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
||||||||
시절은 여행을 계획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고려 사항이다. 처음 여행을 나설 때는 보통 '어디를 가야 하는가.' 여행지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고려 대상이 되기 일쑤지만, 여행을 자주 다니다 보면 오히려 그 시절에 맞추어 장소를 고르게 된다. 같은 공간이라 할지라도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듯이 언제 그곳에 가느냐에 따라 그곳 풍경도, 그리고 그곳을 대하는 나그네의 인식도 모두 달라지기 때문이다. 모든 공간은 결코 시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9일이나 되는 추석연휴, 가족들과의 여행계획을 짜던 나는 대뜸 고창을 떠올렸다. 추석 밑 이맘때 고창 선운사의 꽃무릇이 그리도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주워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자주 갔던 선운사지만 난 아직까지 꽃무릇이 한창인 시절에는 가 본적이 없었다. 꽃무릇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올해 4월 선운사에서였다. 당시 만세루에서 선운사에 관련된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었고 꽃무릇 군락은 가을의 선운사 정치 중에 하나였다. 빨간 꽃이 진 다음에 잎이 피기 때문에, 잎과 꽃이 서로 그리워하지만 만나지 못하므로 상사화라고도 불려 진다는 그 꽃무릇. 그 아름다운 자태만큼이나 석산, 노아산, 우팔화 등 많은 이름을 간직하고 있는 그 꽃을 보러 나는 선운사를 고집했다. 게다가 선운사는 고창에 있다. 개인적으로 고창은 변산반도와 더불어 항상 여행 1순위이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산과 들, 바다, 문화 유적지, 넉넉한 인심 등 여행에서 볼 수 있는 그 모든 것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전국을 돌아다녀 봐도 고창만큼 풍족한 동네는 보기 힘들다. 따라서 결심을 한 이상, 고창으로의 발걸음을 머뭇거릴 필요는 없었다. 아버지는 선운사 도립공원에다 전화를 하셔서 꽃무릇이 한창 절정이라는 사실까지 확인하셨다. 10월 3일 오전 서해안고속도로 아침 7시쯤 집을 나섰다. 원래 계획대로였으면 6시쯤 나섰어야 했지만 그, 전날 늦게까지 술을 마신 터라 늦게까지 잠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지 못했던 탓이었다. 서해안고속도로 진입. 비록 징검다리 연휴였지만 역시나 차는 많았고 길은 막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차들의 흐름이 이상함을 감지할 수 있었다. 아무리 연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첫날 아닌가. 4일에 일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의아심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갓길로 적지 않은 레커와 경찰차들이 속력을 내어 질주하는 풍경이 벌어졌다. 사고가 났나? 그러더니 이번엔 반대 상행선의 차들은 보이지 않고 경찰차와 소방차, 레커들이 역주행을 하는 것이었다.
서해대교를 건너니 정체는 풀렸고, 안개도 걷히기 시작했다. 청명한 가을 하늘. 따가운 햇살을 업고 우리는 어렵지 않게 고창 선운사에 도착했다. 고창의 얼굴 선운사, 그리고 그 너머 도솔암
그러나 꽃무릇은 상상한 것만큼 예쁘지 않았다. 비록 군락은 군락이었지만 4월에 보았던 사진과는 달리 꽃들은 듬성듬성 펴 있었으며 색깔도 완전히 빨갛기 보다는 한물 간, 바래진 색깔이었다. 그것은 입구뿐만이 아니었다. 선운사를 지나 도솔암까지 가는 길가의 꽃무릇 역시 색이 한창은 아니었다. 너무 늦게 온 것일까. 아직 추석도 안 지났건만. 왜 우리 아버지의 전화를 받은 도립공원에서는 이를 한창이라 했던 것일까. 빛바랜 꽃무릇의 비밀은 선운사의 어느 한 보살님으로부터 풀렸다. 4월의 선운사 동백이 그랬듯이 꽃무릇 역시 작년 호남에 내렸던 폭설 때문에 많이 망가졌다는 것이다. 꽃무릇 자체가 워낙 9월 중순에 한창이지만 올해는 그 폭설의 영향이 매우 컸다고 한다.
도솔암 올라가는 길은 이전과 달랐다. 매번 도솔암까지 나 있는 자갈투성이 길을 걷노라면 발바닥이 피곤했었는데, 이번에는 친절하게도 도보자만 걸을 수 있는 길을 표시해 놓았다. 차들이 다닐 수 있도록 자갈을 깔아 놓은 길과 달리 사람만이 걸을 수 있는 호젓한 산길. 도솔암을 오르는 원래의 길일테다.
내려오는 길. 요번에는 올라올 때와 달리 예전에 걷던 그 차 다니는 길을 걷는다. 식구들 중 아무도 아무 말 없었지만 어서 내려가 다음 목적지를 가야한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암묵적 합의를 이끌어 낸 게 분명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근대가 만들어 놓은 길은 빠른 동시에 목적 지향적이다. 주위를 둘러볼 여유는 사치일 뿐이다. 해질녘 질마재에서 팔할의 바람을 맞다 선운사를 나와 곰소만으로 무작정 차를 몰았다. 아침에 서해안고속도로에서 지체한 탓에 시간이 넉넉지 않았지만 곰소만의 일몰은 충분히 볼만 했다. 얼마나 갔을까. 저 멀리 보이는 곰소만의 뻘과 누런 황금벌판이 아름답게 조화되는 바로 그곳에 '미당 서정주 문학관'이 서 있었다. 그곳이 바로 그 질마재란다. 서정주의 생가가 보이는 <질마재 신화>의 바로 그 동네. 무엇에 홀린 듯 문학관으로 들어서 서정주의 일생을 읽어 나간다. <국화꽃 옆에서>부터 <자화상까지>. 비록 최근 그 친일행적에 관해 말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어쨌든 서정주는 교과서에 배웠던 위대한 시인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전망대에 올라서는 순간, 감탄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해질녘의 곰소만. 가을의 누런 들판은 지는 해를 맞아 더욱 아름다웠으며 질마재를 넘어가는 길은 고즈넉한 시골의 옛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스물 새 해 동안 서정주 시인을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랬던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고 있으려니 왜 서정주가 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같은 팔할의 바람이라도 그 환경에 따라 천양지차일 수밖에 없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다시 서울로 곰소만으로 지는 해를 등에 업고 다시 빡빡한 서울로 향했다. 서해대교쯤 왔을까. 또 갑자기 차들이 막히기 시작했다. 아침의 악몽을 떠올릴 수밖에. 다행히 정체의 원인은 사고가 아닌 어느 차의 고장 때문이었다. 무정하게 지나치는 서해대교. 아침 현장의 잔해들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고속도로 분리대에는 참변을 증명하듯 새까만 그을음이 묻어 있었다. 추석연휴,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당한 영혼들의 넋을 기리며 서울로 차를 몰았다. |
|
Andre Gagnon - L'air du soir(저녁바람)
첫댓글 해리 광승 앞바다에서 그물로 고기를 잡으려다 바닷물에 불의의 사고를 당한 장수원님(아산 남촌)의 명복을 빕니다.^^!
뉴스에도 크게 났던데...안개가 넘 심했어요. 나도 어제(목)밤바다에 가기로 예약했다가 취소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팔할이 바람 번호 : 18209 글쓴이 : 오순 조회 : 71 스크랩 : 1 날짜 : 2006.10.13 10:10 추석밑 전북 고창의 풍경을"해리 광승 앞바다에서 그물로 고기를 잡으려다 바닷물에 불의의 사고를 당한 장수원님(아산 남촌)의 명복을 빕니다.^^
오순님은 제주도에 가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