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위 13년(1467) 5월 19일, 수양은 신숙주와 그의 다섯 아들, 그리고 한명회와 그의 아들 및 사위 등
을 모조리 하옥시켰다. 신숙주와 한명회는 수양의 보위 찬탈에 앞장선 일등공신으로서 나는 새도 떨
어뜨린다는 소문이 온 나라에 자자할 정도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수양이 자신의 최측근 중신들
을 투옥한 것은 그들이 반란 주모자와 내통하고 있다는 장계를 받고서였다. 장계를 보낸 자는 함길도
회령절제사를 역임한 이시애였다. 고변 내용을 요약하면, 함길도 절도사 강효문이 신숙주‧한명회 등
조정 중신들과 내통하여 반역을 도모했기 때문에 이시애 자신이 강효문과 그의 수하들을 처단했다는
것이었다.
이시애가 거짓 장계를 올린 목적은 조정에 혼란을 초래하여 장차 수월하게 반역을 도모하기 위해서
였다. 이시애의 집안은 대대로 길주의 거부로서 백성들에게 자애를 베풀었으며, 길주와 회령 절제사
를 지낸 이시애 역시 길주는 물론 함길도 전체에서 신망을 받고 있었다. 덕분에 이시애가 군사를 일
으키자 백성들뿐만 아니라 강효문 휘하의 군사들까지 적극 협력했다. 수양은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집권하자마자 중앙의 관리들을 대거 지방으로 내려 보냈는데, 가뜩이나 지역적 차별대우에 불
만을 품고 있던 함길도 백성들에게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들의 행패에 대한 반감까지 겹치면서 이시
애의 난에 동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시애의 장계보다 하루 늦게 함길도 관찰사로 나가 있던 신숙주의 아들 신면의 장계가 당도했다. 이
시애가 반란을 일으켜 고을 수령들을 모두 죽이고 군사를 늘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장계를 올린 직
후 신면은 이시애에게 살해되었다. 수양이 사태의 전말을 파악한 것은 신숙주와 한명회를 하옥한 지
열흘 뒤였다. 수양은 즉시 두 신하와 가족들을 풀어주었다.
수양은 종친 이준을 도통사에 제수하여 4만 군사를 이끌고 즉각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라고 명했다.
군사가 함길도에 도착했을 때, 이시애는 백성들과 군사들의 적극 협조 아래 함흥 이북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수양은 즉시 함길도 백성들에게 회유의 글을 내렸다. 절도사를 사칭한 이시애가 반
역을 도모하여 무고한 여러 수령과 백성들을 죽였으니, 이시애를 잡아오는 자에게는 후히 상을 내릴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수양의 글은 함길도 백성들에게 유포되지 못했다. 이시애 일당이 중도
에서 어명을 탈취했기 때문이었다.
6월로 접어들자 이시애의 철옹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함길도 남쪽 지역에서부터 수양의 유시가
접수되어 이준의 군사가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시애는 여전히 마운령 이북 지역을 장악한 채
여진까지 끌어들여 군사가 2만 5천에 이르렀다. 도통사 이준을 비롯하여 전투경험이 없는 장수들은
더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도 쉬 움직이지 못했다. 강순 장군이 이끄는 선봉대만 이시애의 반란군과 싸
워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을 뿐이었다.
수양의 지략도 오십보백보였다. 7월 2일 직접 반란 진압에 나서겠다며 지원병을 모집하기 위해 경향
각지에 내다 붙인 방의 내용이 가관이었다. 아전‧공노비‧사노비‧한량 등에게 지원을 권유하면서, 도끼
나 몽둥이 등 무기는 직접 준비하고 10일분 식량도 가져오라고 했다. 7월 2일이 되어도 지원하는 자
들이 없자 수양은 슬그머니 명을 거두었다. 대신 재차 유시를 내려 백성들이 다칠까봐 직접 가지 않
는 것이라고 둘러댔지만 믿는 백성은 아무도 없었다. 왕이 직접 온다고 했다가 오지 않자 함길도 백
성들은 더욱 이시애에게 밀착했다.
도통사 이준이 본격적으로 공격에 나선 것은 8월 4일이었다. 선봉장 강순, 절도사 허종, 대장 어유소,
후위 이준으로 구성된 관군 2만이 거산을 공격하여 반군 2000여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이시애
는 패잔병을 이끌고 도주했다. 첫 접전에서 크게 패하자 반군은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반군이나
백성들의 피로감도 관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시애가 패주하자 반군의 핵심 장수들이 하나둘
전사하거나 체포되었다. 투항해오는 장수도 차츰 늘어났다. 8월 12일, 관군이 임명으로 진출하여 진
을 치고 있을 때 이시애의 수하들이 이시애를 묶어 데려왔다. 이시애를 체포하는 데 가장 공이 큰 자
는 그의 처조카 허유례였다.
이준은 심문 끝에 자백을 받아내고 이시애를 능지처참했다. 이로써 3개월에 걸친 이시애의 난은 종
결되었지만 민심은 쉬 가라앉지 않았다. 전투 중에 수많은 백성들이 죽고 재산이 파괴되었기 때문이
었다. 반란에 적극 가담한 백성들은 극형에 처해졌다. 이를 본 백성들은 조정으로부터 또 무슨 벌이
내릴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반란에 가담했던 여진족의 움직임도 함길도 백성들의 불안을 가중시켰
다. 수양은 9월부터 12월에 걸쳐 강순과 어유소에게 여진을 토벌하도록 명하여 추장 이만주‧고납케‧
다비랄 등을 죽인 후에야 민심이 안정되었다.
※ 저자 박영규는 무슨 까닭인지 남이 장군의 활약상을 쏙 빼놓았다. 40페이지에 이르는 <이시애의
난> 부분에 남이라는 이름 한 번 나오지 않는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남이는 이시애의 난 평정에
기여한 공로로 난이 진압된 이듬해인 수양 14년(1468)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 오른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무장이었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오면서 지은 호방한 시 <북정가(北征歌)>는 간
신 유자광이 남이를 역모로 모는 데 악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 남이를 고의로 누락시킨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하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신문에 보도된 각분야 의 경제지표가 많이도 나빠진 지수들, 경제 전문가들이 제기했던 경기추락 경고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실기를 시킨 지적 입니다. 반도체 경기둔화 조차 원인이 된다니 암담한 불황이 아닐수 없습니다. 기업에 대한 활기를 불러일으키는 국가적 지원이 필요한 시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