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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5. 묵상글 (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 사랑 포기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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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5.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0.25 04:35
- 사랑 포기자?
오늘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라고 하면서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삶의 표시로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권고를 들으면서 일치를 보존하려고 애쓰라는 말이
유독 눈에 들어왔는데 왜 이 말이 유독 제 눈에 들어왔을까요?
그것은 아마 전에 비해 요즘 제가 그러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사실 전에는 저뿐 아니라 모두가 일치를 중요하게들 생각했고,
그래서 일치를 이루려고 무던히도 애들을 썼지요.
그러던 것이 요즘 와서 일치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고,
일치를 부르짖으면 ‘왜 꼭 그래야 하나?’ 하는 눈으로 봅니다.
사실 요즘은 일치를 부르짖는 것을 억지로 하나로 만들려는 것으로,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을 묵살하고 획일적으로 하나로 만들려는,
그런 시도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일치, 하나가 되는 것이, 이런 것이라면 그렇게 중요시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고 우리가 이루려 애써야 할 일치는 사랑의 일치이고,
이런 일치는 이루기 힘들기에 못하지 할 수 있다면 모두 이루고 싶어 하는 겁니다.
사실 진정한 자유와 다양성은 일치를 지향할 때 그 가치가 있고,
참다운 일치는 개인의 진정한 자유와 다양성을 묵살치 않습니다.
사실 참사랑은 개인과 개인의 자유를 존중합니다.
성령의 사랑을 보면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성령 안에서 다양한 은사가 주어지고,
성령 안에서 그 많은 다른 것이 일치를 이룹니다.
바오로 사도가 다른 곳에서, 성령의 은사는 각기 다르지만
우리는 같은 성령을 모시고 있다고 했고, 오늘 독서에서도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치의 관건은 성령의 사랑을 우리가 할 수 있느냐 못하느냐이고,
일치를 이루려고 애쓰지 않는 것도 이 사랑을 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쉽지 않은 이유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그렇습니다. 겸손과 온유와 인내심을 수반하는,
또는 겸손과 온유와 인내심이 밑받침되는 사랑이어야 하기에 쉽지 않습니다.
이런 것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사랑은 어렵지 않고 달콤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참사랑은 그렇게 할 수 없기에 하다가 실패하거나
이것을 알고 난 뒤에는 아예 사랑하기를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니 사랑 포기자들이 많은 요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린 다시 용기를 내며,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그 유명한 ‘사랑의 찬가’를 거듭 상기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견디어 냅니다.”
참사랑은 이런 사랑이기에 하루 이틀에 이룰 수 없습니다.
어제 뿌리내리기에 이어 오늘도 사랑은 전 생애적인 것임을 강조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이런 사랑을 하도록 부르심 받은 그리스도인들입습니다.
이런 사랑 도전하시겠습니까?
사랑 포기자가 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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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5.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시인 헤르베르트는 책 읽기의 무용함을 말합니다. 누군가 그에게 고전을 읽으라고, 그 책들이 수백만 명의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말하지만, 자신은 그 책을 읽은 뒤에도 달라진 게 없다고, 솔직히 말하면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푸념했습니다.
헤르베르트의 이 말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다. 요즘에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제 책을 출판했던 출판사 사장님께서도 요즘 너무 힘들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책을 사서 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책값이 너무 비싸다는 이유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지요.
도움이 되지 않는 책 읽기인 것 같지만, 분명히 도움이 됩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고가 넓어집니다. 작가의 상상력에 저의 상상력을 더해서 새로운 삶을 떠올려 지금을 다르게 살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작가의 통찰에 공감과 비판을 반복하면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갑니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나의 이야기를 탄탄하게 만들어 줍니다.
주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과거의 일회적 말씀이 아니라, 지금에도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말씀입니다.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묵상을 통한 마음의 변화로 지금도 새롭게 다가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전혀 변하지 않는다고 또 어느 성경 말씀인지도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읽지 않는 것이 오히려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자기변호일 따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변화는 예측하여 대비하면서, 절박하게 닥친 시대의 변화는 왜 올바로 읽지 못하느냐고 꾸짖으십니다. 이렇게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 “위선자들아~”라고 하시지요. 읽을 수 있음에도 읽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 각종 전례를 통해 주님의 말씀은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일이 더 중요하다고, 바빠서 주님을 알 시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두 위선적인 모습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분명히 마지막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세상 삶을 마치고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삶이 영원한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심판자 앞에 섰을 때 과연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대단한 것으로 생각될까요?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모두 사랑의 삶으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단순히 이 세상 삶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핵심 사항이 됩니다. 그런데도 주님을 알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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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해안이 시야에서 사라져도 괜찮다는 용기가 있어야 새로운 수평선을 향해 헤엄칠 수 있다(윌리엄 포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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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5.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이 시대”의 징표를 풀이하고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책망하여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56)
사실, 군중들은 자연의 징표나 자신 몸의 징표는 잘 읽고 대처하면서 ‘시대의 징표’는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과 같은 거짓 지도자들의 판단에 의존하면서 책임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하고, 그들의 ‘회피’와 ‘위선’을 질책하십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시대의 징표’를 복음으로 읽어내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눈으로 읽으면서 또한 그러한 눈으로 세상을 읽고 있는 언론에 의존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루카 12,58)
“징조”를 잘 읽고 ‘바르게 행동하라’는 엄한 경고입니다. 곧 재판에 붙여지기 전에 화해라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역사의 징조를 읽으셨고, “때가 차자”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시어 빛을 비추셨습니다.
또한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도 끊임없이 ‘시대의 징조’를 읽고 해석하고 응답해 왔습니다. 그것은 [교회문헌들], 특별히 [사회회칙들]에 잘 드러납니다. 곧 교회는 끊임없이 “시대의 징조”를 읽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늘의 사회, 윤리적인 문제에 적용하여 해석하고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2013년에 발표하신 교황 권고 문헌인 [복음의 기쁨]에서, “모든 공동체가 시대의 징표를 주의 깊게 살피도록 권고”(51항)하셨습니다. 그리고 돈이 우상화 된 ‘신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물질만능의 ‘물신주의의 병폐’와 ‘무관심의 세계화’ 등을 지적하시면서,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하는 교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난한 교회’, 곧 함께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공빈(共貧)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5년, 환경을 주제로 한 첫 번째의 회칙인 [찬미받으소서]에서,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으로 기술만능주의와 왜곡된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통합적이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다양한 차원의 대화와 생태 교육을 촉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찬미받으소서]의 후속 권고 문헌인 [하느님을 찬양하여라]에서는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하기 위해 ‘생태적 회심’을 호소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이 시대가 징표”를 읽고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라.”는 예수님의 촉구에 응답하며, 이 시대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위선자들아,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56)
주님!
세상의 빛이 되게 하소서!
시대의 징조를 읽어내고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대처하게 하소서.
위선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말과 혀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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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5.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적인 사정에 민감하라
어르신들은 지혜가 많으신 분입니다. 많이 배우지 못해 지식은 풍부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분도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는 늘 차고 넘칩니다. 제비가 낮게 날고 있는 것을 보면서 비가 올 것을 예상했고, 개미의 움직임을 보면서 장마에 대비했습니다. 서쪽에서 밀려오는 구름을 보며 비를 예상하고 남풍이 불면 더위를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이렇게 지혜 있는 사람들은 자연의 징조를 읽어냈고 거기에 맞는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의 지혜에 밝은 사람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무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기적들과 가르침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니 관심 부족이 아니라 외면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바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옛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기득권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에 시대의 뜻을 올바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시대의 징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체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선자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시대의 뜻은 겉모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나를 비워낼 때 하느님의 뜻을 만나게 됩니다.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바뀌기를 기대하지 말고 먼저 내가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환경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하나의 촛불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 할 일을 오늘 복음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재판관에게 가기에 앞서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루카12,58).는 것입니다. 화해가 쉽지는 않지만, 재판정에 서서 판결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5,24) 고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에페4,26). 하고 권고합니다. 더더욱 판결을 받아 감옥에 가게 되면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말씀이든 ‘나는 아니야’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어떤 말씀이나 강론을 들으면 “저 얘기는 아무개를 두고 하는 얘기야!”, “그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 하고 자기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대의 징표를 읽는 사람은 “모두가 나를 두고 하는 말씀이야!” 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대는 하느님을 잊어가는 시대입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정신이 아주 사소한 틈새까지 파고들어 우리를 정복하려고 들고 그에 따라서 우리는 더욱 영적인 사정에 둔감해지는 시대입니다”(함께야).
이런 시대를 올바로 분별하려면 세상의 지혜를 찾지 말고, 주님의 뜻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심판의 마지막 날이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회개할 기회입니다. 진정한 변화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한순간도 헛되이 하지 않기를 빕니다. 단풍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곧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겨울을 맞이할 것입니다. 아름다움의 절정에는 내려놓아야 할 과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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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5.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백분 토론’을 보았습니다. 주제는 ‘이스라엘과 이란의 확전 가능성’이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고, 이스라엘과 이란은 멀리 있기에 큰 관심은 없었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은 어떤지 알고 싶었습니다. 전문가들은 확전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도움 없이는 이란과 전쟁을 이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란도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어 하기에 미국이 원하지 않는 전쟁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합니다. 결국 문제의 열쇠는 미국에 있다고 합니다. 미국이 이스라엘에 무기를 제공하지 않으면,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이란과 전쟁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설령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한다고 해도 이란은 큰 나라이기에 타격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고 합니다. 이란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면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이기에 타격이 생각보다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이란의 확전 가능성은 적다고 합니다.
1년 넘게 이스라엘이 하마스와 전쟁을 이어가고, 전선을, 헤즈볼라를 넘어 이란에까지 넓히는 이유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작년 10월 하마스의 공격으로 이스라엘 사람이 1,000명 넘게 사망했다고 합니다. 1년간의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팔레스타인 사람은 40,000명이 넘게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국민도, 국제사회도 이제 전쟁을 끝내고, 평화협정을 맺으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계속 전쟁이 길어지는 것은 이스라엘 국내 정치의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면 이스라엘 총리인 네타냐후는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형사재판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총리는 전쟁을 계속 이어가면서 지지도가 올라가고, 전쟁의 성과로 형사재판을 받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인구가 늘어나고 있고, 산업이 발전하면서 수자원이 더 필요해졌다고 합니다. 갈릴래아 호수의 물만으로는 부족하기에 레바논 남부 지역에 있는 강을 확보하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레바논 남부에 있는 헤즈볼라를 몰아내면서 자연스럽게 레바논 남부에 있는 강을 이스라엘의 수자원으로 확보하길 원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과 하마스와의 평화는 가능할 수 있을까요? 중동의 평화는 가능할 수 있을까요? 유엔에서 천명한 두 개의 국가를 인정하는 것이 해법이라고 합니다.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떠돌던 유대인들은 1948년 이스라엘 국가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는 1,000년 넘게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유엔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두 개의 국가를 이루고 서로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국제사회와 미국이 이스라엘에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할 수 있도록 요청하면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미국의 정치, 경제, 언론에는 유대인의 영향력이 크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욕망과 이기심의 눈으로는 결코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폭력과 전쟁의 방식으로는 결코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시대의 징표를 읽을 방법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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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5.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국수를 삶습니다. 끓는 물에 국수를 잡아넣습니다. 잠시 잠잠했던 물은 이내 허연 거품을 물고 넘치기 시작합니다. 면이 다 익은 것은 아닙니다. 국수를 삶을 때 늘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넘칠 것을 대비해 냄비 옆에 냉수 한 그릇을 놓습니다. 넘치려고 할 때 냉수를 살살 넣어주면 거품 물었던 냄비는 다시 냉정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서너 번이면 국수는 알맞게 익어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주님의 말씀처럼 땅과 하늘의 징조를 풀이할 줄 알았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땅과 하늘의 징조가 국수 삶기와 같다면 쉬울 텐데요.
땅과 하늘의 징조도 풀지 못하는데 시대의 징조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복음의 의미는 세상 모든 징조를 우리가 풀어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늘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말씀을 우리가 우리 삶 안에서 풀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징조의 풀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가볍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지만 우리는 그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늘나라가 다가왔지만, 우리는 그 나라를 신경 쓰지 않습니다. 반면, 이 세상이 영원할 것이라 말하며 세상에 젖어 살아갑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가서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되기를, 사랑을 전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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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짓기
우리나라 전통 건축 방식 중 하나는 바로 ‘들보식 구조’입니다.
들보식 구조는 기둥을 세우고 기둥 사이에 보를 건너질러 이음과 맞춤으로 연결하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우리 전통 가옥의 대부분은 이 ‘들보식 구조’입니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읽다 보면 참 대단한 것이 많습니다. 온돌도 그렇고 들보식 구조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우리 선조들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으로 훌륭한 삶의 터전을 만들었습니다. 나무, 흙, 돌 등으로 말입니다.
우리 삶이 집을 짓는 과정이라면 그대는 어떤 집을 짓고 있을까요? 진귀한 재료들을 모아 화려한 집을 짓고 있나요? 아니면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로 화려하진 않지만 아늑한 집을 짓고 있나요?
우리 주변의 사람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이 모두 그대가 짓는 집의 멋진 재료들 아닐까요?
아늑함과 따스함을 선물하는 집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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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5.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더불어 일치의 여정
<시대의 표징을 아는 지혜, 분별력의 지혜>
기상하여 자비의 집 숙소문을 열면서 가장 먼저 보는 것이 하늘과 별이요 다음은 불암산입니다. 아마 세상에서 저만큼 하늘과 산을 많이 바라보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1997.2.>
아주 많이 인용한 무려 27년전 자작애송시지만 지금도 하늘과 산을 바라볼 때 마다 늘 새롭게 떠오르는 시입니다. 하늘이 상징하는 주님과 산이 상징하는 나와 날로 깊어지는 관계를 희구(希求)하는 시입니다. 새삼 우리의 삶은 더불어 주님과 일치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옛 어른 ‘다산’의 지혜를 나눕니다.
“말이 말을 하지 않고, 사람이 말하기 위해서는 오직 끊임없는 공부와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그릇된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릇된 것을 깨달음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바른 말에서 깨달을 뿐이다.”
바른 말을 깨닫는 공부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더불어 주님과 일치의 여정은 이런 깨달음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깨달음의 은총입니다. “아, 그렇구나!” 날로 깨달아가면서 지혜로워지고 너그러워지고 자유로워지는 우리들입니다. 역시 값싼 깨달음의 은총도 없습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치열한 공부와 노력의 수행이 뒤따라야 합니다.
어제 원장수사로부터 부탁한 강의록을 선물받았습니다. “전례의 상징과 공간”이란 ‘깊고 아름다운’ 제하의 강의록인데 참보물을 지닌 부자라도 된 듯 행복했습니다. 맨먼저 나온 상징이 제대였습니다. 끊임없이 미사가 봉헌되는 ‘희생제단과 식탁’의 주님의 제대야 말로 하느님을 믿는 우리 삶의 영원한 중심이 됩니다. 또 믿는 이들 모두가 다 주님 중심의,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일치의 여정중의 삶임을 깨닫게 합니다.
공부중의 공부가 주 하느님 공부입니다. 이런 공부의 대가가, 공부의 달인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주님 안에서 수인(囚人)이 된 바오로 사도이지만 자유롭기는 우주적입니다. 우리 모두 더불어 주님과 일치의 여정에 항구할 것을 권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단숨에 읽힙니다.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진리 말씀으로 더욱 주님과 일치를 추구하고픈 의욕을 갖게 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하느님께서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고,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모두가 성령의 인도하에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평화의 사랑을 다하며, 이런 일치의 중심인 하나를, 한분이신 주님을 향한 일치의 여정에 항구할 때 다양성의 일치에 날로 지혜로워지고 자유로워지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우리 모두 시대의 표징을 읽는데, 또 분별에 눈밝은 지혜를 지닐 것을 촉구합니다.
“깨어 있어라”에 이어지는 시대를 알아보고 분별의 지혜로 늦기전에 용서하고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이 어떤 시대입니까? 어제 “파멸 앞당기는 초가속 시대 AI”(안호기) 이란 칼럼을 읽었습니다. 핵전쟁 위험을 예고하는 종말시계는 90초를 남겨두고 있고, 탄소시계의 한계치는 4년 273일 남았을 뿐이며, 인공지능의 위험을 경고하는 ‘AI 안전시계’는 현재 11시31분으로 고위험상태에 진입했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이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근대화 이전 과거 삶의 방식을 되찾고, 지구와 인간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국가는 성장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정책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시민이 서로 돌보고 연대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변화의 속도가 훨씬 느리더라도 공동체의 가치와 삶의 질을 높여야 행복해질수 있다.”
그 무엇보다도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의 소중함을, 공동체의 고마움을 깨닫고 섬김과 나눔의 삶에 충실하는 것이 우선임을 깨닫습니다. 각자도생은 모두가 파멸의 지름길입니다. 오늘 주님의 복음은 그대로 이런 위기의 시대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참으로 외적 육적 욕망의 삶에서 내적 영적 삶에로의 혁명적 전환이 절박한 시대입니다. 더불어 주님과 일치의 여정에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절체절명의 작금의 시대입니다. 이어 주님은 우리의 무지를 꾸짖으며 분별의 지혜를 발휘할 것을 촉구합니다.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스스로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지체없는 회개와 용서, 화해를 촉구하는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깨어 주님과 더불어 일치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주님께서 주시는 시대의 표징을 읽는 지혜의 은총에, 분별력의 지혜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더불어 주님과 일치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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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5.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 시대를 담아내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 12,56)
나의 기쁨이
어찌 나만의 것이요
그대의 기쁨이
어찌 그대만의 것이겠는가
이 시대의 기쁨인 게지
나의 슬픔이
어찌 나만의 것이요
그대의 슬픔이
어찌 그대만의 것이겠는가
이 시대의 슬픔인 게지
나의 희망이
어찌 나만의 것이요
그대의 희망이
어찌 그대만의 것이겠는가
이 시대의 희망인 게지
나의 절망이
어찌 나만의 것이요
그대의 절망이
어찌 그대만의 것이겠는가
이 시대의 절망인 게지
나의 사랑이
어찌 나만의 것이요
그대의 사랑이
어찌 그대만의 것이겠는가
이 시대의 사랑인 게지
나의 무관심이
어찌 나만의 것이요
그대의 무관심이
어찌 그대만의 것이겠는가
이 시대의 무관심인 게지
나의 삶이
어찌 나만의 것이요
그대의 삶이
어찌 그대만의 것이겠는가
이 시대의 삶인 게지
나의 죽음이
어찌 나만의 것이요
그대의 죽음이
어찌 그대만의 것이겠는가
이 시대의 죽음인 게지
나의 살림이
어찌 나만의 것이요
그대의 살림이
어찌 그대만의 것이겠는가
이 시대의 살림인 게지
나의 죽임이
어찌 나만의 것이요
그대의 죽임이
어찌 그대만의 것이겠는가
이 시대의 죽임인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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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5.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루카 12,57-59)
예수님만이 우리 빛을 탕감하실 수 있다
빚받이꾼은 나를 위해 동전 한 닢만큼도 빚을 탕감할 능력이 없습 다. 빚진 자들이 빚을 갚을 수 없을 때, 오직 한 분만이 빚을 탕감해 주실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루카 7,41-42). 빚을 탕감해 준 이는 주님이십니다. 채권자는 주님이 아니고 주님께서 빚을 받아오라고 위임한 자입니다
그대는 오백 데나리온이건 오십 데나리온이건 간에 빚을 탕감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7,48)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대는 감옥에 갇혀 중노동을 하거나 고통스런 징벌을 받는 것으로 빚을 갚아야 할 몸입 다. 거기서 ‘마지막 한 닢까지’ , 그리스식으로 해 ‘단돈 한 푼까지’ 갚지 않으면 결코 나오지 못할 몸입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설교 12
하느님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기
정신과 영을 새롭게 하여(에폐 4,23).
그러니 침묵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에 대하여 마구 지껄이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하느님에 대하여 지껄이는 만큼, 여러분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 흠이 없기를 바란다면, 하느님에 대하여 떠들어 대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모든 지식 위에 계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알 수 있는 하느님이라면, 나는 그를 하느님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이 그분에 관해 무언가를 안다고 해도, 그분은 여러분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전혀 아닙니다. 이렇게 하느님에 관해 무언가를 알겠다고 수선을 떨다가는 완전한 무지에 빠져 들고 말 것입나다. 이렇게 하다가는 짐승과 같은 존재의 상태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야말로 금수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짐승이 되고 싶지 않거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에 관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짐승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여러분이 물으신다면, 나는 여러분의 “여러분 됨”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 속으로 가라앉게 하고 흘러들게 하라고 충고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여러분 됨과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 “나 됨”이 될 것이고, 여러분은 그분과 함께 그분의 변함없는 존재와 그분의 이름 없는 무를 영원히 알게 될 것입니다. (267)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노는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대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었고 사람들을 사로잡는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개인적으로 간절히 원한 것은 조용한 곳에 물러나서 고요히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겸손한 자세로 고요히 살아가는 삶의 형태가 바로 신앙을 생활로 드러내는 것이라 여겼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는 이교도에게 다음과 같은 대답을 했다.
“만약 당신이 나에게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다면, 나는 겸손 속에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나에게 다시 한번 더 묻는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겸손 속에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당신이 같은 질문을 아무리 많이 되풀이한다 하더라도 나 역시 여전히 겸손이라는 대답을할것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끝없는 영광과 위대하심이 겸손 속에 자신에게 와 닿는 것을 안 순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신앙을 갖게 된 자신의 개인적 과정에 대해 고백했다. 겸손은 그가 언제나 관심을 둔 주된 테마였다. 그가 겸손 속에 깊이 빠져 들면 빠져 들수록 하느님의 큰 뜻 앞에 무릎을 꿇고 겸손하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결코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분이시고, 인간이 구원될 만한 일을 스스로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은총으로 인간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분이며, 또한 인간을 단죄하기도 하는 분이다. 그는 생애의 말기에 이르러 다시 젊은 시절에 가졌던 마니케이즘적인 비관주의와 음울함에 빠져 들었다. 그가 그리스도교 개종한 이후 가졌던 낙관주의적인 자세는 어디로 갔는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모든 것이 음울한 진지함으로 변화되고 말았다.
아우구스티노의 의미와 영향에 대해 언급하는 일은 너무나 방대한 작업이 될 것이다. 그는 서방세계의 사상 어디에나 존재한다.(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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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5.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 12,56)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인 「현대세계의 사목헌장」 4항에 보면, 『교회는 모든 세대를 통하여 그 시대의 특징을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그것을 해명해 줄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세의 인생과 후세의 인생 자체의 의의와 그 상호 관계에 대하여 사람들이 품고 있는 끝없는 의문에 그 세대에 알맞은 방법으로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바라본 이 시대는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는데, 그 특징은 바로 심각하고도 신속한 변화로 인해 전 인류공동체 삶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는 종교 생활에도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한 편에서는 심각한 위기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현대 세계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분별하며 해석하고 복음의 빛으로 판단함으로써 계시된 진리가 항상 더욱 깊이 알려지고 더 잘 이해되고 더욱 적절히 표현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하느님 백성 전체의 의무이며 특히 사목자들과 신학자들의 의무이다.』(사목44항)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당신의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당신의 파견 사명을 시작하면서 이사야 예언서 인용해 선포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4,21)하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곧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오늘과 더불어 모든 인류의 실존은 역사의 새로운 시간으로 돌입하였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시간, 오늘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 결정적인 시간이 되는데 그 까닭은 바로 이 시간과 더불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기 때문입니다.”(루11,20)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나라의 완성을 위해 동시대의 징표를 파악하고 그에 상응한 올바른 판단과 더불어 해결책을 탐구하고 찾아야 합니다.
“아빠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통하여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 즉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땅과 하늘의 징조는 물론 시대의 징표를 이해하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10,23-24)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한 예언자와 임금들은 단지 그 시대의 예언자와 임금이 아닌 모든 시대의 관점에서 볼 때 과거의 사람들, 낡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부류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동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동시대의 사람들과 전혀 다른 관점에서 시대 징표나 시대정신을 읽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부류를 지칭하는 것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그들은 자기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기에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영적인 귀머거리(=청각장애인)이고 장님인 셈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판단에서 나온 그들의 해결책이나 처방은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늘 상 공허하고 임시방편적인 처방일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시대 정신에 입각해서 새로운 마음으로 접근하고 대화하고 소통하려고 하지 않은 채 자신들만의 낡은 시대정신이나 역사의식을 고집하고 강요한다면 더 깊은 불화와 불의 그리고 부정이 만연되어 더 큰 분열을 초래하리라 봅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로 인류는 분명 새로운 시간을 맞고 있으며, 그에 따라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습니다. (마태9,16참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징표를 아는 제자들에게 곧 들이닥칠 마지막 날에 대하여 준비하고 기다릴 것을 거듭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스스로 시대의 징표를 읽고 풀이하지 못하고 단지 틀에 박힌 시대의 징표를 제 방식대로 읽고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의 견해를 자신들의 생각인 양 알고 살아가는 우매한 군중(?)을 보시고 한탄하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그때도 가짜 뉴스가 있었나 봅니다. 지금은 가짜 뉴스가 너무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당시도 지금도 군중들은 상식적으로 구름과 바람의 변화를 보고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정작 중요한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했던 것입니다. (12,54.55) 예수님께서 여러 곳에서 여러 차례 많은 가르침과 기적을 통하여 시대의 징표를 알려주고 보여 주었지만,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볼뿐 그 깊은 의미나 뜻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당대를 살았던 군중들과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시대는 다르지만, 동일한 문제는 바로 보고 들은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참된 들음과 스스로 생각함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마치 타인의 생각이 자신의 고유한 생각인 양 앵무새처럼 말할 뿐, 하느님 앞에 앉아 세상과 타인 그리고 자기 내면의 소리를 복음에 비춰 깊이 듣고 이를 기도를 통해서 내면화하지 않기에 헛소리, 뜬 소리 그리고 잡소리를 전달하고 퍼 날라다 댈 뿐입니다. 그러기에 오히려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그들의 무지입니다. (11,16)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요나의 기적, 즉 회개의 설교 외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으며(11,29-30), “오히려 너희는 그분의 나라를 찾아라.”(12,31)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이나 시선, 복음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우리 시대의 징표를 읽고 올바른 판단을 앞세워 그에 따른 올바른 행동으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12,57 참조) 나부터 먼저!! 과거 우리 자신들이 올바르게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하고 그에 따른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도 못하고 실천하지 못함으로 동시대의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고 거짓된 가르침을 했다면 이제라도 늦었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서둘러 사죄하며 화해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늦기 전에, 그러기에 더 이상 미뤄서는 아니 됩니다. 오늘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우리 모습을 보다 있는 그대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자연의 변화와 시대의 징조까지도 정확하게 알고 판단을 내리는 능력을 겸비하고 있다고 해도 하느님 앞에 선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더 잘 아는 만큼 우리는 더 하느님의 모습으로 변화되고, 변화된 그만큼 우리의 말과 행동이 인생의 의문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나아갈 길을 보여 주리라 믿습니다. “주님, 이들이 당신 얼굴을 찾는 세대이옵니다.”(화답송 후렴/시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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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5.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우물쭈물하다가는 정녕 너도 나도 다 /
박윤식 [big-llight] 241024 20:34 ㅣNo.177031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온다면, 곧 ‘비가 오겠다.’ 라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라고 말한다. 그리된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을 모르느냐?”’ 갈릴래아 호숫가에 살던 그들은 날씨에 관심을 가졌고, 또 경험으로도 날씨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날씨는 예측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자신의 구원인 이 시대의 징조를 제대로 모르고 엉뚱하게 사는 이들을 경고하신다. 사실 그들은 새 시대를 알지 못하고 옛 시대 기준과 잣대를 예수님께 들이대면서, 율법과 계명을 어겨댄다고 따져댔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질책하셨다. 예수님은 날씨가 어떠할지 알아보는 것 보다 하느님 뜻을 아는 게 더 중요하단다.
이렇게 당신께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시도 때도 없이 여러 징표로 보여 주셨지만, 군중은 아직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게다. 더욱 안타까운 건, 주님을 거부함으로써 그들의 멸망이 곧 닥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고 촉구하시면서, 길지 않는 인생이기에 더 늦기 전에 바로 회개를 하라신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자연의 징조는 그토록 잘 알면서도, 시대를 풀이할 줄 모르는 그들에게 위선자라고 하신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지식은 있으되 삶의 지혜에 무지한 이들을 딱하게 여기시고 윤리적 책임을 외면하려는 그들 마음속의 유혹을 날카롭게 벗겨 내셨다. 우리 곁에도 돈과 물질이 넘쳐 나고 있지만, 내일은 아무도 잘 모른다. 너무 많은 이가 애정 결핍에 빠져있다. 이처럼 이것은 답이 아닌, 갈증만 심해질 뿐이다. 사랑하는 삶이 정도의 길이요, 그 삶은 오로지 성실로만 이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생전에 자기 묘비에 새길 말을 이렇게 미리 정해 놓았단다. “주어진 인생, 이처럼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우리 역시 이러저러한 이유와 핑계를 여러모로 대어가며, 지금 여기서 당장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렇게 그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면 결국은 후회하리라.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인생살이에서, 그분 몰라보고 지내는 것만큼 후회스러운 일은 결코 없을 게다.
신앙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주저하고 망설이면서,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태도로는 하느님을 알 수도, 신앙을 실천할 수도 없을 게다. 마음을 열어서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용기를 내어 신앙을 실천해야만 하리라. 그래야 신앙의 삶에서 앎이 깊어만 가고 신앙생활이 어떤 맛인지를 알 수가 있다. 용기를 내어서 주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하루가 되어야만 하겠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삶의 근원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있다고 말씀하심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혜는 어쩌면 너무나 단순하다고 할게다. 그러하지만 늘 현실에만 안주하고 보이는 것만 마지못해 따르려 한다. 그러나 삶에는 보이지 않는 게 훨씬 더 많다. 깨달음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 참으로 많다. 사랑도 어쩜 깨달음이다. 아픔 없이 이 깨달음에 어찌 도달할 수가? 치유의 지름길은 사랑이다. 자주 만나는 이웃에게 먼저 실천해야만 할게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정녕 너도 나도 다 떠난다. 시대의 뜻은 지금 당장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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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5.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지난 며칠 동안의 복음과 마찬가지로 오늘 복음도 마지막 날이 가까웠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합니다.
시대의 표징들에 마지막 날이 머지않았음을 알아보고, 그 심판의 때가 오기 전에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말씀과 관련하여 보았던 것처럼 언제 마지막 날이 오든 미리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데, 저마다 그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내용은 세상의 마지막 날에 적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마다의 죽음에도 적용됩니다.
나의 죽음은 나에게는 종말입니다.
내 죽음의 때가 언제일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이론상으로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잊고 삽니다.
세상 종말을 잊고 사는 것과 비슷합니다. 영정 사진을 미리 준비하면서 장수 사진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실제로는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면서도 그 말을 입에 담기가 불편하여 죽음을 미루는 듯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날은 분명히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고, 죽음과 마지막 날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도 그만큼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여 화해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 마지막 날은 도둑처럼 찾아올 것입니다.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때로 연옥에 관한 말씀으로도 풀이됩니다.
“마지막 한 닢까지”(루카 12,59) 갚아야 할 그때를 생각하며 아직 시간이 있을 때, 내가 살아 있고 또 화해를 하여야 할 사람이 살아 있을 때 화해하여 죽음을 준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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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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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5.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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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5.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내게 찾아온 은총의 병고, 은총의 실패, 은총의 노년기!
베트남의 가경자(시복 전 단계)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의 감사 기도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주님, 저를 당신 자녀로 선택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에게 마리아를 어머니로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에게 교회를 통해 선교 사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에게 당신의 신비를 열어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를 도와주는 여러 형제자매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 길을 가로막고 저를 힘들게 하는 이들한테도 감사합니다.
그들은 저를 거룩하게 되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를 이 은총의 독방으로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쓴잔을 제게 나누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여러 구절 중에 ‘은총의 독방’이라는 표현이 제 마음에 크게 와닿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독방은 아파트 안에 나 혼자 쓰는 방이 아니라 교도소 안에서 특별 관리 대상자가 쓰는 독방입니다.
독방! 하니 세상 편하겠네, 생각하시지만, 완전 반대입니다.
세상과 사람으로부터 철저하게 단절되어 사무치는 외로움 속에 살아가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추기경님은 그냥 독방이 아니라 은총의 독방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그분은 온전히 자기 자신과 세상을 초월하셨던 분입니다.
온전히 하느님과 일치 안에 살아가니, 머무는 곳이 어디든지 천국을 사셨던 분입니다.
추기경님의 표현을 우리도 자주 사용해야겠습니다.
내게 찾아온 은총의 병고, 은총의 실패, 은총의 노년기, 은총의 죽음, 나와 죽어도 맞지 않는 은총의 그분...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도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차가운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그는 부단히 초대 교회 교우들을 대상으로 편지를 쓰셨는데, 이런 표현이 우리의 눈길을 끌게 합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 4,1~3)
바오로 사도는 그냥 수인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주님 때문에 수인이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주님을 위해 일하다가 수인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지금 주님 때문에 갇힌 것을 크게 기뻐하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통과 역경이라 할지라도 아무것도 아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새벽부터 캄캄해질 때까지 하루 온종일 빡센 하루 일과를 보낸 지금, 별것도 아니지만, 주님을 위한 하루였음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기쁘게 잠자리에 들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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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5.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법정으로 가는 길에서 화해하도록 힘써라.
예수께서는 날씨를 미리 알고 폭풍을 예고할 수 있는 사람이면, 장차 일어날 중요한 일을 마음의 눈으로 보라고 하신다. 중요한 일이란 마지막 시대에 만인의 구원을 위해 당신을 희생으로 바치시는 것이다. 위대하고 값진 구원의 수난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루어진다. 이제 그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고 그들은 넘치는 행복을 누릴 것이다. 복음의 재판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님께서는 우리 목숨이 다하기 전에 죄와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지은 자들이다. 아직 재판관에게 가기 전에, 즉, 살아있을 때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를 온갖 빚과 형벌에서 자유롭게 해 주고, 온갖 두려움과 번민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더러움을 씻지 않으면, 재판관 앞에 서서 판결을 받고, 피할 수 없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 합당한 벌을 받는다.
살아있는 동안에 죄를 벗어버리고 변화되지 않으면 우리의 죄가 오백 데나리온이건, 오십 데나리온이건 탕감받을 자격이 없다. 우리는 감옥에 갇혀 징벌을 받는 것으로 빚을 갚아야 할 것이다. 거기서 마지막 한 푼까지 갚지 않으면 결코 나오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변화를 우리가 살아있을 때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 형벌을 면해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다. 우리가 변화하지 않아 하느님께 죄를 짓게 되면 우리를 재판관에게 넘겨 재판관이 우리를 옥리에게 넘기게 하는 고발자는 누구일까? 우리는 빨리 그를 찾아 합의를 봐야 한다. 그 고발자는 바로 하느님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올바로 살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 죄를 즉 빚을 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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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5.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양심: 원인 모를 불안 해결법
오늘 예수님은 세상 것들은 예표를 보고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면서도 인간 일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예측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작은 잘못이 쌓이는데도 자기 잘못을 바꾸려 하지 않으면 결국 큰일을 벌이고야 만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방치하기 때문에 큰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에게 ‘지금 이대로 계속 간다면~’이란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할 것입니다.
세상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순간에 미쳐서 큰 범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작은 구멍이 큰 둑을 허물어뜨리듯이 큰 잘못도 다 작은 것들이 누적되어 일어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점점 나빠지는 자신의 상태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에 있습니다.
왜 알아채지 못할까요?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개구리를 물에 넣고 조금씩 끓이면 개구리는 온도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죽고 만다고 합니다.
그 변화를 느껴 재빠르게 물 밖으로 뛰어나오면 살 것이지만 작은 변화는 좀처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개구리에게 온도를 느끼는 피부가 없을까요? 있습니다.
분명 그것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을 것입니다.
자동차에는 많은 계기판이 있습니다. 연료게이지도 있고 알피엠, 또 속도게이지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로 보는 것은 속도게이지입니다.
다른 것들은 가끔만 보면 됩니다.
그러나 연료게이지만 보다가는 속도에 무감각해져 큰 사고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중요한 것은 이 말씀입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사실 우리가 마지막 심판 때 주님 앞에 나아가기 전에도 우리가 천당 갈지, 지옥 갈지 이 세상에서부터 심판해 주는 우리를 ‘고소한 자’가 있습니다.
재판에서 말하자면 구형을 때리는 검찰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먼저 검찰과 협의가 이뤄지면 재판은 하나마나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부터 우리를 고소하는 검찰이 누구일까요?
그 고발하는 자는 바로 ‘양심’입니다.
양심은 우리가 설계도대로 살아가는지 심판하는
측정기구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가 병이 들어도 아프지 않은 상태와 같습니다.
양심이 심판하는 기준은 마지막 때 예수님께서 심판하시는 기준과 같습니다.
그 심판기준은 그분의 계명입니다.
곧 이웃 사랑입니다.
사람은 이웃 사랑의 계명과 어긋날 때 불안해집니다.
그리고 이 불안은 심판 때 구원을 못 받는 것으로 확증 받게 됩니다.
얼마 전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오신 분을 만났습니다.
70세가 넘어서 처음으로 가신 것입니다.
많은 준비를 하였지만, 처음엔 몸도 아프고 40년 이상 껴 온 반지는 물론 많은 물건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차분해졌습니다. 이 길에서 버리게 되는 것은 결국 ‘불안’이라고 합니다.
가장 혼자가 되는 시간임에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가장 강렬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힘이 들지만, 나중에는 이 길이 끝나는 게 아쉽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평화를 가진 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나눔’입니다.
산티아고 성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서 무언가 쓸모없는 것까지 지고 가는 게 무겁고 어리석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숙소마다 그곳에 자고 간 이들이 필요 없는 물건들을 두고 간 것이 많다고 합니다.
어떤 스님은 빈손으로 와서 버리고 간 물건들만 사용하며 끝까지 완주하였다고 합니다.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의 목적지는 십자가의 예수님이 아닙니다.
지옥입니다.
그럴 때 양심에서 불안한 감정을 내보냅니다. 이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양심의 문제와 심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고 유의배 신부의 방 안에 붙여논 글을
다시 상기해야 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죽을 때 두려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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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5.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 12,54-56)”
이 말씀은, 자연현상을 풀이하는 일은 잘하면서
그 자연을 만드신 하느님의 뜻은 왜 모르느냐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이 시대’는 ‘메시아 시대’와 ‘종말’을 뜻하고, 동시에 ‘회개해야 할 때’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라는 말씀은, “메시아 시대와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과 지금 당장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하느냐?”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많은 것을 안다고 잘난 체 하면서
‘정말로 알아야 할 것’은 외면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의 뜻’이고,
‘정말로 실천해야 할 것’도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회개해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지혜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그 안에 들어찬 사람들은 본디 모두 아둔하여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지혜 13,1).”
“그러나 그들이라고 용서받을 수는 없다.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지혜 13,8-9)”
실제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정말로 알아야 할 것’을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씀은, 성서학과 신학을 잘 알고 있다고 잘난 체 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성서학과 신학은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학문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생활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것으로 그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 많이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성서학과 신학 지식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앞의 10장에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방법을 묻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5ㄴ-28)”
“그렇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네가 알고 있는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라는 말씀은, ‘실천’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성경과 율법과 신학과 이스라엘 역사 등을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 지식은 영원한 생명과는 아무 상관없는 ‘죽은 지식’이 될 뿐입니다.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루카 12,57-59).”
여기서 ‘올바른 일’은 ‘회개’를 뜻하고, ‘판단’은 ‘실천’을 뜻합니다.
그래서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라는 말씀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라는 말은, 죄를 지은 사람 자신이 능동적으로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고소한 자’는 하느님으로 해석됩니다.
죄는 하느님께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재판관이신 분이시고, 동시에 죄인들을 기소하는 검사이신 분입니다.)
‘고소’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요한 5,45-46).”
이 말씀에서 ‘모세’는 모세가 기록한 ‘하느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따라서 앞의 ‘고소한 자’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죄 지은 사람 자신의 ‘양심’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고소한 자와 ‘합의’를 본다는 말은 회개를 뜻합니다.
‘도중에’는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기 전에’입니다.
인생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는 여행입니다.
회개하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이 여행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 가는 여행입니다.
그러나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고소당해서 재판관에게 끌려가는 여행이 될 것입니다.
(당사자는 그것을 모르거나 의식하지도 않으면서 살겠지만......)
어떻든 회개는 이 여행이 끝나기 전에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행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으니, 지금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죄인의 멸망을 바라시지 않고 회개해서 살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에제 33,11)”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회개해서 살 기회를 주십니다.
누구든지 회개하면 살 수 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보속을 완전히 마칠 때까지 연옥에 있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연옥도 지옥 못지않게 고통스럽고 무서운 곳이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는 곳입니다.
지옥은 모든 것이 끝난 곳, 보속을 할 수도 없는 곳, 희망이 전혀 없는 곳, 완전한 절망과 후회만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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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5.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2,54-59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어르신들은 오랜 경험과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지혜’가 깊으신 분들입니다. 그 지혜는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사람들이 억지로 머리 속에 집어넣는 ‘지식’과는 다르지요. 제비가 낮게 나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올 것을 압니다. 개미가 작은 돌이나 나무가지들을 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곧 장마가 올 것을 압니다. 바람의 방향이 남에서 북으로 바뀌는 것을 보고 곧 닥쳐올 무더위를 준비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오랜 시간 동안 자연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 하나도 놓치지 않고 관심 있게 지켜본 덕에 알게 된 것들입니다. 그 변화가 어떤 의미인지를 아는 이에게는 그것이 곧 닥쳐올 일들을 예상할 수 있게 만드는 ‘표징’이 되는 겁니다.
그런 모습은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도 비슷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자연에서 표징을 읽어내는 그들의 모습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변화의 조짐을 읽어내고 미리 대비하는 것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님에도 비판하시는 것은 그들이 당장 자기들의 이익과 연결되는 자연의 표징을 읽어내는 데에만 신경을 쓸 뿐, 정작 자기들이 전념해야 할 일에는, 다시 말해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읽어내고 대비하는 데에는 무관심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누리게 해주는 ‘지식’은 열심히 공부하면서, 정작 자기들의 구원에 직결되는 구원의 ‘진리’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기적들과 수많은 비유 그리고 가르침들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자기들이 원래 살아왔던 그대로, 하느님과 별 상관없이 살았던 예전의 생활방식대로 살고자 했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익숙하고 편안해진 세상의 방식을 불편하고 힘든 하늘의 방식으로 바꾸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하늘의 방식으로 살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이익과 즐거움을 포기해야만 했기에, 더 나아가 큰 불이익과 희생까지 감수해야만 했기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는, 즉 구원의 새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는 철저하게 무관심했던 겁니다.
그러나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듯’, 내가 모르는 척 외면한다고 해도 하느님 나라는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되었으며 결국엔 온 세상이 하느님의 뜻과 다스림이 온전히 실현되는 그분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시대를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합니다. 주님이 강조하신 올바른 판단이란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주님은 내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기를 바라실까?’를 기준으로 심사숙고하여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판단한 바대로 실행에 옮겨야겠지요. 그것이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며 그 나라의 완성을 희망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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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5.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사도 바오로는 수인의 처지에서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을 전합니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 4,2-3)
서로의 관계에서 겸손과 온유만큼 좋은 처방이 있을까요?
믿음의 공동체의 기초가 되는 부부의 관계에서 겸손하고 서로 상대를 배려하는
온유의 마음이 있다면 거기에다가 때로 받아들이기 힘든 순간에 인내심을 갖고
참아 줄 수 있다면 원만한 사랑의 관계를 이어갈 수 있겠지요.
서로 상대보다는 나의 의견을 고집하고 상대를 무시하거나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기 시작하면 서로의 관계는 깨지고 말지요.
사도 바오로는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이어서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위해서 노력하라는 당부를 또한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아름다움은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로 하나로 되는
일치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땅과 하늘의 징조를 읽듯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판단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서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슬기로운 처신을 하며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젊은 사람들보다 나이 든 사람들이 더 현명한 것은 그만큼 세상을 살면서 깨우치는 것이
많기 때문이지요.
한 삶을 하루에 비유해서 설명하지요. 그리고 이 세상의 마감을 맞는 사람들도
하루 아침에 하느님께서 통보하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 건강의 이상을 통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을 통해서, 신록이 어느 날 붉은 단풍으로 변한 것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봄에 연두빛 새싹이 어느새 여름의 눈부신 신록으로 그러다가 가을이 오면 온통 단풍으로,
그리고 그 곱던 이파리는 낙엽으로 겨울이 오면 이리저리 쓸려서 사라지는 것이지요.
단풍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주검의 색깔을 아름답게 수 놓는다는 것입니다. 떠나는 것이
슬픔도 서글픔도 아닌 아름다움으로 마감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미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오늘의 소중함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내가 겸손하지 못했고 너그럽지 못했다면 오늘 나는 이웃에게 친절하고 따뜻한
말 마디로 온유의 꽃, 아름다움을 피울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의 상처를 남기는 못된 말을 했다면 오늘은 인내로서 부드럽고 아름다운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비단이 곱다 해도 말처럼 고운 것이 있으랴?’라는 말이 있지요.
하느님께서 한 마디의 말씀으로 놀라운 창조를 이루셨듯 우리도 소중한 말 한마디로
이웃에게 기쁨과 평화를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 온유, 인내를 통하여 평화의 가정을 이룩하고 우리의 아름다운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어제는 몰라도 또 내일은 불확실해도 오늘은 내가 못나누던 아름다움을 이웃에게 선사할 수
있습니다.
내일은 어떻지 몰라도 오늘은 사랑하는 이웃에게 멋진 꽃을 멋진 한 마디를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짜투리의 작은 소중함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한다.’라는 말도 오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하느님의 나라, 종말의 날이 언젠가는 온다 해도 오늘 우리는 칭찬, 남을 위한 기도,
격려, 하소연 듣기를 통하여 소중하고 아름다움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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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5.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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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5.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어느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물으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56)
질문 안에는 질문자의 의도와 바람이 들어 있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속의 사정에는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면서 정작 그 안에서 움직이는 하느님의 뜻에는 눈을 감아버린 이 시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계십니다.
"땅과 하늘의 징조"가 자연 현상처럼 외부적으로 명백히 보여지는 추이를 가리킨다면, 그에 대비되는 "이 시대"는 그런 현상들 밑으로 유유히 흐르는 하느님의 섭리일 겁니다. 전자는 육신의 눈에 비치는 사실이고 후자는 신앙의 눈에 보여지는 진실입니다.
그저 보여지는 현상에 기대어 제 힘만 믿으며 살아가는 이는 그 너머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희로애락은 손에 쥔 권력이나 쌓이는 재산, 남 보기 그럴듯한 인맥에 쉽게 좌지우지 됩니다. 그들이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이유는 경박한 이기주의와 탐욕이 옳음도 진실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부르심 받은 우리의 몫을 제시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에페 4,1)
부르심을 받은 이의 삶은 육에만 의존해 살아가던 때와는 사뭇 달라집니다. 무엇보다 "시선"에서 큰 차이가 납니다. 부르심 받은 이들은, 자기들만의 성을 쌓고 배를 채우기 위해 사실과 현상에 고정하던 시선에서, 사건과 사람,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계획을 읽고 공동선을 열망하는 시선으로 건너간 사람들입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은 내적 시각과 신앙의 시선으로 만물을 바라보며 묵묵히 제 몫을 다합니다. 사도가 제시하는 "겸손과 온유, 인내와 사랑, 평화와 일치"의 덕목들은 세속의 눈에는 약하고 보잘것없지만, 영혼의 눈에 아름답고 귀하고 소중합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에페 4,6)
주님은 이처럼 우리를 둘러싼 만물의 깊이 안에 현존하십니다. 현상에만 그치는 시선으로는 만물을 꿰뚫어 움직이시는 하느님을 뵙기 어렵지요. 이 시선은 부르심을 받아 불러 주신 분께 합당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허락된 선물입니다.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복음 환호송)
하늘 나라의 신비는 세속적 수완과 처세에 기대어 사는 이들이 아닌, 철부지들에게만 열리는 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밖에는 기댈 존재가 없는 가난하고 단순한 이들이고, 그분에게서 믿음을 거둘 수 없을 만큼 절박한 작은이들이지요. 주님은 결코 이들의 시선과 바람에 실망을 안기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의 품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며 나아가고 있는지요? 영혼의 시력은 어느 정도인지요? 우리 눈에는 어디까지 보이는지요? 그리고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요?
오늘 눈에 보이는 모든 만물과 현상 안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기를, 사건과 관계 속에서 그분 뜻과 계획과 섭리를 깨달을 수 있기를, 이 모든 것 안에 가득 차 있는 사랑을 캐내어 품은 우리 자신이 또다른 사랑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랑의 신비를 깨달은 철부지에게 "시대는" 저절로 풀이되는 열린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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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5.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복음의 본질로 돌아서도록 간구하는 삶
<2024.10.25> 아침을 여는 묵상 (애 4:1~10절)
❝복음의 본질로 돌아서도록 간구하는 삶❞
❚ 무너진 교회의 영광을 다시금 회복하기 위해 복음의 본질로 다시 돌아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 예루살렘의 형편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 예루살렘의 자녀가 비참하게 굶주립니다(1~5절).
‘슬프다’로 시작을 합니다. 과거와 현재를 대조하며 시인은 탄식합니다.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 되고, 성소의 돌들이 거리에 쏟아져 내린 모습들로 인하여 탄식합니다(1절). 금과 순금은 원래 변하지 않는 것들인데, 변질되었다는 것은 충격 그 자체입니다. 성소의 돌들이 거리에 쏟아져 내렸다는 것 역시 커다란 수치입니다. 아울러 시인은 순금만큼이나 보배로웠던 시온의 아이들이 질항아리로 여겨진 것에 대해 비통해합니다(2절). 시온의 아이들이 당하는 고통을 외면하는 부모들이 들개들보다 못한 광야의 타조로 비유됩니다(3절). 타조는 본능적으로 모성애가 없는 동물로 이스라엘 부모들의 잔인함을 상징합니다. 젖먹이는 목말라 혀가 입천장에 붙을 정도였습니다(4절). 지난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부유하게 살았던 아이들이 거름더미를 안을 정도로 비참한 상태로 전락한 모습을 보여줍니다(5절).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지금의 현실은 참혹함 그 자체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예루살렘 성전이 처참하게 파괴되어 버린 비참한 현실에 시인은 애통해 합니다.
주님의 영광이 떠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님으로부터 은혜와 생명력을 공급받지 못한 채, 영적 굶주림에 빠지게 됩니다. 주의 말씀과 은혜로 듣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면 영적 기갈에 빠져 고통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력이 없고, 감격과 감동도 없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떠난 교회 공동체는 참혹한 현실에 처하게 됩니다. 어른들의 잘못과 무책임함이 보호받아야 할 대상인 어린 아이들이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 채, 미래가 없는 비참함 상황으로 몰아가고 말았습니다. 기성세대들의 잘못된 신앙관과 자기만족에 빠진 신앙생활이 작금의 교회가 뿌리가 뽑힌 나무처럼 점점 말라비틀어져 감으로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거룩한 영적 부담감을 갖고서 교회가 생명력을 잃지 않아 우리의 다음 세대들을 품어 미래에 대해 영적으로 불태울 수 있도록 신앙의 모범을 보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예루살렘의 죄악이 소돔보다 무겁습니다(6~8절).
예루살렘이 이와 같이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 시인은 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기 때문(6절)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전에 누렸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존귀함을 상실해 버렸고, 눈보다 깨끗하며, 청옥 같았던 몸이 그 얼굴이 숯보다 더 검어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살갗과 뼈가 서로 달라붙어 막대기처럼 마른 모습(7~8절)으로 변하였다고 탄식합니다.
교회의 부패와 타락은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처럼 지금의 교회가 세상 속에 아무런 영향력을 나타내지 못한 안타까운 모습을 봅니다. 교회가 세상을 염려해야 할 터인데, 거꾸로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고 있는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비추는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맛 잃은 소금이 밖에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히듯 세상으로부터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고 나는 깨끗하고, 정직한가? 라는 질문 앞에 당당하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다시금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서야 할 때임을 인정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서는 길만이 다시금 주님의 은혜와 생명력을 누리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습니다.
➲ 예루살렘의 형편이 끔찍하게 변했습니다(9~10절).
예루살렘의 멸망 후에 사람들이 겪는 굶주림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으면, 차라리 칼에 죽는 것이 낫다(9절)고 말합니다. 그 참혹함이 얼마나 더 했던지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도다’(10절)... 예루살렘의 상황이 끔찍하게 변했음에 시인은 탄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떠난 교회는 은혜와 생명의 역사가 끊어졌기에 사랑이 아닌, 분열과 다툼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굶주림에 빠져 있는 자들이 다시금 일어설 수 있도록 성령이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미움과 다툼으로 서로 물고 먹는 추악한 모습들이 교회 안에서 사라지도록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이 우리와 교회를 향한 시선을 옮기셔서 하늘의 문을 닫으시지 않도록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도록 간절히 기도하며 살아갈 뿐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를 짊어짐으로 영원한 영광과 기쁨을 사모하는 삶이 되도록 말씀만을 붙잡고 살아갈 수 있기를(애 4:1~10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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