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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13일(주) 03:00
* 시작 기도
주님...
여전히 이 새벽에도 일어나고 싶지 않아서 여러 가지 이유를 들다가 겨우 일어났습니다.
어떻게든 말씀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비존재 세력들을 주의 보혈로 덮어 주옵소서.
나의 죄를 사하여 주사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마음이 교만하여 완악하지 않게 하시고 항상 가난한 마음을 주소서.
새 영과 새 마음을 두사 주의 영이신 진리의 영으로 충만케 항보소서.
내 안에 있는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죄의 몸은 왕의 명령으로 불구가 되었나이다.
오직 주만 바라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마 25:1-13
제목 :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악하고 외식하는 종을 심판하시고...
1.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2. 그 가운데 다섯 명의 처녀는 어리석고, 다섯 명의 처녀는 지혜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이 없었다.
4. 지혜로운 처녀들은 등불만 아니라 통에 기름까지 넣어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오는 것이 매우 더디 오므로 처녀들이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한밤중에 어떤 사람이 소리치기를 “이보시오! 신랑이 옵니다. 맞으러 나오시오!” 하니까
7.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불을 준비 하였다.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지혜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불이 꺼져 가는데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하였다.
9. 지혜로운 처녀들이 미안하지만 안 되겠어. 우리가 함께 쓰기엔 기름이 부족할 것 같은데, 차라리 가서 사오는 게 좋을 것 같다라고 말하였다.
10.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고 준비된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결혼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혀 잠겼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님께 문을 열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12. 그러나 신랑은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말하는데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
13.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왜냐하면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나의 묵상
오늘 본문은 천국을 유대 결혼 풍습으로 비유하고 있다.
유대의 결혼은 보통 신랑이 신부의 집에 들러 간단한 종교 의식을 치른 후에 신부와 신부의 들러리들을 데리고 자기의 집으로 가서 혼인 잔치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당시의 관습에 의하면 결혼식은 보통 해가 진 뒤에 시작되는데 이때 신부의 들러리들은 신부의 집 문 밖에 나가서 등불을 들고 있다가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의 집에 도착하면 그들을 영접하였다.
그런데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신부의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정확하게 정해지지 않았다.
따라서 신부의 들러리들은 신랑이 늦어질 것을 대비해서 등이 꺼지지 않도록 충분한 기름을 준비해야만 했다.
오늘 본문에서도 신랑이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오는 것이 강조되는 것은 종말의 때에 주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깨어서 준비하는 신앙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구절은 13절이다.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깨어 있다는 것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의 마땅한 본분이다.
(마 24:45)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냐?
여기서 말하는 깨어 있다는 것은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는 어떤 물리적인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 신부의 친구인 들러리들은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피곤하여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신랑이 왔다는 외침에 번쩍 정신이 들어 일어나보니 다섯 처녀는 등불도 있고 기름도 넉넉한데, 나머지 다섯 처녀는 등불은 있으나 통에 기름이 없어 거의 꺼져갈 지경이었던 것이다.
등불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경건의 모습이다.
그러나 기름은 그 외적으로 드러나는 경건을 진정으로 경건되게 하는 그 중심이다.
따라서 등불과 함께 기름이 충분히 준비된 슬기로운 처녀들은 내적 외적 경건으로 잘 어우러져 있는 자이나, 등불만 있고 기름이 없는 미련한 처녀들은 외적 경건, 즉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은 없는 자들인 것이다.
이들 경건의 능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주인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복종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자들이 바로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들이다.
그러나 악하고 외식하는 종은 경건의 모양인 등불만 들고 있어서 그 경건이 언제든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겉으로는 분명 경건한 모습이 있다.
이는 사람들을 속이고 경건한 척 할 수 있으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비껴갈 수 없는 것이다.
주인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복종하는 것이 바로 오늘 종말을 현재로 살아가는 자의 경건이요 능력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으로 신랑이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신랑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깨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인의 뜻은 무엇인가?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12:49-50)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주인이신 아버지의 뜻은 다름 아니라 영생이다.
영생은 아버지와 그 아들을 아는 것이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삶으로 아는 것이다.
삶으로 아는 것은 그 분들과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하며, 그 만남이 지속되어야 한다.
아무리 인격적 만남이 이루어졌어도 단회적으로 만나면 그 만남은 금방 잊혀지고 만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만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삶이 되고 그를 알게 되며 그 분들의 삶이 바로 나의 삶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 현실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
날마다 말씀 앞에서 잠잠히 머무르면서 존재이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을 가지는 것이다.
말씀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존재 자체이며 또한 하나님이시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존재이신 말씀을 매일 깊은 교제와 사귐을 통하여 만날 때 그것이 바로 최고의 깨어 있음이요, 이것이 바로 영생이다.
영생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오늘 지금 이 시간에 내가 말씀 안에서 아버지와 그의 아들과 누리는 자리가 영생이다.
누구나 나름대로 등불을 들고 있다.
그러나 그 등불이 꺼지지 않을 진정한 등불인지 아니면 금방 꺼지고 말 외식적인 등불인지는 그 등불을 밝히는 기름의 유무에 있다.
등불을 꺼트리지 않고 신랑되신 주님이 오실 때까지 켤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을 밝혀주는 기름에 있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기름은 준비하지 않고 등불만 밝히려고 했던 자였다.
그런 나는 외식하는 자였고 경건의 모양만 드러내는 자였던 것이다.
뿌리가 땅에 심겨진 나무의 꽃은 화려하지 않을지라도 오래 간다.
그러나 병에 꽂힌 꽃은 오래가지 못하고 금방 시든다.
나는 꽃병에 꽂힌 꽃과 같이 살아왔으며 그런 삶, 즉 남들 보기에 화려하고 멋지고 보란듯한 삶을 추구하며 살아온 자였다.
한 마디로 3A에 함몰되어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가 되기를 원했다.
이 땅에서 보여지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평가받고, 그 결과로 일희일비하는 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남들보다 오랫동안 길게 기도하였고, 설교도 나름 잘 하였다. 무슨 사역을 해도 그 결과물을 풍성하게 도출하였고, 그 결과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았다.
나는 내심 기쁨을 누렸으나 그것도 잠시, 이내 나의 심령은 환난과 곤고로 가득하였다.
그것은 바로 경건의 능력이 아닌 경건의 모양만 가지고 행했기 때문이다.
경건의 모양을 드러내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그것이 바로 나를 주장하는 자기주장의지였다.
나는 사역을 하면서 주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주를 위한 사역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인정과 명예 그리고 자기 만족을 위한 사역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결국 내가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 자리에 앉으려는 사탄과 같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이런 나는 오늘 본문에서 보면 겉으로는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 같으나, 그 속은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하면서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악하고 외식하는 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고 등불만 켜고 있던 미련한 다섯 처녀요 외식하는 종임을 고백한다.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한 자인 나는 정말 주님 앞에서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다.
나는 정말 모래 위에 집을 화려하게 지어놓고, 그 집이 무너지지 않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는 자였다.
주님 앞에서 부르짖으면서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냈으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자였다고 말해보지만, 주님은 그런 나를 향하여 “이 불법을 행한 자여,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 가라.”고 일언지하에 거절당할 수밖에 없는 자였다.
나는 누구보다 나를 잘 안다.
사람들의 눈은 속이면서 기름 없이 등불만 들고 있을 수 있으나, 중심을 보시고 나의 마음의 생각과 그 동기까지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은 속일 수 없다.
이런 나는 죽어 마땅한 자이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다.
이전의 악하고 외식적이며 경건의 모양만 드러내는 나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통하여 완전히 죽고 말았다.
엄위하신 말씀의 검으로 나는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가 찔러 쪼개졌으며 그 마음과 생각까지 하나하나 들추어졌다.
그런 나는 심히도 부끄러워 견디기 힘들지만, 주님은 무화과 옷을 벗기시고 친히 만드신 가죽옷을 입혀 주셨다.
그 옷은 바로 그리스도의 옷, 보혈의 옷이다.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이제 나는 주의 흘리신 보혈로 덮고 주님으로 생각하고 예수로 행하는 자로 살아간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오직 말씀 앞에서 주님과 깊은 교제와 사귐으로 주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유언과도 같이 하셨던 그 피땀흘린 기도는 말씀 앞에 선 내 안에서 성취된다.
(요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심으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주의 품을 떠나 고아와 같이 살던 나는 이제 다시 주의 품, 아버지의 품에 안겨 그 안에서 안식을 누린다.
그곳에서부터 나오는 쉐키나, 주의 영광은 나의 영광이 되어 주님의 기쁨을 함께 누린다.
이제야 속에서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진다.
주를 갈망하던 나는 이제 주님을 태운 새끼 나귀가 되어 주님의 나라인 영생에 이른다.
오늘도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되어 말씀의 기름, 성령의 기름을 넉넉히 채워서 등불을 밝히 들고 깨어 준비한다.
그러나 그 주님은 이미 내 안에 와 계신다.
왜냐하면 나는 종말을 현재로 살기 때문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외식하는 자의 표본으로 살면서 깨어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현실적인 삶에서 드러나는 결과물에 일희일비하며 그것이 열매이며 그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사역인 줄 착각하며 살아왔던 나의 모습을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나이다.
몰라서 행했던 지난날의 잘못을 머리 숙여 가슴 깊이 깨닫고 이제는 주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뜻이 바로 영생이기에 아들이신 주님조차도 당신의 뜻대로 하지 않으시고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사셨음을 깨달았사오니 공중의 먼지와 같은 나야 두 말해 무엇 하겠나이까?
오늘도 그 영생을 누리고자 말씀 앞에서 섰사오니 이 종을 긍휼히 여기사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나는 주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만 내 갈급함을 아시오니 그 안에 은혜의 생수로 채워주소서.
그리하여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주옵소서.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이 되어 주님이 명하신 뜻을 행하고 때를 따라 양식인 말씀을 잘 나눠주는 자가 되게 하소서.
내 안에 비추인 쉐키나의 영광을 고이 간직하여 그 안에서 평강을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