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영화 <패터슨>
시를 읽고 나는 쓰네
서울공대지 2019 Spring No. 112
이수향 영화평론가/ 영화평론가. 서울대 국문과 박사수료.
2013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신인평론상 수상.
공저로
『1990년대 문화 키워드20』,
『영화광의
탄생』, 『영화와
관계』
등.
영화가 된 시
촬영된 화면을 투사하는 시각적인 표현방법으로 관객을 집중시키는 영화는 활자를 통해 인식론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는 ‘시’와는 다른 영역에 속한 것처럼 보인다. 시가 고대부터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담아온 예술인 데에 비해 영화가 근대의 기술적 발전에 힘입어 만들어져 비교적 짧은 역사를 지녔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단순화를 무릅쓰고 말한다면, 시가 시어로 드러낸 행간을 통해 의뭉스럽게 내밀한 얘기를 하고자 한다면 영화는 즉물적인 이미지의 제시를 통해 좀 더 직관적인 감상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시’ 혹은 ‘시인’은 영화가 내용과 형식 양 측면에서 아주 오래 전부터 천착해온 주제라고 볼 수 있다.
시와 영화의 매치는 두 가지의 방법으로 이루어지는데, 먼저 영화 속에서 ‘시’나 ‘시인’이라는 소재를 중핵 서사의 진행에 중요한 키포인트로 사용하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내용과 형식의 양 층위에서 ‘시적(poetic)’인 영화라는 특징을 드러내는 것이다. 모든 작가주의 감독들이 시적인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시적인 영화는 ‘작가’의 칭호를 받은 감독들이 그들의 파토스를 투영해서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패터슨, 패터슨, 패터슨
미국의 대표적인 작가주의 감독이자 독립영화계 최후의 보루라 불리는 짐 자무시의 영화 <패터슨>(Paterson, 2016)은 시와 시인을 다룬 영화이자, 시적인 방식의 구성원리를 영화적 구성방법에도 적용하고 있어 흥미로운 작품이다.
뉴저지주 패터슨에 살며,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집 <<패터슨>>을 좋아하는, 23번 버스 기사 패터슨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이 영화는 잠에서 막 깨는 월요일 아침, 패터슨 부부의 침대를 보여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8일간 매일 아침 풍경을 반복적으로 제시하다가 다시 새로운 월요일 아침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깬 패터슨은 시간을 확인한 후 아내 로라에게 키스한다. 씨리얼을 먹으며 오하이오 블루칩 성냥을 들여다보다가 마당의 기울어진 우체통 기둥을 바로 세우고 걸어서 출근을 한다. 운행 전까지 운전석에 앉아 시의 문장들을 정리하고 운행 중에는 사람들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들으면서 시적 영감을 받는다. 점심시간에는 폭포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전면에서 볼 수 있는 공원 벤치에 앉아 로라가 싸준 도시락을 먹으며 시를 쓴다. 다시 걸어서 퇴근을 한 후에 로라와 대화를 나누고 애완견 마빈을 산책 시키면서 매일 가던 바에 가서 주인 닥과 대화를 나누며 맥주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영화는 이처럼 패터슨의 루틴한 일상을 반복하면서도 그 사이사이 일어나는 작은 사건들과 새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사연으로 채워진다.
영화에서 일상의 흐름은 시계로 표현되는데, 패터슨은 아침 6시 언저리가 지나면 알람 소리가 울리지 않아도 일어나서 시계부터 확인하는 버릇이 있으며 운전 중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장면에서는 그의 손목에 찬 시계의 분침과 시침이 빨리감기 하듯 돌아가면서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이는 그가 시간의 정해진 규칙에 철저하게 따르는 인물이라는 것을 얘기해주는 한편, 그의 삶이 어쩔 수 없는 시간의 중력에 매달린 채 진행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세 가지의 ‘패터슨’을 유기적으로 결합한 상징을 디제시스 (diegesis)적으로 사용하여 그를 매우 특별한 주인공으로 만든다. 뉴욕이라는 대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지방 도시 패터슨은 나무와 폭포 등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낡은 공장과 거리들에서 이르게 개발되고 쇠락해버린 공업도시 특유의 분위기를 풍긴다. 이는 감독의 전작 <천국보다 낯선>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이제 막 미국에 도착한 인물들이 겪게 되는 곤혹스러움의 정체와도 비슷한 것이다. 한편 장편 서사시 『패터슨』의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는 의사라는 직업을 유지하면서도 평생 시를 썼고 그의 시적 태도는 일상성과 이미지즘 사이에서 구호나 관념을 거부한 것이었다.
패터슨이라는 도시가 주는 이미지와 윌리엄스의 시집이 지닌 시풍들은 주인공 패터슨이 거대한 대도시의 번잡스런 공간에서 얼마간 떨어져 있다는 점, 그리고 생업을 유지하면서도 시를 쓴다는 점에서 시가 놓여있을 장소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패터슨에게 시적 영감은 아내나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오고, 시작(詩作)을 하는 장소는 집의 지하에 있는 골방, 운행 중의 버스 안, 폭포 앞의 벤치를 가리지 않는다. 시와 삶을 철저히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계의 한 부분 안에 시의 공간을 늘 지니고 사는 삶. 시와 삶을 동일하게 영위해 나가는 삶이 바로 세 패터슨을 통해 유기적으로 그려지는 시적인 삶의 모습일 것이다.
시적인 운율과 영화적인 운율
시어와 시행을 반복하고 약간의 차이를 두는 데서 시적 운율이 만들어진다고 할 때 패터슨의 삶을 영화적 운율로 직조하는 방식 역시 반복과 차이에 기인한다. 영화가 형식적인 측면에서 ‘시적’이라고 하는 것은 내러티브를 구조적으로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으며 쇼트의 병행편집을 통해 장면의 분절을 반복하며 상영 시간을 쌓아가는 경우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속에는 패터슨의 매일의 일과를 복기해 내는 것 외에도 반복과 차이를 만들어내는 무수한 설정들이 있다. 가령 다양한 쌍둥이들이 연속적으로 화면에 출몰하고, 시를 쓰는 인물들이 등장하면서도 성별, 인종, 세대가 다르게 구성되는가 하면, 로라가 같은 검은 무늬를 반복적으로 찍어내면서도 매번 다른 디자인을 만드는 등 하는 것들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사건의 발생과 해결의 점층을 통해 선형적이고 구조적인 스토리텔링을 만들어가는 영화의 전형적 문법 대신에 사건이 일어나기는 하되 사건을 향해 모든 영화적 주의가 모아져 있지는 않은 비선형적 내러티브를 보여주는 것이다. 과장된 표현과 극적인 내러티브 없이도 인물들의 대사와 장면 연출, 음악을 통해 영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영화는 패터슨이 일상적 상황에서 문득 시적인 감응의 세계로 도약하는 장면을 시각화해 내는데 많은 공을 들인다. 그가 시의 세계로 발돋음을 시작하면, 긴장감을 자아내는 음향이 먼저 도착하여 점점 소리를 키워나가는데 그간 영화에서 음악을 매우 공들여 사용해 온 짐 자무시 감독의 특징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음악과 함께 그의 시작(詩作)의 장소를 상징하는 폭포 아래의 물결들이 일렁이면서 그의 얼굴과 함께 화면에서 디졸브를 통해 이중 인화 된다. 때때로 현실의 패터슨과 파동치는 물결, 시적 대상으로서의 로라가 한 화면에 다중 노출되어 이미지가 여러 겹으로 겹치는 것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다른 경우, 집을 온통 검은색 무늬들로 칠하고 있는 로라의 순간들이 그의 시적 시간과 교차 편집되면서 그의 시창작의 근원에 로라가 있음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이는 설명적인 방식이기보다는 다소 유비적인 방식이라는 점에서 외화/내화의 양측면을 고려하는 시적인 형식미를 차용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벌어지는 사건과 인물의 반응으로 극이 연속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내면에서부터 비롯된 감정과 대사들, 자막(subtitle)으로 제시된 시들이 띄엄띄엄 제시됨으로써 의미의 결락들을 읽어내야 한다는 점이 이 영화를 매우 우아한 시적인 운율을 지니도록 만드는 것이다.
남아 있는 빈 여백
무심한 듯 제시되는 아이러니한 상황과 대사를 통해 어딘가 씁쓸한 웃음을 짓게 하는 짐 자무시 감독 특유의 디제시스적인 방식들은 전작인 <브로큰 플라워>, <커피와 담배>,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두드러진다. 인물의 의도와 상황이 배치되고 그것이 영화적 긴장을 일으키나 진지함보다는 유머러스한 태도를 가미하면서도 의미를 곱씹어 보게 하는 것이다.
대개 시를 쓰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 속 인물들이 자신의 시에 대한 인정 욕망에 시달리는 것과는 달리 패터슨은 로라 외에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시를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는 그가 지니는 순수한 시적 열망의 특이성이 타인의 인정이나 공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족적인 것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로라의 조언을 받아들여 그가 겨우 자신의 시를 복사하기로 결정하자, 즉 시인이 지닌 원본을 복제해서 시들을 안전하게 보존하고 좀 더 많은 열람의 가능성을 갖기 위해 발을 떼자, 그는 시를 잃어버린다! 단 하나밖에 없는 시집이 갈기갈기 찢어지면서 그가 구축해온 시적 시공간의 실체가 모두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는 두 부부가 사랑하는 모습들에 늘 으르렁거리며 웃음을 유발하던 애견 마빈이 정말 이들의 방해꾼이자 빌런이었다는 트릭을 사용한 부분이다. 또한 늘 비현실적인 공상에 빠져 사는 듯 보이던 로라가 자신의 꿈들을 현실적 실체로 만들어내어서 이 부부가 성공의 기쁨을 나누는 순간 찾아온 재앙이라는 점에서 인생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공과 실패 혹은 행복과 불행의 아이러니는 언제든 다시금 자리를 바꾼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패터슨이 마빈을 혼내지도 못한 채 폭포 아래서 낙심해 있을 무렵 다가온 일본 사람은 그에게 시인이냐고 묻는데, 타인을 경유해서 최초로 그에게 제기된 이 질문에 그는 자신은 단지 버스 기사일 뿐이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 사람은 패터슨에게 ‘매우 시적 (very poetic)’이라며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Sometimes empty……)"라고 말하고 빈 노트를 주고 사라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다시 시작된 월요일, 이제 패터슨은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던 시간 체크를 하지 않는다. 사실 그만의 시적 세계에 파국이 찾아왔던 토요일 이후 이미 그는 더 이상 시계를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별안간 그가 시적 감각의 자리로 돌입하기 전에 늘 등장하던 예의 그 긴장감 넘치는 음악이 다시 시작되며 화면이 암전되며 영화가 끝이 난다. 영화 속에서 특정한 장면이나 상황에서 등장하던 테마 음악이 그것이 아닌 장면에도 등장할 때, 이전의 시각적 일관성(continuity)은 유지되며 전체 영상의 의미론적 연속성도 유지되는 경향이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상의 리듬과 시적 리듬이 분리된 채 초월적인 감각의 도약을 통해서만, 혹은 골방에 갇혀 아무도 읽지 않을 시작을 통해서만 이루어졌던 것에서 나아가 이제 그는 시간이라는 일상성의 중력과 시적 감각의 자리를 구분하지 않도록 한 것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시를 잃어 버리고 오히려 시를 얻게 되는 이러한 아이러니들의 반복이야말로 짐 자무시 감독이 늘 힘주어 강조하던 ‘일상의 메타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