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깨는 자 -히엔과 마츠카 (4)-
-------------------
붉은, 붉디 붉은…..
-------------------
경비조 1소대장인 하나피언 다그렌이 결국 히엔의 앞에 나섰다. 경비조를 제외한 아스트르특전대 전 병력이 항구에 집결되어 있기에 경비조만이 히엔을 포위하게 된 건 정말 필로그네측으로선 악운이었다. 두 자루의 검을 휘두를 때마다 시체를 만들어내는 히엔의 신위에 질려 하나피언은 결국 남은 경비조를 물러서게 하고 그가 히엔의 앞에 섰다.
“네놈의 신위는 인정을 하….컥!”
하나피엔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횡으로 그어진 검에 깜짝 놀라 뒤로 물러 섰지만 이미 검은 그의 목을 삼분지 일을 갈랐다. 잘린 기도로 피가 들어가며 숨쉬기 곤란해져 갔지만 목근육이 잘려진 상태에서 기침이 나올 리 없었다. 하나피엔은 이 어이없는 상황에 자신의 방심을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쓸데없는 자책이었다. 피가 폐 속으로 침투하며 더욱 더 숨이 막혀왔다.
“끄윽 ……..끅!”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상한 신음만을 흘릴 뿐이었다. 히엔은 망설이지 않고 하나피엔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하나피엔은 간신히 검을 들어 막아내었으나 균형을 잃고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자신들의 소대장이 그런 처참한 모습을 보이자 남은 경비조 대원들은 히엔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경비조 1소대와 2소대의 총원은 하나피엔을 포함하여 모두 41명이었지만 이제 남아있는 자는 하나피엔을 제외하고 11명의 인원뿐이었다.
“죽어라!”
조금은 세속적인 기합과 함께 맨 앞으로 달려 든 2소대장 칼라인의 검이 히엔의 오른손에 쥐어진 검신이 두터운 검에 막힘과 동시에 히엔의 장검이 칼라인의 복부를 꿰뚤었다. 곧이어 히엔의 장검이 비틀어지고 횡으로 그어지면서 칼라인의 갈비뼈를 매달고 옆구리로 튀어 나오며 뒤로 달려드는 자의 허리를 베었다.
샤각!
비명조차 남기지 않는 쾌검을 보여준 히엔은 곧바로 찔러져 오는 검 하나를 옆구리 사이로 피하며 양검을 휘둘러 가까이 다가온 두명의 목을 베며 그들을 밀치고 구르며 장검을 휘둘러 또 한 자의 발목을 잘랐다. 그 순식간에 일어난 그 경이적인 몸놀림에 나머지 경비조원들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히엔은 물러서지 않고 발목이 잘려 쓰러진 자의 심장에 검을 박았다. 순식간에 경비조원 다섯 명의 생명이 사라졌다. 히엔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쓰러진 자의 심장을 터트린 검을 뽑으며 물러선 6명을 노리며 다가섰다. 뒤로 물러서는 자들 중 가장 가까운 자의 정수리에 검을 박았다. 이어서 장검이 다른 자의 목젖을 노리고 찔러져 들어 갔다.
챙!
히엔의 검은 뒤늦게 달려든 하나피엔의 검에 저지되었다. 히엔은 검이 막히자 뒤로 물러서며 하나피엔과 살아나은 경비조원들을 쳐다보았다. 그는 검을 들어 그들을 가리켰다. 마치 저승사자의 예고 같은 동작이었다.
“모두 여기서 죽어라.”
히엔의 무뚝뚝한 말이 살아남은 이에게는 너무도 공포스럽게 전해졌다. 하나피엔은 핏물이 잠식하는 자신의 폐에서 바늘로 헤집는 것 같은 고통이 밀려옴에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음을 느끼며 살아남은 경비조원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들이 교환하는 눈빛에는 비장함이 서려있었다. 하나피엔은 검으로 자신의 가슴을 찔러 구멍을 내었다. 폐 속에 차있던 피가 흐르며 조금은 고통이 누그러지는 걸 느꼈다.
“아아아앗”
조원 중 하나가 기합과 함께 히엔에게 달려들었다. 히엔이 휘두른 검에 손목과 함께 머리의 반이 날라갔지만 히엔의 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뇌가 날라가며 즉사했을 테지만 히엔의 오른쪽 다리를 꽉 움켜진 채 떨어지지 않았다. 곧바로 또 다른 이가 히엔에게 검을 던지고는 두손을 번쩍 들며 히엔에게 달려 들었다. 무방비의 그자를 히엔의 검이 반으로 갈랐지만 그자의 복부를 뚫고 나온 다른 이의 검에 히엔은 어깨를 찔렸다. 히엔은 어깨를 찔림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짧은 검으로 그 자의 관자놀이를 관통시켰다. 그자는 관자놀이를 관통 당하면서도 히엔의 손을 꽉 잡고 늘어졌다. 나머지 인원들도 히엔의 검에 목숨을 내주며 히엔의 몸에 달라붙었다. 그들 덕에 움직임이 둔해진 히엔에게 하나피엔의 최후 절기가 날아들었다.
“끄아아아아….”
상황종료. 양손에 매달린 자들 때문에 양손을 움직일 수 없던 히엔은 손목만을 튕겨 양검을 하나피엔에게 던졌다. 장검은 정확히 하나피엔의 검과 검끝을 맞추며 하나피엔의 검을 산산히 부서뜨리며 조각났고 또 다른 검은 회전하며 하나피엔의 머리를 세로 방향으로 두동강을 내버렸다. 하나피엔의 머리가 정확히 반으로 쪼개지기 시작했다. 하나피엔이 그 와중에 바라본 마지막 세상은 마치 원래는 완벽히 겹쳐져 있던 두개였다는 듯이 두개로 분리되며 환한 빛 속에 사라졌다. 카멜레온이 바라보는 세상은 이럴까?
히엔은 자신의 몸에 달라 붙어 있는 시체들을 떼어내고는 조원들이 들고 싸우던 검 두자루를 다시 양손에 들어 쥐고는 해안 쪽을 향해 무덤덤히 걷기 시작했다. 방금 전에 찔린 왼쪽 어깨에서 피가 흘렀지만 이미 온몸에 피를 뒤집어 써서 티가 나질 않았다. 멀찍이 보이는 수평선으로 반쯤 가려진 태양도 선혈을 흘리며 세상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 덕분에 핏물에 잠긴 로젠다로마을의 거리는 참혹스럽다기보다는 고요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그 거리에 히엔의 그림자가 길게 누웠다. 그 때 히엔의 앞을 막는 사내가 있었다.
“루빈에도 너 같은 검사가 있을 줄 몰랐는 걸…..”
그림자에 있다가 히엔의 옆으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사내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불끄는 대신 이곳에 누워 낮잠을 청한 보람이 있군..”
온통 붉은 세상 속에서 유난히 붉은 갑옷을 입은 사내였다. 자신의 키보다도 커다란 검을 꺼내 들며 말을 이었다.
“난 레알아스트르의 7인중 1인 슐란 하이머라 한다.. 네 검을 내 직접 받아 보겠다.”
--------------------------
피의 소환사 , 슐란 하이머
석양속에서…
--------------------------
히엔의 쌍검이 허공에서 교차하였다.
“핫! 정말 빠르군…길렌보다 더 빠른 것 같은데…”
바닥을 그으며 허공으로 뻗어진 히엔의 쌍검을 피하며 슐란이 말했다. 말이 이어지는 중에 슐란의 검 또한 길게 횡으로 그어졌다. 2미터는 되어 보이는 장검은 히엔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히엔은 뒤로 물러서도 슐란의 검의 사정거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순간적인 판단을 내리고는 슐란에게 다가서며 검을 내리 쳤다. 그러나 슐란은 계산 하였다는 듯이 검을 순간적으로 거두며 다가오는 히엔의 배를 걷어 찼다.
퍼억!
히엔은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복부를 가격 당해서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슐란은 그런 히엔을 회수하던 검의 탄력으로 회전하며 히엔의 머리를 노리며 검을 올려쳤다. 슐란의 검은 너무도 긴 탓에 검의 절반 가량이 땅을 가르고 있었지만 땅을 가르고 있는 속도라고는 믿을 수 없는 빠르기였다. 그리고 슐란의 외침이 있었다.
“죽어라!”
그대로 베어졌다면 히엔은 머리뿐이 아니라 몸 전체가 반으로 쪼개졌을 테지만 히엔은 쌍검을 교차해서 땅에 박았고 슐란의 검은 그 쌍검의 교차점에 막히며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를 내었다.
챙!
“웃기지 마라! 크아아아앗!”
슐란은 괴성과 함께 검을 두 손으로 잡고 그대로 검을 들어 올렸다. 슐란의 검을 막고 있던 히엔은 슐란의 괴력에 검과 함께 그대로 공중에 떴다. 슐란은 그대로 다시 히엔의 무게를 탄력으로 이용하여 한바퀴 회전하며 아직 공중에 떠있는 히엔의 정수리를 노리며 떨어졌다.발 디딜 곳이 없다면 움직임이 둔해지기 마련이라 히엔의 검은 늦었고 슐란의 검을 막은 검이 자신의 어깨에 반쯤 들어가 있었다.
“정말 엄청난 놈이군…. 살을 내주고 뼈를 치는군……”
또 하나의 검은 핏빛 갑옷 틈새를 뚫고 복부에 박혀 있었다. 슐란이 말한 그대로 히엔이 검 두 개로 막았다면 상처 없이 막을 수 있었을 것이지만 히엔의 계산은 그것을 넘어 자신의 근력과 비교적 단단한 자신의 어깨뼈를 이용해서 슐란의 검을 막고 다른 검으로 슐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준 것이었다.
“하지만 넌 여기서 죽어라…..”
슐란의 검에 힘이 가해졌다. 히엔의 어깨뼈에서 금 가는 소리가 났다. 히엔과 슐란의 눈이 마주쳤다. 히엔이 슐란과 마주친 뒤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죽어라.”
히엔의 검이 뒤틀리며 슐란의 배속을 헤집었다. 창자가 히엔의 검에 감기며 슐란에게 극심한 통증을 선사했다.
“크윽! 넌 대체 왜 혼자서 우리 필로그네에 대항하는 것이냐?”
슐란은 히엔에게 신음과 함께 질문을 던지며 검에 힘을 한껏 가했다. 히엔의 검이 히엔의 뼈를 가르며 더욱 더 깊이 들어갔다. 히엔은 그에 개의치 않고 검을 뒤틀은 채 심장을 향해 가르기 시작했다. 그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죽기 위해서다.”
슐란의 갑옷엔 이미 많은 피가 묻었지만 원래가 핏빛인 갑옷이라 흔적이 남지 않았다. 피의 소환사라 불리며 숱한 전설을 남긴 슐란 하이머가 항상 핏빛갑옷을 즐기는 이유는 다른 이의 피가 자신의 갑옷에 묻어서 흔적을 남기는 것이 싫어서라고 그가 과거의 언젠가 말했었다. 그는 지금 이렇게 말한다.
“무슨 뜻이냐?”
슐란의 갑옷에 슐란의 피를 먹인 최초의 인간, 아니 세상 아래의 모든 것을 포함하여 유일한 존재인 히엔이 대답한다.
“네놈들을 모두 죽이지 않고는 난 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슐란의 무릎이 땅에 닿았다. 히엔의 검을 찍어 누르던 검에도 힘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슐란이 고개를 떨군 채 다시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렇군… 이제 그만 검을 뽑아 주지 않겠나?”
히엔은 무심한 눈빛으로 슐란의 몸에서 검을 뽑아 내었다. 슐란은 이제 생명이 다하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조금 비켜 서 주게나.. 석양을 가리지 말고… 마지막 부탁이네….”
피의 소환사 슐란 하이머.
로젠다로의 한 마을에서 석양을 받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제 영원히 보지 못할 그의 마지막 세상은 너무도 붉은 석양 속에서 너무도 눈부셨다.
“저녁엔 노을이 아름답고….”
눈을 감고 슐란 하이머가 중얼거린 마지막 말이었다. 히엔이 그 석양 속으로 석양보다 더 붉은 피를 흘리며 두 손의 검을 땅에 끌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히엔의 모습이 멀어지고 슐란 하이머 앞에 온통 검은 색으로 치장한 남자가 나타났다.
“당신의 마지막 말이 맘에 들었어. 언블러드!.”
루빈의 언어도 필로그네의 언어도 아닌 말로 지껄인 그 검은색의 사내의 손에서 푸른 빛이 일어나 슐란의 몸을 휘감았다. 그러자 슐란의 몸에서 흐르던 피가 멈추었다.
“살 수 있을지 없을 지는 당신한테 달렸다구…그럼..”
그 검은색의 사나이는 그렇게 말하며 히엔의 뒤를 쫓았다.
저녁엔 노을 아름답고
무엇이 하루를 채웠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지만
너 이외엔 아무것도 없더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