 없으며, 그것을 기도라고 정의할 수도 없으며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신비한 초능력이나 권능을 갖는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간구하며 겸손하게 그 응답을 기다리는 소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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