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독(冒瀆)
맑은 샘
산허리에 서리가 핀다
낙엽이 죽은 모기떼들 처럼
뒹구는 달동네
새벽마다 열고 자던 창을 닫을 때에
가난한 집 아이들, 겨울에도 벋고 사는 집
'목적의 실천적,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 변증(辯證)'이 아니라
아직도 그 잘난
'개념(槪念)의 논리적 변증(辯證)'을 외치며
도심의 노숙(露宿)과 투쟁(鬪爭)을 위해 술취해 떠난 아빠
이것은 사기(詐欺)다, 아무리 합리화를 해도
철저히 거짓이다
개들도 햇볓에 웅크리며 조는데
사람의 발이 무척 시리다
아무도 아,아 아무도
그들을 모르며 잊혀져 간다
위선(僞善)이라도,
사랑의 연탄과 도시락이 배달되어도
아빠는 잘난 '개념변증(槪念辯證)'의 자존심만 살아 목청을 돋군다
자존심이 아니라 자만심일 뿐
이름 높았던 시절은 소시적(少時的)일 뿐
왜?
베꼈으니까
속은 딴물이니까
아이들 발 시리겠다
무슨 죄냐?
냉정한 찬바람이 불면서
나는 잘나서 TV의 말 잘하는 사람 몇몇들이 매우 우습다
이것은
언어에 대한 모독(冒瀆)이다
----------------------------------------------------------------------------
*배경 :
필자의 사상연재물 : 똘주릉 할아버지 이야기 56편 : 예에링(Rudolf von jhering, 1818-92), 필립 폰 헤크 (Philipp von Heck, 1859-1943) 참조.
----------------------
똘주릉 할아버지 이야기 56 : 예에링(Rudolf von jhering, 1818-92), 필립 폰 헤크 (Philipp von Heck, 1859-1943)
* 예에링(Rudolf von jhering, 1818-92)
예에링(Rudolf von jhering, 1818-92)은 1818년 독일의 아우리히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형적인 독일 중산계급의 사람으로 법학을 하이델베르크, 괴팅겐, 뮌휀, 베를린 대학에서 공부한 후 베를린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그곳에서 학문의 길로 들었다. 그는 초기에는 로마법을 연구하며 사비니를 추종했으나 (권리를 위한 투쟁 Der Kampf ums Recht, 1872) (법학에서의 농담과 진담 Scherz und Ernst in der Jurisprudenz, 1885), (법에 있어서의 목적 Der Zweck im Recht, 1877-83)등에서 개념법학을 맹렬히 비판했다. 이 때 그는 괴팅겐 대학에서 강의할 때였다. 그는 말년까지 괴팅겐 대학에 몸담고 있었다. 그의 역저로는 위에 든 것 이외에도 (로마법의 정신 Geist des ro"mischen Rechts, 1852)과 (로마법의 발달사 Entwicklungsgeschichte des ro"mischen Rechts, 1814)등이 있다.
영국의 공리주의와 차이가 있지만 독일의 법사상가 예에링 역시 공리주의적 사상을 전개한 학자로 볼 수 있다. 그는 처음에는 역사법학에서 출발하여 로마법과 법사에 관한 논저들을 많이 발표하였다. 그러다 (로마법의 정신)을 발표하면서 그의 법사상에 전환을 가져왔다. 그는 여기서 독일의 로마법 계수를 정당화하고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법을 계수하는 것은 민족정신의 문제로 판단될 것이 아니라 합목적성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로마법을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파악하고, 역사법학처럼 법원(Rechtsquelle)에 구애될 것이 아니라 현실의 법생활을 주목해야 된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로마법과 로마인의 생활과의 관련, 예컨대 로마의 가족제도는 가장에게 자녀의 生殺을 허용할 만큼 강력한 가장권을 인정하였는데 그것의 실제적인 기능은 어떠했기에 그런 제도가 필요했던가를 규명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로마법을 통하여 로마법 위로'(durch das ro"mische Recht, aber u"ber dasselbe hinaus)라는 표어를 내걸고 사비니나 푸흐타에게 받은 역사법학적 태도에 입각하면서도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법과 생활, 이론과 실제, 목적과 경험의 관계들에 접근했던 것이다. 후일 독일과 세계의 저명한 형법학자며 법철학자인 '구스타브 라드부르흐'는 예에링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에링은 역사법학파의 강령을 완수한 나머지 그것을 극복 하였다. 완수 하였다고 하는 것은 역사법학파가 강령만으로 주장하고 결코 세목적으로 명시하려고 하지 않은 법과 민족정신 관련을 (로마법의 정신)에서 천재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그는 극복 하였다. 그는 맹목적인 충동 대신에 법발전의 담당자로서의 목적의식적인 의사를 설정했다. 즉 '목적은 모든 법의 창조자이다'. 그래서 '투쟁 속에서 너는 네 권리를 발견해야 한다'. ---이것이 그의 두 저서 (법에 있어서 목적 Der Zweck im Recht)과 (권리를 위한 투쟁 Der Kampf ums Recht)의 지도적 주제이다. 그는 역사법학파의 비합리주의의 자리에 새롭게 합리주의를 대치시켰다. 그러나 헤겔이 행한 것 과는 달리 '개념의 논리적 변증법'(eine logische Dialektik des Begriffs)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의 실천적, 불가항력적 변증법'(eine parktisch zwingende Dialektik des Zwecks)으로서, 하나의 철학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 사회학 이론으로서 형성 되었다. 그래서 적어도 그의 표현방식에서는 예에링도 경험주의를 극복하지는 못하였다"(G. Radbruch, Rechtsphilosophie, 최종고 역,(법철학), 54-55면)
--------------------------------------
<문헌>:
최종고, 루돌프 폰 예에링, (위대한 법사상가들)(1), 1984, 176-214면 ; 예에링/심재우 역, (권리를 위한 투쟁), 박영문고(163) ; 장경학, 법목적에 있어서 Jhering과 Radbruch, (현대법학의 제문제)(서돈각 박사회갑기념), 법문사, 1981, 497-516면; 박준규, 권리를 위한 투쟁(Jhering),(근대법사상의 전개)(장경학 박사 회갑 기념논문집), 1977 ; A. Baratta, U"ber Jherings Bedeutung fu"r die Strafrechtswissenschaft, in : Jherings Erbe, SS. 17-26; H. Coing, Der Juristische Systembegriff bei Rudolf von Jhering, in : Philosophie und Rechtswissenschaft, (hrsg. von J. Blu"hdorn und J. Ritter), 1969, SS. 149-171......생략.......
--------------------------------
*필립 폰 헤크 (Philipp von Heck, 1859-1943)
필립 폰 헤크 (Philipp von Heck, 1859-1943)는 1858년 7월 22일 러시아의 페테르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889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베를린 대학에서 교수 자격을 얻었다. 1891년 그라이프스발트 대학의 정교수를 시작으로, 1892년 할레대학 정교수, 1901년 튀빙겐 대학의 독일법, 상법, 어음법, 민법 교수가 되었으며 , 1911년부터 1912년 까지 튀빙겐 대학 총장을 지내다가 1928년 대학을 퇴직하여 1934년 6월 28일 튀빙겐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법률해석과 이익법학 Gesetzesauslegung und Interessenjurisprudenz, 1914) (개념형성과 이익법학 Begriffsbildung und Interessenjurisprudenz, 1932) (이익법학 Interessenjurisprudenz, 1933)등이 있다.
헤크는 독일의 법학사와 사상사에서 이른바 이익법학(Interessenjurisprudenz)의 대표자로 알려져 있다. 개념법학(Begriffsjurisprudenz)에 대하여 공격적,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점에서는 자유법론(Freirechtslehre)이나 목적법학(Zweckjurisprudenz)과 같은 조류이지만, 그는 일층 적극적으로 '이익'의 개념을 법학에 도입하여 법과 사회생활의 결합을 시도 하였다. 다만 그는 이익법학을 '실용법학에 대한 방법론'이라 하여 법철학적인 가치형량을 피하고 주로 법학을 위한 이론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헤크는 일찍이 학생시절 예에링의 저서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아, 목적사상에서 출발했으나 이익이라는 더욱 구체적인 관념에로 발전 되었다. "그는 마치 이익법학을 창시하기 위하여 법률가가 된 듯 보인다"(G. Kleinheyer).
그는 주어진 법에 따른 이익교량(Interessenwertungen)을 중요시 하여 벤담, 바흐(A.Wach), 코울러(J. Kohler)처럼 법해석의 '객관적 방법'에 관심을 두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룸프(Rumpf), 슈탐페(Stampe)와 같은 자유법 운동가와도 연결되었다. 그는 개념법학에서의 논리적, 연혁적 체계구성을 거부하고 '내면적 체계화'와 외면적 체계를 구별하였다. 내면적 체계는 '충돌결정의 체계( System of konfliktsentscheidungen)이고 외면적 체계는 질서개념(Ordnungsbegriffen)으로 설명 하였다. 그는 이런 방법을 자신의 (물권법 GrundriB des Sachenrechts, 1930)에 적용 하였다. 그는 '소박한 사회학적 실증주의'(Rosenbaum)이라고 지적받기도 하고, 법의 다양한 제약성들을 이익이라는 관념으로만 설명하려한 것이라 비판받기도 한다.
*공리주의의 평가
공리주의는 19세기 부르조아지의 낙관주의적 세계관의 지지를 받은 자유주의 운동의 이데올로기로서 영국에서는 봉건 잔재를 타파하고 시민계급의 사회적 이익의 실천에 공헌 하였다. 그들 이론의 난점이 있기는 하나 현실적인 시민생활의 철학을 합리적으로 표현하였다. 독일의 사회적 공리주의는 역사학파 로마니스텐의 몰락을 초래하고 법적 공정에 공헌하였다. 사회적 공리주의와 영국 공리주의의 공통점은 법을 명령으로 보고 입법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한 점이다. 공리주의 철학과 사회사상에 대하여 오늘날도 많은 찬반논쟁을 야기시키고 있지만 영미법문화에서는 현실적으로 지배적이라 할 만한 정신적 사상적 분위기가 존재함에는 틀림없다 하겠다.
---------------------------------------------
<문헌>:
G. Kleinheyer, Deutsche Juristen aus Fu"nf Jahrhusnderten, 2. Aufl., 1983 ; B. Dombek, Das Verha"ltnis der Tu"binger Schule zur deutschen Rechtssobiologie, 1969 ; R. Dubischer, Philipp Heck, in ; Lebensbilder zur Geschichte der Tu"binger Juristenfahulta"bt, hrs. F. Elsener, 1977 ; Ellicheid / Hassemer(Hrg.), Interessenjurisprudenz, 1974 ; M. Marx, Interessenjurisprudenz und Freirechtlehre ; in ; Einfu"hrung in Rechtsphiloosophie und Rechtstheorie der Gegenwart, hrs . A. Kaufmann / W. Hassemer, 1977.
--------------------------------------
*청소년들이 생각해 볼 점 :
*예에링의 사상은 헤겔이 행한 것 과는 달리 '개념의 논리적 변증법'(eine logische Dialektik des Begriffs)으로서
가 아니라 '목적의 실천적, 불가항력적 변증법'(eine parktisch zwingende Dialektik des Zwecks)으로서, 하나
의 철학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 사회학 이론으로서 형성 되었다. 오늘날 우리사회를 "대한민국"이라는 공리주
의적 관점에서 볼 때, 좌파정권 타도, 또 좌파연대 타도의 합리성은 무엇인지? 건국후 지금까지의 철학적, 역사적,
현실적 관점에서 글을 써 보자 !(자신의 생활에 찾아온 목적의 실천적, 불가항력적 변증의 실례를 들면서.....)
*개념의 논리적 변증법이 왜 오류인지 비판하며 글을 써 보자 !
*이익 법학(利益法學)은 그 전의 개념법학이 추구하는 논리적 일관성이 실천적 타당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비판으로부터 출발하여 실정에 맞는 해결, 즉 실생활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해결을 가져오는 것을 지향한 데서
나타났다. 이익 법학은 법규가 사회적 이익분쟁의 해결을 위해서의 “입법자의 이익 형량(衡量)=가치 판단의 소산”
이라는 전제하에 출발했으며, 법관도 판결에서 입법자의 판단에 서면서도 스스로도 부차적으로 가치 판단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때문에 법규의 논리적 구조와 함께 법규의 배후에 있는 입법자의 가치 판단까지도 구명
(究明)하는 것을 법률학의 임무로 했다. 만일 입법자나 판사가 이런 판단을 해야하는 입법이나 판결을 해야 한다면
그 기준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글로 써 보자 ! (공리주의를 중심으로....)
*통진당의 대리투표 사건에 있어 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부장판사 송경근)가 통합진보당 19대 총선 비례대표 경선
에서 대리 투표를 한 피고인 45명에 대해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이 판결은 부산 대구 광주지법 등 다른 6개 법원
에서 같은 사안에 대해 내려진 유죄 판결과 배치될 뿐 아니라 상식과도 동떨어진 것이다."라고 언론의 비판이 따갑
기도 하다. 이 사건의 판단기준을 공리주의와 이익법리에 비추어 본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구체적으로 지적해 보고
글을 써 보자 !
---------------------------------------------------
*Rudolph Ritter von Jhering (also Ihering) (22 August 1818 – 17 September 1892)
Rudolph Ritter von Jhering was a German jurist. He is known for his 1872 book Der Kampf ums Recht (The Struggle for Law), as a legal scholar, and as the founder of a modern sociological and historical school of law.
Jhering was born in Aurich, Kingdom of Hanover. He entered the University of Heidelberg in 1836 and, after the fashion of German students, visited successively Göttingen, Munich, and Berlin. Georg Friedrich Puchta, alone of all his teachers, appears to have influenced him. After graduating doctor juris, Jhering established himself in 1844 at Berlin as privatdocent for Roman law, and delivered public lectures on the Geist des römischen Rechts, the theme that may be said to have constituted his life's work. In 1845, he became an ordinary professor at Basel, in 1846 at Rostock, in 1849 at Kiel, and in 1851 at Giessen. At each of these seats of learning, he left his mark; beyond any other of his contemporaries he animated the dry bones of Roman law.
The German juristic world was still under the dominating influence of the Savigny cult, and the older school looked askance at the daring of the young professor, who attempted to adapt the old to new exigencies and to build up a system of natural jurisprudence. This is the keynote of his famous work, Geist des römischen Rechts auf den verschiedenen Stufen seiner Entwicklung (1852–1865), which for originality of conception and lucidity of scientific reasoning placed its author in the forefront of modern Roman jurists. It is no exaggeration to say that in the second half of the 19th century. the reputation of Jhering was as high as that of Savigny in the first half. Their methods were almost diametrically opposed. Savigny and his school represented the conservative, historical tendency. In Jhering, the philosophical conception of jurisprudence, as a science to be utilized for the further advancement of the moral and social interests of mankind, was predominant.
In 1868, Jhering accepted the chair of Roman Law at Vienna, where his lecture-room was crowded, not only with regular students but with men of all professions and even of the highest ranks in the official world. In 1872, Emperor Franz Joseph I of Austria conferred upon him a title of hereditary nobility. The social functions of the Austrian metropolis became wearisome, and Jhering gladly exchanged its for the repose of Göttingen, where he became professor in 1872. That year, he had read at Vienna before an admiring audience a lecture, published under the title of Der Kampf ums Recht (1872; Eng. trans., The Struggle for Law, 1879). Its success was extraordinary. Within two years it attained 12 editions, and it has been translated into 26 languages. It this, his most famous work, Jhering based his theory of duty in the maintenance of one's rights, firstly, on the connection between rights and personality; and secondly, on the solidarity of law and rights. The relation of rights to personality is explored. In truth, our rights involve a parcel of our social worth, our honor. Whoever violates our rights, attacks our worth, our honor.
This work was followed five years later by Der Zweck im Recht (2 vols., 1877–1883). In these two works is clearly seen Jhering's individuality. The Kampf ums Recht shows the firmness of his character, the strength of his sense of justice, and his juristic method and logic: to assert his rights is the duty that every responsible person owes to himself. In the Zweck im Recht is perceived the bent of the author's intellect. But perhaps the happiest combination of all his distinctive characteristics is to be found in his Jurisprudenz des taglichen Lebens (1870; Eng. trans., 1904). A great feature of his lectures was his so-called Praktika, problems in Roman law, and a collection of these with hints for solution was published as early as 1847 under the title Civilrechtsfalle ohne Entscheidungen. Aside from shorter positions at Leipzig and Heidelberg, Jhering continued to work in Göttingen until his death.
Among others of his works were the following: Beiträge zur Lehre vom Besitz, first published in the Jahrbücher für die Dogmatik des heutigen römischen und deutschen Privatrechts, and then separately; Der Besitzwille, and an article entitled Besitz in the Handwörterbuch der Staatswissenschaften (1891), which aroused at the time much controversy, particularly on account of the opposition manifested to Savigny's conception of the subject. See also Scherz und Ernst in der Jurisprudenz (1885); Des Schuldmoment im römischen Privat-recht (1867); Das Trinkgeld (1882); and among the papers he left behind him his Vorgeschichte der Indoeuropaer, a fragment, has been published by v. Ehrenberg (1894).For an account of his life, see also M. de Jonge, Rudolf v. Jhering (1888); and Adolf Merkel, Rudolf von Jhering (1893).von Jhering was married to Ida Christina (Frölich).[2] His oldest son was a German-Brazilian zoologist Hermann von Ihering (1850–1930). von Jhering was also the great-great-grandfather of Australian singer and actress Olivia Newton-John through his daughter Helene Ehrenberg and her marriage to German jurist Victor Ehrenberg.
------------------------------------------------
*Philipp Heck (* 22. Juli 1858 in St. Petersburg; † 28. Juni 1943 in Tübingen; ab 1912 Philipp von Heck); war ein deutscher Jurist. Er gilt als wegweisend für die deutsche Interessenjurisprudenz.
Leben
Heck ging in St. Petersburg zur Schule. Nachdem seine Familie 1870 nach Wiesbaden zog, besuchte er dort das Gymnasium. Später studierte er zunächst Mathematik in Leipzig, wechselte aber bald zur Rechtswissenschaft, angeregt durch die Lektüre von Jherings Geist des römischen Rechts. Nach weiteren Studienjahren in Heidelberg und Berlin, legte er 1886 das Assessorexamen ab. In Berlin promovierte und habilitierte er sich 1889. 1891 wurde er als ordentlicher Professor an die Universität Greifswald berufen, von der aus er 1892 als Nachfolger Eugen Hubers nach Halle wechselte. Ab 1901 bis zu seiner Emeritierung 1928 lehrte er in Tübingen. Dort war er 1911/12 Rektor.
Die Schwerpunkte Hecks Arbeiten liegen auf dem Gebiet der Rechtsgeschichte, des Zivilrechts und insbesondere der juristischen Methodenlehre. Kaum eine Bedeutung mehr haben aber seine Studien zur friesischen Rechtsgeschichte, die in der Zeit in Halle entstanden sind oder die Arbeiten zur deutschen Rechtsgeschichte (insbesondere zum Sachsenspiegel). Bekanntheit und großen Einfluss erreichte er stattdessen mit seiner Methodenlehre. Aufbauend auf Jhering entwickelte er die Interessenjurisprudenz weiter. Er grenzte sich damit von der Begriffsjurisprudenz ab, die versucht hatte, ein schlüssiges System von Rechtsbegriffen zu errichten. Auf der anderen Seite bekämpfte er teilweise polemisch die Freirechtsschule, die eine stärkere Freiheit des Richters in der Auslegung befürwortete. Seinen Lehren nach sollte der Richter bei der Auslegung von Normen vielmehr auf die Interessen schauen, die der Gesetzgeber seiner Entscheidung zu Grunde gelegt hatte und diese Wertung bei der der Entscheidung des Einzelfalls beachten.
Zur Zeit des Nationalsozialismus stieß Hecks Methode der Interessenjurisprudenz zunehmend auf Kritik. Karl Larenz und andere − vor allem der Kieler Schule nahestehende Rechtswissenschaftler − bezeichneten die Interessenjurisprudenz als die überwundene Methodik eines liberalistischen und bürgerlichen Zeitalters. Heck selbst trat dieser Kritik dadurch entgegen, dass er sich selbst dem Nationalsozialismus annäherte und seine Lehre von der Interessenjurisprudenz ideologisch an die NS-Rechtslehre anzupassen versuchte. Weitere Vorlesungen hielt er zum bürgerlichen Recht, Wechselrecht und internationalem Privatrecht. Auf Philipp Heck geht der Ausdruck „Paschastellung“ für den Gläubiger in der Gesamtschuld zurü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