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스님들도 결혼할 수 있나?
가수 이선희 씨는 2014년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서 아버지가 대처승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대처승이란 아내가 있는 스님이다.
‘토끼의 뿔’이나 ‘늙은 아이’ 마냥 비상식적이고 이물스럽다.
불사음계에 나타나듯, 출가자에게는 혼인은 커녕 성행위 자체가 허용이 안 된다.
그러나 한때는 대처승이 한국불교의 주류였던 시절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는 우리에게 수많은 적폐를 안겨다줬다.
승려의 대처는 일본에서 건너온 풍습이다.
다음은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한국학과 교수가 2006년 『한겨레21』에 기고한 글의 일부다.
“12세기 이전까지 일본불교는 수행자들의 결혼생활이 전혀 허락되지 않았으며 그 이후로는 정토종 승려만이 공개적으로 결혼할
수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전의 일본에서는 여성과 동침한 승려를 형사처벌할 수 있었지만 1872년 3월부터 정권은 개신교의 대처 목사를 의식하 듯, 승려에게도 대처를 허락했다.”
대처는 한때 누군가에겐 선善이었다.
만해 한용운 스님도 『조선불교유신론』 에서 불교개혁을 위한 방법론으로 대처를 지지했고 또한 실천했다.
여하튼 ‘생활불교’ 또는 ‘근대화를 위한 필연적인 산물’이란 명분 아래, 전대미문의 제도는 1926년 사법寺法 개정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공식화됐다. 육식肉食도 풀어줬다. 쉽게 말해 처자식을 거느려도 스님이었고, 버젓이 술집을 드나들어도 스님이었던 셈이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이후 국가 시스템은 그들의 치하로 속속 편입됐다.
종교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1911년 6월 반포된 ‘사찰령’은 불교계를 겨냥한 족쇄였다.
‘사찰을 병합, 이전하거나 폐지하고자 할 때는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제1조).’ ‘본산 주지는 총독, 말사 주지는 도장관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제2조).’
조선총독은 교단의 인사권을 장악함으로써 한국불교를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됐다.
사찰령이 구조의 식민화였다면 대처식육은 의식의 식민화였다.
사실 대처식육의 허용은 막강한 재력과 실권을 지닌 본산(지금의 교구본사) 주지들의 청원 덕분이었다.
특권층은 당당하게 처첩을 거느렸고 신도들이 시주한 돈으로 자식을 유학보냈다.
나라의 주인은 일본이었고 친일이 ‘윤리’였던 시대다. 다음은 국권을 빼앗긴 35년간 한국불교가 얼마나 뒤틀리고 무너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신문 기사다.
“(전략)….그래서 그들 제국주의 일본 지배자들의 뜻에 맞고 눈에 잘 드는 승려들은 주지의 직에 재임, 3임도 되고 관리를 행사하여 축재도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제국주의 일본 지배자들의 침략 정책에 이용되고 복종하는 대처승들은 자녀를 키워 학교에서 공부시키고 또 학교에서 졸업하고 나오면 제국주의 일본 지배자들의 관청에 관리로 채용되는 특전을 받게 되므로 생각으로나 행동으로나 제국주의 일본 지배자들의 충신이 되어 왔다.
그러므로 그들 승려들은 불법에 의한 바른 불도를 닦을 겨를도 없이 처자를 부양하고 심지어는 절간에서 음식을 만들어 팔고 장구와 북과 가야금도 구비하여 두고서 기생을 데리고 유흥하러 다니는 유야랑遊冶郞들이 밤낮으로 사찰을 점령하고 난잡하게 놀던 곳으로 되어 왔던 것이다.”
- 『평화신문』 1955년 1월 26일자 –
피는 물보다 독하다. 이기주의의 근원 가운데 하나는 딸린 식솔이다.
사내에게 처자식은 쉽터이며 책임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벌어먹이려면, 가족 아닌 것들로부터 끊임없이 빼앗아야 한다.
‘대처’는 개인의 사생활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출가자의 속화俗化와 사찰의 사유화를 부추기며 교단을 총체적으로 망가뜨렸다.
해방 후에도 대처승들의 기득권은 유지됐다.
1955년 8월 6일자 『경향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전국 승려가 8,000명에 달하고 있다는데 비구승은 불과 1,200여 명뿐”이었다.
이에 청정독신淸淨獨身의 전통을 회복하자며 비구승들이 전개한 것이 바로 불교정화운동이다.
1954년 5월 ‘대처승은 절에서 떠나라’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유시로 촉발된 정화운동은 비구승과 대처승 간의 치열한 물리적 충돌과 소송전 끝에 1962년 4월 대한불교조계종의 출범으로 열매를 맺었다.
종헌宗憲에는 ‘승려는 출가 독신자여야 한다’는 조항이 기어이 명시됐다.
권세를 잃은 대처승은 절에서 쫒겨나거나 다른 종단을 만들어서 나갔다. 아버지 때문에 어릴 적 왕따를 당했다는 이선희 씨의 안타까운 사연처럼, 대처승은 현대사의 얼룩으로 남아 있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