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개요 및 매월당의 생애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습니다. 매월당 김시습 선생이 돌아간 지 5백여 년이 지났습니다. 선생이 남겨놓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 그 가운데서도 가장 핵심이라 할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를 재조명하고 소설의 상징성과 콘텐츠 구축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작품이란 작가가 살았던 시대상과 작가의 정신세계를 반영합니다. 먼저 '만복사저포기'의 작가인 매월당 김시습 선생이 살았던 자취의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심유적불(心儒蹟佛)의 삶이었습니다. 정신적으로는 생육신으로서의 불사이군의 절의(節義)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의 행적은 불교의 승려로서의 자취를 남겼습니다. 31살(1466) 무렵에 경주 남산의 용장사에 머물러 약 7년 동안 살면서 금오신화를 썼습니다. 여기 금오(金鰲)란 금오산(468m)을 이름이요, 신화(新話)란 새로운 형태의 이야기 곧 소설이란 뜻입니다. 명나라 구우(瞿佑)의 전등신화(剪燈新話)를 표방한 작품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2) 원효(元曉) 대사를 표방하였습니다. 생사를 넘나들며 거칠 것이 없이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一切無㝵人 一道出生死). 원효 대사가 임금의 사위라는 귀족의 자리도 박차고 민중 속으로 들어갔던 분이라면, 매월당은 양녕대군의 추천으로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으나 거절한 것 또한 유사한 점입니다. 동두천의 소요산은 원효가 자재암에서 수행하였던 곳인데 매월당이 이 산을 거닐었다고 하여 소요산이라고 했다는 유래담이 있습니다. 두 분은 결혼했던 승려라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3) 방랑의 저항 시인이었습니다. 매월당은 5살 때 세종에게 그의 뛰어난 시재를 인정받아 비단 선물을 받았던바, 장래가 촉망받던 천재 시인이었습니다. 오대산의 오세암 또한 매월당 관련의 암자 이름입니다. 계유정란(癸酉靖亂, 1453) 관련하여 수양대군이 16살의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빼앗음을 반대,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죽은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死六臣)과 김시습을 비롯한 생육신(生六臣)이 있었습니다. 처형을 당하여 거리에 나뒹군 사육신의 시신을 승려의 몸으로 매월당 자신이 몸소 시신을 거두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단종이 영월에서 사약을 받고 돌아갔을 때 엄흥도와 함께 임금의 시신을 수습하고 3년 상을 치렀습니다.
4)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같은 불서 번역에 잠시 참여했습니다. 사육신의 명복을 빌기 위한 활동이었습니다. 그 뒤로 세조가 매월당을 불렀으나 끝까지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5) 농민의 참혹한 생활상을 고발하며 실천적인 수행을 했습니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고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몸소 크고 작은 농사를 지으며 농민들의 고통스러운 참상을 글로써 고발하기도 했습니다.
6)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기반한 성리학의 수행자였습니다. 정신이 물질을 지배한다는 것인데 뒤에 이율곡이나 서 선생이 전승하였습니다.
2.0. '만복사저포기'의 상징성
발단 : 남원고을의 노총각 양생(梁生)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홀로 외롭게 살았다. 만복사(萬福寺)에서는 매년 3월 24일 복회(福會)를 열어 탑돌이를 하여 젊은 남녀들이 등불을 켜고 소원을 비는 풍속이 있었다. 양생 또한 복회에 나아가 윷놀이인 저포(樗蒲)를 갖고 소원을 빌었다. 부처님 앞에 나아가 윷놀이를 하여 자신이 이기면 좋은 짝을 점지해 달라며 윷가락을 던졌더니 마침내 양생이 이겼다. 양생은 매월당 자신이고 왜구가 침략한 남원은 왕궁이다. 남원의 옛 이름은 고룡, 대방 모두가 용 상징 곧 임금의 행궁이 있었던 곳이다. 단종의 영월 적소를 상징한다.
전개 : 양생이 불상 뒤에 숨어 꽃다운 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득 웬 16세쯤 되는 묘령의 귀신 처녀 곧 귀녀가 들어와 불전에 짝을 찾는다는 축원문을 읽고 있었다. 예언대로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고 인연을 맺고 여인은 양생을 자신의 개령동 집으로 데리고 갔다. 왜구의 침략에 수절하려다 희생당한 귀녀는 계유정란으로 죽은 단종의 화신일 수 있다. 개령동 집은 실상 귀녀의 무덤이었다.
위기 : 양생은 여인과 함께 사흘 동안 운우의 정을 나누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사흘 뒤 여인은 양생에게 이별할 때가 되었다고 한다. 그곳의 사흘은 인간 세상의 3년에 해당한다. 헤어질 때 정표로 여인은 양생에게 은잔을 주며 내일 보련사에 가서 자신의 부모를 만나라고 일러 준다. 여기 3년은 단종의 3년상을 이른다.
절정 : 다음 날 양생은 보련사로 가는 길에서 여인의 부모와 만나게 된다. 고을의 선비인 여인의 아버지를 따르던 마부의 눈에 양생이 지닌 은잔을 보고 주인에게 알린다. 주인은 양생에게 어떻게 은잔을 얻게 된 것인가를 묻는다. 은잔을 얻게 된 과정을 말한 양생은 여인의 부모로부터 삼 년 전 그녀가 왜구의 침탈을 당하여 정절을 지키려다 죽었음을 알게 된다. 보련사에 여인의 부모와 함께 간 양생은 그녀의 부모에게 죽은 딸이 음식을 먹는 혼령의 숟가락 소리를 듣게 하여 준다. 부모는 양생을 사위로 인정하고 더불어 두 사람이 결혼을 허락한다. 생육신과 사육신이 하나의 뜻으로 단종을 만날 수 있게 된다(同心結).
결말 : 여인과 헤어진 양생은 그녀 대신에 그녀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물로 개령동을 찾아가 여인의 무덤에서 정식으로 장례 절차를 밟는다. 여인의 혼령이 양생에게 고맙다며 덕분에 자신은 다음 세상에 남자로 태어났다. 양생은 장가도 들지 않고 약속을 지키면서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고 살았다. 윤회를 따라 남자로 부활한 귀녀는 단종의 부활을 염원하는 상징적인 주인공으로 볼 수 있다.
첫댓글 https://youtu.be/mJdCUYQh6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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