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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章
[태경궁 - 계연실契緣室]
상궁 민씨는 벼루 위로 연적에 담긴 물을 몇 방울 떨어뜨린 다음에 조심스러우면서도 정성스럽게
먹을 갈았다. 묵향은 금세 사방을 휘감았다. 황제의 손짓에 민상궁은 먹을 갈던 것을 정지한 채로
굵은 손에 윤기가 줄줄 흐르는 붓을 건냈다. 그는 매화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새하얀 비단 위로‥
한 가지 매화를 피어내는 것이다. 경춘원(慶春園, 황제궁의 후원)에 매화가 지천인 것을 보아서는
매화 자체도 좋아하나 보다.(물론 추측에 불과하다)
입을 꼭 다물고서 눈짓과 손짓으로만 자신을 가끔씩 드러내는 그의 진실된 속마음은 스무 해를
가까이한 민상궁도 그의 친모인 황태후 조씨도 모를 일.
"수家에 납징(納徵)이 당도하였나이다. 며칠 내로‥‥"
그녀는 조심스레 말을 꺼내어본다. 그가 어떻게 답할지는 모른다. 구태여 미루고 미루던 이번
혼사에 대해서 그의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을 것이 틀림없으므로.
"먹을 더 갈아야 하지 않는가?"
역시나. 그는 답하기를 꺼려하고 있었다.
"‥‥ 며칠 내로 입궐하실 듯 하나이다."
"‥‥‥‥‥‥‥‥‥‥‥‥‥"
굵은 가지에서 퍼져가는 잔가지들 사이로 매화의 봉오리들이 철도 아닌 때에 아름답게 피어났다.
그러고 보면 그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겨울철에 피는 매화를 매번 여름이 다가올 때에‥
그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는 정작 한겨울에는 매화를 그리지 않는다.
"친영례 때까지는 황궁에서 머무실‥‥"
"고매(古梅)야 말로 매화 중의 매화지."
"‥‥폐하."
그는 그제야 붓을 내려놓았다. 그림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듬성듬성 꽃을 피워낸 그림은 아직
그림이라고 말하기 일렀다.
"아직 규완으로부터 서찰이 오지 않았나보군."
민상궁은 차마 고개도 끄덕이지 못하고 작은 한숨으로 그 마음을 대신한다.
"정혜궁(晶暳宮, 귀빈최씨)마마를 뫼셔오리까?"
"‥‥ 그림이 완성되려면 아직 멀었지 않은가?"
"‥‥ 폐하. 부디 허(許)하셔야 하나이다."
그들의 대화가 매번 이렇듯 뒤죽박죽인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불편한 심기를 숨기며 서로를 최대한
배려하는 것인데도 듣는 이로 하여금 동문서답의 꼴이 되고만다. 민상궁은 결국 수家의 여식에 대한
이야기는 다 전하지도 못한 채로 그의 홀로만의 시간을 위하여 물러나야만 하였다. 민씨가 물러나자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잡았던 붓을 조심스러운 손길이 아닌 거칠게 탁자 위로 내려두었다.
애써 그린 그림 위로 붓에서부터 튀어나온 먹이 반점을 그렸다. 그야 물론 신경을 쓰는 듯 보이지는
않았지만.
"‥‥‥‥‥‥‥"
어느 누구도 쉬이 접할 수 없는 공간인 태경궁의 계연실은 이름과는 거리가 멀었다. 계연(契緣)‥‥.
인연을 맺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태경궁의 제 1접견실이지만 언제부터인가 황제의 개인적 용무를
보는 곳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그 까닭은 아마도 태경궁에서 가장 커다란 창을 지닌 곳이라서 일 듯
싶다. 커다란 창을 열면 훤히 보이는 후원에는 사시사철 이름모를 꽃이 한가득, 저 멀리에는 키가 큰
대나무들까지 보여서 한층 푸르름을 더하는 곳이다. 태경궁을 찾는 손님들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지은 곳이었지만 광륜제가 즉위하고 나서부터는 그 홀로만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관자놀이를 매만지던 그는 예기치 못한 느낌에 몸을 틀었다. 아무래도 반가운
이가 찾아온 모양이다. 그의 입가는 절로 호선을 그려낸다. 그의 간절했던 마음처럼 그곳에는‥‥‥.
◆ ◆ ◆
[채윤당彩贇堂]
넘실넘실 불어오는 춘풍에 가격을 매길수도 없는 고운 비단이 흩어진다. 그것을 정돈하느랴, 이것저것
신기하고 화려하며 난생처음 보는 궁궐을 바라보느랴 한이는 정신이 없다. 그러나 려한만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잘하는 일인지 잘못하는 일인지 아직까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다만 이렇게 웅장한 전각 앞에서 작아져버린 자신을 탓하는 수 밖에. 세도가와 혈연관계를 맺고 있다면
한 번쯤을 찾아와 보았을 법도 하지만 려한의 신분이 신분인만큼 려한은 한번도 황궁 구경을 해본 적이
없다. 맥없이 고개를 쳐들어 하늘에 걸쳐있는 지붕의 끝자락에 시선을 두고 만다.
그녀에게 소속된 상궁 1명과 나인 7명. 황제의 품계가 낮은 후궁에게 소속되는 양이지만 그것은 훗날에
달라져 있을 것이다. 애당초 그녀를 황실인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신상궁의 안내에 따라
내실에 들어서니 내실은 더욱 장엄하다.
"나흘간 이곳에서 머무신 후에 황후궁으로 뫼시겠나이다."
"사치스러워요."
노기 띈 얼굴로 앉지도 못하고 있던 려한은 입꼬리를 말아올린다. 그것은 필경 조소, 상궁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처량하기 짝이 없는 비웃음. 벌써부터 황후격에 가까운 대접을 하는 궁녀들도 불편하
며 이런 거추장스러운 의복도 불편하다. 그럼에도 불평 한마디 해보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가엾다.
"아씨, 아씨. 전각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지요? 그렇다면 상궁 마마님께서 다른 전각으로 옮겨주신다고
하셨사와요. 어찌하올까요? 전해올리까요? 한이는 이곳도 좋은데‥"
"‥ 흐음."
철없는 계집은 그렇게 입을 놀렸지만 그것까지 오냐오냐하면 신경써 들어줄 여력이 려한에게는 없다.
아무렇게나 빼어진 의자에 몸을 깊게 묻으며 애꿎은 비단을 꼬깃꼬깃 쥐어내면서 잔주름만 늘려본다.
"아아, 마마님!! 이것이 다 금박이 아니래요?"
휘장을 길게 잡아 올리며 이리저리 뛰어넘던 한이는 상궁의 짤막한 손짓으로 조용해졌다.
"미예야, 한이 또한 데리고 가서 아이들과 함깨 궁녀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여라. 황후마마를 뫼시게
될 아이를 아무렇게나 두어서야 되겠느냐."
상궁의 한마디에 미예라는 소녀는 냉큼 한이의 팔목을 부여잡고 내실을 빠져나갔다. 한이의 방정맞은
웃음소리도 사라진 곳은 그세 조용해졌다.
"마마‥"
"그런 호칭은 싫어요."
"딱히 칭할 호칭도 없거니와 곧 익숙해지셔야 하나이다."
"저의 이름은 수. 려. 한. 이예요."
"잊으소서. 이곳에서는 국모의 위치와 그에 걸맞는 행동이 중요시 될 뿐, 석자 이름은 필요치 않나이다."
려한은 허리춤에 손을 얹으며 의자에서 튕기듯이 일어섰다. 그러자 더욱 몸을 수그리는 상궁의 태도에
화도 내지 못한 채로 이마를 손으로 매만졌다. 아무렴 자기보다 연로한 사람이 앞에서 허리를 숙이는데
어찌 화를 낼 수가 있을까. 사가에서 가야할멈도 려한을 아씨라고 부르며 존대하였지만 이렇게까지 극
존대는 받아본 적도 없을 뿐더러 려한의 성미에 옳거니, 할 일도 되지 않는다.
"편하게 려한이라고 부르세요."
"마마, 오늘은 편히 쉬시고 내일부터 간단한 황실의 법도를 습득하셔야 하나이다. 모레는 예식의 절차
를 익히시게 되나이다."
"난‥ 그런 것을 배우려고 이곳에 온게 아니란 말이예요."
"황후의 위(位)에 오르기 위한 일부 과정일 뿐이오니 노하지 마소서."
"‥‥ 그런 말이 아니라 그 자리는 애당초 나의 것이 아니예요."
신상궁은 더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처음에는 엄격한 규율아래 자라온 뭇소녀들과 같아보였으나 보니
언제 어디로 튀어버릴지 모르는 천방지축 소녀 같았다. 그러나 제멋대로 구는 것 같지는 않고‥‥‥‥
여튼, 누구만큼이나 까다롭다고 여기고 있는 중이었다.
"‥‥ 이게 팔려온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래요?"
"마마!! 무슨 말씀을 그리 하오신지!!"
"나는 모르겠어요. 황궁의 마마들의 깊으신 속내는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다구요."
어느것 하나 내세울 것이 없었다. 출생이 천하고 외모가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서화에 능한 것도 아니
다. 결국 수씨라는 성씨 때문이다. 경화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드높은 수家의 여식이 죄인게지.
"‥‥ 이건 분명히 크게 잘못된 일이예요."
려한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자신이 들고왔던 보따리를 다시 챙겨 가슴에 안았다.
"마마?"
"저는 이만 가볼게요, 마마님!! 우리 한이는 길을 알고 있을터이니 곧장 집으로 오라고 전해주셔요!"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신상궁의 부르짖음에도 려한은 쿵쾅쿵쾅 굉음을 울리며 복도를 달려나갔다.
서있던 나인들은 갑작스런 그녀의 등장에 황급히 고개를 숙이느랴 정신이 없었다. 신상궁의 다급한
손길을 보고나서야 멀어진 그녀의 뒤를 쫓았다.
이놈의 궁은 왜이리 드넓은겐지. 그 전각을 빠져나오니 조금 전에 들어서면서 본 넓다란 앞마당이다.
려한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두눈에 힘을 주었다. 뒤에서 쫓아오는 나인들을 보니 수혜를 신을 겨를도
없어 보따리와 수혜를 가슴에 품었다. 영규오라버니가 탄신일에 선물하신거니 잊어버려서는 안됐다.
층층 계단을 재빨리 내려와 뒤를 힐긋힐긋 쳐다보면 달리던 려한.
그만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청평재신이 타지에서 들여온 비단으로 지어진 옷이 흙투성이가 되었다.
물론 지금 그녀에게는 그것이 중한 일이 아니었지만, 반사 작용처럼 고운 손으로 흙을 툭,툭 털어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새 그녀의 뒤에 질서정 연하게 서있는 나인과 신상궁, 그들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폐,폐하."
신상궁은 차마 송구스러워 그를 쳐다볼 용기가 없었다. 려한을 단장시켜서 그의 앞에 데려가는 것이
순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참으로 난감하였다.
폐.하라는 말에 그녀는 좁혔던 미간을 피려고 애쓰며 살짝이 그를 올려다 보았다. 매서운 눈매, 사부
인에게서나 볼 수 있었던 차가운 표정. 아니, 그에게서는 그조차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신상궁, 지금 이 무슨 일이오?"
꽁꽁 얼어붙은 호수에 단련된 철건이 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딸-꾹. 끄윽, 끅‥"
모두의 시선이 려한에게로 쏠렸다.
(+) 저도 배경음악을 무척 사용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주머니가 없어서 못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원래 가지고 있던 배경으로 올릴 수가 있던 것이였군요!! 지난 해에 다음에서 이벤트로 얻은 별로 음악
을 사두었는데 냐하하하~ 이렇게 쓰게 되네요 ^^ 저 홀로만의 카페에서 저 혼자 들었지라T_T
이제 님들과 몇개 안되는 음악을 공유할 수 있겠군요! 므흣스러운걸요~ ㅎㅎ
4章에 사랑스러운 꼬릿말을 남겨주신 사랑스러운 님님님♥
정프롬님 꺅♥ 그럼 프롬님의 품에 사요를 안겨드리올까요~ 경화국 대표 약골로 지정되어 있지만
이래뵈도 검사인데 말입니다.T_T 참 모순이지요? ㅎㅎ 그래도 좋으시다면.. 근데 이 녀석이 시스터
컴플렉스가 있어서리..(..*) 그렇고 그런 것은아니여요! 그냥 애지중지~
중독님 재밌으시다니 정말 다행이여요.T_T 매번 올릴때마다 그렇지만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옵니다.
저 나름대로는 열심히 쓰지만 다들 취향도 다르시니 말입니다~~ 하여도 중독님께서 재밌으시다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첫댓글 려한이 참! 귀여워요~(?) 여기서 넘어지는 씬이 들어가다니!! 다음 편을 얼른 올려주세요!
요녀석 사실은 엄청 덜렁이랍니다ㅜ_ㅜ 말괄량이 삐삐를 모델로 하고 싶지만 자꾸 이중인격을 만들고 있는 기분이 든답니다..ㅎㅎ 뭐, 그런 면이 조금이나마 없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여주로서 다해야할 소임과...(?) 아무튼 귀여운(?) 려한이 어여삐 봐주셔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