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가장 알맞는 재능을 찾아가다보면 도착지는 결국 히사이시 조였고, 그렇게 반복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부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까지 이어진 영화음악가 히사이시 조(53)와의 작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똑같은 과정이 기타노 다케시와 작업하는 동안에도 되풀이됐으리라.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부터 올해 베니스영화제 출품작 <인형들>에 이르는 기타노의 영화에서도 히사이시 조의 선율은 화면 가득 넘실거렸다. 현대 일본영화의 두 대가, 미야자키 하야오와 기타노 다케시에게 전적인 신임을 얻고 있는 영화음악가 히사이시 조는 단순하지만 잊혀지지 않는 멜로디와 리듬으로 관객의 가슴을 파고든다. <이웃집 토토로>에서 토토로와 함께 하늘을 나는 장면, <키즈 리턴>에서 마사루를 태운 신지의 자전거가 텅 빈 운동장을 도는 장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용을 타고 날아오르는 장면, <기쿠지로의 여름>에서 마사오와 기쿠지로의 즐거운 놀이가 이어지는 장면 등 뇌리에 깊이 새겨진 명장면마다 히사이시 조의 신비롭고 투명한 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를만한 영화음악의 대가이다.
지난해 한국에서 공연을 갖기도 한 히사이시 조는 4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일본 국립음악대학을 졸업한 뒤 82년 개인음반 <인포메이션>을 발표하면서 현대음악 작곡가이자 연주가로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TV드라마와 광고음악에서 출발해 본격적으로 영화음악을 맡은 것은 84년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부터. 미야자키 하야오, 기타노 다케시 외에 오바야시 노부히코 감독과도 여러 차례 작업했으며 92년부터 3년 연속 일본 아카데미 최우수음악상을 받았다. 영화음악 외 활동범위도 넓은 편. <피아노 스토리즈> <아이 엠> <웍스> 등 10개가 넘는 개인앨범을 발표하며 콘서트 활동도 계속하고, 98년 나가노동계올림픽 때는 문화이벤트의 종합연출을 담당했다. 99년 발라네스쿠 4중주단과 2개월 투어연주를 하면서 영감을 얻어, 2001년 <4중주>라는 영화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지난 7월31일, 도쿄의 한 녹음스튜디오에서 진행된 히사이시 조 인터뷰는 <기쿠지로의 여름> 홍보차 수입사에서 주선한 것이었지만 <기쿠지로의 여름>에 관한 문답에 얽매일 필요는 없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음악의 거장이지만 그는 격식이나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며 이웃집 아저씨처럼 편안함을 주는 모습으로 나타나 시종 미소를 잊지 않으며 질문에 답했다. 문답이 끝나고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요청하자 즉석에서 <기쿠지로의 여름>에서 한곡을 피아노로 연주해 취재진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아래 인터뷰는 7월31일 진행된 인터뷰 내용에 지난해 서면으로 주고받았던 문답을 첨가한 것이다.
지난해 한국에서 공연을 했는데 당시엔 음향시설이 안 좋았다. 다시 한번 한국에서 공연할 생각이 있나. → 그때 너무 즐거웠기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하고 싶다. 한국음식이 대단히 맛있더라(웃음).
미야자키 하야오와 기타노 다케시, 두 감독의 영화음악으로 유명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작업하다가 이 음악은 기타노 다케시 영화에 맞겠는걸 하거나 기타노 다케시와 작업하면서 이건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에 넣어야지 하는 일은 없나. → 두 감독과 처음 일할 때부터 둘의 스타일이 워낙 달라서 그런 적은 없다. 기타노 다케시는 미니멀한 리듬을 반복하는 스타일인 반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멜로디가 풍부한 곡을 요구하는 편이다. 하지만 요즘은 둘다 비슷한 걸 요구할 때가 있다. ‘내가 지금 누구 영화음악을 만들고 있었지?’ 잘 모르겠는 때가 있다.
영화음악가로 자리잡은 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영화음악을 맡으면서부터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어떤 계기로 알게 됐나 → 나는 원래 도그마재팬이라는 회사에 소속된 음악가였는데 회사를 통해 섭외가 들어왔다. 그전에 개인적으로 알았던 사이는 아니다. 적당한 영화음악을 찾고 있는데 내가 만든 이미지앨범을 듣고 마음에 들어했다. 그래서 영화음악을 하게 됐다.
미야자키 하야오, 기타노 다케시, 두 감독과는 개인적으로도 친한 사이인가. → 그렇지 않다. 개인적 친분은 전혀 없다. 일로 만나는 관계일 뿐이다. 두 사람 다 존경한다. 인생의 선배로서 그렇다. 개인적으로 친하다고 표현할 순 없는 관계다. 각자 열심히 몰두해서 일할 때는 개인적인 정이 끼어들 시간이 없다. 내가 갖고 있는 일에 대한 기본 자세가 그런 것이다. 친구 관계에선 일을 함께 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음악가로서 영화음악 작업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영화음악을 하는 최고의 매력은 뛰어난 감독과 함께 일한다는 것이다. 음악은 기본적으로 나 혼자만의 세계인데 다른 감독이 만든 영화를 보면서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기본적인 것은 내가 영화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영상과 음악이 함께 있을 경우 음악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을 그릴 수 있다. 영화음악을 하다 보면 왜 이런 영상에 음악이 들어가야 하는 거지, 하며 불만스러울 때도 있지만 영상이나 음악, 하나만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큰 것을 그릴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다.
영화에서 영화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 영화에서 음악의 역할은 대단히 크다. 영화의 세계관이 음악으로도 드러난다. 화면과 화면이 이어질 때 음악이 둘 사이를 부드럽게 연결시켜준다. 음악을 잘못 쓰면 중요한 장면이 깨지기도 한다. 안타까운 것은 일본에선 영화음악을 제대로 평가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영화평론가들이 있지만 영화음악에 대해 평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영화음악가를 둘러싼 환경은 일본의 경우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4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고 들었는데, 음악을 어떻게 만났나. → 마을의 악기점에서 가끔 보았던 바이올린을 갖고 싶었던 게 계기였다. 가정환경이 음악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건 아니다. 아버지는 화학 선생님이었고 영화를 매우 좋아해서 내가 유치원 때부터 영화관에 함께 갔다. 수년간 1년에 300편에 달하는 영화를 봤다.
같은 감독과 여러 번 작업을 하면서 서로를 잘 알아서 생기는 편한 일이나 불편한 일이 있을 것 같다. 어떤 면이 좋고 어떤 면이 나쁜지. → 같은 감독과 여러번 할수록 일은 점점 힘들어진다. 작품마다 음악의 분위기를 바꾸지만 감독의 기대는 점점 커진다. 반드시 기대에 응해야 하기 때문에 압력은 계속 커진다. 기대에 못 미치면 다음 작업을 못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기는 것이다.
지난해 <4중주>라는 영화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감독을 한 경험이 영화음악에도 도움이 되나. → 사실 감독을 해보고 나서 많이 변했다. 예전엔 영화를 보면서 그 영화가 좋은지 나쁜지 그다지 평가하지 않고 일했는데 이제는 나라면 이렇게 연출했을 텐데 하는 식으로 비평하는 자세를 갖게 됐다. 전에는 감독이 원하는 것을 아무 비판없이 그 자체로 받아들였는데 연출이 자꾸 보이니까 고민이 된다. 감독을 해서 마이너스인 부분인 셈이데 역시 모든 인생사는 모르는 게 행복, 이라는 생각이 든다. (웃음) 반면에 감독이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 감독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면서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점도 있다. 지금이 내겐 과도기라는 생각이 든다. 연출경험을 살려서 더 좋은 음악을 만드는 방법을 모색할 때인 것 같다.
<4중주>에 대한 대중과 평론가의 반응은 어떤 것이었나. → 한마디로 실패했다. 지금도 <4중주> 얘기가 나오면 화가 난다. (웃음) 하지만 어디까지나 음악가로서 만든 음악영화이고 일반적인 평가도 내 생각과 다르지 않다. <4중주>는 지난해 몬트리올영화제에 출품되기도 했다.
영화음악을 맡을 때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 있다면. → 가장 큰 건 영화의 내용에 공감할 수 있는가이다. 시나리오를 읽고 도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야 된다. 그 다음은 개런티이고 스케줄이다. 개런티가 적을 경우는 내용이 굉장히 좋아야 된다. 내용이 안 좋은데도 하는 경우는 개런티가 많아야 되고. 아, 개런티 얘기는 많이 쓰지 말아달라. 이런, 내가 쓰지 말라고 했으니 개런티 얘기를 더 쓰겠군. (웃음)
스케줄이나 개런티가 맞지 않아서 하고 싶었는데 못한 작품이 있나. → 아무리 스케줄이 빡빡해도 미야자키 하야오와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는 반드시 하고 있다. 사실 어떤 감독이 내게 영화음악을 부탁할 때는 내 음악을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되도록 거절하지 않는다. 기회가 된다면 한국 감독과도 일해보고 싶다
영화음악을 하다보면 아무래도 감독과 의견 차이가 생기는 일이 있을 것이다. 심혈을 기울인 음악을 퇴짜놓는다거나 이렇게 저렇게 바꿔달라는 요구를 들을 텐데. → 감독과 의견차이가 있는 경우는 있지만 다투는 일은 거의 없다. 기본적으로 영화음악을 만들 때 나는 1년 정도를 생각해서 작업한다. 하지만 감독은 3년, 혹은 그보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그 영화를 생각한 것이다. 감독이 훨씬 오래 생각했고 더 많은 것을 걸고 하는 것인만큼 감독의 견해에 따르려고 노력한다.
기타노 다케시는 <기쿠지로의 여름>을 찍을 때 완성된 시나리오가 없었다고 하던데 시나리오가 없는 상태에서 영화음악을 어떻게 만드는지 궁금하다. → <기쿠지로의 여름>은 처음 구상했던 것과 다른 영화가 나왔지만 기타노 다케시는 처음부터 피아노를 위주로 부드러운 음악을 쓰자고 말했다. 사실 감독에게 시나리오는 설계도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것을 만들고 싶어하는가에 있다. 그게 확실하면 큰 문제는 없다.
기타노 다케시나 미야자키 하야오는 영화음악에 관해 당신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편인가. → 기타노 다케시는 촬영소나 조감독 출신이 아니어서 첫 작품부터 꾸준히 성장하는 감독이다. 영화음악에 관한 주문도 거기에 맞게 성장하는 것 같다. 이번에 만든 <인형들>은 영화음악에 대해 확실한 주문을 했다. 기타노 다케시가 음악에 대해 잘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겸손일 뿐이다. 기타노 다케시나 미야자키 하야오나 음악에 관해 일반인이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확실히 이해하고 있다. 영화감독들이 음악에 대해 잘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겸손한 표현이다. 사실 그들은 음악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