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약령시장과 풍물시장 답사
2020년 1월 17일, 서울에 간 길에 짬나는 시간을 이용해, 제기동 약령시장과 신설동 풍물시장을 찾아보기로 했다.
모두 다 몇차례 가본 곳이긴 해도,그래도 좀더 돌아볼 곳이 있지 않겠나하는 호기심을 갖고 찾아 보기로 한것이다.
서울은 그동안 모든 유명 산들과 한성도성을 비롯해서, 궁궐과 명소들을 거의 답사했기 때문에,다시 골목길을 돌며 미쳐 살펴보지 못한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남아있다.
오늘 나들이는 퍽이나 값진 것들을 많이 새롭게 만나보는 좋은 여행이 되었다.
첫번째 제기동의 정릉천이 새로 처음 만난 곳이었고,약령시장 안에 들어서서 거창박물관에서 만난 "월지확"이란 거석이 그 두번째였으며,세번째는 한방 박물관도 처음 만나보게된 수확물이었다.
신설동 풍물시장에서도 역시 값진 수확을 거뒀다.
전에는 만나보지 못했던 우산각 하정 유관 선생 발자취를 만나볼수 있었던 것이 그 수확이라 하겠다.
하정 유관 선생은 "방안에서 우산 쓴 정승"이란 별명을 남긴 재상으로,조선 시대 황희,맹사성과 함께 조선 3대 청백리로 유명한 명재상이란 사실을 이곳에서 비로소 알게 되기도 하였다.
오늘 여행의 백미(?)는 마지막 코스였던 금호동 열방제자교회에서 만난 어머니란 여인이다.

정릉천을 돌아보며...

정릉천(貞陵川)
정릉천은 북한산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내려 월곡동에서 정릉천의 지류인 월곡천과 만나 남쪽으로 흘러 동대문구 용두동에서 청계천과 합류하는 하천을 말한다.
지명은 조선시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묘 정릉이 있는데서 비롯되었다.동국 여지승람에 따르면 정릉이 처음에는 황화방 북쪽 언덕에 있다가 태종 9년에 양주로 옮겨 모셨는데,지금도 이곳을 정릉동이라 하는 기록이 있다.


서울 약령시장 풍경




월지확이란 거석이다.
무게가 무려 25톤이나 된다니 실로 놀랍지 않은가!
궁금증을 풀기 위해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점원으로 있는 젊은 아낙이 한방차를 대접해 주었는데, 고향을 물었더니 천안 동면이란다.
월지확 출처를 물었더니 부여에서 가져온 물건이라고 일러주었다.
천안 들꽃 세상에도 커다란 거석 확돌이 있었는데,그건 강원도 어느 사찰에서 가져오면서 운반 비용만도 거금이 들었다고 하였다.
근데 월지확은 그보다도 몇배나 큰 내 생애 처음 만나보는 놀라운 거석 확돌이었다.


가창 박물관 보물들
향후 새롭게 박물관을 조성할 계획이란다.




한방 박물관을 만나다.










신설동 풍물시장으로....


전에는 그냥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수 있었는데,허가를 사전에 득해야 한다기에 취재 허락을 받고 사진 촬영을 할수 있었다.









고려부터 조선까지 8대 왕을 모신 관료
유관은 고려 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1371, 26세)하여 조선 세종 때까지 활동한 문신이다. 본관은 문화인으로 자는 경부敬夫, 호는 하정夏亭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유관은 고려 말기에 이미 전리정랑, 전교부령을 거쳐 성균사예, 사헌중승(종3품)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공조총랑이 되었을 때 이성계가 조선의 왕위에 올랐다. 유관은 즉위식을 행하는 동안 왕의 뒤에서 칼을 들고 호위하는 운검雲劒의 책임을 맡아서 좌우에서 떠나지 않았다. 즉 유관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에 참여한 개국원종공신이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내사사인으로서 태조에게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의하였다.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태조6년(1397)에는 좌산기상시·대사성에 올랐다. 태종원년 유관은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태종 11년에는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통감》 및 《대학연의》와 《춘추》를 왕에게 강하였다. 세종 8년(1426) 1월에 우의정에 임명되고 그대로 치사致仕하였다. 유관이 81세 때이다.
서울시 동대문구 신설동 로터리에서 동대문구청을 거쳐 동대문구 답십리동 신답초등학교에 이르는 길이 있다. 답십리동에서 천호대로와 청계로로 연결되는 길이다. 이 길 1,650m 를 하정로라 부른다.
하정(夏亭)이란 바로 조선초 청백리 유관((柳觀, 또는 柳寬)의 호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면 하정 유관은 이 곳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현재 신설동 근처 오두막집에 유관이 살던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조선 청백리인 하정 유관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고려부터 조선까지 8대 왕을 모신 관료
유관은 고려말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1371, 26세)하여 조선 세종때까지 활동한 문신이다. 본관은 문화인으로 자는 경부(敬夫), 호는 하정(夏亭)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유관은 고려 말기에 이미 전리정랑, 전교부령을 거쳐 성균사예, 사헌중승(종3품)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공조총랑이 되었을 때 이성계가 조선의 왕위에 올랐다. 유관은 즉위식을 행하는 동안 왕의 뒤에서 칼을 들고 호위하는 운검(雲劒)의 책임을 맡아서 좌우에서 떠나지 않았다. 즉 유관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에 참여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내사사인으로서 태조에게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의하였다.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태조6년(1397)에는 좌산기상시․대사성에 올랐다. 태종원년 유관은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태종 11년에는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통감》 및 《대학연의》와 《춘추》를 왕에게 강하였다. 세종 8년(1426) 1월에 우의정에 임명되고 그대로 치사(致仕)하였다. 유관이 81세때이다.
유관은 형조전서의 직책에 있을 때 죄인의 자복(自服)을 받기 위하여 고문(拷問)을 하는 관행을 없앨 것을 건의하였다.
사람의 타고난 기질은 강하고 사납고 굳세고 과단성이 있기도 하며, 유순하고 나약하고 겁이 많기도 하여 같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도둑질을 하고도 그 매질을 견디어 마침내 공초(供招)에 승복(承服)하지 않기도 하며 혹은 무고(誣告)를 당하고도 매질의 고초를 참지 못하여 거짓 자복(自服)하기도 하니 진실과 거짓은 정말로 분변하기 어렵습니다. 형벌을 맡은 관리는 다만 자복시켰다는 명목만 힘쓰고 생명의 중함을 돌보지 않고서, 법에서 정한 것 외의 형벌을 설치하여 온갖 방법으로 신문하여 죄가 드러나기도 전에 몸이 이미 곤장 아래에서 죽게 되니, 정말로 도적질 한 자라도 만약 공초(供招)에 승복(承服)하지 않고서 죽었다면 죄를 판결하는 데 혐의가 있을 것인데, 하물며 죄도 없이 생명을 잃게 되면 원통하고 억울함이 어찌 적겠습니까?
따라서 법외의 형벌을 일체 금지하고 함부로 고문하는 것을 말도록 건의하였다. 임금은 이를 받아들여 시행하게 하였다. 형조전서는 죄인을 다스리고 법률을 세우는 직책이지만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여기에 나타나 있다.
당시에는 아직도 처첩의 구분이 명확하지 못하고, 관원들이 처를 두 셋씩 두는 사례가 많았다. 이 경우 본인이 죽은 후에 아들들이 적자(嫡子)문제로 다투게 되어 쟁송이 제기되었다. 유관은 적자문제에 대한 판결기준을 정하는 상소를 올렸다.
“세월이 이미 오래 되어서 혼인서가 있는지 없는지 혼례를 올렸는지 아닌지의 여부를 분간하기가 곤란합니다. 무릇 처(妻)가 있는데도 처를 얻는 자를 규찰할 법조문이 없습니다. 처가 있는 자가 다시 후처를 얻으면 선처(先妻)와 후처(後妻)의 자식은 서로가 적자(嫡子)라고 주장하는데, 양반의 자식은 후취(後娶)를 ‘첩(妾)이라 일컫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 또 처첩(妻妾)의 자식이 적자(嫡子)를 다투는 경우에는 선후를 논하지 말고 조사하여 밝혀 결정하소서. 노비는 처첩의 예(例)에 의거하여 차등 있게 나누고, 세 명의 처를 모두 데리고 산 자는 선후를 논하지 말되 그 중에 죽을 때까지 동거하는 자에게 작첩(爵牒)과 전지와 노비를 주면 3 처(妻)의 자식이 고르게 분급(分給)할 것입니다.
이 상서를 보면, 작첩을 주거나 재산을 분배할 때 가장 으뜸되는 것은 끝까지 같이 산 자 은의가 두터운 자를 우선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는 아직 성리학의 명분 질서가 고착화되기 전 조선초기의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모호한 판결에서 유관은 인간의 도리나 의리를 기준으로 삼았다.
세종은 즉위한 후 교서를 내려 신하들에게 진언을 하게 하였다. 이 때 유관(柳觀)은 예문관 대제학으로서 수령들이 선정(善政)을 베풀도록 건의를 올렸다. 왜냐하면 당시의 지방 수령들이 자기 권위만 세우고 윗사람에게 잘보여서 빨리 다른데로 승진해 갈 생각만 하고 있는 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유관은 전임자가 두고 간 부채 하나가 있었는데,그것 마져 전임자에게 전해주지 못해 한강 나룻배에 올라 강물위에 떠나 보냈단다.






금호동 열방 제자교회를 찾아서....

지난 1월 11일 부산에서 가졌다는 돈 잔치 인증 사진

행사에 앞서 기타연주를...


이 여인은 도대체 여떤 여자일까?
나이는 아직 50이라니 한창 새파란 여인인데, 자신이 이 세상 어머니로 왔다니 이 무슨 황당한 헛소리인가!
자신의 이름을 서 승희라고 밝히기도 하였지만,다른 이름도 거명하는걸 보니 진짜인지 가명인지 아리송하고.....
여기 모인 안간들은 아직 사람이 덜된 인간들이라며,사람만 되면 자신이 행복을 보장해 주겠다고 큰소리 치고 있다.

10만원을 선입금하고 3개월만 있으면 50만원씩 주겠다고 큰소리친다.
100만원이면 5백만원,1억이면 5억을 주겠다니, 돈에 환장한 사람들은 군침도는 유혹이라 아니할수 없다.
자신은 돈이 무한정 있다고도 큰 소리치고, 무려 1경 300조를 가지고 있다고도 떠들어 댄다.
그걸 도대체 누구더러 믿으란 말인가?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여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현혹을 당한다.
오늘 모인 숫자만도 대충 3백명쯤은 족히 모인것 같은데,참으로 통탄스럽기 그지없다.

이런 사기꾼을 왜 잡아가지 않는가?
요즘 청와대에 있는 개들이 "도둑이 와도 짓지 않는다"는 우스개 소리가 장안에 파다하다.
청와대만이 도둑놈 소굴이 아니라,선량이라고 뽑아준 국회의원 나리들이 간 큰 도둑놈들이고,법무장관 해먹겠다던 조국이란 놈은 온갖 사기를 쳐가며 국민을 우롱했음에도 버젓이 대학 교수를 더 해먹겠다는 기막힌 나라꼴이다.
도둑 잡는 경찰중에 도둑놈이 허다하고,경찰들과 짜고 사기치는 사기꾼도 허다한게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오호라,여기 대형교회에서까지 사기꾼이 버젓이 대국민 사기극을 벌이도록 묵인하고 방조하고 있다니 이일을 어이할꼬??
내 말이 얼른 믿겨지지 않거든, 매주 금요일 오후 이곳에서 이런 모임을 갖겠다니 꼭 한번 찾아 확인해보시라!

먼저 시작했다는 자랑스런 지도자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