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4일
월요일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안드레아 둥락
신부는 1785년 베트남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제가 된 그는 베트남의 여러 지역에서 열정적으로 사목 활동을 펼쳤다. 베트남 교회의 박해
시기에 교회의 주요 인물이었던 안드레아 둥락 신부는 관헌들의 끈질긴 추적으로 체포되어, 1839년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98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그를 비롯한 베트남의 순교자들을 시성하였다.
☆☆☆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넣었다.
저 사람들은 모두 넉넉한데서 얼마씩을 예물로
바쳤지만
이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가진 것을 전부 바친
것이다. (루가 21,1-4)
I
tell you truly, this poor widow put in more than all the rest; for those
others have all made offerings
from their surplus
wealth, but she, from her poverty,
has offered her
whole livelihood.”
말씀의 초대
어린양과 그의
백성에 관한 환시이다. 어린양은,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는 십사만 사천 명의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제1독서). 한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닢을 헌금함에 넣는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자신의 생활비를 다 바친 그녀야말로 헌금을 가장 많이 낸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위령 성월의
끄트머리인 까닭인지 죽음에 대한 묵상의 기회를 자주 가집니다. 이 죽음에 대한 묵상은 오히려 삶의 의미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합니다. 죽음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볼 때 삶이 더욱 절실해지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손톤 와일더의 희곡 『우리 읍내』는 죽음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삶의 소중함을 애잔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젊은
주부 에밀리가 일찍 죽어, 막 죽은 이들의 세계인 마을의 무덤가로 오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단 한 번이라도 산
이들의 세계로 돌아가 보기를 염원했던 그녀는 마침내 행복했던 열두 살 때의 어느 하루로 되돌아가는 기회를 갖습니다. 그 시절의 행복을 되찾으려던
그녀는 다시 찾은 이승에서 사람들이 소중한 하루하루를 얼마나 맹목적이고 이기적으로 보내며 허무하게 사는지를 깨닫고 비통 속에 말합니다.
“몰랐어요, 모든
게 그렇게 지나가는데, 그걸 몰랐던 거예요. 데려다 주세요, 산마루 제 무덤으로요. 아, 잠깐만요. 한 번만 더 보고요. 안녕, 이승이여.
안녕, 우리 읍내도 잘 있어. 엄마 아빠, 안녕히 계세요. 째깍거리는 시계도 해바라기도 잘 있어. 맛있는 음식과 커피도, 새 옷과 따뜻한
목욕탕도, 잠자고 깨는 것도. 아, 너무나 아름다워 그 진가를 몰랐던 이승이여, 안녕.” 그러면서 그녀는 이렇게 묻습니다. “살면서 자기 삶을
제대로 깨닫는 인간이 있을까요, 매순간?” 사색의 이 계절에
용기를 내어 ‘자신의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현재의 삶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은
지금 여기서 더욱 생생하게 살게 하는 길을 보여 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신앙의 눈으로 죽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죽음으로 단절되는 유한한 삶에서 슬픔과 허무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약속된 영원한 삶의 빛나는 조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살아 있는 희망입니다.
어떤 남자가 이웃에
있는 부인을 보고는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반하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외모 뿐 아니라 세련된 옷차림, 그리고
교양이 넘치는 말투에 이 남자가 홀딱 반하게 되었지요. 이런 상태에서 자기 아내를 바라보니 너무나 형편없이 보입니다. 후질 구례한 옷만 입고,
아무 말이나 툭툭 던지고 있으며 여자이면서도 자신의 외모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 등을 보면서 점점 보기가 싫어졌습니다. 아니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무슨
행동을 해도 다 보기가 싫습니다. 그리고 결국 아내를 불러서 “난 도저히 당신과는 함께 살 수 없을 것 같아. 우리 헤어지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에 크게 슬퍼하는 아내는 “알았다”라고 말한 뒤에 친정으로 가기 위해 머리를 빗고 화장을 곱게 한 후 외출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이렇게 단장한 아내를 본 순간, 남편은 그제야 이웃집의 아내보다 자기 아내가 훨씬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집안 살림을 위해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포기했던 아내의 헌신을 그제야 볼 수 있었던 것이지요.
결과는 어떻게
되었냐고요? 남편이 아내에게 자신이 잘못했다면서 그래서 제발 가지 말라고 하며 싹싹 빌었지요. 자기 눈이 잠시 무엇에 홀려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반드시 남보다 나을 수는 없습니다. 즉, 남이 더 좋은 것을 그리고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남이 나보다 나은
것이 있으면, 나 역시 남보다 나은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모든 점에서 남보다 더 많고 좋은 것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면서 불평불만을 던지는 마음 역시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 마음, 또한 남을 향한 너그러운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행복으로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빈곤한 모습을 한 과부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과부는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었지요. 부자들이 봉헌한 금액에 비교할 때 형편없이 적은
금액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의 마음을 보십니다. 비록 봉헌금은 부자가 더 많이 했겠지만, 풍족한 데에서 아주 일부를 봉헌한 부자의
마음보다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 전체를 다 봉헌한 과부의 마음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집에 여유가 없어서
누군가를 도울 수 없다는 것은 커다란 핑계입니다. 물질적인 여유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하는 것이 더 맞겠지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주님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가난한 과부처럼 말입니다.
재산보다는 희망을
욕심내자. 어떠한 일이 있어도 희망을 포기하지 말자(세르반테스).
노숙자
해리스(연합뉴스)
미국 중부
캔자스시티에서 노숙자 해리스가 놓아둔 컵에 한 여성이 실수로 동전과 함께 다이아 반지를 넣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손을 씻다가 그제야 다이아
반지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노숙자에게 찾아갔다. 그리고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제가 뭔가 귀중한
것을 잃어버렸어요.”
그러자 해리스는
"아! 반지요. 제가 보관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며 다이아 반지를 돌려주었다.
다이아 반지를
돌려받은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감격했고, 인터넷을 통해 자신들의 사연을 널리 알리며, 해리스를 위한 성금을 호소했다. 그렇게 해서 다이아 반지의
가격에 몇 배에 달하는 성금이 모아졌다.
노숙자 해리스는 한
방송에 출연하여 감사의 뜻과 함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 소유가 아닌
물건을 돌려줬을 뿐인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자신의 선행으로
유명해진 해리스는 16년간 떨어져 있던 동생도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욕심 부리지 않는
삶이 결국은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 준 이야기입니다. 너무나 큰 욕심으로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 돈이 지닌
정성을 보시는 예수님
-이기정신부-
만원권과 천원권의
대화라는 거 들어보셨나요? 그
전부터 있었지요.
만원권이 천원권에게 자기는 매일 갈비집 잔치집에 다니느라 바쁘다네요.
천원권이 그러냐며
자기는 지난 주 성당에 갔고 이번 주에도 갔답니다.
만원권은 성당엘 잘
안가서 자기는 하느님과 거리가 멀어졌다 말했대요.
천원권은 1000이
아니고 자기는 天원인가보다며 다음 주에도 갈 거랍니다.
어떻든 예수님은
돈들의 생김보다 돈이 지닌 정성을 보신다 하네요?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루카 21,1~3)”
-조재형신부-
어머니께서 가끔
전화를 하십니다.
대녀의 자녀가
혼인을 하는데 주례를 부탁하기도 하십니다.
병원에 입원한
이웃이 있으면 봉성체를 부탁하기도 하십니다.
지난 목요일에도
의정부 성모병원엘 다녀왔습니다.
어머니의 친구 분이
넘어지셔서 많이 다치셨다고 합니다.
와서 기도를 해 줄
수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많이 다치셨지만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셨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지내시는 어머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가능하면 어머니의
청도 들어 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말씀하십니다.
액수가 많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돈의 흐름이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옳은
일에,
가난한 이를 돕는
일에,
하느님께 드리는
곳에 쓰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노숙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밥을 제공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달동네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위해서 수고하시는 사회복지사도 있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웠던
것은 본인도 정부에서 받은 노인연금 80,000원과 폐지를 팔아서
받는 돈 100,000원으로 어렵게
지내시는 할머니께서 거동이 불편하신 동네 할아버지를 위해서 식사를 준비해 드리고,
청소를 해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라도 이
할아버지를 도와 드려야지!’
가난한 할머니께서도
기꺼운 마음으로 이웃을 돕는 것을 봅니다.
정부에서도
힘들겠지만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아픈 이들을 위한
복지에 좀 더 많은 예산을 책정했으면 좋겠습니다.
‘무상급식,
무상보육’은 예산의 문제가
아니라 복지의 차원에서 접근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평가는
상대평가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커다란
업적,
빼어난
능력,
화려한 언변도 필요
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처럼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도 하느님께서는 모두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새로운 한 주간이
시작되는 월요일입니다.
주님께 받는 은총과
사랑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면 좋겠습니다.
받았기에 줄 수
있습니다
-반영억신부-
가진 것을
내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더욱 모두를 내놓는 것은 자신을 내놓는 것이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는 것은
바로 그 과부가 가진 것을 전부 바쳤기 때문입니다(루카21,4). 얼마나 많은 액수를 바쳤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떠한 마음으로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바쳤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동전 두 닢을 넣었는데 그것이 자기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그러니 그는 자기 자신을 모두 바친
것입니다. 그는 많은 것에서 일부를 바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바친 것입니다.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부분은 전체의 일부인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졌다 해도 소유물이 그것을 소유한 사람보다는 클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진 것이 없어서 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말고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매순간 물었습니다.“주님! 저를 어디에다 쓰시렵니까? 말씀하십시오. 어디에? 어떻게? 그리고 언제 쓰시렵니까?”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애착 때문에 남에게 줄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주위를 한 번 살펴보십시오.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면 적게 가질수록 좋지
않겠습니까?.....하느님께서 우리를 채워주시기를 원한다면 스스로 비워야만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하느님께 드림으로써 그분이 소유하도록 해야
합니다.”하고 권고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돈에 애착을 느끼는 사제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는“제가 무엇이며 제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 같은 예물을 바칠 수 있었겠습니까? 모든 것은 당신에게서 오기에,
저희가 당신 손에서 받아 당신께 바쳤을 따름입니다”(1역대29,14). 하고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라 했는데 무엇인가 바칠 수 있다면 그것은 은총입니다. 바치면 바칠수록 바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힘이 주어집니다. 똥을 쌓아놓으면 냄새가 나지만 뿌려지면 거름이 됩니다. 우리가 가진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노력,
수고와 땀이 들어갔다 할지라도 이미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것을 활용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한 번 내어 놓아 보세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랑합니다.
@@@
도둑의 뉘우침
한 성직자가 물건을
훔쳐 나가는 도둑을 붙잡았습니다. 그에게 “도둑질을
한다는 것은 인생에 오점을 남기는 것입니다. 순간의 잘못으로
큰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도둑은 깊이 반성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네
맞아요, 물건을 훔쳐
나오면서 발자국을 닦지 않았어요. 바로 가서 닦아야겠어요.”@@@
행복한
사람들
-비전,
사랑, 현실-
-이수철신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를 묵상하는 중 떠오른 말씀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역설적입니다만 가난한 부자입니다.
지닌
것은 없어도 마음 안에 참 보물인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환경이
행복을, 구원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똑같은
환경중에 주님과 사랑의 깊이에 따라 천국을 사는 이도 있고 지옥을 사는 이도 있습니다.
비전이,
꿈이, 희망이 행복의 요체입니다.
비전
중의 비전이 하느님이요 하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제자들이 무소유의
가난 중에 행복할 수 있었던 것도
빛나는
비전이자 참 보물인 하늘 나라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 불모의 땅 어디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고,
어린왕자의
별이 아름다운 것은 한 송이의 장미가 있기 때문이다.' 라는 말도 있듯이,
사막
같은 세상에서 오아시스 주님의 비전을 지닌 자들이 정말 행복한 사람들 입니다.
주님은
황량한 사막같은 유배지에서 요한에게 빛나는 비전을 보여주심으로 그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가난한
부자로 만드십니다.
우리의
천상 비전으로 삼아도 좋은 아름다운 비전입니다.
구원
받은 이들의 천상 행복을 묘사하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노래는 땅으로부터 속량된 십사만 사천 명 말고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입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흠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대로
요한의 신비체험입니다.
진정
주님을 사랑하여 마음 순수할 때 이런 신비체험의 선물입니다.
문제는
주님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행복은,
부요는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주님과
사랑의 깊이에 달렸습니다.
한
집에서 남남으로 사는 부부관계도 있듯이,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 살아도, 교회의 신자로 살아도 냉담으로 주님과 남남의 관계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참 비전이신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사막은 낙원이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과부가 그 모범입니다.
'사랑을
통한 비전의 현실화'입니다.
그대로
'비전-사랑-현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아무리
많은 소유를 지니고 오래 살아도
이런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를 통해
비전을
현실화하지 않으면 가난한 자들이며 인생 헛 산 것입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인지요.
육신의
외적성장은 멈춰 노화되어 갈지라도 주님과 내적 사랑의 관계는 날로 깊어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가 바로 마음 가난한, 마음 깨끗한 부자입니다.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세상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도대체
부러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아,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내면의 보물, 주님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저절로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하여
이미 지상에서 묵시록의 천상 비전을 사는 가난한 과부임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고 이르셨다.‘
부자와
가난한 과부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주님은 가난한 과부가 진정 부자임을 인정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온전한
봉헌을 상징합니다.
이런
이들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오늘 1독서 요한 묵시록의 구원 받은 이들입니다.
내
존재 전체를 봉헌하는 이가 진정 가난한 부자입니다.
마음
가난한 겸손하고 순수한 이들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비전이자 꿈인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깊어질 때 비전의 현실화요,
겸손과
순수의 열매입니다.
주님의
비전을 잃으면 열정과 겸손, 순수도 잃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천상
영혼들과 새노래를 부르며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는 우리 모두에게 참 비전인 당신을 선사하십니다.
다음
말씀은 가난한 과부는 물론
주님을
비전으로 지니고 인생 사막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향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누가
주님의 집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
(시편24,3-4ㄱㄴ).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5,10).
아멘.
< 영광이
아니라 멸시를 >
-전삼용신부-
박보영 목사의 강의
중 그가 얼마나 솔직한 사람이었는지가 나오는 대목이 있어 소개합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데리고 사는 아이들에게 안 좋은 영상물들이 인터넷을 통해 들어올 것을 두려워해 인터넷에 방어 프로그램을 설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혼자
어떤 것들이 인터넷에 있기에 그런지 살펴보려는 마음으로 잠시 인터넷을 뒤지다가 야한 영화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호기심으로 빨리
돌리며 단 몇 분을 보았는데 그것이 그렇게 죄책감으로 다가오더랍니다.
그만 보아야한다는
마음이 이는데도 그러지 못하고 몇 분을 더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하느님께 부끄러운 죄로 여겨져 다음날 부끄러워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더랍니다.
그래서 신도들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 신도들을 등지고 뒤돌아서서 울면서 어제 있었던 일들을 사람들 앞에서 고백했습니다.
성경에도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라고 나와 있습니다.
솔직해지고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창피를 당하고 멸시를 받는 일은 성경말씀을 따르는 큰 덕입니다.
신도들은 그날
예배가 가장 은총이 충만했고 많은 것을 배우고 갔다고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하였습니다.
자신을 가리려고
하는 것이 이미 자신들의 죄에 떨어진 비참한 처지를 인정하기 싫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보이기 싫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이미 거짓이 자신
안으로 들어와서 죄인인 자신들을 의인처럼 보이고 인정받기를 바라는 사람들로 변해버렸던 것입니다.
이렇듯 솔직히
자신의 죄를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지 못한다면 그만큼 교만이라는 죄에 억눌려 있는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진실하지 않고,
진실하다면 죄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이들은 거짓이 없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거짓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받았던 이가 바로 나타나엘입니다.
나타나엘이
무화과나무 밑에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았다고 하시며,
동시에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시고,
또한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하느님나라 백성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가리는 이들이 아니라 참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밝힐 줄 아는 겸손하고
솔직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늘나라에서 구원된 이들 중 특별히 선택된 십사만 사천 명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어린양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니며 그들 외에는 누구도 배울 수 없는 새 노래를 부릅니다.
하늘나라에서도 다
같은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뽑힌 이들은 더 특별한 행복과 특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사만
사천 명의 특징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입니다.”
거짓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겸손하고 순결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숨기는 것이 없이 진실할 수 있는 사람이 흠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들을 만날 때
긴장하게 되는 이유는 자신의 이미지가 나빠지지나 않을까 하는 세속적인 두려움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들어
높임을 받는 것이 하느님께는 가증스러운 일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가장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께만 인정받으면 되는데 어떻게 해서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마치 모든 것을
내어주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들에게도 잘 보이려고 갖은 수단방법을 동원해 몸을 지나치게 치장하는 여인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거짓이 있는
사람은 하느님이 아닌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이니 하느님께는 인정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예수님께서 무언가를 청하라고 했을 때,
‘멸시와
고통’을
청했습니다.
고통을 받아봐야만
다른 이의 고통도 느낄 수 있고 또한 나를 속량하기 위해 당하셨던 그리스도의 고통도 깊이 깨달아 그분을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싶다는 마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되어야만 교만해지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에만 잘 들도록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사람들
앞에서 들어 높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멸시 받는 것을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
존재와 인격의 봉헌
-기경호신부-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하느님에 대한 태도가 재물을 통하여 드러난다고 보고 있다. 성전의 ‘여인들의 뜰’에는 남녀가 다 드나들 수 있었는데,
이 여인들의 뜰 입구에 나팔 모양의 열세 개의 헌금함이 있었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은 헌금 액수나 쓰일 목적에 따라 각기 해당되는 헌금함에
예물을 집어넣었다. 그런데, 부자와 권력가들은 자기가 쓰고 남은 것을 헤아려 바쳤고, 바리사이나 율법교사들도 위선적으로, 또는 의무감에서
헌금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는 것을 보셨다(21,2). 이를 보시고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21,3-4)라고 하셨다.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 우선
이 과부는 넉넉하고 삶에 어려움이 있는 상황에서 헌금을 한 것이 아니다. 그는 경제적으로 가난하였고, 사회적으로는 여자인데다 과부라는 처지
때문에 소외당한 채 살아가야 했다. 나아가 정치적으로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자기를 돌볼 힘도 의지할 데도
없는 상황에서 자신을 내놓는 태도는 참으로 놀랍다. 우리는 보통 내가 살만하고 마음이 편해야 봉사하고 기부나 사랑 실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는 바로 ‘지금’이다. 그분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신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건강하면 건강한 대로, 아프면 아픈 상태에서 사랑이신 당신께 오길 원하신다.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무엇을 해드릴 수
있으며, 눈에 보이는 선물을 준비한다 한들 그것이 주님께 필요할까? 아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어떤 상태에 있든 당신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마음을 지닌 ‘나’를 원하시는 것이다.
참으로
보잘것없고 가진 것 없는 그녀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남은 전 재산은 ‘렙톤 두 닢’뿐이었다. 렙톤은 그리스 화폐의 최소 단위의 쇠돈으로 하루
일한 품삯에 해당하는 그리스 은전의 128분의 1에 해당된다. 그녀가 지닌 것은 하루를 살기 위한 최저 생계비는 커녕 한 끼를 떼우기에도 부족한
김밥 반의 반 토막 정도 밖에는 살 수 없는 극히 적은 돈뿐이었다. 그런데 그 과부는 그것 전부를 성전 헌금함에 예물로 넣었다. 이 과부는
부유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위해 쓸 것 다 쓰고 선심 쓰듯 극히 적은 일부를 바친 것과는 달리 최소한의 먹을 것조차 포기하며 자신의 전부를
바친 것이다. 여기서 렙톤 두 닢을 ‘영혼과 육신’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아무튼 그녀는 액수는 적었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느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바친 것이다. 그렇다!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나의 전 존재이다.
전
존재를 바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봉헌하는 축성된 삶이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성별(聖別)되어 하느님께
속하게 되었고 그래서 거룩한 존재들이다. 우리가 거룩해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함에 참여하도록 해주신 그 자비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전
존재를 바친다는 것은 소유물 전부를 바친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나의 존재 이유이신 그분을 위해 시간과 능력, 지혜와 일과 재물, 영혼과
육신 등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되돌려드리려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물리적인 구분이나 산술적인 계산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봉헌을 하고 돌아설 때는 완전한 빈손, 빈 마음이었고 그 빈자리에 성령께서 계시고, 온갖 부의 원천이요 우리 삶의
전부이신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적인 봉헌은 가난의 자세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태도이다. 이 기본이 안 된
채 온갖 재물과 원의와 탐욕과 집착을 지니고서는 결코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과부처럼 전 존재를 봉헌한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향’이다. 재물도 권력도, 재능도 시간도, 나의 생각과 행위도 모두 그분의 뜻에 따라 하고 그분을 위하여 하며 그분께
되돌리겠다는 그 지향 말이다.
오늘도 주님께 대한
사랑 하나로 전 존재를 바친 과부와 더불어 나도 주님 마음에 드는 향기로운 내 삶의 봉헌을 하도록 하자!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여!”(성
프란치스코)
-한상우신부-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봉헌의
삶을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매우
간단한 방법이 가장
어려운 길이 되었습니다.
마음이
멀어졌기에 사랑의
나눔도 멀어진
것입니다.
과부의
렙톤 두 닢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봉헌의
삶이 가능함을 상황을
탓하는 우리들에게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극한 상황이 주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은총의
시간이 됩니다.
아름다운
봉헌은 아름다운
여정이 되게합니다.
닳아
없어지는 궁핍한
가난 가운데서도 모든
정신을 일깨우는 믿음은
바로 우리의 봉헌입니다.
변하지
않을 주님 사랑을 가슴에
안고 산 렙톤
두 닢의 과부가 가장
행복한 여인으로 다가옵니다.
마음
깊은 사랑의
봉헌으로 우리의
눈이 뜨이게 됩니다.
사랑과
믿음의 눈으로만 이해되는
봉헌의 여정입니다.
가장
가난한 여인을 통해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모두
성부께 바치신 봉헌이었습니다.
내
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
줄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마음까지도 주님께
봉헌하는 풍족한
끝자락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진정한
봉헌은 생활의
봉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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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