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시고 1년만에 올리는 제사를 소상(小祥)또는 소기(小朞)라 한다.
지금 세대의 젊은이 들이야 이런 이야기에 감흥이 별로 없으리라 생각되나,
70 고희가 불원한 나에게는 소싯적에 아버지에게 들은 이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할아버지(아명: 공선)가 정해(丁亥)생 1887년 생이고, 열여섯때의 이야기라 하였으니 1902년의 일이다.
1902년 한일합방직전의 조선말의 사회가 어떻하였는지?
그 사회상은 보지 않아도 핍박한 정도야 가늠이 되지 않을런지?
농촌마을의 누구네라 할것없이 먹고 삼동 지낼 양식 걱정 않는 집이 통털어 몇집도 안 되었단다.
증조모께서는 영감님보다도 8년전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12살 15살 남매를 두고 홀아비마저 떠났으니,
살길이야 뻔한 노릇이렸다.
어린 여동생은 역시 믿업지도 못한 곤궁한 큰집에 맡기고, 50여리나 떨어진 양대(?)라는 곳으로
고용살이 머슴으로 가게 되었답니다.
증조부 기일이 음력 9월 21일이니 양력 10월 중순의 농촌의 가을이 눈코 뜰사이 없이 바쁜 철이다.
그날 저녁 왼종일 일을 하고 고단한 몸을 끌고 들어와
문간방에서 개다리 소반에 저녘상을 받고,
윗목에 올려놓고 기다린다. 삼경이 되기를....
상물림이 없자, 주인 마나님이 어서 먹고 빈상을 내오라고 재촉을 하셨겠다.
그러자 핑게로 "속이 불편하니 좀 가라 앉으면 밥을 먹고 부엌에 들여다 놓겠습니다, 마님께서는 그냥 주무세요"
하셨댄다.
그러자 주인 마님 그럴일이 없을텐데, 하시며 어디가 아프냐?
젊은녀석이 어디가 어때서 돌이라도 씹을 나이에 밥을 못 먹는단 말이냐?
하시며 거듭거듭 물어오신터에 하는 수 없이 사실을 고하게 되었단다.
실인즉 오늘이 저희 아버지 소상입니다,
자식 제가 이지경이니 아버지 혼령인들 편하실리야 없지만,
저의 저녘밥상로라도 아버지께 제사를 올리고 먹으려고 합니다.
이 사실을 들으신 주인 영감님과 마나님,
아! 이렇게 보잘것 없는 저녘밥상으로 제사를 지내게 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그러시며 그 바쁜 철 늦은 시간에 삼색, 삼채를 작만하고 뫼를 다시 지어
제사를 올리게 준비를 하여 주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버지 소상을 이렇게 모시게 되었답니다.
저는 할아버지의 그 정신을 가슴에 새기고 살고저 해 왔습니다.
그댁 영감, 마나님의 극락왕생을 부처님전에 지극 발원합니다.
그 후손들 께서도 선대 어른들의 적덕으로 자손 융성하고 만대번창하시기 발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첫댓글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그어른이 아버님 기일을 남의집에서 일을 하시면서도 할 용기에 감사드리고 그분들이 모시고 계시는 주인분들이 너무 고마운 분들이군요 이글을 쓰신분게도 불로장생을 기원 드립니다 _()_
이심전심 글을 쓴 진의를 이해하시는 분들께 깊은 감사말씀을 드립니다.
나무지장보살마하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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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님께도 행복이 같이 하시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