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츄어의 명반사냥이야기 서른 번째
뢰(雷)가 이끄는 운(雲)우(雨)풍(風)의 조화
서울공대지 2019 Spring No. 112
나용수 원자핵공학과
교수
“SAMUL-NORI: DRUMS AND VOICES OF KOREA” LP
(Elektra/Asylum/Nonesuch Records, Explorer
Series, 음반번호: 72093)
“바람이 불고 구름이 몰려오니 비가 내리고 천둥이 친다.”
오늘날 국악 하면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음악. 바로 사물놀이가 이루는 소리이다.
사물놀이의 “사물”은 본디 불가에서 사용되는 네 가지 악기, 즉 법고1), 운판2), 목어3), 대종4)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속가에서 꽹과리, 장구, 북, 징의 네 악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변모되었다. 이 사물은 사계절 변화와 자연계 현상을 비유한 것으로 기둥을 세우는 구실을 하는 “징”은 바람으로 풍백을, 장구를 도와서 힘을 넣어주는 구실을 하는 “북”은 구름으로 운사를, 소리나 가락을 잘게 쪼개는 구실을 하는 “꽹과리”와 “장구”는 각각 천둥, 벼락의 뇌공과 비의 우사를 상징한다고 한다. 특히 장구는 쇠와 함께 음양을 이루며 사물의 리듬을 이끌어 가는 악기로, 장구 왼쪽 윗부분의 깊고 장중한 소리는 음(陰)을, 오른쪽 윗부분의 날카롭고 밝으며 꿰뚫는 듯한 소리는 양(陽)을 상징함으로서 사물악기 가운데 유일하게 음양성을 낼 수 있는 악기이다. 사물 중 주도권을 갖는 악기는 꽹과리로 사물 중 가장 오래된 악기인 북을 비롯해 나머지 세 악기를 이끌어 간다. 이처럼 금속악기가 가죽악기를 이끄는 사례는 우리나라의 사물놀이에서만 보이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 김용배 (1952~1986)
농경사회가 현대사회로 전이하면서 전 국민 생활의 일부나 다름없던 농악이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갈 무렵 “사물놀이”가 등장한다. “사물놀이”는 공간사랑 소극장에서 1978년 5월에 심우성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용어이자 1978년 김덕수(장고), 이광수(북), 최종실(징), 김용배(꽹과리) 네 명이 전통음악 즉흥 연주단인 ‘시나위’의 핵심체로부터 나와 결성한 연주단 이름이다. 결국 연주단 이름이 하나의 국악 장르 명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 “사물놀이”이다. 이는 풍물굿을 계승한 앉음반 형태의 실내 연주용 놀이의 형태로, 사물을 사용하여 다양한 박자, 생동감 있는 리듬, 긴장과 이완의 다채로운 리듬변화로 치밀한 리듬음악의 극치를 이루는 음악을 의미한다. 사물놀이는 창시 이래 짧은 기간 동안 국내에서 유례없는 대성공을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극찬을 받게 되는데, 1982년 타악기 예술협회의 초대로 미국 달라스에서 열린 세계 타악인 대회(PASIC)에서 9번의 커튼 콜을 받았던 연주는 가히 전설로 남아있다. 이후 미국을 비롯한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서 초청공연이 이루어졌으며 해외 곳곳에 사물놀이 캠프가 세워지고, 워크숍이 진행되었다. 대영백과사전에는 ‘사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Samulnorian’이 등록됐다.
본 앨범은 1984년 Elektra Nonesuch 레코드에서 사물놀이의 창시자들인 김용배, 김덕수, 이광수, 최종실의 연주를 미국 뉴욕에서 녹음하고 발매한 사물놀이의 기념비적인 앨범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같은 해에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발매되었다. (음반번호: OLW-
348) CD로는 1988년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발매되었는데 (음반번호: ORC-1041) 제작은 일본에서 이루어졌다.
사물놀이의 창시자인 김덕수, 이광수, 최종실, 김용배는 모두 내로라하는 광대 집안 출신이다. 사물놀이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최근 “장구산조(음반사: 고금, 음반 번호: 8 809607 640068(LP), GGC18004(CD))”를 창시한 장구의 김덕수는 남사당패 법고놀이의 명수였던 김문학의 둘째 아들이다, 북의 이광수는 충남 예산에서 북만주 일대까지 전문 연희패를 이끌고 다니던 이름난 뜬쇠 이점식의 아들이고, 징의 최종실은 경남 삼천포 12차 농악 무형문화재 지정 당시에 단장을 맡았던 최재명의 아들이다.
신들린 꽹과리로 알려진 김용배(1952~1986)는 이른 나이에 타계했을 뿐 아니라 내성적인 성격과 김덕수의 그림자에 가려 그 실력에 비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충남 논산 태생으로 풍물굿에도 관계했고, 김신이라는 예명을 가진 영화배우이기도 했던 김형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서울로 이주하게 된 그는 신대방동 일대에서 기거했는데, 부근 관음사라는 절에서 머물던 남사당패의 뜬쇠를 통해 예인의 길에 첫 발을 디디게 된다. 거기서 그는 최성구에게 쇠를 배우고, 양도일에게 장구를, 송복산에게 온갖 재주를 터득하게 된다. 또한 김석출과 김만석을 통해 아랫다리에서도 재주를 익히게 되는데, 특히 김석출에게서 쉽사리 터득할 수 없다는 푸너리 가락을 익혀 이 후 푸너리 가락의 제일인자가 된다. 뿐만 아니라 국악예술고등학교에서 지갑성과 지영희에게서 전통적인 가락도 전수 받는다. 지영희가 가락은 몸으로 전수한다는 불문율을 깨고, 자신의 육성과 가락을 테이프에 녹음하여 김용배에게 전수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처럼 김용배는 풍물 전반에 걸친 폭넓은 이해를 가질 수 있었기에 장고, 북, 징 가락의 기본 축 사이사이를 날렵하게 누비며 신기에 가까운 쇠가락을 두드릴 수 있었다. 또한 야외 풍물굿의 기나긴 가락들을 간소화, 핵심화하여 실내, 야외의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구성하여 연주할 수 있었다.
<그림> 사물놀이 창단 멤버: (좌로부터) 이광수, 김용배, 김덕수, 최종실
김용배와 김덕수는 타고난 라이벌이었는데 전국농악경연대회 개인 부문에서 항시 1, 2등은 김덕수와 김용배 차지였다고 한다. 강준택에 의하면 김덕수와 김용배가 신들린 듯 장단을 몰아가게 되는 때에 서로가 지지 않으려고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이는 것이 매번 공연마다 보였다고 한다. 선천적으로 안정된 버슴새를 갖고 있는 김덕수의 장구소리와 하늘로 치켜 올라가듯 뿜어져 나오는 김용배의 쇳소리는 하염없이 밀고 당기며 감싸 안고 달아나면서 운우 풍뢰의 조화를 낳는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음악관에서 서로 마찰을 빚었는데, 김덕수는 대중에게 영합하는 곡을 연주하면서 전통적인 가락을 연주하자는 입장인 반면 김용배는 전통을 완벽하게 재창조하고 그 다음에 대중을 생각하자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마찰로 인해 결국 김용배는 사물놀이패를 떠나 국립국악원으로 가게 된다. 지극히 폐쇄적이고 정악(正樂) 중심으로 운영되던 국립국악원이 기존의 관습을 깨고 사물놀이패를 결성하도록 그를 맞이한 것은 김용배의 실력과 영향력을 가늠케 한다. 김덕수는 두 번이나 김용배가 돌아오도록 권유하였으나 김용배는 이를 고사하고 향후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김용배가 결성했던 국립국악원 사물놀이패의 연주는 음반으로 남아 감상할 수 있다. (LP: 지구레코드
JLS-1201998, CD: 지구레코드 JCDS-0050)
푸너리, 길군악 7채, 짝드름의 제 일인자였던 김용배의 쇳가락은 뜬쇠의 재기, 웃다리풍물의 정수, 그리고 스스로의 끊임없는 노력이 아우러진 결정체이다. 그는 한 지역 음악의 관심에만 머물지 않고 전국토의 장단에 호기심을 가지고 학습했으며 무모한 창작 시도보다는 철저하게 정통 음악에 기반을 둔 연주를 했다. 일시적인 유행이나 관중의 박수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않고 자신이 학습 과정에서 느낀 옛 명인들의 구성지고 담백한 멋, 들을수록 깊은 맛이 나오는 연주가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연마하며 종교적일 정도의 신념을 가지고 꿋꿋이 전통음악 뿌리에 따른 편곡과 새로움을
개척했다.
김용배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던 간에 끊임없이 자신의 음악세계를 정진하고 다져나갔다. 만년에는 무속 가락에 심취하게 되고, 특히 인도 음악에 경도되었다고 한다. “실크로드를 따라 풍물을 치며 인도에 가고 싶다. 우리 가락처럼 복잡하고 오묘한 인도의 음률을 찾아서. 인간의 혼을 감아주고, 풀어주고, 그러면서 반복이 있는 가락. 이것은 우리나라와 인도밖에 없다.”
<그림> 1982년
미국
달라스에서
열린
세계타악인대회에
참가한
사물놀이
특유의 해맑은 눈동자로 헤쳐 나갔던 김용배의 일생은 어찌 보면 불우한 광대의 일생이었다.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 끝에 서른 다섯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가 마지막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無’자만 열 다섯 개가 주먹만한 크기에서 콩알만한 크기로 점차 작게 쓴 액자 한 폭이었다고 한다. 아파트 베란다에는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꽹과리가 깨어져 있었다. 이 꽹과리는 김용배가 신춘국악대전 지방 공연 때 늘 상 정성스럽게 광약으로 닦아두었던 것이었다.
“예술은 인간의 가장 승화된 표현입니다. 삶에 대한 진실의 세계가 극치를 이루는 것이지요. 거짓의 세계는 파괴적입니다. 예술이 밝히는 진실의 세계는 인정을 받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예술가의 환상은 신이 그렇게 하시듯, 돌과 풀과 모든 만물에 영혼이 깃들게 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예술가는 긍정적인 논리보다는 ‘잔인함’과 ‘광기’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예술은 추한 것을 통해서도 삶을 승화시킵니다. - 김용배의 유언장 中”
그가 타계한 후,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공간사랑’에서 그를 기리는 진도 씻김굿패가 김덕수패 사물놀이에 의해서 행해졌다.
㈜
1. 기어 다니는 짐승을
제도하려는
뜻에서
두드림, 법고는
소의
암수
가죽을
양면에 대서 만드는데
이것은
소리의
조화
내지
음양의
조화를
구하자는
사고에서
유래함.
2. 날아다니는 짐승을 제도하려는 뜻에서 두드림.
3. 물속의 짐승을 제도하려는 뜻에서 두드림.
4. 지옥고에서 헤매는 짐승을
제도하려는
이유로
두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