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 14: 19-24
그가 아브람에게
본문에서는 참으로 신비로우신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서 신비로우신 방식으로 멜기세덱을 통하여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브람을 위하여 축복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에 아브람은 자기 신앙고백의 일환으로 멜기세덱에게 그가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드립니다. 이로서 아브람은 하나님을 만복의 근원으로 고백합니다. 반면에 소돔 왕으로부터는 지극히 정당한 것 외에는 결코 취하지 않습니다. 이 같은 일에서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예가 걸린 문제를 신중하게 처리합니다.
1. 본문 19절은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입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와 ‘그가 축복했다’ 는 이 두 문장이 서로 일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기서 모세는 다른 것을 전혀 시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일상적으로 사람들은 서로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차원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그가 여기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그러나 멜기세덱께서는 자기 직능의 권리에 따라서 열등한 자들과 자기 자신에게 복종한 자들을 거룩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면에서 그가 아브람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감히 아브람을 축복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레위인 제사장들은 그 백성들을 축복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축복은 효험이 있으며 재가(裁可)된다는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민6:23). 여기 멜기세덱의 축복은 레위인 제사장들의 모든 축복권이 통합되는 차원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를 예시하는 차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하늘 곧 승천하실 무렵에 손을 들어 벌리시고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자로서 신도들을 축복하셨습니다(눅24:51). 그리고 그때 이 비유의 진리로 그리스도께서 과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멜기세덱에서 어렴풋이 나타났던 교회를 축복하는 임무는 하나님 아버지에 의하여 그리스도에게 맡겨졌다는 것을 증명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 본문 20절 상반절은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할지로다” 입니다.
멜기세덱의 계획은 거룩한 아브람을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확증시키고 재가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구별시키시고 그분의 아들로 삼으심으로 하나님이 특이하게 하신 영예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브람을 택해 주신 하나님을 ‘하늘과 땅의 소유자이신 분’이라고 불러서 이방인들의 가공적인 우상으로부터 그를 구별시키고 있습니다. 후에는 정말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다른 칭호를 붙이고 계십니다. 그것은 어떤 특이한 표로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의 허영심 때문에 하늘과 땅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단순히 들을 때 자기들의 공상 가운데서 마침내 몰두되어 자신을 잃어버리는 결과에 이르기까지 계속 방황하며 그것이 절대 그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람에게 알려 주셨으며 그의 믿음이 많은 기적들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창조자의 칭호로 아브람이 경배했던 분이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이 충분히 선포되어야 한다고 멜기세덱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멜기세덱 자신이 그 참된 하나님을 진정하게 예배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지만 영원한 언약에 관하여 그는 아브람을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일종의 재산 상속권으로 아브람이 이 세상에서 혼자 선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한가정과 한 민족에게 거하고 있다는 것을 그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얻은 승리에 대하여 특별한 축하를 첨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 감염된 찬사를 던져 상투적으로 서로의 기분을 부풀게 하는 불경건한 자들 사이에서 곧잘 하는 것 같은 축하가 아니고 멜기세덱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으며 그 거룩한 사람이 취득한 그 승리는 하나님이 은혜로 불러주신 표로서 간주되고 있습니다.
3. 본문20절 하반절은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입니다 이 십일조가 아브람에게 주어졌다고 이해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달리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선언하기를 아브람이 지극히 높은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바칠 때 레위인들이 아브람의 허리에서 십일조를 바쳤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히7:9). 만약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면 그가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주는 것보다 당연히 그것을 받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멜기세덱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께 선물들을 드림으로 그런 첫 번째의 열매로서 자기의 모든 소유물을 하나님에게 헌납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자원하여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쳐서 그의 제사장직을 존경했던 것입니다. 이 일은 그렇게 생각없이 허겁지겁 잘못 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히브리 저자는 여기서 적절하게 추론하기를 이 비유에서는 레위지파에 속한 제사장직이 그리스도의 제사장직보다 하위에 속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유로서는 하나님이 이후에 율법하에서 십일조를 레위인들에게 바치라고 명령하고 계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시대에는 그 십일조는 단순히 감사에 대한 맹세이며 표로서 바쳐진 거룩한 제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노획한 것들의 십분의 일을 바쳤는지 또는 자기가 집에서 소유하고 있는 것들의 십분의 일을 바쳤는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른 사람의 물건을 가지고 아낌없이 썼거나 그가 실오라기 하나라도 건드리지 않겠다고 결심한 노획물들의 십일조를 바쳤을 것이라는 생각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히려 이 십일조가 그의 재산에서 나온 것이라고 추측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이 상상하는 대로 이것이 매년마다 바치는 것이라고는 보지 않고 우리의 판단으로는 그가 멜기세덱을 하나님의 대제사장으로 인정하려는 목적으로 멜기세덱에게 또 한번 이 선물을 헌납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단지 손으로 건네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엄숙한 계약이 있었습니다. 그 계약의 효력은 체결된 직후에 발효되었습니다.
4. 본문 21절은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입니다.
모세는 이전에 살렘왕 이야기로 중단했던 소돔왕 이야기를 다시 계속합니다. 그리고 소돔왕이 아브람을 만나러 나온 것은 그를 축하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적절한 보상을 주려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든 노획물들을 아브람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마치 그는 “사람들만 다시 구출한 것도 막대한 일입니다. 그 나머지 것들은 이것을 되찾아 주신 당신에게 보답으로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에게 그토록 감사한 마음을 보여 주었다는 것은 칭찬 받을 가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에게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사실상 그런 감사 표명은 칭찬 할 가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소박함과 온화함으로 볼 때 그는 마치 쓸모 없는 존재처럼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물건을 빼앗긴 이 사람이 종과 같이 겸허한 감정으로 다른 물건을 다시 찾는 것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포로들과 텅빈 그 도시만 자기에게 달라고 부탁함으로 아브람의 호의를 얻으려고 했을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소돔사람들이 의로운 롯을 교만하게 그리고 경멸하면서 괴롭혔을 때 자기들이 받은 유익에 대하여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입니다.
5. 본문 22절은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입니다.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대응하는 말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아브람의 지식과 그의 사람에 대한 지식이 사물에 대한 것과 함께 드러나고 있습니다.이 고대에 있었던 의식은 맹세의 위력과 성질에 대하여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어서 우리는 하나님을 증인으로 삼고서 그분에게 호소합니다. 또한 우리가 이 맹세를 이행하지 않을 때는 그것을 보복하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에게 호소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상 공식적으로 그들은 투표를 할 때에도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맹세하는 의식에는 그렇게 하는 이유가 각기 달랐습니다. 이 의식으로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진리 수호자와 위증(僞證)에 대한 복수자가 되어 주시도록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그렇게 쉽사리 맹세를 해야 되었던가에 대하여 조금 이상한 듯합니다. 그것은 아브람 자신이 하나님의 성호에 들여져야 할 경건의 정도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성호는 우리가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것을 억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직 꼭 필요할 때만 그 성호를 부르도록 교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그가 맹세한 두 가지 이유를 대답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조변석개의 인간들은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들의 표준으로 곧잘 평가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순수한 주장에는 거의 믿으려 들지 않습니다. 소돔왕도 아브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개입시키기 전에는 그가 자기의 권리를 진정으로 포기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아브람이 다른 사람의 돈을 받은 용병전(傭兵戰)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밝혀두는 것이 지대한 중요성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시대의 역사들은 바로 전쟁의 원인을 지니고 있었던 자들이라도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조급했던 사실을 너무나도 넘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구실을 붙이는 데에는 예민한 것과 같이, 전쟁도발의 주요 원인이 그들의 탐심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 전쟁을 일으킨 그럴싸한 이유를 찾는 데에는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멋있는 구실을 갖다 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전쟁에서 얻은 그 노획물들을 결단성 있게 거절하지 않았다면 그가 자기의 조카를 구출한답시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명분을 얻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제사보다는 젯밥에 정신이 있듯이 전쟁 노획물을 가로채려고 그랬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자자하게 퍼졌을 것입니다. 그런 구설을 듣지 않으려면 그가 조심스럽게 경계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어떤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럴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아브람은 이 모든 탐욕의 유혹을 대항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방패로 무장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호감을 주는 환심거리를 이용하여 아브람의 마음을 끌어보는 계기가 그렇게 단호하게 거절되지 않았다면 소돔 왕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의 마음을 유혹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6. 본문 23-24절은
“(23)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24)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 입니다.
1) 본문 23절 상반절은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입니다.
이 말이 의기양양하고 너무도 명예에 집착되어 있는 마음을 의미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렇지만 아브람은 이 점에서도 성경에서 칭찬을 받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이야말로 진정으로 거룩한 도량이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예외가 첨가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아브람은 자기의 관대함으로 인하여 함께 동맹한 나라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을 자기의 율법에 복종시키지 않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올바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덕성의 일부이긴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우리가 마치 하나의 규칙에 얽매이게 하듯이 우리의 모범적인 생활에 다른 사람들을 결속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의 소명이 요구하는 바를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뜻에 다라 서로를 미리 판단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의 의무에 관련되어 있는 것을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들로서는 옳다고 따르며 우리의 의무에 일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법칙으로 규정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치게 오만하며 까다로운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2) 본문 23절 하반절은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입니다.
히브리인들은 맹세를 하는 데에 생략된 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형벌의 저주가 이해되고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이것을 다 표현하고 있는 내용도 언급되고 있는데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는 예를 들면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삼상14:44)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맹세의 의무를 구속력 있게 하려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떨어져 들어가는 것이 참으로 무시무시한 일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퉁명스런 말의 형식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다시 한번 반성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기들에 대하여 제재를 가하며 대화 도중에 갑자기 중단하는 것처럼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다음의 사실을 분명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인간들이 제멋대로 경솔하게 절대로 맹세하지 못하게 하며 오직 자기들 멋대로 맹세를 할 때는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보복을 자극시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그들의 원수로 만드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는 점입니다.
3) 본문 24절은 “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입니다.
이렇게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들, 곧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 외에 것을 취하지 않으려함으로써 하나님의 명예에 대하여 신중한 자세를 취합니다(24-). 그러니까 이미 하나님의 은혜와 신령한 복을 받은 자요 이 같은 행위로 더하여 받을 자요 계속해서 받을 자요 하나님 자신이 그러하시듯이 영원한 복을 받은 자입니다. 이를테면 “나에게는 하나님이 계시니 족하다” 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 혹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족하다” 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것으로 만족한다” 는 뜻입니다. 우리 생활 모두는 신앙고백의 일환입니다. 드리는 일이든 받는 일이든 간에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