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다들 알듯 싶지만 오늘은 10.26 제 1차 특집으로 안중근의사의 생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다.
(내일은 친일매국노 오까모또 미노루의 실체를 다시 리바이벌 할 예정.)
<안중근 의사>
안중근(安重根)은 조선 왕조 말엽인 1879년 9월 2일 황해도(黃海道) 해주읍 (海州邑)광석동에서 태어났다. 안중근은 고려 말의 이름난 유학자 안유(安裕)의 후손으로, 할아버지 안인수(安仁壽)는 진해현감을 지냈으며 집안이 넉넉해서 해주(海州)에서 알아 주는 큰 부자였다.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지혜가 남달리 뛰어났던 사람 으로,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안태훈은 조(趙)씨와 결혼하여 3남1녀 를 두었는데, 맏아들이 바로 안중근 (安重根)의사이다. 안중근은태어나면서 부터 가슴과 배에 검은 점 일곱 개가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아 태어났다 하여 자(子)를 응칠(應七)이라 했다.
안중근이 7세때, 아버지 안태훈이 김옥균 (金玉均), 박영효(朴泳孝),등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甲申政變)에 관련되었다는 의심을 받고 쫓기는 몸이 되었다. 다행히 고향으로 몸을 피한 안태훈은 벼슬에 대한 꿈을 버리고 가족을 모두 이끌고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 (信川郡 斗羅面 淸溪洞) 으로 이사 했다.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경치가 아름다운 청계동에서 안중근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안중근은 일찍부터 서당 에서 한학(漢學)을 배웠다. 그러나 안중근은 학문에 힘쓰기 보다는 사냥하기를 좋아했다. 특히 말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나 그 근처에서는 따를사람이 없었다.
1894년, 안중근이 16세 되던 해에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동학혁명(東學革命)이란 고부 군수 조병갑의 난폭한 정치에 견디다 못해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자,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이 동학군을 조직하여 관군과 싸움을 시작한 것으로, 이 일로 우리 나라에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들어와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나게 된다. 안중근이 살고 있는 청계동에도 동학군을 빙자하여 일반 민가에 처들어와 행패를 부리는 무리가 있어 안중근의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 사병 (私兵)을 조직해 이에 맞섰다.
이때, 어려서부터 정의롭고 용감했던 안중근은 아버지를 도와 사병을 이끌고 청계동 일대에 나타난 동학군을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 이듬해, 안태훈은 동학군을 물리치고 얻은 물건 가운데 천여 푸대의 곡식이 나라의 대신 어윤중 (漁允仲)과 민영준 (閔泳駿)의 것이니 돌려 보내라는 요청을 받는다.
이 일로 위험을 느낀 안태훈(安泰勳)은 몇 달 동안 성당에 몸을 피해 숨어 지내며 카톨릭교를 받아들여 신자가 된다. 그 뒤, 일이 잘 해결되자 안태훈은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에게도 카톨릭 교를 전하여 온가족이 카톨릭교의 신자가 된다.
이 무렵 , 안중근은 김홍섭 (金鴻燮)의 딸 김아려(金亞麗)와 결혼했다. 이듬해, 안중근은 프랑스인 홍석구(洪錫九) 신부(프랑스 이름은 빌레헴) 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도마'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홍석구 신부로부터 프랑스 말과 서양의 학문을 배워 새로운 사상에 눈뜨게 되었다. 그 뒤,안중근 은 홍석구 신부와 함께 황해도 일대를 돌며 카톨릭 교를 전하는 데 힘썼다. 또 우리 나라가 자주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재를 기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홍석구 신부와 함께 서울에 있는 민주교 (프랑스 이름은 뮈텔)를 찾아가 한국에 대학을 세우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 일로 안중근은 외국인은 믿을 수가 없다며 크게 실망하여 프랑스 말을 배우는 것도 그만두었다.
을사조약 1904년, 한국(韓國)과 만주(滿州)를 서로 차지하려고 러시아와 일본(日本)사이에 벌어진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일본은 1905년에 을사조약을 강제로 맺어 우리나라를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맺어지자 민영환(閔泳煥), 홍만식(洪萬植) 등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이에 항의했고, 장지연(張志淵)은 황성신문(皇成新聞)에 '오늘 목을 놓아 통곡한다.(是日也放聲大哭)'라는 논설을 발표했다. 또 전국 각지에서는 백성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항의가 끊이지 않았다.
이 무렵, 안중근은 청계동에서 신문, 잡지 등을 통해 나라 안팎의 일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안중근은 아버지와 의논한 뒤, 나라를 구할 결심을 하고 중국(中國)으로 떠났다. 그 당시, 중국의 산동성(山東省)이나 상하이(上海)에는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옮겨가 살고 있었으므로, 안중근은 그 곳에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일 터전을 만들고자 했다.
안중근은 중국에 도착해 산동성을 두루 둘러본 뒤, 상하이에 이르러 민영익(閔永翼), 서상근 (徐相根)등을 찾아다니며 뜻을 같이하자고 청했으나 ,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러던 중 안중근은 우연히 황해도(黃海道)에서 오랫동안 선교활동을 같이한 프랑스인 곽신부(郭神父)를 만나게 되었다. 안중근은 조국으로 돌아가 교육을 통해 백성을 깨우쳐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곽 신부의 충고를 받아들여 한국으로 돌아온다.
1905년 12월, 안중근이 조국에 돌아와 보니 그 동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중근은 몹시 슬퍼하며 그 해 겨울을 청계동에서 보냈다. 1906년 3월, 안중근은 진남포(鎭南浦)로호 이사하여, 삼흥학교(三興學敎)를 세웠다. 1907년 7월, 고종황제의(高宗皇帝)의 명을 받은 이준 등의 밀사가 "네덜란드 헤이그" 에서 열리는 민국 평화 회의에 참석하여 일본과 맺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압에 의한 것임을 세계에 널리 알리려던 '헤이그 밀사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물러나게 한 뒤, 우리 나라에 관한 모든 일은 일본의 감독, 승인 아래 행할 것을 내용으 로하는 '한일 신협약(정미7조약)'을 맺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군대를 해산하고 산림, 광산, 철도를 빼앗는 등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을 강력하게 밀 어붙이고 있었다. 안중근은 그 무렵의나라 안 사정을 지켜보며 교육만을 통해서는 망해 가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해외로 건너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할 것을 결심한다. 사실 이 때, 안중근의 나이 29세였다.
의병 안중근 (대한의군참모중장 안중근) 1907년, 안중근은 진남포를 떠나 간도(間島)를 거쳐 러시아 땅인 연해주(沿海州) 지방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1908년 봄, 안중근은 그 곳에서 김두성(金斗星)을 총독으로 하고, 이범윤(李範允)을 대장으로 하여 의병 부대를 조직하고 자신은 참모 중장이 되어 일제에 대항하는 투쟁을 시작했다. 그 해 7월,안중근은 의병 300여 명을 이끌고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함경도(咸鏡道) 경흥(慶興)으로 쳐 들어가 일본 군인과 경찰 50여명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곧바로 회령(會寧)으로 쳐들어가 일본군 수비대 5천여 명을 물리치는 등 13일 동안 30여 차례의 싸움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 안중근은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들을 국제법 에 따라 모두 풀어 주었는데, 이로인해 의병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뒤, 안중근이 이끄는 의병 부대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뿔뿔이 흩어지고,안중근도 굶주림에 시달리며 산길을 헤매다 간신히 살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때, 안중근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다른 대원들을 격려했다. 男兒有志出洋外 事不入謀 難處身 望順同胞警流血 莫作世間無義神 그 뒤, 안중근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프스크, 흑룡강성(黑龍江省)등을 돌아다니며 교포들을 모아 강연도 하고 단체를 조직하는 등, 교포들에게 독립사상을 북돋워 주는 일을 계속했다. 이 무렵, 안중근 그곳의 교포 사이에까지 퍼져 있던 일본에 협력하는 단체인 일진회(日進會)의 무리들에게 붙잡혀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넘기기도 했지만, 한순간도 민족의 자주 독립을 향한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09년 2월, 안중근은 엔치아부근의 카리 마을에서 믿을 수 있는 동지들을 모아 동의단지회 (同議斷指會)를 결성했다. 안중근은 그 곳 교포 사회에도 일본에 협력하는 무리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안중근은 김기룡(金基龍), 강기순(姜起順), 정원주(鄭元柱), 박봉석(朴鳳錫) 등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왼쪽 약손가락을 잘라 피로써 태극기에 '대한 독립'이라고 쓴뒤, 만세를 불렀다. 이들 12명의 애국 지사들은 몸과 마음을 바쳐 온 국민의 소망인 독립을 이루기로 맹세한 것이다.
하얼빈 의거 1909년 가을,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등박문이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뒈진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1841. 10. 14~1909. 10. 26 ) 러일전쟁(露日戰爭)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을 합병한 뒤 중국 땅인 만주까지 빼앗을 계획을 세우고, 이등박문을 하얼빈으로 보내 러시아의 재무 대신 코코프체프와 협상을 하려는 것이었다 . 이등박문은 우리나라와 을사조약을 강제로 맺고 한국의 초대 통감을 지낸 뒤, 일본으로 돌아가 추밀원(樞密院) 의장이 된 침략의 우두머리였다. 안중근은 침략자 이등박문을 없애고 일본의 침략 정책을 세계에 알릴 하늘이 주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대동공보사(大東共報社) 사무실에서 독립 투사 정재 관, 김성무 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이등박문을 없앨 계획을 세운 뒤, 1909년 10월 21일 동지 우덕순과 함께 하얼빈으로 떠났다. 하얼빈은 러시아의 동청(東淸) 철도의 종착지인 동시에 정치, 문화의 중심지였다.
우덕순(禹德淳)과 함께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가는 도중에 러시아 말을 잘하는 유동하(劉東夏)를 통역으로 삼았다. 또 하얼빈에 도착한 뒤에는 교포 김성백(金成白)의 집에 머무르며 다시 조도선(曺道先 )을 동지로 맞았다. 안중근 은 동지들과 함께 밤새 여러 신문을 모아 이등박문이 만주에 도착하는 시간과 환영 행사 등에 관항한 정보를 모았다. 이때, 안중근은 일본 의 남만주 철도와 러시아의 동청 철도가 엇갈리는 채가구(蔡家溝) 역에서 이등박문이 열차를 갈아탄다는 사실을 알아 내고, 채가구에서도 기회를 엿보기 로했다.
안중 근은 의거 전날 밤, 자신의 굳은 뜻을 담은 시 '장부가(丈夫歌)'를 지었다. 장부가 세상에 남에 그 뜻이 크도다 하얼빈 역에는 벌써부터 러시아 군인들과 환영객 들이 많이 나와서 이등박문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중근은 역 안에 있는 찻집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열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오전 9시쯤이 되자 이등박문이 탄 열차가 하얼빈 역에 들어와 멎었다.
얼마 후, 러시아 재무 대신 코코프체프와 일본 총영사(總領事)의 안내를 받으며 이등박문이 기차에서 내렸다. 안중근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일이 반드시 성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 뒤 찻집에서 나왔다. 이등박문은 러시아 군 의장대를 사열한 뒤, 환영객들로부터 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안중근은 러시아 군대 뒤 에서 이등박문을 쏠 기회를 노렸다. 안중근은 이등박문이 10보 정도 떨어 진 거리에 왔을 때, 재빨리 권총을 꺼내 이등박문을 향해 3발을 쏘았다. 이등박문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 순간, 안중근은 자기가 혹시 이등박문이 아닌 다른 사람을 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일행중 의젓해 보이는 사람 들을 향해 3발을 더 쏘았다. 이등박문을 뒤따르 던 하얼빈 일본청영사가 가와가미 도시히꼬, 비서관 모리야스 지로, 남만주철도(南滿州鐵道) 이사 다나까 세이지로(田中淸次郞)등이 차례로 쓰러졌다. (이등박문 처단 후 체포되는 의사.) 그때, 러시아 헌병 들이 안중근을 덮쳤다. 안 중근은 '코레아우라! (대한만세)' 라고 외친뒤 순순히 체포 됐다.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쓰러진 이등박문은 곧 수행하던 의사가 응급 처치를 했지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국에 이어 만주(滿州)를 집어삼키려던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우두머리 이등박문은 안중근의 손에 최후를 맞은 것이다. 이등박문이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은 곧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동경일일신문(東京日日新聞) 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등의 호외가 쏟아져 나왔고, 전세계가 떠들 썩했다.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환호를 보냈으나 한국, 중국의 친일파 들은 매우 당황했다. 중국 사람들은 안중근 의사가 마치 자기들의 원수 를 갚은 것처럼 기뻐했다.
당시중국의 국가 주석 이었던 원세개(위안스카이)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 를 듣고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찬양하였다. (원세개(袁世凱, 위안스카이 1859 ~1916. 6. 6.):청나라 말의 정치가,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 안중근 의사 만(安重根義士輓) 平生營事只今畢 死地圓生非丈夫 身在三韓名萬國 生無百世死千秋 평생을 벼르던 일 이제야 끝났구려 죽을 땅에서 살려는 것은 장부가 아니고말고 몸은 한국에 있어도 세계에 이름 떨쳤소 살아선 백 살이 없는데 죽어서 천 년을 가오리다 의거 직후 안중근 의사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러시아 기병 대위 니키프로프에게 체포되어, 하얼빈 역에 있는 러시아 헌병파출소로 끄려가 간단한 조사를 받았다.
그 날 오후, 안중근의사는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졌다.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죽인 장소가 러시아 땅인 하얼빈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재판소에서 안중근 의사를 재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 사건이 정치적으로 복잡한 문제라고 생각하여, 안중근 의사를 일본 총영사관에 넘기고 재빨리 발을 뺀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조사를 받고 있는 동안 우덕순, 조도선 등 사건과 관련된 동지들이 하나둘 씩 잡혀 들어와 일본 총영사관 지하실에 갇혔다.
그 뒤, 여순(旅順)에서 온 미조부찌 다가오 검찰관이 안중근 의사를 조사했다. 안중근은 이등박문을 죽인 이유를 묻는 미조부치 검찰관의 질문에 이등박문의 죄악을 15 가지로 나누어 대답했다. (거사를 행하시고 감옥에서의 모습) (안중근 의사에게 총살당한 이등박문) 내가 이등박문을 죽인 이유는 이러하다. 안중근 의사는 이등박문의 죄악을 하나하나 들었다. 안중근 의사에게 이등박문을 죽인 이유를 듣고 난 미조부찌 검찰관은 매우 놀라면서 "이제 그대가 하는 말을 들으니, 그대는 참으로 동양의 의사라 하겠다. 그대는 절대로 사형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안중근 의사는 "내가 죽고 사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고, 이 뜻을 어서 일본 천황에게 아뢰어라. 그래서 하루빨리 이등박문의 옳지 못한 정책을 고쳐서 동양의 위태롭고 급한 사태를 바로잡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대답했다.
여순 감옥 생활과 공판 (수감 시기의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 있는 일본 총영사관 지하 감방에서 1차 조사를 받은뒤, 11월 3일에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과 같이 여순(旅順) 형무소로 옮겨졌다. 여순(旅順)은 중국 북방에 있는 최대의 항구도시인 대련(大連)시의 6구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은 러일 전쟁이 끝난 뒤 이곳에 관동 도독부를 설치하고, 총독의 지휘, 감독아래 형무소장을 두어 형무소를 맡아 보게 했다. 안중근 의사가 여순(旅順)감옥에 갇혀있을 때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그 동안 여러 자료에 나타난 것을 종합해 볼 때, 일본은 안중근의사를 정중하게 대해 주었으며 고문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 의사는 여순 감옥에서 쓴 자서전 '안응칠 역사(安應七 歷史)'에서, 검찰관이 조사를 마친 뒤에는 언제나 담배를 권하고 서로 토론을 했으며, 형무소장과 다른 관리들도 모두 친절하게 대해 주어서 고마웠었다고 쓰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1월 14일 여순 에서 두 번째로 검찰관의 조서를 받기시작해서 이듬해 1월 26일까지 모두 11번의 조사를 받았다. 그런데 조사가 횟수를 거듭할수록 검찰관의 태도는 점점 강압적으로 변해갔다. 당시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 지방 법원에서는, 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죽인 데에는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으며, 안중근 의사가 신앙심이 두터운 점 등을 높이 평가하어, 안중근 의사에게 무기 징역을 내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 내의 강경파가 서둘러 안중근 의사를 사형시키라는 명령을 보내옴에 따라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 법원의 태도가 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7.여순 지방 법원의 공판 공판정에는 많은 신문 기자들이 이 재판을 지켜 보러 와 있었다.
오전 9시 20분경, 마침내 재판이 시작되었다. 마나베 판사는 네 사람의 피고인들은 일일이 확인한 뒤, 안중근 의사부터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마나베 판사는 안중근 의사의 가정 환경, 교육 정도, 신앙 등에 대해 차례로 물은 뒤, 한국을 떠나 해외로 온 목적에 대해 물었다.
안중근 의사는 해외로 오게 된 목적이 첫째는 교육을 통해 한국 사람들을 깨우쳐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모국의 의병으로서 나라를 위해 교포 사회를 돌며 그들을 깨우치기 위한 연설을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어 마나베 판사는 안중근 의사에게 이등박문을 죽인 이유를 물었다. 공판정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얼마 후, 안중근 의사는 당당하게 그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이 일은 나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한 것이다. 일본 천황은 러일전쟁(露日戰爭) 이 동양의 평화를 지키고 한국의 독립을 굳건히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일본이 전쟁에 이겼을 때, 한국인은 마치 우리 나라가 승리한 것처럼 기뻐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이등박문이 한국을 협박하여 을사조약(乙巳條約)을 맺었다. 그것은 일본 천황의 약속과 반대되는 것으로, 이에 한국인은 모두 이등박문을 미워하게 되었다. 이어 이등박문은 강제로 우리나라와 7조약을 맺어 한국인의 불이익은 더해갔다. 또한 한국의 황제를 강제로 물러나게 했기 때문에 한국인은 이토 히로부미를 원수로 삼게되었고, 그래서 내가 이등박문을 죽인 것이다. " 의거 이유(義擧 理由)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한국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도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기때문이다.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한국 의군 참모 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 해서 한것이니 만국 공법에 의해 처리하도록 하라 안중근 의사는 이등박문을 죽인 이유를 논리적으로 말했다. 그 뒤, 재판은 일본 정부의 강압에 의해 1주일 만에 서둘러 모두 끝났다.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이 공판이 무효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그 이유는 우선 이 사건이 러시아 땅인 하얼빈에서 일어났고, 안중근 의사가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마음대로 일본 형법에 의해 재판을 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강대국이 국제법과 국제 관례를 무시하고 힘이 약한 나라의 국민을 마음대로 재판한 하나의 예이다.
다음은 외국인 민선(民選) 변호인단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이 일방적으로 일본인 관선 변호인을 지명하여 재판을 진행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법률 위반일 뿐 아니라 상식을 벗어난 일이다. 또한 중요한 점은 안중근을 비롯한 피고인들에게 자신들의 생각을 밝힐 기회를 주지 않은 상태에서 재판을 서둘러 진행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하루빨리 이토 히로부미의 옳지 못한 정책을 고쳐서 동양의 위태롭고 급한 사태를 바로잡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대답했다.
안중근 의사 순국
1910년 2월 14일, 마지막 공판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이 선고되자,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느냐며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고한다. 이러한 안중근 의사의 태도에는 항소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2월 19일, 안중근 의사가 항소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자 일본정부는 크게 놀랐다. 고등 법원장 히라이시(平石)는 일부러 형무소로 안중근 의사를 찾아와 항소할 것을 권했으나, 안중근 의사는 찾아와 항소하지 않은데에는 옳은 일을 했으니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지 않겠다는 본인의 굳은 의지뿐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놀라운 애국심이 뒷받침이 되어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안중근의사의 두 동생을 급히 여순(旅順)으로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일렀다.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이소식이 알려지자, 한국의 대한 매일 신보와 일본의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는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안중근 의사는 항소를 포기하기로 결심한 뒤, 사형이 집행되기를 기다리며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自敍傳)'안응칠 역사'는 1909년 12월 13일에 쓰기 시작해서 1910년 3월 15일에 끝마친 것으로, 출생에서부터 의병 활동과 하얼빈 의거 그리고 여순에서 사형 선고를 받기까지의 옥중 생활을 기록하고있다. 안중근 의사는 자서전을 끝마친 뒤, 3월 15일부터 '동양 평화론(東洋平和論)'을 쓰기 시작했다. 이 때, 안중근 의사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염려하여, 히라이시 고등 법원장에게 '동양평화론'이 완성될 때까지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청해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 뒤, 3월 26일 에 사형이 집행되어 안중근 의사는 불과 10여 일 동안에 '동양평화론'의 머리말과 제1장인 전감(前鑒)의 일부분밖에 쓸 수가 없었다. '동양 평화론'은 안중근 의 사의 사상을 대표하는 것이다. '동양 평화론'은 일본, 한국, 중국이 각기 자주 독립국으 로서 힘을 합하여, 서양의 침략을 막아 내자는 데 근본 정신이 있었다.
이것은 일본이 침략 전쟁을 감추기위해 주장햇던 '아시아 연대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상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옥중에서 자서전과 '동양평화론'을 쓰며 자신의 삶과 사상을 정리하 는 한편, 형무소장에게 부탁해 홍석구(洪錫九)신부로부터 마지막 고해 성사를 받았다. 평소 신앙심이 깊었던 안중근의사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신앙인으로서 인생 을 끝마치려 했던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 집행 전날 국내외의 동포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신부님과 두 동생(좌측)에게 마지막 유언하시는 모습) 동포에게 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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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어느 천민의 블로그. 원문보기 글쓴이: 명박퇴진-안모씨
첫댓글 자료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