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박구리
이괄(1587~1624)은 어릴 때부터 시서(詩書)에 빼어난 자질을 보였으며 무예도 출중했다. 선조 때 무
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제수된 뒤, 현감‧형조좌랑‧군수‧부사‧목사 등을 두루 역임했다. 인조반란 때
는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재임하고 있었다. 광해왕 14년(1623), 이괄은 반군세력의 강력한 요청에 따
라 군대를 이끌고 상경하여 인조반란에 가담했다. 반군대장 김류가 정보가 누설되었다는 첩보에 지
레 겁을 먹고 몸을 숨기자 이괄은 선두에서 반군을 이끌고 도성을 점령했다. 뿐만 아니라 한성부를
수색하여 광해왕을 사로잡는 등 반란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
반란이 끝난 뒤에 행해진 논공행상은 해괴했다. 몸을 사린 김류는 일등공신에 책록된 반면 이괄은 이
등공신에 책록되었다. 그는 포도대장과 한성판윤을 거쳐 평안병사 겸 북방수비대 부원수에 제수되어
외직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이괄은 대승적 판단으로 수하들의 볼멘소리를 달래며 임지로 떠났다. 그
가 부임한 곳은 평안도 영변이었다. 북방수비대는 1만 5천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5천은 평양
에 주둔하는 도원수 휘하에 있었고 1만은 이괄이 거느리는 국경수비대에 배속되었다. 당시 조선에서
는 가장 많고 강한 군대였다. 권력 핵심부 인사들이 어떠한 의도로 변방으로 내몰았든, 이괄은 여진
이 세운 후금이 날로 막강해져 침략 가능성이 높으므로 북방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조선의 명운을 좌
우하는 중요한 일로 여기고 군사 조련과 수비력 강화에 총력을 기울였다.
문제는 인조 주변의 모리배들이었다. 반란을 일으킬 때는 몸을 사렸던 무리들이 정승‧판서를 독점한
채 이괄을 모함하기 시작했다. 인조 2년(1624) 1월,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모리배들이 이괄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했다. 증거는 물론 정황조차 없어 누가 봐도 모함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권력욕에 눈이 멀어 반란으로 옥좌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인조 역시 판단능력이 1도 없는 자였다. 이
괄은 증언이 확보될 때까지 보류해두고, 이괄의 아들 이전과 이괄의 오른팔인 순변사 한명련을 역모
혐의로 압송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이괄은 자신을 시기하는 김류가 모사한 짓임을 직감했다. 앉아서 역모로 몰려 죽느니 도성을 장악한
뒤 무능한 왕을 바꾸는 게 나라를 위해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1624년 1월 21일, 이괄은 군대를 보내
잡혀 가는 한명련을 구출해오는 한편 아들 이전을 잡으러 온 선전관 김지수, 중사 김천림, 의금부 도
사 심대림‧고덕률 등을 죽이고 그들이 이끌고 온 군사들을 북방수비대에 편입시켰다. 이괄은 다음날
로 군사를 발진시켜 도성으로 진군했다.
도원수 장만이 첩보를 받은 것은 이괄의 반군이 이미 안주까지 내려온 뒤였다. 안주방어사 정충신은
이괄의 회유를 거절하고 도원수에게 달려와 변란 소식을 전했다. 정충신은 북방수비대 장수 가운데
이괄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자로서, 무예가 출중할 뿐만 아니라 통솔력도 뛰어났다. 난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괄이 좀더 일찍, 그리고 직접 찾아가 진지하게 합류를 권고했어야 했다. 이때 장만은 신
병으로 몸져누워 있었는데, 평양에 주둔중인 군대는 숫자로나 전투력으로나 이괄의 군대를 막아낼
능력이 없었다. 이때 장만의 수하 장수 남이홍이 묘책을 냈다. 이괄의 휘하 장수 유순무‧이신‧이윤서
등은 마지못해 따라왔을 뿐 반란에 뜻이 없을 것이므로 밀서로 유인해내자는 계책이었다. 밀서를 받
은 세 장수는 병력 3천을 이끌고 도원수부로 투항해왔다.
이괄은 아랑곳하지 않고 진군 속도를 높였다. 그는 군사들의 불필요한 희생을 피해 평양을 우회하여
도성으로 직행했다. 도중에 여러 번 관군을 만났지만 모두 상대가 되지 못해 죽거나 도망쳤다. 조정
에서는 연일 간신배들이 입씨름만 계속할 뿐 난을 막을 계책을 내놓을 만한 중신은 한 사람도 없었
다. 무능한 인조 역시 입을 꾹 다문 채 오들오들 떨고만 있었다. 간신배들은 처음 이괄에 대한 모함이
제기되었을 때 그를 두둔한 기자헌 등 애꿎은 38명의 중신들을 처형하는 데 그쳤다. 이괄의 친척은
물론 그와 조금만 관련이 있는 자들도 모조리 하옥되었다.
2월 2일, 이괄의 반군이 황해도 황주까지 내려와 남이홍과 정충신이 이끄는 부대를 격파했다는 장계
가 올라오자 인조는 하옥되어 있던 이괄의 친인척들을 모두 처형했다. 반군이 경기도 평산에서 관군
을 대파했다는 장계가 올라오자 2월 8일, 인조는 몇몇 대신들과 함께 수십 군사의 호위를 받으며 서
둘러 공주를 향해 도주에 나섰다. 끼니조차 변변히 준비하지 않고 도망친 덕에 호위하던 군사들도 하
나둘 대오를 이탈했으며, 인조 일행은 쫄쫄 굶은 채 걸어서 수원에 도착했다. 그러나 수원성을 지키
던 관리들과 수졸들도 모두 도망친 터라 음식을 내오는 자가 없었다.
인조가 도망친 지 이틀 뒤인 2월 10일 새벽, 이괄은 한양에 무혈입성했다. 이괄의 아우 이수가 4천여
명의 모병을 거느리고 이괄을 맞았다. 이때 인조는 수원에 머물고 있었는데, 날랜 기병대를 보내 인
조를 생포해 왔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괄의 운명은 거기까지였다. 휘하에 그만
한 지장(智將)이 없었던 것이다. 이괄은 우선 군사들을 배불리 먹인 뒤 백성들을 위무했다. 이어 당초
계획대로 흥안군을 새 왕으로 옹립했다. 흥안군은 선조의 열 번째 아들이다. 휘하 장수들은 문재인만
도 못한 흥안군의 됨됨이에 크게 낙담했다.
병석에서 일어난 도원수 장만은 군사를 이끌고 도성으로 진격했다. 선봉장 정충신은 이내 한양도성
경계인 낙산을 점령했다. 한명련이 즉각 반군을 이끌고 공격해왔지만, 400여 명의 전사자와 300여 명
의 포로를 남기고 퇴각했다. 반군은 일시에 기세가 꺾이며 뿔뿔이 도망치기 바빴다.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한 반군은 금세 와해되었다. 이괄은 숭례문 쪽으로 도망쳤다. 정충신은 27기의 기병만 거느리고
반군을 추격했다. 더 멀리 달아나기 전에 이괄을 사로잡기 위해서였다. 2월 12일, 이괄은 100여 기의
부하를 데리고 경기도 광주로 내려가 목사를 죽이고 계속 남쪽으로 도망쳤다. 일행이 이천에 이르자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잔병들은 이괄‧한명련‧이수‧이전 등 반란 주모자 9명을 살해했다. 그 사
이 광주로 도망쳤던 ‘3일의 왕’ 흥안군도 관군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2월 15일, 이괄의 부하들은 이괄‧한명련‧이수‧이전 등 반란 주모자 9명의 수급(首級)을 가지고 인조가
숨어 지내는 공주로 달려갔다. 인조는 그제야 혈색이 돌아오며 2월 19일 공주를 떠나 22일 한양에 도
착했다. 이로써 인조 2년(1624) 1월 18일에 일어났던 이괄의 난은 한 달 남짓 조선을 뒤흔들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괄은 2월 9일 도성을 점령한 뒤 12일 흥안군을 새 왕으로 옹립했지만, 불과 사흘
만에 그처럼 두려워하던 정충신에게 패함으로써 삼일천하로 반란의 막을 내렸다. 흥안군은 인조 및
중종과 같은 반란수괴로되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임의로 보위를 점거했기 때문에 정식 왕으
로 인정되지는 않는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새해 그리고 명절을 즈음하여 동우회 원로 선배님께 문안소식을 드리는 일을 전화 대신 이제는 문자메시지로 대신하는 간편식을 해온지 몇해가 되었습니다. 결례로 여기지만 그렇게 함이 편한 탓 이었고 또 이를 수용? 하시어 답신 역시 문자로 주시는 시대흐름에 적응하시는 것 같습니다. 한발 더 앞서 이제는 몇줄 워딩하는 인사말 대신 새해사진 한장 으로 대신하고 있으니 내가 손으로 표현하는 의사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