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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7년(1398) 8월 26일 밤, 태조의 5남 이방원(태종. 1367~1422. 재위 1400~1418)은 자신의
왕위쟁탈전에 가장 큰 걸림돌인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을 살해했다.
이어 조선의 첫 번째 세자인 이복동생 방석과 방석의 동복형 방번을 살해했다. 방번과 방석의 생모인
신덕왕후는 2년 전에 병사했다. 신덕왕후는 친정이 태조의 집안보다 명문일 뿐만 아니라 지혜롭고
과단성이 있어 개국에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방원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녀가 살아 있었더라면 방원은 거사를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세자를 죽인 방원은 가장 만만한
둘째형 방과를 세자에 책봉했다. 보위를 노리고 세자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어설픈 기만
술이었다. 6일이 지나서야 가장 총애하는 아들 방석이 죽은 사실을 알게 된 태조가 할 수 있는 일이
라곤 보위를 물려주는 방법뿐이었다. 태조는 서둘러 방과에게 선위했다.
태조는 고려에서 신하로 지내는 동안 부인 한씨로부터 6남 2녀를 얻었다. 장남 방우는 고려에서 문과
에 급제하여 밀직부사(종2품)까지 지냈다. 그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뒤 찬탈의
기미를 보이자 가담을 거절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다가 조선 건국 이듬해에 병사했다. 부인 한
씨는 조선 개국 1년 전인 1391년에 죽었는데, 이성계가 즉위하면서 신의왕후로 추증되었다. 한씨 사
후 이성계는 강씨와 재혼하여 방번과 방석을 차례로 얻었다. 그 중 둘째인 방석을 지극하게 편애하여
한씨 소생 6남과 방번을 젖혀두고 세자로 책봉했는데, 이 지나친 편애가 결국 사랑하는 자식 둘을 비
명횡사시킨 원인으로 작용했다.
둘째형 방과를 임금(정종)으로 세운 방원은 상왕 태조의 출궁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행여 무리를 모
아 자신처럼 역모를 꾸밀지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그 참에 4남 방간이 방원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
으켰지만 역부족으로 패했다. 방원이 방석과 방번을 죽인 사건을 제1차 왕자의 난, 방간의 봉기를 제
2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승리를 거둔 방원이 제멋대로 전권을 휘두르자 정종은 언제 목숨을 잃을
지 두려워 1400년 11월 방원에게 보위를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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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2년(1402) 11월 5일, 함경도 안변부사 조사의가 세자 방석의 원수를 갚고 태조를 복위시키겠다
는 명분을 내걸고 군사를 일으켰다. 당시 태조는 안변에 머물다 고향인 함흥으로 내려가 은거 중이었
는데, 이 지역은 모두 그의 세력권에 있었다. 태조는 태종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북방의 여러
절과 고을을 찾아다니면서 조사의에게 명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다. 급보를 받은 태종은 어떻게 해서
든지 태조를 환궁시키기 위해 승추부 판사 박순을 차사로 보냈지만, 박순은 조사의의 수하들에게 붙
잡혀 살해되었다. 이후 태조를 환궁시키기 위해 함흥으로 찾아갔던 여러 명의 차사가 잇달아 살해되
어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났다.
반군은 함경도를 완전히 장악하고 평안도로 진출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11월 13일, 태종은 조영
무를 도통사로 삼아 동북면과 서북면으로 진압군을 급파했다. 11월 18일, 태조는 동북면은 완전히 장
악되었다고 보고 서북면을 접수하기 위해 평안도 맹주로 향했다. 진압군 선봉장 이천우 장군은 서둘
러 맹주로 진격했지만, 사전에 대비하고 있던 반군에게 포위되어 10여 명의 측근들과 함께 가까스로
탈출했다. 11월 27일 반군은 안주까지 진출하여 청천강변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때 진중에는 진압군
으로 왔다가 포로로 잡힌 김천우란 자가 있었는데, 진압군이 몇 명이나 되느냐는 반군의 질문에 4만
명쯤 된다고 뻥을 쳤다. 이에 큰 공감대도 없이 조사의의 명에 따라 가담했던 대부분의 반군은 야밤
을 틈타 뿔뿔이 달아났다.
조사의에게는 50여 명의 최측근 수하들만 남았다. 조사의는 이들과 함께 안변으로 돌아가던 중 진압
군에게 체포되었다. 조사의 일행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난을 일으킨 지 한 달 13일 만인 12월 18일에
처형되었다. 이로써 태조의 보복계획도 조사의의 태조 복위계획도 부질없는 일장冬몽으로 끝났다.
기나긴 권력다툼에서 방원이 완승을 거둔 것이다.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자 태조는 오랜 친구인 무학
대사의 간곡한 권유를 받아들여 상경 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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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궁한 태조는 더 이상 태종과 맞서지 않았다. 권력의 추뿐만 아니라 운명의 추도 이미 방원에게 기
울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태조는 이후 6년을 더 살다가 태종 8년(1408)에 눈을 감았다. 태종은
1418년 3남인 충녕대군(세종)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4년을 더 살다가 1422년 56세로 눈을 감았다. 태
종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우는 데도 가장 큰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허약한 왕실을 굳건하
게 다지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특히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해 자신의 처가와 세종의 처가를 멸문시
키는 악역까지 떠맡았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남북 철도연결등 전쟁없는 종전을 위한 갖가지 선처가 양보와 치욕속에서 이루워 지고있어 국민의 공감대를 형성치 못하고 있는 대북지원,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완전 비핵화를 이룰수 없습니다. 우선 내가 먼저 살아야 하니 그 처방은 핵탄두를 보유하는 게 우선이어야 하기 때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