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소녀를 위한 노래
랭스턴 휴즈 (송기호 역)
남부의 남쪽 깊은 곳
(내 가슴이 무너진다)
그들이 내 젊은 흑인 연인을
십자로 길 나무에 매단다.
남부의 남쪽 깊은 곳
(멍든 몸 공중에 높이 걸리고)
내가 백인 예수에게 묻는다
기도가 무슨 소용이냐고.
남부의 남쪽 깊은 곳
(내 가슴이 무너진다)
사랑은 옹이 많고 헐벗은 나무 위에 걸린
벌거벗은 그림자
----송기호, {신화와 문학에 뿌리내린 나무 이야기}(지혜)에서
인간의 언어는 천변만화하는 요술쟁이이며, 때로는 모든 악몽을 길몽으로 바꾸고, 다른 한편, 모든 길몽을 악몽으로 둔갑시키는 재주를 지녔다고 할 수가 있다. 자본가에게는 축복의 말이 노동자에게는 저주의 말이 되고, 어떤 범죄자에게는 사형장치에 불과한 십자가가 어떤 신도들에게는 너무나도 고귀하고 거룩한 성상이 된다.
십자가는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가장 사악하고 흉악한 범죄자를 처형하는 사형장치였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의 죽음 이후, 예수를 상징하는 가장 거룩하고 신성한 성상이 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인도주의 입장에서는 그가 무슨 죄를 지었든지 간에 곧바로 죽여버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피해자의 원한 맺힌 복수심에 의해서 너무나도 잔인하고 끔찍한 사형장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인간을 맨 처음 십자가에 못을 박고 매달아 죽인 이후부터 대부분의 인간들은 십자가라는 말만을 들어도 소름이 오싹 돋고 밥맛을 잃었다고 한다.
예수는 이 세상에 태어난 적도 없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적도 없다. 예수는 유태교에 반하여 기독교인들이 창출해낸 가짜 인물이며, 따라서 유태인들은 기독교인들에게 그처럼 엄청난 고통과 처형을 당하고도 여전히 예수의 역사성과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는 어디까지나 기독교인들이 조작해낸 가짜 인물이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고 죽어갔다는 것은 시뻘건 거짓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전지전능하며 그 모든 것을 다할 수가 있었는데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이 그것이며, 부활과 함께 영원불멸의 삶이 약속되어 있는데도 현재까지 재림하지 않고 있는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랭스턴 휴즈의 [흑인 소녀를 위한 노래]는 흑인 노예들의 참상을 고발하고 있는 시이며, 너무나도 끔찍하고 처절한 마음으로 통곡을 하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모든 분노는 강력한 외침이며 만인들을 불러 모을 수도 있지만, 통곡은 그 분노 이전에 우리 인간들의 마음과 행동을 사로잡는다. “남부의 남쪽 깊은 곳” “그들이 내 젊은 흑인 연인을/ 십자로 길 나무에 매”달 때에도 “내 가슴은 무너진다.” “남부의 남쪽 깊은 곳” “멍든 몸이 공중에 높이 걸”릴 때에도 “내 가슴은 무너”지고, “사랑이 옹이 많고 헐벗은 나무 위에 걸린/ 벌거벗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 때에도 “내 가슴은 무너진다.”
예수는 백인 예수이고, 백인 예수가 구세주의 탈을 쓰고 있지만, 그것은 백인들의 대사기극에 지나지 않는다. 백인 예수는 전 인류의 치욕적인 노예제도를 창출해내고, 이 노예제도를 통하여 오늘날의 서양과 미국의 문명을 창출해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목화밭과 방직공장, 사탕수수농장과 수많은 목장들, 그리고, 또 수많은 강제노역장과 성적 유린과 인권 유린 등이 너무나도 파렴치하고 뻔뻔스럽게 ‘예수의 이름’으로 자행되어 왔던 것이다.
펄펄 끓는 가마솥에 삶아버리는 형벌과 삽과 몽둥이로 때려 죽이는 형벌, 총과 칼로 쏴죽이는 형벌과 천길 벼랑끝에서 뛰어내리게 하는 형벌, 전기와 물고문으로 죽여버리는 형벌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형벌 등--. 예수는 천사가 아닌 악마였으며, ‘백인 예수’에 대한 기도는 ‘흑인 유죄/ 백인 무죄’의 노예제도와 그 인종차별에 대한 감사의 기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더 많이, 더 빨리, 우리 흑인들을 성적으로, 육체적으로 짓밟고 모든 인간적 가치와 노동력을 착취해 달라고 하는 ‘백인 예수’에 대한 기도----.
랭스턴 휴즈의 [흑인 소녀를 위한 노래]는 수많은 흑인 여성들에 대한 ‘진혼가’이며, 더 이상 ‘백인 예수’가 그 천사의 탈을 쓰고 우리 흑인들을 이용하고 착취하지 말라는 노래라고 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