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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크마를 찾은 여인 (눅15:8-10절)
열 드라크마를 갖고 있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중의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여인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포기하지 않고 찾기로 결심했습니다. 집이 너무 가난하여 대낮에도 등불을 켜야 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서민들 집의 방바닥은 대개가 진흙이나 돌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막기 위해 방바닥 위에 짚을 깔아 놓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동전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여인은 짚을 걷어내고 방바닥을 쓸며 티끌과 흙 속에서 부지런히 찾았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아내었습니다. 그 여인은 너무나 기뻐서 벗과 이웃을 불러 모아 잔치하면서 즐거워하였습니다. 이는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해야 되겠다고 주장하시는 주님의 두 번째 비유입니다.
누가만이 기록하고 있는 드라크마 비유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한 주인의 사랑, 곧 죄인을 향하신 그리스도의 지극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가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떠난 죄인을 찾으시는 그리스도의 행동 즉 불신자를 구원하는 내용이 강조되었다면,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는 범죄하고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를 구원하시려는 그리스도의 세심한 노력과 행동 즉 신자의 온전한 구원이 강조되어있습니다. 전도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곧 한 사람의 죄인이 회개하는 일은 하늘에서 하나님과, 이세상의 교회와, 교회의 사자들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신자를 전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잡은 고기를 놓친다는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입니다. 혹은 타 종교에, 혹은 이단에, 혹은 세상으로 떠나갑니다. 많은 교인들을 천주교나 불교에 빼앗긴다고 합니다. 기독교가 마이너스 성장을 한다고 하여도 우리들은 무감각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대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대를 미리 아시는 주님께서 드라크마 비유를 통하여 우리들을 재삼 교훈하시고 계십니다. 오늘은 불신자들을 전도하기에 앞서 잘 믿다가 실족해버린 영혼을 찾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1. 한 여자가 찾아야 할 드라크마입니다.
*눅15:8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양을 찾는 주인은 목자였습니다. 목자가 양을 찾았을 때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함께 즐거워했는데 이때 그의 벗과 이웃은 모두 남성 정관사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양을 찾는 주인은 바로 우리의 목자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드라크마를 찾는 주인은 여자로 나타났습니다. 여기 여자는 주님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참된 주님의 교회를 여자로, 신부로 비유한 것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 또 9절에 ‘벗과 이웃을 불러 모아 즐기자.’ 할 때도 여성형 정관사를 사용함으로 여자들이 모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여자가 교회를 상징하고 있는 것은 드라크마를 찾은 결과 기뻐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자들이라는 사실로도 명백합니다. (10절)
드라크마는 헬라 은전의 단위 명칭입니다. 히브리 돈은 세겔이고, 로마 돈은 데나리온입니다. 한 드라크마는 한 데나리온과 동일한 가치로서 오늘날의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금액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인이 소유하고 있는 전 재산의 10분의 1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것을 잃어버렸다가 찾은 기쁨이란 말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유대 여인에게 있어서 열 드라크마는 결혼 기념증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때 사랑의 증표로 드라크마 열 닢을 줄에 꿰어 주는데 여인은 그것을 머리띠로서 남에게 보이도록 이마에 둘러 다녔다고 합니다. 이것을 세메디라고 부르는데 대단히 중요하고 좋은 장식품입니다. 따라서 여인이 한 개의 드라크마라도 잃어버리면 약혼식이나 결혼식에 그것을 장식하고 나갈 수 없으며 이것은 남편에게 충실하지 못했음을 뜻합니다. 열 드라크마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사랑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화폐나 재산 이상의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여자가 결혼 징표인 드라크마를 잃었다가 다시 찾은 기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비유로 사용된 드라크마 은전은 구원 받아야 될 잃어버린 백성을 의미합니다. 바로 회개하고 구원받을 그 한 사람의 생명은 주님에게나, 교회에나, 전도자들에게는 사랑이요, 사모자요, 기쁨이요, 면류관입니다.
*빌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살전2:19-20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잃어버린 성도는 여자가 찾아야 할 드라크마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과 아름다움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의무요, 사명이요, 특권이며, 동시에 우리 모든 종들의 의무인 것입니다.
2. 집에서 잃어버린 드라크마입니다.
*눅15:8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목자가 치던 양은 들판에서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드라크마는 집에서, 안에서 잃어버렸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집은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a. 개인의 집에서 잃어버린 드라크마가 있습니다.
믿음의 가정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크리스찬 가정들 중에 실제로 잃어버린 드라크마가 있습니다. 전에는 교회에 잘 다니던 식구가 우연한 일로 실족하여 교회를 떠난 경우입니다. 타성적이고 관념적인 신앙생활로 인해 그 영이 어둠에 빠져 있는 가족일 수도 있습니다.
*창42:11-13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로서 독실한 자니 종들은 정탐이 아니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그들이 가로되 주의 종 우리들은 십이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말째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자신들을 독실한 자라 하였습니다. 독실하다는 뜻은 인정 있고, 성실하고, 진실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독실한 가정입니까? 그러나 우리들 가정에는 잃어버린 드라크마가 있습니다.
b. 교회 안에서 잃어버린 드라크마가 있습니다.
우리의 부주의, 무관심, 태만 등으로 교회를 떠난 성도가 있습니다. 교회 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려워 떠난 성도도 있습니다. 불타는 구령애가 식어버려 잃어버려진 상태의 드라크마가 있습니다.
c. 기독교 안에서 잃어버린 드라크마가 있습니다.
잘못된 교리나 이단의 사술에 빠져버린 성도들이 있습니다. 자유주의, 유물주의 신앙이나 신학에서 오는 절대 진리에 대한 불신앙이나 성경을 떠난 교회의 유전이나 전통에 얽매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비주의나 환상주의에 빠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d. 신앙 안에서 잃어버린 성도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예수 구원의 체험이 없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 모든 사람들이 집 안에서 잃어버린 드라크마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많은 자들이 들판에서, 광야에서,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집 안에서 잃어버려진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3. 찾아야 할 드라크마입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는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한 개의 드라크마도 결코 포기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없이는 남편에게 신뢰와 인정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기 위해 여인은 드라크마를 찾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a. 등불을 켜고 찾아야 합니다.
*눅15:8 등불을 켜고 찾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씀의 본질적인 뜻은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이유가 집안이 어두웠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교회가 어두울 때 성도를 잃어버립니다. 교회는 등불과 같은 존재입니다.
*마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등불은 성령과 말씀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밤을 이기고 신랑을 맞는 기본 요소가 등불이었습니다. 교회의 생명은 성령입니다. 성령의 강림하심 속에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성령은 교회의 교회된 본적이요, 현주소입니다. 성령의 조명과 밝히심이 없으면 교회는 어둡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하심이 사라질 때 성도는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또한 말씀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교회의 생명은 말씀입니다.
*시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등불을 켜면 집안 전체가 밝을 뿐 아니라 잃어버린 드라크마 은전이 불빛에 반사되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빛이 없는 곳에 은전은 반사 기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마치 양들에게 목자의 음성이 생명이듯이 은전에는 불빛이 절대 필요합니다. 빛을 보는 순간 그는 곧 자기의 정체를 반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고 하였습니다.
b. 집안을 쓸며 찾아야 합니다.
*눅15:8 집을 쓸며
이것은 집안에 있는 모든 가구를 뒤지며 찾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성경적 표현은 세 가지 뜻이 있는데--
① 집안의 모든 먼지와 쓰레기,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치우며 찾는 것을 말합니다.
즉 교회 안의 모든 더러움, 추한 것, 버려야 할 것을 청소하면서 찾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회개, 확실한 회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부터 돌아보고 나아가 교회 안에 죄악 된 요소가 있을 때 그것부터 먼저 깨끗하게 하고 드라크마를 찾아야 합니다.
② 세밀하게, 철저하게, 분명하게 찾는 것입니다.
적당히 찾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찾을 때까지, 모든 것을 다 뒤져서라도 찾아내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경로를 찾아 구체적으로 가능한 곳부터 찾아 나가는 것입니다.
*계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③ 집 안에 드라크마가 분명히 있다는 확신 속에서 찾는 것입니다.
집 안에서 잃어버린 드라크마는 반드시 집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멀리 가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생각보다는 손쉬운 곳에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고 확신하며 찾아야 합니다.
c. 부지런히 찾아야 합니다.
*눅15:8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열심을 내어서 찾아야 합니다. 애써서 노력하고 사생결단하며 찾아야 합니다. 찾겠다는 결심과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한 번에 안 되면 몇 번이라도 찾아야 합니다.
*살전2: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바울 사도가 성도 보기를 열정적으로 더욱 힘썼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그의 마음이 간절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4. 궁극적 구원의 기쁨인 드라크마입니다.
*눅15:9-10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결과적으로 드라크마는 찾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궁극적 구원을 말합니다. 잠시 실수로 한 개를 잃었으나 마침내 열 드라크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택자 구원이 궁극적으로 만족과 기쁨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 반열에 들어선 택자들이 이 세상 속에도 있습니다. 집 밖에도 있습니다. 또한 집 안에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그는 여전히 잃어버린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유아 세례를 받고도 불신자처럼 살든지, 세례를 받고도 죄 중에 빠졌든지, 심지어 직분을 받고도 교회를 떠나간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심지어 주님을 비방하고 교회를 헤치며 믿는 가족이나 형제를 넘어뜨리며 핍박하기도 합니다. 그들 중에는 많은 택자들이 있습니다. 결국 교회가 등불을 들고, 집을 쓸어가며, 부지런히 찾고 찾으면 마침내 돌아오고야 말 사람들입니다.
★ 세계적인 성경학자 토레이는 모태 교인이었지만 주님과 그의 어머니를 얼마나 섭섭하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무디 목사의 설교를 듣고 그는 찾은 바가 되었습니다.
★ 고아의 아버지라 불리는 죠지 뮬러 목사는 모태 교인이었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도적질하는 버릇 때문에 가정과 학교가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장하면서 어느 조그마한 기도 모임에 참석하다 회심하고 돌아와 주의 종의 길을 걸으며 5만 번 기도 응답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 어거스틴도 집 안에서 잃어버린 드라크마였습니다. 그는 로마서 13장 12절-13절의 말씀의 빛 안에서 찾은 바 되었습니다.
✶ 마틴 루터도 로마 카톨릭이라는 집 안에서 잃어버린 드라크마였습니다. 그는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에서 빛을 보고 찾은 바 되었습니다.
✸ 중국의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도 집 안에서 잃어버린 드라크마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요한복음 19장 30절의 '내가 다 이루었다.' 고 하신 빛 앞에서 찾은 바 되었습니다.
우리는 집 밖에서, 들판에서, 산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불신자의 전도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집 안에서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아야 합니다. 등불을 높이 들고 불을 밝혀야 합니다. 빛을 보는 드라크마는 곧 그의 소재를 알려 줍니다. 먼저 믿는 자들의 밝은 생활로 저들을 감화하고 감동시켜야 합니다. 집을 쓸면서 찾아야 합니다. 교회 자체가 회개하면서 찾아야 합니다. 물론 집 안에 드라크마가 있습니다. 확신 속에서, 부지런히 찾아 마침내 찾고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존재 목적이요 의의입니다. 신부된 교회는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아 그것으로 세머디라는 장신구를 만들어 목에 걸고 다녀야 합니다. 참된 교회는 잃어버린 생명을 찾을 때에만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이 기쁨은 하늘의 하나님의 기쁨이요, 땅의 교회들의 기쁨이며, 교회 기쁨의 본질입니다. 이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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