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건형의 닥터 사이언스]
꿀벌만 걱정하는 세상, 나방은 억울하다
일러스트=이철원
1889년 5월 빈센트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쓴다. “어제 아주 희귀한 밤나방을 그렸어. 아주 큰 나방이었지. 그림을 그리려면 죽여야 했는데 그렇게 아름다운 동물을 죽이는 건 아쉬운 일이지.” 결국 고흐는 나방을 죽이는 대신 데생으로 스케치해 작품을 완성했다.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이 소장한 명작 ‘거대한 공작나방(Giant Peacock Moth)’이 이렇게 탄생했다. 독일 대문호 헤르만 헤세도 자전적 소설 ‘공작나방’에서 어린 시절 친구의 화려한 공작나방을 훔쳐 망가뜨린 과거를 고백했다. 1991년 영화 ‘양들의 침묵’ 포스터에는 ‘죽음의 머리’라고 하는 나방이 등장한다. 조디 포스터의 입에 물린 박각시나방 가슴 부위에 섬뜩한 해골 무늬가 선명하다. 음침하게 밤을 나는 해충이라고 욕먹기 일쑤고, 모기나 바퀴벌레처럼 보이면 잡아 죽이기 바쁜 나방이 위대한 예술의 영감이 됐다.
꿀벌의 위기에 대해 앞다퉈 말한다. 꿀벌이 사라지면 생태계가 망가지고, 결국 인류도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넘쳐난다. 모두가 꿀벌을 사랑하고, 집 나가 돌아오지 않는 꿀벌의 행방을 궁금해한다. 그런데 밤이면 나방이 꿀벌을 대신하는 것은 잘 모른다.
영국 셰필드대 연구팀은 이달초 국제 학술지 ‘생태학 회보’에 “나방이 식물 수분(受粉)의 3분의 1을 맡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들은 2019년 여름 세 차례에 걸쳐 리즈의 정원에서 나방과 꿀벌을 채집했다. 이어 유전자(DNA) 분석 기술을 이용해 나방과 꿀벌에 어떤 종류의 꽃가루가 붙어 있는지 확인했다. 그 결과 꿀벌은 양배추, 단풍나무, 가시나무 같은 십자화과 식물의 꽃가루를 옮기고 있었고 나방에게서는 토마토, 감자, 부들레야 등 가짓과 식물의 꽃가루가 나왔다. 꿀벌과 나방이 각기 다른 식물을 선호한다는 뜻이다. 스튜어드 캠벨 셰필드대 박사는 “영국에는 벌이 250종 있지만, 밤에 꽃과 나무를 찾는 나방은 2500종에 이른다”고 했다. 종류가 많은 만큼 나방이 꿀벌보다 더 다양한 식물의 꽃가루를 옮긴다.
나방은 심지어 ‘근면함의 대명사’인 꿀벌보다 훨씬 더 부지런했다. 지난 3월 영국 서섹스대 연구팀은 국제 학술지 플로스원 논문에서 “영국 남동부 지역 10곳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관찰한 결과 나방이 꿀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꽃을 수분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연구팀은 꽃이 만개한 여름밤이 짧기 때문이라고 봤다. 낮에 활동하는 꿀벌은 긴 시간을 활동할 수 있지만, 밤의 나방은 시간에 쫓겨 서두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꿀벌만큼 사랑받는 나비도 외형에서 알 수 있듯 원래 나방이었다. 비슷해 보이지만 나비는 날개를 접고 앉고, 나방은 날개를 편 채 앉는다. 더듬이도 나비는 끝이 뭉툭하고 굵은 곤봉 모양, 나방은 뾰족한 모양이다. 무엇보다 나비가 나방과 가장 다른 점은 낮에 난다는 것이다. 과학계에서는 원래 나비의 등장을 박쥐 때문이라고 봤다. 밤의 제왕이자 최상위 포식자 박쥐가 전성기를 맞으면서 나방 일부가 포식자를 피해 낮에 움직이는 나비가 됐다는 것이다.
지난 5월 미국 플로리다 박물관 연구팀은 90국 나비 2244종에게서 수집한 DNA와 나비 11종의 화석을 분석해 최초의 나비가 1억1400만년 전 북미 중서부 지역에서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나비가 나방에게서 갈라진 계기도 새로 밝혀지고 있다. 1억3000만년 전 등장한 꽃피는 식물 덕분이다. 낮에 피는 꽃에서 꿀이라는 달콤한 보상을 얻으려는 용감한 나방들이 낮에 날기 시작했고, 이들이 나비의 직계 조상이라는 것이다. 이후 식물 생태계의 주도권이 꽃피는 식물로 넘어가면서 나방 역시 밤마다 꽃과 꿀을 찾기 시작했다. 가로등에나 몰려든다고 여기는 나방이 꽃가루를 나르고, 수많은 식물의 번식을 돕게 된 까닭이다.
나비와 나방은 식물의 잎에 알을 낳고, 부화한 애벌레는 식물의 잎을 먹고 자라 성충이 된 뒤 고치를 벗고 날아올라 다시 식물의 번식을 돕는다. 지구라는 거대한 생태계가 얼마나 정교한지 보여준다. 하지만 나방의 생존 여건은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다. 도시가 커지면서 조성되는 공원과 정원에는 꿀벌이 좋아하는 꽃과 식물만 늘어나고 있다. 식물 번식의 영광을 꿀벌에게 빼앗긴 것도 서러운데, 이제는 살아갈 곳도 마땅치 않다. 나방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곤충이라고 해야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