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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묵상글 (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한 몸 의식.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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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0.26 05:54
- 한 몸 의식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각자가 자기 살 궁리만 하고,
각자가 자기 돈 벌 궁리만 하고,
각자가 자기 이익만 생각하면 공동체는 어떻게 될까요?
공동체는 망하게 되겠지요?
그러면 그 개인은 망하지 않고 잘 살 수 있을까요?
자기 살 궁리만 하는데 자기는 잘 살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공멸입니다.
그런데 왜 각자 살 궁리만 합니까?
공멸이라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인생은 각자도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것은 마치 한배를 타고 가면서 각자도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이란 각자가 사는 것을 꾀한다는 뜻이지요.
왜냐면 한배를 탔는데도 한배를 탔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인 것 같지만,
그리스도라는 한 몸을 이루는 각각의 지체들이라고.
다만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고,
공동체 의식 곧 한 몸 의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을 뿐이며,
우리는 공동체라는 것을 알기에 공생하려는 사람과
그것을 모르고 각자도생하다가 공멸하게 될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공동체 의식, 한 몸 의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 외롭고 모두 서서히 혼자 죽어갑니다.
독거노인만 고독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혼자 사는 것이 좋다고 하고,
혼자 살 수 있다고 하는 혼술 혼밥의 혼족들이 불쌍하고,
그들의 뻔한 불행을 보고만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한다면
나 혼자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며 살아서는 안 되고,
나만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며 살아서도 안 되겠지요.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같이 살고,
같이 그리스도라는 한 몸을 이루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지 않으면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처럼 되리라는 것이
요한복음의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이고 오늘 바오로 서간의 가르침입니다.
부대끼며 살다 보면 혼자 있는 것이 한순간 자유롭고 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롭고 편한 것이 진정 행복이고 생명보다 좋다고 생각한다면
영원히 저 캄캄한 우주에 혼자 떠돌아다닌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혼자 떠돌아다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까?
자유롭고 편하기만 한 것이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입니까?
이것을 성찰하며 자문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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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심청전을 잘 알 것입니다. 심청이의 효심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심청의 한자어를 보면 마음 심(心)에 맑을 청(淸)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름인 심봉의 한자어를 보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심청이와 마찬가지로 마음 심(心)에 봉할 봉, 닫힐 봉(封)을 씁니다. 따라서 마음이 맑은 심청이가 마음이 닫힌 심봉사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바쳐 아버지 마음의 눈을 뜨게 만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닫힌 마음을 열게 하기 위해서는 전적인 투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당수에 풍덩 빠지는 심청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도 그러합니다. 우리의 완고한 마음, 그래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닫힌 마음을 활짝 열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셔서 전적인 투신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전적인 투신을 할 수 있는 맑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 마음은 남 위에 올라타는 것이 아니고, 또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다는 마음으로 겸손한 사랑으로 다가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마음을 갖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심청이가 아닌 심봉사 쪽에 훨씬 가까운 것 같습니다. 마음이 꽉 닫혀 있어서 전적인 투신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의 이웃에게 아픔과 상처만을 주고 있지 않나요?
주님께서는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인 사건과 실로암 탑이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깔려 죽은 사건을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이 있고 나서 이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것을 생각했고 또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더 죄가 많았고, 또 잘못을 더 많이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판단이 잘못임을 분명하게 이야기하십니다. 그렇게 판단할 것이 아니라, 곧바로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를 이야기하십니다. 이 나무는 하느님의 일에 무심하고 냉담한 우리 모습을 상징합니다.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이시며, 포도 재배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삼 년은 주님께서 지상에서 활동하신 공생활 기간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열매가 바로 우리의 회개와 사랑의 응답입니다.
아무런 고통과 시련 없이 잘 산다고 해서, 죄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또 고통과 시련으로 힘들어하는 것을 죄 많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의 몸인 우리는 곧바로 회개하고 사랑의 응답을 해야만 마지막 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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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생은 끊임없이 배우고,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안주하지도, 안일하지도 않으면서 늘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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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멸망하는 것은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회개”란 ‘뉘우침’과 ‘돌아옴’을 말합니다. 곧 내면적, 정신적 뉘우침과 행위의 실천적 돌아옴을 말합니다. 그러니 넘어진 채 넘어진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넘어진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곧 자신의 죄를 알고 ‘뉘우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깨닫고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단순한 ‘죄의 인식’이나 ‘자기 성찰’ 혹은 ‘자기반성’이 아니며, 또한 단지 죄가 없는 ‘죄의 공백 상태’나 ‘죄의 진공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죄를 용서받았기에 뉘우치는 것’이요, 용서하신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옴’임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단순히 죄의 어둠을 벗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감이요,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됨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옴”이라는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마르 1,15;마태 4,17).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그러니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것은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 사랑인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라는 말씀은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완고함과 고집으로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믿지 않고,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멸망할 것입니다.
비유 속의 포도 재배인은 주인에게 말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 13,8)
그렇습니다. 범한 죄로 본다면, 저는 이미 뽑혀도 수백 번 뽑혀지고 말았을 열매 맺지 않는 쓸모없는 나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 여기 주님의 정원에 심겨져 있다는 것은 이미 용서받았다는 표시요, 또한 하느님께서 저를 사랑하고 희망하고 기다려주고 믿고 계신다는 표시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제 둘레를 파고 축복과 말씀의 거름을 주시며, 열매 맺도록 기다리시고 돌보시고 희망하시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뉘우치고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 13,8)
주님!
당신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저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손수 저의 둘레를 파고, 축복의 거름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당신께서는 여전히 말씀의 거름을 주시고,
믿고 사랑하고 돌보아 주시며, 기다리고 희망하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향기 담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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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축복의 때를 놓치지 마라
마음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심삼일 이다.’,‘마음이 흔들비쭉이다.’,‘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이라거나‘똥누러 갈 적 마음 다르고 올 적 마음 다르다.’ ‘마음처럼 간사한 것은 없다’고 합니다. 마음을 가다듬으려 하지만 본마음과는 다르게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그야말로 ‘내 마음 나도 몰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오늘을 사는 모두에게 관심을 두십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이고, 지금 살아있는 우리가 주님께 마음을 돌려 영원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2).‘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루카13,5).하고 말씀하십니다.
에제키엘서에는“주 하느님의 말이다. 너희는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에제18,3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3,9).라고 말씀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야고4,8)하고 말씀하십니다.
묵시록은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리겠다”(묵시2,5).고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고쳐 하느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하겠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루카13,6-9)를 보면 포도원지기는 3년이나 기다렸음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내려는 주인에게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하고 사정합니다. 마지막 가능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 무화과나무가 베어질 운명입니다. 이제 ‘올 한 해’동안에 결말이 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도 죽음이 유보된 시한부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올 한 해’가 소중합니다. 아니 유보된 지금 순간순간을 어떻게 사느냐에 멸망과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기회를 잘 써야 합니다. 우리는 주어진 축복의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리 열매를 맺어도 그것이 주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부터 주님의 마음에 드는 변화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주인의 마음에 드는 열매가 중요합니다.
비유에서 주인은 하느님이요, 포도원 지기는 예수님이시고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포도원 지기인 예수님께서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께 아직 참아 달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비유되는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수고이고 땀입니다. 그분의 노력을 헛되이 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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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평화신문 홍보를 위해서 뉴욕에서 신부님이 왔습니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달라스로 오기 전에 뉴욕의 평화신문에 있었습니다. 평화신문의 사정을 잘 알기에, 신문 홍보가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기에 더 마음이 쓰였습니다. 신부님은 제가 같은 서울 대교구이고, 전임 신부이기에 마음이 편했다고 합니다. 마치 시집간 딸이 힘들면 친정집에 와서 엄마에게 이야기하듯이, 신부님도 아버지의 집에 온 것처럼 편했다고 합니다. 신문사 운영은 제가 5년 동안 있었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직원들은 신문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후임 신부님은 젊은 패기와 열정으로 홍보를 다니고 있습니다. 신문사 홈페이지도 알차게 디자인했습니다. 건물이 100년 가까이 되었기에 고치고, 수리해야 할 곳들이 생겼습니다. 이번에 어쩔 수 없이 지붕공사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신자분이 공사를 맡아서 조금 저렴하게 계약했지만, 신문사가 감당하기에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친정 같다는, 아버지의 집 같다는 달라스 성당에서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어서 기쁨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성숙한 신앙인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닐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람들의 속임수나 간교한 계략에서 나온 가르침의 온갖 풍랑에 흔들리고 이리저리 밀려다닙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그 직분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그 소유 때문에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는 사람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죄를 지었어도 회개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탕자’는 회개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돌아온 동생을 바라보는 형은 아버지에게 불만을 이야기합니다.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또한 정의라는 이름으로 자비를 베풀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죄를 지어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못해서 구원받을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회개한 것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금연을 한다고 말을 하면서 담배를 피우면 진정한 금연이 아닙니다. 회개는 인식의 전환이고, 인식의 전환은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준 이야기는 ‘자캐오’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났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가진 것의 절반을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겠습니다. 제가 빌린 것이 있으면 4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가족은 구원받았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본인의 뜻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성인 성녀들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욕심 때문에, 체면 때문에, 시기와 질투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못합니다. 비우는 사람이, 나누는 사람이, 먼 곳을 보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이라 할지라도 죽기를 바라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악인이라고 해도 돌아서서 살기를 바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물며 당신이 사랑하시는 신자들과 사제들을 위해서는 더욱 기다려 주시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올 것을 더욱 바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기준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죄, 악, 죽음’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란 잘못된 길에서 올바른 길로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삶의 중심이 ‘돈, 명예, 권력, 욕심’이었다면 내 삶의 중심을 ‘믿음, 사랑, 희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듯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신앙인은 참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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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천벌을 받아도 싸지!’
악행을 일삼으며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사람이 벌을 받게 되면 우리는 위와같이 말합니다.
어제까지는 친구라고 부르고 형제라고 부르던 사람의 치부가 드러나 사회적 지탄을 받게 되면 언제 친구, 형제라고 불렀냐며 세상과 똑같이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단지 드러나지 않은 것뿐인데 말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이 말씀의 뜻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십니다. 드러나지 않은 것까지 말입니다.
다른 이에게는 손가락질하며 자신은 깨끗한 사람인 척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회개하라고, 빛을 바라보라고 말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빛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빛을 등지고 있으면 앞이 어둠이어서 자신을 바라보기 쉽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빛을 바라보면 자기 모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손가락을 펼치는 것보다 자기 모습을 보며 다른 이를 이해하고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에 물을 주십니다. 내일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한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회개하세요. 빛을 바라보세요. 그리고 자신과 모두를 용서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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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알 수 있는 것
세상 모든 일에는 교훈과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설령 고통일지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날 중에는
쨍한 날도 있고, 우중충한 날도 있으며, 비가 오는 날도 있습니다.
쨍한 날은 쨍한 날대로 그 안에 선물이 있고
우중충한 날은 그날대로 선물이 있습니다.
비 오는 날에도 깨달을 수 있는 선물이 있습니다.
비가 오는 날 깨달았습니다.
구두 밑창이 떨어졌다는 것을 말입니다.
쨍했다면 몰랐을 일입니다.
비가 와서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비가 오면 알게 될까요?
우리 마음 어디에 구멍 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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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혜로운 구원의 삶
“회개, 책임을 다함, 사랑의 공동체 건설”
이런저런 소식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페루 출신 해방신학의 선구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도미니코 수도회 신부가 지난 화요일 10,22일 향년 96세로 선종했습니다. 교황은, “나는 오늘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를 생각한다. 그는 위대한 사람이자 교회의 사람이었다.”극찬합니다.
또 어제 교황은 성 보나벤투라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선종 750주년을 맞이하여, “두 거룩한 교사들은 크게 영감을 주고 교회를 부요하게 한 영감의 원천이었다”며 두 교회박사를 기립니다. 성 프란치스코회의 성 보나벤투라는 “세라핌 박사(The Seraphic Doctor)”로, 성 도미니코 수도회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천사박사(Angelicus Doctor)”로 불립니다.
교황청을 방문한 예수고난회 수도자들에게 주신 교황님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고통중인 세상에 하느님 사랑의 희망을 가져다 주십시오’, ‘여기 제가 있습니다. 저를 보내십시오’, ‘관상생활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전쟁은 인류의 쓰레기입니다’, ‘사랑이 희망을 가져다 줍니다’, ‘마리아의 모범’” 순서에 따른 풍요로운 영적 가르침이었습니다.
행복은 발견이자 선택입니다. 언젠가가 아닌 오늘 지금부터 행복을 발견하여 행복을 선택하여 사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2,4), 어제 금요강론 시간 서두 인용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느님이 소망하시는바 우리 각자 모두 구원의 행복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 권리와 책임이 있습니다. 어제 찾아온 짧은 시가 자주 저를 행복하게 할 거란 예감입니다.
“늘
앞에 있는 산,
늘
앞에 있는 당신,
이
행복에 삽니다”<2024.10.25.>
늘 앞에 있는 주님이 제 행복의 원천입니다. 다음 옛 어른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예술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시인詩人은 시를 쓸 수 밖에 없는 순간이 오기 때문에 시를 쓴다.”<다산>
시가 찾아오기에 시를 쓴다는 것입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사람은 누구나 고유의 시인임을 깨닫습니다.
“시로써 감성을 풍부하게 하고, 예로써 바로 서고, 음악으로 완성한다.”<논어>
‘시삼백, 사무사(詩三百, 思無邪)’란 공자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이래서 시편을 늘 노래로 바치는 우리의 공동전례기도가 얼마나 지혜로운 구원의 축복인지 깨닫습니다.
지금까지 모두가 풍요로운 영성생활에 좋은 참고가 되는 가르침입니다. 유비무환의 지혜입니다. 언젠가 예기치 못한 일에 앞서 하루하루 충실히 사는 것이 구원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이 왜? 하느님이 왜?...끝없는 물음만 있지 도대체 원인을 알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도대체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 없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렇다 하여 인과응보도 단편적일 뿐 모두를 반영하지 않습니다. 불행한 일을 만날 때, 우리는 조건반사적으로 인과응보의 프레임에 빠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불행한 일에 담긴 경고를 배우고 깨닫는 것이 지혜이자 겸손입니다.
빌라도에 죽임당한 갈릴래아 사람들의 불행을, 실로암탑이 무너져 죽은 사람들의 불행을 경솔히 죄와 연결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인을 캐기 보다는 각자 신속히 회개의 계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원인 해명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 영역입니다. 원인 해명하다보면 악순환의 미궁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으니 이 또한 유혹입니다.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원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유구무언의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결론 말씀이 아주 단호합니다. 결코 회개를 미뤄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인 예수님의 지혜가 빛납니다. 이어지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회개의 절박성을 가르칩니다. 포도밭 주인이 하느님이라면 포도 재배인은 예수님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리겠다는 하느님에게 간곡히 제동을 거는 포도 재배인 예수님입니다. 일단 심판을 유예하고 재기의 기회를 주십사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모두 회개하라 연장되는 날들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 회개지 죽으면 회개도 못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알 수 없습니다. 한치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어떤 생각이나 계획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도대체 소모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시작해야만 합니다. 과거는 지났고 미래는 오지 않았습니다. 이는 우리 영역이 아닌 하느님 영역이고 오직 현재만 우리에게 해당되어 있습니다. ‘내가 지금 그분과 함께 있는 한, 나는 전혀 걱정할 것 없습니다(As long as I am with him now, I have nothing to worry about)’. 그분과 함께 회개의 지금을 사는 것이 바로 구원의 지혜입니다.
회개에 이어지는 지혜로운 구원의 삶은 바오로 사도가 가르쳐줍니다. 회개는 끝이 아니라 구원의 시작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각자 받은 은사의 몫에 따라 책임을 다함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여하여 실현해야 할 바오로의 원대한 공동체 이상이 참 아름답습니다. 결코 혼자의 구원은, 혼자서 완성의 구원은 없습니다. 더불어의 공동체를 통한 구원이요 전인으로서의 참나의 실현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끊임없이 사랑으로 성장하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중인 그리스도의 몸인 유기체의 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와 더불어,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통해 실현되는 각자 지혜로운 구원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각자 책임을 다함으로 사랑의 공동체 성장에 도움이 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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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늘 오늘 오직 오늘>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8-9)
늘 오늘
오직 오늘
어제는
지난 오늘
내일은
오는 오늘
늘 오늘
오직 오늘
오늘
믿으니
어제도
믿음
내일도
믿음
늘 오늘
오직 오늘
오늘
희망하니
어제도
희망
내일도
희망
늘 오늘
오직 오늘
오늘
사랑하니
어제도
사랑
내일도
사랑
늘 오늘
오직 오늘
어제는
지난 오늘
내일은
오는 오늘
늘 오늘
오직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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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7-9)
성조·예언자·복음, 세 번에 걸친 주님의 방문
주님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에 대해서도 꼭 하실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간청합니다 ...
이 나무는 인류를 나타냅니다. 주님께서는 첫 해, 곧 족장 시대에 이 나무를 찾아오셨습니다. 그 이듬해에 해당하는 율법과 예언의 시대에도 찾아오셨습니다. 바야흐로 복음과 함께 세 번째 해가 밝았습니다. 아무래도 나무가 베이게 생겼는데 자비로운 이가 자비로운 이에게 청합니다.
그는 주인이 얼마나 자비로운 분인지 드러내려고 간청하지요.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거름은 겸손을 뜻합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나무가 한쪽에는 열매를 맺고 다른 쪽에는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오셔서 그것을 갈라놓으실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가 무슨 뜻이겠습니까? 한 집단에도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설교 12
하느님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기
정신과 영을 새롭게 하여(에폐 4,23).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영을 새롭게 하여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영을 새롭게 하기를 바란다면, 영혼의 여섯 가지 기능이 저마다 신적인 사랑으로 도금된 금반지를 끼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영혼에게는 세 가지 낮은 기능이 있습니다. 첫째 기능은 구별하는 능력입니다. 이 기능에는 교화라는 금반지가 끼워져 있어야 합니다. 이 교화의 반지는 이성적인 기능 속에서 언제나 신적인 빛에 의해 교화됩니다. 둘째 기능은 분노라고 불립니다. 이 반지에는 평화라는 이름의 금반지가 끼워져 있어야 합니다. 왜 그러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평화 속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는 사람이고, 평화를 벗어난 사람은 하느님 밖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기능은 욕망이라고 불립니다. 여러분은 이 기능에다 자족이라는 이름의 반지를 끼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느님의 다스림을 받는 모든 피조물로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절대로 하느님을 충분히 소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을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여러분에게는 하느님이 더 적어질 것입니다. 실로 여러분이 하느님을 충분히 소유한 나머지 하느님에 대하여 싫증이 날 정도가 되었다면, 그런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267)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한국 고대사에 나타난 하느님 신앙과 풍류도
하느님 신앙과 불교와의 지평 융합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은 한민족의 종교적 심성의 밑바탕을 이루는 ‘혼 사상'이 한국의 대승 불교를 만나 어떻게 전개되어 갔는지, 거꾸로 말해서 불교가 한민족의 ‘혼 사상’과 어떻게 지평 융합을 이루어갔는지를 살펴봄으로써 한민족의 하느님 신앙과 유일신 신앙의 함수 관계를 짚어보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불교사상 중 ‘하나’를지향하는 ‘일승 지향성'과 관련된 사상만을 제한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흔히 학자들은 불교는 ‘무신론적 종교’로서 수행 해탈을 통해 ‘자력(自力) 구원' 하는 종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학문적 판단은 불교가 살아서 생동하는 종교 현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현실과 동떨어진 말이다. 대덕 학승으로부터 재가 불자에 이르기까지 1천만 한국 불자들에게 있어 불교는 단순히 ‘인식론적 혁명'을 통해 발생하고 또 이어져온 학자들의 철학적 사유체계로만 머물지는 않았다. 깨달음을 이룬 부처들에 귀의하고, 불경을 비롯한 진리의 가르침 총체에 귀의하며, 진리 구도가 집단 승단에 귀의하는(僧寶) 삼보(二寶)를 숭앙 경배하여 신심을 도탑게 하는 것이 엄연한 불교 현싱이기 때문이다.
만약 석기모니불, 괸음보살불, 이미타불, 약사여래불, 지장보살불 등 한국 불자들이 귀의하는 불교적 신심을 “지적 능력이 결여된 대중 불교의 방편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매우 오만한 지식인이거나 종교를 머리로만 이해하려는 철학도에 불과할 것이다.(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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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9)
우리 가운데 어떤 누구도 한 치 앞, 자신의 운명을 내다보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한 시간 후에 나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내일까지 살아 있을 것이라고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지만, 1994년 10월 저희 수도회 창립자이신 십자가의 성 바오로 탄신 300주년을 기념하면서 은인들을 모시고 이태리와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떠났는데 그 일행 중에는 청주 미평과 일본 예수고난회 관상 수녀님 8분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994년 10월 21일 오후, 저희 일행이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거의 다 마칠 무렵 관광 가이드로부터 <한국에서 성수대교가 끊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는 소식을 듣고 다들 비탄과 걱정으로 혼란에 빠졌습니다. 아마도 거의 모든 일행이 동시에 한국으로 국제전화를 하면서 가족과 친지들의 안전 여부를 확인하느라 난리가 났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런 비극적이고 불행한 사건이 단지 성수대교 사고뿐입니까?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대구 지하철에서 방화 사건이 일어났을 때, 특별히 세월호 침몰 때, 성남시 테크노밸리 환풍구 붕괴 참사로 무고한 아까운 목숨을 잃게 된 비극이 우리 주변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일련의 사고로 돌아가신 그분들이 저희보다 큰 죄를 지었기에 참변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 역시 그런 끔찍하고 엄청난 사고가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을 것이고,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채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을 뿐입니다. 어느 누가 멀쩡한 다리와 백화점이 무너지리라고, 지하철에서 화재가 발생하리라고, 튼튼해 보이는 큰 배가 침몰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분들 또한 다리와 백화점이 무너질 것이라고, 지하철에서 화재가 일어날 것이라고 또한 배가 침몰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무도 그 시간 그 자리에 가지 않았을 것이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변을 당한 분들도 그런 끔찍한 일이 발생하리란 사실을 전혀 예측할 수 없었고, 살아 있는 우리도 그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부 몰지각하고 비복음적인 개신교 목사들이 설교 가운데 자신들 교회에 소속한 신자들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서라지만, 이렇게 불의의 사고로 죽어간 이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서 변을 당한 것이라 설교하는데, 저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런 사고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며 하느님의 심판도 더더욱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히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런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그리고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13,2~3.4~5)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교는 바로 무화과 열매가 맺힐 것을 기대하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린 포도원 주인의 심정을 이해하고 동감한다면 예수님께서 이토록 강력하게 말씀하신 의도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13,6.7) 물론 무화과나무 주인은 언제든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 나무는 주인의 말 한마디에 자신이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운명은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삶과 죽음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흥정하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저버린 채 자신이 마치 주인인 양 행세하며 제멋대로 살아갑니다. 만일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지 못한다면 언제라도 포도원 주인이 자신을 잘라 버릴 수 있음을 망각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망각하고 하느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고 살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많은 사람의 경우에 회개하지 않고 회개를 미루는 까닭은 ‘지금 영세를 받으면 족쇄를 찬 것과 같으니 좀 더 나이 들어서!’라고 다음으로 미루고 또 미루고자 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어떤 면에서 참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미루다 보면 영원히 그 기회를 놓치고 말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13,9)라는 경고의 말씀처럼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영원히 열매 맺지 못한 채 잘려 나간 가치처럼 버려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비하신 하느님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기다리시고 참아 주시지만, 그 시간이 넘으면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러 매체를 통해서 접하는 끔찍한 사건 사고에 관한 뉴스는 삶이란 길고도 길지만, 때론 한 치 앞에 일어날 일을 예상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도 합니다. 예전부터 신앙인은 물론 많은 이들이 경험을 통해서 깨달았던 사실은, 죽음이 삶의 의미를 회복시켜준다, 는 관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타인의 재난이나 사건 사고를 접한 우리가 배우고 살아야 하는 지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우리 운명의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합니다. 어떤 일이 언제 일어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내일로 미루지 않고 지금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참된 자신을 찾고 참된 자신으로 한정된 삶의 시간 속에서 보람 있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살기를 바란다.”(에33,11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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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자비를 안기는 주님께 천만 번의 감사를 /
박윤식 [big-llight] 241025 19:41 ㅣNo.177060
참으로 이상하게 무슨 짓으로도 돈 많아야 행복해진단다. 첨단 무기만이 참 평화를 보장받는다나. 이 오만과 독선이 행복대신 평화를 짓밟을게다. 통계로는 국민수보다 신앙인들 수가 더 많지만 껍데기일 따름일까? 깨어 있지 않기에 행복도 평화도 다 잃는 것 같다. 죄 짓는 게 그리 악이라 생각지 않아서 일게다. 그래서 쉬이 죄에 빠진다나. 이 지경이니 회개는 정말 어려우리라. 악에서 선으로 향하는 게 회개요, 그게 없기에 멸망으로 바로 가는 게 여기에 있단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이르셨다. “어떤 이가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 심어 놓았다. 나중에 열매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열매가 달렸나 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했네. 그러니 이제 딱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그가 주인에게 대답하였다.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죠. 그간 제가 둘레를 파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이처럼 예수님 이야기에는 무화과나 포도나무에 대한 게 참 많다. 어쩌면 그것들이 축복을 상징하는 나무였다지만, 어찌되었건 그 무화과는 이상하게도 무려 삼 년 동안이나 열매를 맺지 못하기에 베어 버리잖다. 비유 본질은 그토록 회개를 부르짖었지만 변화가 없었단다. 선민 유대인도 회개하지 않으면 포기하신다는 걸까? 위기의 무화과나무는 신앙인 모두의 상징일 수도. 예나 지금이나 많은 이가 겉으로는 율법에는 좀 충실하지만 속은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
말은 진리를 외치지만 정작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은 정말 못 알아본다. 그분을 믿는다는 우리도 예수님을 실제 느끼며 신앙생활을 하는지? 그렇지 못하다면야, 그들과 하등 다를 바 전혀 없을 게다. 다시 주어지는 회개의 그 기회는 정녕 은총일 게다.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나는 이에게는 늘 관대한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그 기회를 거절하는 이에게는 엄격하신 분이시리라.
하느님 손길에 우리 약점과 상처를 겸허히 맡길 때, 분노에 찬 마음의 얼음이 하나 둘 녹여 깨지고 가슴에 웅그린 그 회개의 움직임이 비로소 시작될 게다. 하느님 자비는 우리 상상을 뛰어넘는다. 그분은 지은 죄보다 더 큰 자비를 꼭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를 없애시려고 구원에로 초대하셨다. 죄로 연민에 빠진 우리 모두를, 더 회심할 기회를 주시려고 기다리신다.
사실 회개는 하느님 자비를 체험하게 해 주는 은총의 샘이다. 우리는 주님 포도밭에서 그분 은총으로 살지만, 종종 열매다운 열매를 못 맺는다. 해마다 좀 더 나은 삶을 살겠다는 다짐에도, 조금도 더 나아지지 않은 채 그대로이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또 기다리신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그분께서는 늘 이렇게 용서하시며 기다리신다. 우리는 이제는 정말 더 나아져야 할게다.
어쩌면 올리브 나무도 마찬가지이지만 무화과나무는 척박한 데서도 잘 자라고, 특별히 거름을 주지 않아도 열매 맺는 효자나무이다. 특별히 거름이 필요 없는 무화과나무에 거름 준다는 것은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보살핀다는 뜻일 게다. 신앙인들은 계속해서 회개하는 이들이다. 어느 누구도 회개의 필요성에서 제외될 수 없으며, 은총의 시간이 남았지만, 그 시간은 마냥 지속될 수없는 제한된 시간임을 명심하자. 이렇게 질기게도 더 나아지지 않는 우리를 두고 그래도 자비와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시는 그분께, 그야말로 천만 번 감사뿐 무엇이 달리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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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에페소서에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현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고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우리 각자의 구원으로 끝나지 않으며 하느님의 우주적인 계획 안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우리의 속량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에페 1,10)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지 창조 이전부터 이러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계획은 교회를 통하여 이미 드러나고 있습니다.
4장 이후로는 이러한 교회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하여 줍니다.
교회는 인간적인 덕들을 실천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서 일치하여야 합니다(어제 독서).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실천하는 것은 한 분이신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에서는 교회 안의 여러 직무도 같은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려고 주어지는 것임을 말합니다.
눈을 크게 뜨고 멀리 바라봅시다. 최종 목표는 만물이 그리스도 안으로 수렴되는 것입니다.
이 커다란 계획 안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장하고, 우리 각자도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4,13) 다다르기까지 성장합니다.
어중간한 삶에 만족하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4,1) 살아가야 한다고 할 때 그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도달하라는 부르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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