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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11일 주님 공현 후 토요일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The one I must decrease
말씀의 초대 주님의 뜻을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는 들어주신다. 그러므로 잘못을 저지르는 형제가 있으면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은총이 감싸 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예수님께서 지켜 주시면 죄를 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상을 조심해야 한다. 주님의 은총을 가로막기 때문이다(제1독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자신은 다만 준비하는 사람’일 따름이라고 선언한다. 아무나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성령께서 요한을 이끌어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다. 자신을 낮추는 이에게는 언제나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요한은 자신의 위치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분명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리 때문에 ‘어정쩡한 삶’을 살고 있는지요? ‘저 자리는 내가 가야 한다.’ ‘저곳은 나에게 어울리는 자리다.’ 하지만 착각踏 경우가 많습니다. 남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주헌신(與主獻身) - 이영선 신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서커스 공연을 보면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줄타기입니다. 공중에 설치된 기다란 줄 위를 마치 평지를 걷듯이 걷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신기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서 줄 위에서 폴짝 뛰기도 하고, 그 위에서 줄넘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라는 감탄사까지 나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유명한 줄타기 곡예사에게 물었답니다.
“당신은 정말로 쉽게 줄을 타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죠?” 곡예사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비결은 간단해요. 오로지 목적지에만 시선을 고정하면 됩니다. 밑을 보면 절대 안 돼요. 머리가 가면 몸도 따라가거든요. 아래를 보면 분명히 떨어지고 말지요. 항상 내가 가려는 곳만 바라보면 줄을 쉽게 탈 수 있습니다.” 이 곡예사의 말은 우리 인생살이에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뒤를 바라보면서 과거에 연연하며 후회하고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아래를 보면서 나는 할 수 없다고 불안해하며 발을 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 반해서 자신이 가려는 목적지를 바라보면서 힘차게 한 발 한 발을 내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까요? 당연히 자신이 가려는 목적지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겠지요.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이 바라보는 곳은 과연 어떤 곳이 되어야 할까요? 바로 주님을 우리 시선의 목적지로 삼아야합니다. 그래야 보다 더 행복한 삶을 영유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로 떠나는 제자들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겸손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동거 동락했던 제자들이 떠나는 것이 어찌 서운하지 않겠습니까? ‘의리도 없는 자식들 같으니라고.’고 한 바탕 욕을 퍼부어야 정상일 것 같은데, 그는 가장 낮은 자세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주님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은 그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 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떠올리며 지금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주님이 커지기보다는 내가 더 커지기 위해서 노력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래서 주님을 보지 않고 다른 것을 보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크게 흔들렸고, 남보다 더 많은 부와 명예를 가져야 한다는 욕심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기 보다는 사랑받으려 했으며, 인간적인 손해는 절대로 보지 않겠다는 결심을 수시로 했습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제대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반복해서 할 때 그것은 우리 것이 된다. 우수함은 행위가 아니라 습관이다(윌 두란트).
진정한 제자직 -정찬호-
세례자 요한은 스스로를 가리켜, 신랑의 소리를 듣고 크게 기뻐하는 ‘신랑 친구’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신랑 친구, 즉 쇼쉬벤(shoshben)은 당시 유다인의 혼례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신부와 신랑의 대변자로
겸손으로 알아야지만 -김찬선신부-
내일은 성탄이 끝나는 주님의 세례 축일이고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전삼용신부-
하루는 교수 신부님과 신학 세미나 하는 데 다녀왔습니다. 특별히 스페인에서 시작된 한 공동체의 체험담을 듣고 왔습니다. 한 사제가 있었는데 어떤 자매와 사랑에 빠졌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순결하였습니다. 둘은 수도회와 비슷한 공동체를 창설하였습니다. 그 공동체는 비록 동정으로 살아가지만 남녀의 사랑을 금지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건전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놓아두는 분위기입니다. 사실 그 사랑 안에서 둘은 정화되고 성숙되어 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는 온전한 그리스도와 성모님처럼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각각의 숙소가 따로 있지만 기도와 식사 같은 것을 함께하며 지낸다고 합니다. 혹시 눈이 맞아 둘이 한 가정을 이루고 싶다면 집을 따로 마련해 주어서 살게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정결을 지키며 삽니다. 낮에는 각자가 학교, 은행, 병원 등에서 일을 하고 번 돈은 공동으로 모아 필요할 때마다 나누어 씁니다. 지금 그 창설자 사제는 돌아가셨고 공동 창설자 자매는 아직 살아계신데 나이가 드셨어도 매우 여성스럽게 꾸미고 다니신다고 했습니다. 만약 이런 공동체를 우리나라에서 설립한다면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요? 아무리 영적이라고 하지만 사제가 한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면 신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러면서 동시에 작년까지 우리를 가르치시던 한 교수신부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올해부터 몸이 안 좋아 가르치시지 않는데 알고 보니 가정을 꾸렸고 벌써 애가 둘씩이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겉보기에는 정통교리를 매우 중시하고 매우 친절했던 사제다운 사제였습니다. 또 주위에도 적지 않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이런 문제로 옷을 벗고는 합니다. 옛날에는 신학생이 길가에서 여자와 단 둘이 이야기만 하더라도 퇴학을 당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신부님은 어머니가 밥상을 들고 들어오면 뒤돌아 앉아 있다가 나가시면 돌아 앉아 식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보는 것까지 정결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도 성교육 시간이 있었는데 시작 전에 신부님이 교실에 성수를 뿌리고 그런 이야기들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성이 그렇게 죄악시 되었던 것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이후였습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성적인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서로를 가리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창조 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모상을 본따 만드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관계인 것처럼 사람도 남자와 여자가 성령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사랑을 할 수 있어야 참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께로 몰려가는 것을 보고 요한에게 그것을 알려줍니다. 요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교회는 신부이고 그리스도는 신랑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은 신랑이 사랑하는 신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랑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하신 것은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바로 남녀 간의 구체적이고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온전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현 교황님의 첫 번째 교서인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에서 베네딕도 교황께서는 “세상에는 많은 사랑이 존재하지만 사랑의 원형은 바로 남녀의 사랑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신학교에서 그런 사랑 자체를 죄악시 하고 있기에 온전히 사랑할 수 있도록 성숙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사제가 되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갑자기 좋아지는 사람이 생기게 되면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어 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꼭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바로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 분들도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더라도 남자가 여자 앞에서 남자이고, 또 여자가 남자 앞에서 여자일 수 없을 때, 그것이 더 큰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또는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유일한 신랑은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만이 신부를 차지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내 아내나 남편,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것이라고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모습처럼 나의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스도께 봉헌해야합니다. 그리스도의 가장 순결한 신부이고 교회의 시작인 성모님도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시지만 당신의 사랑을 성전에서 아버지께 봉헌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그리스도께 봉헌하였고 자신은 작아졌습니다. 이것이 참 사랑을 이루는 방식입니다. 내가 붙잡고 있으면 절대 사랑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성모님께서 성전에서 그리스도를 봉헌하셨기에 성전에서 그리스도를 다시 찾으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사실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중 가장 작은 하나도 절대 나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소유할 권한이 있고 또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은 오로지 우리가 주인님, 혹은 주님이라 부르는 하느님이십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소유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던 이 신비를 다시 한 번 되새겨봅시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진시황릉의 병마용갱 박물관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것은 무릎을 꿇고 활을 쏘는 용사의 조각상이라고 합니다. 이 병마용은 왼쪽 다리를 꿇고 있고, 오른쪽 무릎은 땅에 닿아 있으며, 상반신은 왼쪽으로 약간 기울었는데, 형형한 눈빛은 왼쪽 전방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손은 오른쪽에서 화살을 당기고 있지요.
지금까지 출토된 병마용들은 대부분이 약간씩 훼손되었기 때문에 인공적인 복원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이 병마용은 완벽하게 보존되었으므로 전혀 손을 보지 않았다고 해요. 심지어 옷의 문양이나 머리카락의 결까지도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을 정도이니까요. 전문가들은 무릎을 꿇은 병마용이 원래의 모습을 완벽하게 지켜온 이유가 낮은 자세 덕분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이 병마용의 높이는 1.2미터로, 기립하고 있는 병마용들이 1.8~1.97미터에 이르는 것에 비하면 상당히 낮지요. 지하에 건설된 병마용갱은 천장이 무너지면 건장한 병마용들이 머리로 받치기 때문에 낮은 자세의 병마용은 덜 손상되었던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꿇은 자세의 병마용은 오른쪽 무릎과 두 발이 삼각형을 이루면서 몸을 지탱하고, 그 중심이 아래에 있기 때문에 상당히 안정적입니다. 당연히 두 발로 서 있는 병마용들에 비해 넘어지거나 깨질 확률이 아주 낮은 것입니다. 이렇게 무릎 꿇은 궁사 병마용의 모습은 우리의 삶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경쟁에서 이기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겸손한 마음가짐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이 어떤 나약함이나 위축된 모습처럼 평가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를 낮추는 것이 오히려 자기 자신을 살리는 현명함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도 이렇게 자기를 한없이 낮추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이 성경말씀을 아마도 평생토록 자신의 삶 안에서 지키셨던 분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 누구도 세례자 요한을 못난 사람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일들이 헛일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겸손함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 실천하는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한 젊은 여인이 미술관에 그림을 감상하러 왔습니다. 미술관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여인은 꿇어앉은 채로 그림을 감상했습니다. 미술관 직원이 그토록 힘들게 그림을 감상하는 까닭을 물었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내일 학생들을 데리고 미술품을 감상하러 올 텐데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이 미술품들이 어떻게 보일지 미리 알아두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눈높이를 낮추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눈높이를 낮추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죠. 우리들과 하나를 이루시기 위해서 하느님이신 분께서 인간의 육체를 취하시어 이 땅에 오셨고 이로써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도 이러한 겸손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그 겸손만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며, 자기를 살리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용기는 대단히 중요하다. 용기는 근육처럼 쓰면 쓸수록 강해진다.(루스 고든)
가장 슬기로운 사람
사랑이 사랑을 만드는 세상 - 이건복 신부-
2년 전 저를 참으로 사랑하셨고 이 땅의 모든 사제를 위하여 특별한 지향을 가지고 평생을 기도하던 고모 수녀님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연세가 드시고 얻은 폐암으로 1년여 투병 생활을 하다가 하느님께 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헤어짐이나 이별의 고통보다는 아름답고 행복한 선종 안에서 감사의 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선종하시기 일주일 전 마지막으로 조카 신부인 저에게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청하셨습니다.
-엄종건 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이에 요한의 제자들, 즉 조금 전 어떤 유다인과 논쟁을 했던 제자들이 자기 스승에게 이릅니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게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정연동신부- 잎은 나뭇가지에 그대로 매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바람이 불면 그 잎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실제로 평화롭고 단순합니다. 그러다가 누군가 와서 “당신은 훌륭하군요! 당신은 멋지군요! 우리는 당신을 사랑해요!” 하고 말하면, 그 잎사귀는 움직이기 시작하고 평화를 잊어버립니다. 아주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누군가 자신을 비난하면, 그 잎사귀는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을 잊어버립니다. 마음은 더 이상 평화롭고 행복하지 않습니다.<스님들이 쓰신 ‘공부하다 죽어라.’ 중에서> 세상이 어떻든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그 자리에 마음으로 성실한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비록 화려한 조명을 받지 않아도 훌륭한 조연으로 영화가 아름다워 집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자리를. 어머니는 어머니의 자리를. 자녀는 자녀의 자리를. 교사는 교사의 자리를. 정치인은 정치인의 자리를. 학생은 학생의 자리를. 신앙인은 신앙인의 자리를. 수도자는 수도자의 자리를. 사제는 사제의 자리를. 평생 묵묵히 자기 자리 지키고 사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오늘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킨 요한을 봅니다. 남들이 뭐라하든 그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으면 됩니다. 아름다운 사람 요한에 ‘나’를 한번 비춰보십시오. 아름답습니까? 자신의 자리를 잘 지켜, 아름다운 나날 되시길 바랍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람은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양승국신부-
<신림동, 장충동>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자 세례자 요한은 "마지막 증언", 다시 말해서 "고별사"를 남기고 인류구원사의 전면에서 사라집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러한 고별사를 하게 된 배경이 있는데, 소위 "세례 원조 논쟁" 때문이었습니다.
신림동에 가면 떡볶이 집들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장충동에 가면 돼지 족발집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이 밀집되어 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상당수의 음식점 주인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가 "내가 원조"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 인간들의 보편적인 심리 근저에는 원조에 대한 집착이랄까 애착심이 깔려있는 듯 합니다.
세례자 요한 시대 당시 "세례!" 하면 요한이었습니다. 당연히 세례의 원조는 요한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름까지 그냥 요한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운동, 갱신운동, 자정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러한 운동은 당시 유다 백성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물론 세리와 창녀들까지 요한에게 찾아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조차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활동을 개시하면서 돌아가는 상황을 가만히 보자 하니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슬슬 속이 끓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아이들 표현에 따르면 "꼭지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스승 세례자 요한은 요즘 손님이 없어서 파리를 날리고 있는 반면 예수님네는 몰려드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질투심과 분노로 가득 찬 나머지 이런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분에게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한때 잘 나가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세례자 요한과 그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안드레아를 비롯한 중요 인사들마저 세례자 요한 당 사무국에 탈당계를 제출하고 예수님 당으로 입당하는 판국이었습니다.
찬밥 신세가 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갑자기 쇠락해져간다는 느낌을 받았고, 여기에 대해서 속수무책인 스승의 태도에 크게 실망한 나머지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세례자 요한은 결정적인 말 한마디를 던집니다. "사람은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존경하는 송봉모 신부님의 해석에 의하면 이 말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쇠락도 예수님의 흥성함도 모두 다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조금이라도 좋은 것을 지녔다면 그것은 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욕심을 버리고 자족하며 살라는 말입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원조, 영원하고 참된 원조는 오직 한분 주님뿐이십니다.
우리가 찾아갈 때 마다 단 한번도 손해 보지 않게 하시는 분, 찾아갈 때 마다 맛갈지고 정성어린 음식, 영양가 만점인 음식을 주시는 주님, 단 한번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런 표현까지 쓰면서 주님이야말로 원조중의 원조, 마지막 원조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고 계시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미국의 사회학자인 안토니 캠보로 박사가 95세 이상을 산 50명에게 설문을 보내서 연구조사를 했답니다. 그 질문은 이렇습니다.
‘~ 때문에’라는 이유를 붙이기보다는 ‘~ 불구하고’라는 강한 실천의지를 간직합시다. 일치와 화해를 희망하여 -박영대 - 요즘 길을 오가며 MP3를 사용한다. 음악을 듣는 건 아니고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김진호 목사의 성경 강의를 듣는다. 김 목사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동으로 이루어 낸 공동번역 성서를 가지고 강의한다. 새로 배우는 게 많다. 그 가운데 하나는 요한과 예수의 세례운동이 그 당시 사회에서 어떤 의미였는가 하는 점이다. 그때는 죄를 없애기 위해서 반드시 성전에서 흠 없는 제물을 바쳐야 했다. 제물을 살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은 죄를 짊어지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세례만으로 죄를 없앨 수 있다는 요한과 예수님의 세례운동은 성전체제에 정면 도전하는 반란이고, 제물 장사로 배불리던 이들에게 고약한 영업 방해(?)였다. 물론 가난한 이에게는 기쁜 소식이었을 게다. 김 목사의 강의를 들으면서 새삼 성경을 볼 때 그 사회 문화 배경을 살피며 봐야겠다고 생각한다.
보고 싶은 왕 언니 -박기호 신부- 본당의 봉사직은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힘이며 활성화 기능의 연대입니다.
주님 공현 후 토요일 - 김창환 신부 -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유다 땅으로 가셔서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시면서 세례를 주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에게 가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세례를 받기 위해서 몰리는 것을 이야기 하며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반응에 요한은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라는 대답을 하며 자신의 사명이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왔고, 이제 자신의 시대는 끝이 났으며 드디어 오셔야 할 분이 오셔서 하늘의 일을 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고 그 다음은 사라지는 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단순히 자기를 ‘신랑의 친구’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증인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신랑의 친구’는 결혼하는 신랑의 들러리입니다. 들러리의 임무는 신랑이 신부를 자기 집에 맞아들일 때 그의 임무는 끝이 납니다. 즉 세례자 요한의 임무도 신부인 인류가 신랑이신 예수님을 잘 맞아들이도록 잘 준비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러한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사명을 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세례자 요한의 이러한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자신의 위치를 아는 자세! 그리고 자신의 위치에 맞는 행동을 하는 자세! 이것이 바로 참된 신앙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상대방을 놓아주고 높혀주는 사랑
기도생활 이렇게만 하라! -오상선신부- 기도는 하면 할수록 어렵다고 생각된다. 오늘 주님께서는 요한 사도를 통해 우리의 기도 생활을 다시 점검하라고 하시나보다. 1. 먼저 주님께서는 2. 둘째는 우리의 청원을 다시 살펴보라고 촉구하신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양승국신부- <주어진 몫이 크던지 작던지> 등산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자주 맞닥트리게 되는 난감한 상황이 있습니다. 하산 길 끝에는 늘 수많은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걸어 내려오다 보면 이집 저집에서 달려 나와 반갑고 환한 얼굴로 ‘따뜻한 방에서 요기 좀 하고 가시라’며 초대합니다. 간판들도 경쟁이 대단합니다. ‘전국 맛 자랑 방영된 집’ ‘KBS, MBC, SBS 방영된 집’ 어떤 식당은 반대로 나갑니다. ‘KBS, MBC, SBS 아무데도 방영 안 된 집’ 한 식당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그 식당은 이상하게 그날따라 파리만 날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밖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큰 식당이 썰렁했습니다. 주인이나 종업원들도 맥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버스에서 내린 백여 명이나 되는 단체손님들이 바로 옆 식당으로 꾸역꾸역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식당 주인이나 종업원들의 얼굴에 갑자기 생기가 돌면서 갑자기 분위기가 사람 사는 것처럼 바뀌었습니다. 이웃식당의 잘 나가는 모습을 본 주인 아저씨의 얼굴은 그야말로 참혹하게 일그러졌습니다. 우리 집은 파리 날리고 있는데, 옆집은 사람들로 북적대니 마음이 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 심정이 똑같았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세례자 요한의 시대가 가고 예수님의 때가 도래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가고 있던 반면 예수님께서는 서서히 구원사 무대의 전면으로 나서기 시작합니다. 이런 최근의 상황 앞에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은근히 심기가 불편해지다 못해 속이 뒤집히기 시작했습니다. 한 때 그렇게 잘 나가던 스승 세례자 요한이었지만 요즘은 거의 손님이 떨어져 파리만 날리고 있는 반면, 예수님 가게 쪽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질투심과 분노로 가득 찬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이런 상황 앞에서 그저 묵묵부답인 스승의 태도가 못마땅해서 볼멘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그 때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에게 이런 아리송하고 묘한 말을 건넵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한때 잘 나가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세례자 요한과 그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안드레아를 비롯한 중요인사들이 속속 ‘세례자 요한 당’에 탈당계를 제출하고 ‘예수당’으로 입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은 완전히 찬밥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존재 의의가 급격히 쇠락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여기에 대해서 속수무책인 스승의 태도를 보고 크게 실망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스승 세례자 요한을 향해 “모든 사람이 그분에게 몰려가고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냥 보고만 계실 것입니까?”라고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 세례자 요한은 결정적인 말 한마디를 던집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세례자 요한의 이 말은 자신의 쇠락도 예수님의 흥성함도 모두 다 하느님의 뜻이란 것입니다. 그간 자신이 주인공이었지만 이제 자신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무대의 새로운 주인공인 예수님께로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인류 구원사의 현장에서 사라지면서 남긴 ‘고별사’의 핵심은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좋은 것을 지녔다면 그 모든 것은 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달란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각자 자신의 몫을 지니고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100을 지니고 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50을, 어떤 사람은 20을, 어떤 사람은 0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애초부터 그렇게 주셨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10밖에 안가지고 온 사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지지든지 볶든지 하느님이 부여하신 그 10으로 겸손하게, 자족하며 한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100을 지니고 온 사람 역시 하느님이 주신 그 풍요로움에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겸손하게 그 100을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되돌릴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우리 각자 그릇의 크기는 제각각 다릅니다. 자신이 타고 난 그릇의 크기가 근본적으로 작은데 큰 그릇을 보면서 ‘왜 내 그릇은 이렇게 작나?’하고 한탄하면서 지낸다면 그 인생은 얼마나 고통스런 가시밭길이겠습니까? 자신이 타고난 그릇의 형태가 세모인데, 한평생 ‘왜 나는 네모가 아니고 세모인가?’하며 지낸다면 그 삶이 또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몫이 크던지 작던지 늘 감사하면서 기뻐하면서 그 몫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쌀 100포대>
요즘 심심찮게 들리는 말들 가운데 하나가 이런 말입니다. 일부 대학생들이 방학을 맞아 고액과외를 통해서 번 돈으로 고급 승용차를 구입한다든지, 해외여행을 다니는 등 상류층 못지 않은 호화판 생활을 한다는 소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참으로 격에 어울리지 않는 생활, "그냥 두었다가는 큰일나겠다"는 걱정이 드는 현실입니다.
이런 걱정에 사로잡혀있던 제게 참으로 흐뭇한 소식 한가지가 전해져왔습니다. 지난 1월 3일 청주에 사는 한 대학생이 몇 달간 땀흘려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 전액으로 20kg들이 쌀 100포대를 사서 불우한 이웃들에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 남자 대학생은 "불우한 이웃들에게 전해 달라"는 쪽지 한 장만 남기고 유유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 대학생이 쌀과 함께 보낸 종이 쪽지에는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과 부모님이 주신 용돈을 아껴 쌀을 마련했습니다. 얼마 안되지만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생각에 쌀을 보냅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쌀가게 주인의 말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31일 오후 자신을 대학생이라고 밝힌 한 남학생이 380만원을 건네며 "쌀 100포대를 구청에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며 "100포대 가격인 430만원에는 부족한 돈이었지만 장사를 시작한 지 30년 만에 이런 일은 처음이고 학생의 마음씨가 너무 착해 그 돈만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자선 중에 가장 으뜸가는 자선은 겸손한 자선입니다. 남보란 듯이 떠벌리는 자선이 아니라 끝끝내 자신의 이름을 숨기는 자선, 할 일을 다 했으면 미련 없이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자선, 끝까지 신문기자들의 취재를 거부하는 자선, 그것만큼 아름다운 자선은 다시 또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참으로 겸손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자신의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참으로 큰 겸손이고 참으로 큰 물러남입니다.
우리가 한평생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견디기 힘든 일 중에 하나가 "물러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물러나는 일보다 더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은 다시 또 없는 듯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의 삶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그 진가가 발휘되는 겸손의 삶이었습니다. 물러날 때가 왔을 때는 표시 내지 않고, 떠벌리지 않고, 불평불만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서는 삶,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빛나는 조연의 기쁨을... -상지종신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주연도 있고 조연도 있습니다. 우리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주연에게 쏠리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유독 조연에게 더 시선이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작가가 의도했던 안했던 조연이 주연보다 더 관심을 끈다면, 이미 조연은 자신의 역할을 벗어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연은 주연을 받쳐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받쳐준다는 것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조연이 조연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때, 주연도 제대로 살아날 수 있기에, 조연 역시 꼭 필요한 인물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조연으로 머물 때 자신의 존재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이지요.
조연은 조연으로 머물 때 의미가 있습니다. 조연은 조연으로 머물 때 가치가 있습니다. 조연은 조연으로 머물 때 아름답습니다. 조연은 자신을 통해 주연이 한층 더 빛을 낼 때 기뻐합니다. 조연은 자신이 작아짐으로써, 그리고 이를 통해 주연이 커짐으로써 보람을 느낍니다.
세례자 요한, 분명히 조연이었습니다. 자신의 제자들,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이 주연이 되라고 떠밀었지만, 요한은 분명 자신의 자리, 자신의 역할을 알았고, 그것에 충실할 뿐이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통해, 자신의 증언을 통해, 구세주가 모든 이들에게 알려지는 것에 만족하면서 벅찬 기쁨을 느꼈던 빛나는 조연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의미있는 사람, 가치있는 사람, 모든 이에게 기억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제로 살아가면서 가장 커다란 착각이 무엇이냐 하면... 제 경우에 한정 될 수 있겠지만, 자신을 주연으로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잘못 살지만 않으면(잘 살지는 못한다 해도) 주위에서 ’신부님, 신부님’ 하면서 신자분들이 따릅니다. 그러다가 보면 극단적으로는 ’교회’ 또는 본당’이라고 하는 나라의 왕이나 된 것처럼 착각하기도 하지요. 입으로는 주님을 말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으로는 자신을 드러내곤 합니다. 주님을 드러내는 조연으로서의 빛나는 의미와 가치를 져버리고, 주님의 자리에 박차고 들어 앉아서 ’하느님 나라와 복음 선포’ 라는 멋진 드라마를 완전히 망쳐 놓는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추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끄러운 자화상이기도 하구요.
오늘 또 다시 세례자 요한을 보면서 하느님 나라를 일구어가는 빛나는 조연으로서의 기쁨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기쁨에 넘쳐 외치는 요한의 음성을 제 것으로 삼고 싶습니다. 요한의 초연함, 굳건함을 제 것으로 삼고 싶습니다.
그러나 사제이기 전에 나약한 한 사람이기에, 굳센 의지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쉽게 유혹에 걸려 넘어질 수 있는 사람이기에, 거룩한 주님 교회의 사제단의 한 사람으로서 사랑하는 믿음의 벗들에게 부탁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사제가 조연으로서의 자신의 의미와 가치와 자리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옆에서 많이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무작정 추켜세우는 것이 사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제가 사제일 수 있도록, 사제를 사제로서 사랑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위의 어떠한 칭송이나 부추김에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준비하고 드러내는 조연으로서의 자신의 길을 충실히 걸어 갔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그리고 그렇지 않은 다른 신부님들께는 외람되지만, 많은 신부님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세례자 요한처럼 그렇게 굳건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언제 어디서 인간적인 유혹에 넘어가 조연으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주연이 되겠다고 덤벼들지 모릅니다. 아니 주연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갈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조연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라는 애정어린 충고를 외면하고 오히려 주연 대접을 하지 않는다고 섭섭해하거나 불만을 가질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저의 과민한 추측에 불과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잘 되어가리라 희망을 가져봅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고, 자신의 사명에 충실한 많은 신부님들이 계시고, 함께 하는 소중한 믿음의 벗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땅의 모든 사제들이 빛나는 조연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그리고 함께 하는 모든 믿음의 벗들이 옆에서 항상 커다란 용기와 힘이 되어주시기를 함께 기도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예수 안에 사는 세례자 요한 -박상대신부-
복음서들이 시사하는 예수님 공생활 시작의 정확한 시점과 장소에 관하여는 이미 논한바 있다.(목요일 복음산책)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투옥 직후 갈릴래아 지방으로, 루가복음은 자신의 고유한 시간과 공간개념을 도입하여 "지금과 여기"로, 요한복음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를 비교하는 대비구조 안에서 요한으로부터 예수에로의 점진적인 이양작업으로 예수님 공생활 시작의 시점과 장소를 각각 논하고 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구원사적 활동의 점진적인 이양작업은 말보다 쉽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세례자 요한 스스로는 자신의 철저한 선구자적 임무에 충실한다 하더라도 적지 않은 문제가 요한의 제자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온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와서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다’(마르 1,5)는 보도를 미루어 볼 때 세례자 요한은 상당히 많은 수의 제자들을 이미 확보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느냐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세례자가 세례를 베풀던 요르단강에 인접한 베다니아에 처음으로 등장하신다.(1,29) 여기서 요한복음은 세례자가 예수께 세례를 베푼 것에 관한 보도는 생략하고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증언한다. 세례자의 증언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은 그의 제자 안드레아와 다른 제자가 예수를 따라갔고, 안드레아의 형 베드로와 함께 예수의 첫 제자가 되었음으로 보증된다. 나아가 필립보와 나타나엘까지도 예수와의 대화를 통하여 첫 제자단에 합세한다.(1,35-51) 그후 가나 혼인잔치에서의 첫 번째 기적(2,1-12), 해방절 축제를 맞아 예루살렘에서 치러진 성전정화와 활동(2,13-25), 니고데모와의 대화(3,1-13 또는 15), 그리고 제3인칭의 독백형식으로 기록된 복음에 관한 요약설명(3,16-21) 등의 보도는 세례자 요한의 활동 가운데를 파고드는 예수님의 활동을 한층 돋보이게 만드는 동시에 첫 제자단의 예수께 대한 신뢰심을 높이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는 동안에도 세례자 요한의 활동은 계속된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세례자 요한과 그 제자들은 살림 가까이에 위치하여 물이 많은 애논에서 계속 세례를 베풀고 있었다.(23절) 살림과 애논지역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요르단강 남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으로서 사마리아 지방과 베레아 지방의 경계지역으로서 데카폴리스 지방에 속하는 곳이었다. 한편 예수의 일행은 유다지방에 머물면서 세례를 베풀었다.(22절) 그러나 예수께서 직접 세례를 베푼 것은 아니고 예수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4,2) 예수의 세례는 분명 요한의 세례와 다르다. 공관복음서 어디에도 언급이 없는 예수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는 예수부활 이후에 가서야 비로소 베풀어졌을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성령의 세례’(1,33; 3,5)가 요한이 베풀던 ’물의 세례’(1,26)와 대비하여 이를 능가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었다면 이는 예수의 제자가 되는 조건부의 세례였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이 벌이는 활동에 대하여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하는 가운데 언급된 세례자의 마지막 증언인 셈이다. 이 증언은 요한의 제자들이 표시하는 불만과 질투가 부당함을 설명하는 것이며, ’신부’인 예루살렘이 준비하고 맞이하여야 할 ’신랑’이 바로 예수임을 증명하는 증언인 것이다. 이 증언을 끝으로 요한은 역사 속의 인물로 사라지게 된다. 구원역사의 장(場)에는 오직 예수만이 있을 뿐이다. 오직 예수만이 메시아요 구세주이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예수께 대하여 마지막 증언을 외치는 세례자 요한의 입에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30절)는 말을 담았다. 점점 작아져 없어질지라도 ’신랑’의 친구로 있었던 것만으로도 기쁨에 벅찼던 세례자 요한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점점 작아 없어지는 세례자 요한의 삶은 점점 커져 전부가 되실 그리스도 예수의 삶 안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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