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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묵상글 (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한 몸 의식.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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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0.26 05:54
- 한 몸 의식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각자가 자기 살 궁리만 하고,
각자가 자기 돈 벌 궁리만 하고,
각자가 자기 이익만 생각하면 공동체는 어떻게 될까요?
공동체는 망하게 되겠지요?
그러면 그 개인은 망하지 않고 잘 살 수 있을까요?
자기 살 궁리만 하는데 자기는 잘 살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공멸입니다.
그런데 왜 각자 살 궁리만 합니까?
공멸이라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인생은 각자도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것은 마치 한배를 타고 가면서 각자도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이란 각자가 사는 것을 꾀한다는 뜻이지요.
왜냐면 한배를 탔는데도 한배를 탔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인 것 같지만,
그리스도라는 한 몸을 이루는 각각의 지체들이라고.
다만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고,
공동체 의식 곧 한 몸 의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을 뿐이며,
우리는 공동체라는 것을 알기에 공생하려는 사람과
그것을 모르고 각자도생하다가 공멸하게 될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공동체 의식, 한 몸 의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 외롭고 모두 서서히 혼자 죽어갑니다.
독거노인만 고독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혼자 사는 것이 좋다고 하고,
혼자 살 수 있다고 하는 혼술 혼밥의 혼족들이 불쌍하고,
그들의 뻔한 불행을 보고만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한다면
나 혼자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며 살아서는 안 되고,
나만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며 살아서도 안 되겠지요.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같이 살고,
같이 그리스도라는 한 몸을 이루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지 않으면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처럼 되리라는 것이
요한복음의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이고 오늘 바오로 서간의 가르침입니다.
부대끼며 살다 보면 혼자 있는 것이 한순간 자유롭고 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롭고 편한 것이 진정 행복이고 생명보다 좋다고 생각한다면
영원히 저 캄캄한 우주에 혼자 떠돌아다닌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혼자 떠돌아다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까?
자유롭고 편하기만 한 것이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입니까?
이것을 성찰하며 자문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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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심청전을 잘 알 것입니다. 심청이의 효심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심청의 한자어를 보면 마음 심(心)에 맑을 청(淸)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름인 심봉의 한자어를 보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심청이와 마찬가지로 마음 심(心)에 봉할 봉, 닫힐 봉(封)을 씁니다. 따라서 마음이 맑은 심청이가 마음이 닫힌 심봉사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바쳐 아버지 마음의 눈을 뜨게 만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닫힌 마음을 열게 하기 위해서는 전적인 투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당수에 풍덩 빠지는 심청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도 그러합니다. 우리의 완고한 마음, 그래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닫힌 마음을 활짝 열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셔서 전적인 투신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전적인 투신을 할 수 있는 맑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 마음은 남 위에 올라타는 것이 아니고, 또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다는 마음으로 겸손한 사랑으로 다가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마음을 갖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심청이가 아닌 심봉사 쪽에 훨씬 가까운 것 같습니다. 마음이 꽉 닫혀 있어서 전적인 투신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의 이웃에게 아픔과 상처만을 주고 있지 않나요?
주님께서는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인 사건과 실로암 탑이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깔려 죽은 사건을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이 있고 나서 이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것을 생각했고 또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더 죄가 많았고, 또 잘못을 더 많이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판단이 잘못임을 분명하게 이야기하십니다. 그렇게 판단할 것이 아니라, 곧바로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를 이야기하십니다. 이 나무는 하느님의 일에 무심하고 냉담한 우리 모습을 상징합니다.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이시며, 포도 재배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삼 년은 주님께서 지상에서 활동하신 공생활 기간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열매가 바로 우리의 회개와 사랑의 응답입니다.
아무런 고통과 시련 없이 잘 산다고 해서, 죄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또 고통과 시련으로 힘들어하는 것을 죄 많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의 몸인 우리는 곧바로 회개하고 사랑의 응답을 해야만 마지막 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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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생은 끊임없이 배우고,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안주하지도, 안일하지도 않으면서 늘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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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멸망하는 것은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회개”란 ‘뉘우침’과 ‘돌아옴’을 말합니다. 곧 내면적, 정신적 뉘우침과 행위의 실천적 돌아옴을 말합니다. 그러니 넘어진 채 넘어진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넘어진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곧 자신의 죄를 알고 ‘뉘우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깨닫고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단순한 ‘죄의 인식’이나 ‘자기 성찰’ 혹은 ‘자기반성’이 아니며, 또한 단지 죄가 없는 ‘죄의 공백 상태’나 ‘죄의 진공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죄를 용서받았기에 뉘우치는 것’이요, 용서하신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옴’임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단순히 죄의 어둠을 벗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감이요,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됨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옴”이라는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마르 1,15;마태 4,17).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그러니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것은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 사랑인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라는 말씀은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완고함과 고집으로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믿지 않고,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멸망할 것입니다.
비유 속의 포도 재배인은 주인에게 말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 13,8)
그렇습니다. 범한 죄로 본다면, 저는 이미 뽑혀도 수백 번 뽑혀지고 말았을 열매 맺지 않는 쓸모없는 나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 여기 주님의 정원에 심겨져 있다는 것은 이미 용서받았다는 표시요, 또한 하느님께서 저를 사랑하고 희망하고 기다려주고 믿고 계신다는 표시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제 둘레를 파고 축복과 말씀의 거름을 주시며, 열매 맺도록 기다리시고 돌보시고 희망하시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뉘우치고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 13,8)
주님!
당신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저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손수 저의 둘레를 파고, 축복의 거름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당신께서는 여전히 말씀의 거름을 주시고,
믿고 사랑하고 돌보아 주시며, 기다리고 희망하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향기 담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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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축복의 때를 놓치지 마라
마음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심삼일 이다.’,‘마음이 흔들비쭉이다.’,‘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이라거나‘똥누러 갈 적 마음 다르고 올 적 마음 다르다.’ ‘마음처럼 간사한 것은 없다’고 합니다. 마음을 가다듬으려 하지만 본마음과는 다르게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그야말로 ‘내 마음 나도 몰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오늘을 사는 모두에게 관심을 두십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이고, 지금 살아있는 우리가 주님께 마음을 돌려 영원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2).‘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루카13,5).하고 말씀하십니다.
에제키엘서에는“주 하느님의 말이다. 너희는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에제18,3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3,9).라고 말씀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야고4,8)하고 말씀하십니다.
묵시록은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리겠다”(묵시2,5).고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고쳐 하느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하겠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루카13,6-9)를 보면 포도원지기는 3년이나 기다렸음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내려는 주인에게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하고 사정합니다. 마지막 가능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 무화과나무가 베어질 운명입니다. 이제 ‘올 한 해’동안에 결말이 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도 죽음이 유보된 시한부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올 한 해’가 소중합니다. 아니 유보된 지금 순간순간을 어떻게 사느냐에 멸망과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기회를 잘 써야 합니다. 우리는 주어진 축복의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리 열매를 맺어도 그것이 주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부터 주님의 마음에 드는 변화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주인의 마음에 드는 열매가 중요합니다.
비유에서 주인은 하느님이요, 포도원 지기는 예수님이시고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포도원 지기인 예수님께서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께 아직 참아 달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비유되는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수고이고 땀입니다. 그분의 노력을 헛되이 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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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평화신문 홍보를 위해서 뉴욕에서 신부님이 왔습니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달라스로 오기 전에 뉴욕의 평화신문에 있었습니다. 평화신문의 사정을 잘 알기에, 신문 홍보가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기에 더 마음이 쓰였습니다. 신부님은 제가 같은 서울 대교구이고, 전임 신부이기에 마음이 편했다고 합니다. 마치 시집간 딸이 힘들면 친정집에 와서 엄마에게 이야기하듯이, 신부님도 아버지의 집에 온 것처럼 편했다고 합니다. 신문사 운영은 제가 5년 동안 있었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직원들은 신문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후임 신부님은 젊은 패기와 열정으로 홍보를 다니고 있습니다. 신문사 홈페이지도 알차게 디자인했습니다. 건물이 100년 가까이 되었기에 고치고, 수리해야 할 곳들이 생겼습니다. 이번에 어쩔 수 없이 지붕공사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신자분이 공사를 맡아서 조금 저렴하게 계약했지만, 신문사가 감당하기에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친정 같다는, 아버지의 집 같다는 달라스 성당에서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어서 기쁨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성숙한 신앙인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닐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람들의 속임수나 간교한 계략에서 나온 가르침의 온갖 풍랑에 흔들리고 이리저리 밀려다닙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그 직분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그 소유 때문에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는 사람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죄를 지었어도 회개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탕자’는 회개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돌아온 동생을 바라보는 형은 아버지에게 불만을 이야기합니다.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또한 정의라는 이름으로 자비를 베풀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죄를 지어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못해서 구원받을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회개한 것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금연을 한다고 말을 하면서 담배를 피우면 진정한 금연이 아닙니다. 회개는 인식의 전환이고, 인식의 전환은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준 이야기는 ‘자캐오’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났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가진 것의 절반을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겠습니다. 제가 빌린 것이 있으면 4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가족은 구원받았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본인의 뜻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성인 성녀들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욕심 때문에, 체면 때문에, 시기와 질투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못합니다. 비우는 사람이, 나누는 사람이, 먼 곳을 보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이라 할지라도 죽기를 바라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악인이라고 해도 돌아서서 살기를 바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물며 당신이 사랑하시는 신자들과 사제들을 위해서는 더욱 기다려 주시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올 것을 더욱 바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기준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죄, 악, 죽음’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란 잘못된 길에서 올바른 길로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삶의 중심이 ‘돈, 명예, 권력, 욕심’이었다면 내 삶의 중심을 ‘믿음, 사랑, 희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듯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신앙인은 참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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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천벌을 받아도 싸지!’
악행을 일삼으며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사람이 벌을 받게 되면 우리는 위와같이 말합니다.
어제까지는 친구라고 부르고 형제라고 부르던 사람의 치부가 드러나 사회적 지탄을 받게 되면 언제 친구, 형제라고 불렀냐며 세상과 똑같이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단지 드러나지 않은 것뿐인데 말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이 말씀의 뜻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십니다. 드러나지 않은 것까지 말입니다.
다른 이에게는 손가락질하며 자신은 깨끗한 사람인 척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회개하라고, 빛을 바라보라고 말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빛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빛을 등지고 있으면 앞이 어둠이어서 자신을 바라보기 쉽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빛을 바라보면 자기 모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손가락을 펼치는 것보다 자기 모습을 보며 다른 이를 이해하고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에 물을 주십니다. 내일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한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회개하세요. 빛을 바라보세요. 그리고 자신과 모두를 용서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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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알 수 있는 것
세상 모든 일에는 교훈과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설령 고통일지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날 중에는
쨍한 날도 있고, 우중충한 날도 있으며, 비가 오는 날도 있습니다.
쨍한 날은 쨍한 날대로 그 안에 선물이 있고
우중충한 날은 그날대로 선물이 있습니다.
비 오는 날에도 깨달을 수 있는 선물이 있습니다.
비가 오는 날 깨달았습니다.
구두 밑창이 떨어졌다는 것을 말입니다.
쨍했다면 몰랐을 일입니다.
비가 와서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비가 오면 알게 될까요?
우리 마음 어디에 구멍 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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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혜로운 구원의 삶
“회개, 책임을 다함, 사랑의 공동체 건설”
이런저런 소식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페루 출신 해방신학의 선구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도미니코 수도회 신부가 지난 화요일 10,22일 향년 96세로 선종했습니다. 교황은, “나는 오늘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를 생각한다. 그는 위대한 사람이자 교회의 사람이었다.”극찬합니다.
또 어제 교황은 성 보나벤투라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선종 750주년을 맞이하여, “두 거룩한 교사들은 크게 영감을 주고 교회를 부요하게 한 영감의 원천이었다”며 두 교회박사를 기립니다. 성 프란치스코회의 성 보나벤투라는 “세라핌 박사(The Seraphic Doctor)”로, 성 도미니코 수도회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천사박사(Angelicus Doctor)”로 불립니다.
교황청을 방문한 예수고난회 수도자들에게 주신 교황님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고통중인 세상에 하느님 사랑의 희망을 가져다 주십시오’, ‘여기 제가 있습니다. 저를 보내십시오’, ‘관상생활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전쟁은 인류의 쓰레기입니다’, ‘사랑이 희망을 가져다 줍니다’, ‘마리아의 모범’” 순서에 따른 풍요로운 영적 가르침이었습니다.
행복은 발견이자 선택입니다. 언젠가가 아닌 오늘 지금부터 행복을 발견하여 행복을 선택하여 사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2,4), 어제 금요강론 시간 서두 인용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느님이 소망하시는바 우리 각자 모두 구원의 행복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 권리와 책임이 있습니다. 어제 찾아온 짧은 시가 자주 저를 행복하게 할 거란 예감입니다.
“늘
앞에 있는 산,
늘
앞에 있는 당신,
이
행복에 삽니다”<2024.10.25.>
늘 앞에 있는 주님이 제 행복의 원천입니다. 다음 옛 어른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예술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시인詩人은 시를 쓸 수 밖에 없는 순간이 오기 때문에 시를 쓴다.”<다산>
시가 찾아오기에 시를 쓴다는 것입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사람은 누구나 고유의 시인임을 깨닫습니다.
“시로써 감성을 풍부하게 하고, 예로써 바로 서고, 음악으로 완성한다.”<논어>
‘시삼백, 사무사(詩三百, 思無邪)’란 공자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이래서 시편을 늘 노래로 바치는 우리의 공동전례기도가 얼마나 지혜로운 구원의 축복인지 깨닫습니다.
지금까지 모두가 풍요로운 영성생활에 좋은 참고가 되는 가르침입니다. 유비무환의 지혜입니다. 언젠가 예기치 못한 일에 앞서 하루하루 충실히 사는 것이 구원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이 왜? 하느님이 왜?...끝없는 물음만 있지 도대체 원인을 알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도대체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 없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렇다 하여 인과응보도 단편적일 뿐 모두를 반영하지 않습니다. 불행한 일을 만날 때, 우리는 조건반사적으로 인과응보의 프레임에 빠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불행한 일에 담긴 경고를 배우고 깨닫는 것이 지혜이자 겸손입니다.
빌라도에 죽임당한 갈릴래아 사람들의 불행을, 실로암탑이 무너져 죽은 사람들의 불행을 경솔히 죄와 연결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인을 캐기 보다는 각자 신속히 회개의 계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원인 해명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 영역입니다. 원인 해명하다보면 악순환의 미궁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으니 이 또한 유혹입니다.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원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유구무언의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결론 말씀이 아주 단호합니다. 결코 회개를 미뤄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인 예수님의 지혜가 빛납니다. 이어지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회개의 절박성을 가르칩니다. 포도밭 주인이 하느님이라면 포도 재배인은 예수님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리겠다는 하느님에게 간곡히 제동을 거는 포도 재배인 예수님입니다. 일단 심판을 유예하고 재기의 기회를 주십사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모두 회개하라 연장되는 날들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 회개지 죽으면 회개도 못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알 수 없습니다. 한치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어떤 생각이나 계획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도대체 소모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시작해야만 합니다. 과거는 지났고 미래는 오지 않았습니다. 이는 우리 영역이 아닌 하느님 영역이고 오직 현재만 우리에게 해당되어 있습니다. ‘내가 지금 그분과 함께 있는 한, 나는 전혀 걱정할 것 없습니다(As long as I am with him now, I have nothing to worry about)’. 그분과 함께 회개의 지금을 사는 것이 바로 구원의 지혜입니다.
회개에 이어지는 지혜로운 구원의 삶은 바오로 사도가 가르쳐줍니다. 회개는 끝이 아니라 구원의 시작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각자 받은 은사의 몫에 따라 책임을 다함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여하여 실현해야 할 바오로의 원대한 공동체 이상이 참 아름답습니다. 결코 혼자의 구원은, 혼자서 완성의 구원은 없습니다. 더불어의 공동체를 통한 구원이요 전인으로서의 참나의 실현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끊임없이 사랑으로 성장하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중인 그리스도의 몸인 유기체의 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와 더불어,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통해 실현되는 각자 지혜로운 구원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각자 책임을 다함으로 사랑의 공동체 성장에 도움이 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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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늘 오늘 오직 오늘>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8-9)
늘 오늘
오직 오늘
어제는
지난 오늘
내일은
오는 오늘
늘 오늘
오직 오늘
오늘
믿으니
어제도
믿음
내일도
믿음
늘 오늘
오직 오늘
오늘
희망하니
어제도
희망
내일도
희망
늘 오늘
오직 오늘
오늘
사랑하니
어제도
사랑
내일도
사랑
늘 오늘
오직 오늘
어제는
지난 오늘
내일은
오는 오늘
늘 오늘
오직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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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7-9)
성조·예언자·복음, 세 번에 걸친 주님의 방문
주님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에 대해서도 꼭 하실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간청합니다 ...
이 나무는 인류를 나타냅니다. 주님께서는 첫 해, 곧 족장 시대에 이 나무를 찾아오셨습니다. 그 이듬해에 해당하는 율법과 예언의 시대에도 찾아오셨습니다. 바야흐로 복음과 함께 세 번째 해가 밝았습니다. 아무래도 나무가 베이게 생겼는데 자비로운 이가 자비로운 이에게 청합니다.
그는 주인이 얼마나 자비로운 분인지 드러내려고 간청하지요.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거름은 겸손을 뜻합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나무가 한쪽에는 열매를 맺고 다른 쪽에는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오셔서 그것을 갈라놓으실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가 무슨 뜻이겠습니까? 한 집단에도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설교 12
하느님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기
정신과 영을 새롭게 하여(에폐 4,23).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영을 새롭게 하여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영을 새롭게 하기를 바란다면, 영혼의 여섯 가지 기능이 저마다 신적인 사랑으로 도금된 금반지를 끼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영혼에게는 세 가지 낮은 기능이 있습니다. 첫째 기능은 구별하는 능력입니다. 이 기능에는 교화라는 금반지가 끼워져 있어야 합니다. 이 교화의 반지는 이성적인 기능 속에서 언제나 신적인 빛에 의해 교화됩니다. 둘째 기능은 분노라고 불립니다. 이 반지에는 평화라는 이름의 금반지가 끼워져 있어야 합니다. 왜 그러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평화 속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는 사람이고, 평화를 벗어난 사람은 하느님 밖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기능은 욕망이라고 불립니다. 여러분은 이 기능에다 자족이라는 이름의 반지를 끼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느님의 다스림을 받는 모든 피조물로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절대로 하느님을 충분히 소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을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여러분에게는 하느님이 더 적어질 것입니다. 실로 여러분이 하느님을 충분히 소유한 나머지 하느님에 대하여 싫증이 날 정도가 되었다면, 그런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267)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한국 고대사에 나타난 하느님 신앙과 풍류도
하느님 신앙과 불교와의 지평 융합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은 한민족의 종교적 심성의 밑바탕을 이루는 ‘혼 사상'이 한국의 대승 불교를 만나 어떻게 전개되어 갔는지, 거꾸로 말해서 불교가 한민족의 ‘혼 사상’과 어떻게 지평 융합을 이루어갔는지를 살펴봄으로써 한민족의 하느님 신앙과 유일신 신앙의 함수 관계를 짚어보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불교사상 중 ‘하나’를지향하는 ‘일승 지향성'과 관련된 사상만을 제한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흔히 학자들은 불교는 ‘무신론적 종교’로서 수행 해탈을 통해 ‘자력(自力) 구원' 하는 종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학문적 판단은 불교가 살아서 생동하는 종교 현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현실과 동떨어진 말이다. 대덕 학승으로부터 재가 불자에 이르기까지 1천만 한국 불자들에게 있어 불교는 단순히 ‘인식론적 혁명'을 통해 발생하고 또 이어져온 학자들의 철학적 사유체계로만 머물지는 않았다. 깨달음을 이룬 부처들에 귀의하고, 불경을 비롯한 진리의 가르침 총체에 귀의하며, 진리 구도가 집단 승단에 귀의하는(僧寶) 삼보(二寶)를 숭앙 경배하여 신심을 도탑게 하는 것이 엄연한 불교 현싱이기 때문이다.
만약 석기모니불, 괸음보살불, 이미타불, 약사여래불, 지장보살불 등 한국 불자들이 귀의하는 불교적 신심을 “지적 능력이 결여된 대중 불교의 방편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매우 오만한 지식인이거나 종교를 머리로만 이해하려는 철학도에 불과할 것이다.(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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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9)
우리 가운데 어떤 누구도 한 치 앞, 자신의 운명을 내다보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한 시간 후에 나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내일까지 살아 있을 것이라고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지만, 1994년 10월 저희 수도회 창립자이신 십자가의 성 바오로 탄신 300주년을 기념하면서 은인들을 모시고 이태리와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떠났는데 그 일행 중에는 청주 미평과 일본 예수고난회 관상 수녀님 8분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994년 10월 21일 오후, 저희 일행이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거의 다 마칠 무렵 관광 가이드로부터 <한국에서 성수대교가 끊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는 소식을 듣고 다들 비탄과 걱정으로 혼란에 빠졌습니다. 아마도 거의 모든 일행이 동시에 한국으로 국제전화를 하면서 가족과 친지들의 안전 여부를 확인하느라 난리가 났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런 비극적이고 불행한 사건이 단지 성수대교 사고뿐입니까?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대구 지하철에서 방화 사건이 일어났을 때, 특별히 세월호 침몰 때, 성남시 테크노밸리 환풍구 붕괴 참사로 무고한 아까운 목숨을 잃게 된 비극이 우리 주변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일련의 사고로 돌아가신 그분들이 저희보다 큰 죄를 지었기에 참변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 역시 그런 끔찍하고 엄청난 사고가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을 것이고,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채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을 뿐입니다. 어느 누가 멀쩡한 다리와 백화점이 무너지리라고, 지하철에서 화재가 발생하리라고, 튼튼해 보이는 큰 배가 침몰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분들 또한 다리와 백화점이 무너질 것이라고, 지하철에서 화재가 일어날 것이라고 또한 배가 침몰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무도 그 시간 그 자리에 가지 않았을 것이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변을 당한 분들도 그런 끔찍한 일이 발생하리란 사실을 전혀 예측할 수 없었고, 살아 있는 우리도 그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부 몰지각하고 비복음적인 개신교 목사들이 설교 가운데 자신들 교회에 소속한 신자들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서라지만, 이렇게 불의의 사고로 죽어간 이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서 변을 당한 것이라 설교하는데, 저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런 사고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며 하느님의 심판도 더더욱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히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런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그리고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13,2~3.4~5)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교는 바로 무화과 열매가 맺힐 것을 기대하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린 포도원 주인의 심정을 이해하고 동감한다면 예수님께서 이토록 강력하게 말씀하신 의도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13,6.7) 물론 무화과나무 주인은 언제든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 나무는 주인의 말 한마디에 자신이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운명은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삶과 죽음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흥정하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저버린 채 자신이 마치 주인인 양 행세하며 제멋대로 살아갑니다. 만일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지 못한다면 언제라도 포도원 주인이 자신을 잘라 버릴 수 있음을 망각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망각하고 하느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고 살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많은 사람의 경우에 회개하지 않고 회개를 미루는 까닭은 ‘지금 영세를 받으면 족쇄를 찬 것과 같으니 좀 더 나이 들어서!’라고 다음으로 미루고 또 미루고자 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어떤 면에서 참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미루다 보면 영원히 그 기회를 놓치고 말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13,9)라는 경고의 말씀처럼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영원히 열매 맺지 못한 채 잘려 나간 가치처럼 버려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비하신 하느님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기다리시고 참아 주시지만, 그 시간이 넘으면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러 매체를 통해서 접하는 끔찍한 사건 사고에 관한 뉴스는 삶이란 길고도 길지만, 때론 한 치 앞에 일어날 일을 예상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도 합니다. 예전부터 신앙인은 물론 많은 이들이 경험을 통해서 깨달았던 사실은, 죽음이 삶의 의미를 회복시켜준다, 는 관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타인의 재난이나 사건 사고를 접한 우리가 배우고 살아야 하는 지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우리 운명의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합니다. 어떤 일이 언제 일어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내일로 미루지 않고 지금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참된 자신을 찾고 참된 자신으로 한정된 삶의 시간 속에서 보람 있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살기를 바란다.”(에33,11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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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자비를 안기는 주님께 천만 번의 감사를 /
박윤식 [big-llight] 241025 19:41 ㅣNo.177060
참으로 이상하게 무슨 짓으로도 돈 많아야 행복해진단다. 첨단 무기만이 참 평화를 보장받는다나. 이 오만과 독선이 행복대신 평화를 짓밟을게다. 통계로는 국민수보다 신앙인들 수가 더 많지만 껍데기일 따름일까? 깨어 있지 않기에 행복도 평화도 다 잃는 것 같다. 죄 짓는 게 그리 악이라 생각지 않아서 일게다. 그래서 쉬이 죄에 빠진다나. 이 지경이니 회개는 정말 어려우리라. 악에서 선으로 향하는 게 회개요, 그게 없기에 멸망으로 바로 가는 게 여기에 있단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이르셨다. “어떤 이가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 심어 놓았다. 나중에 열매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열매가 달렸나 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했네. 그러니 이제 딱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그가 주인에게 대답하였다.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죠. 그간 제가 둘레를 파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이처럼 예수님 이야기에는 무화과나 포도나무에 대한 게 참 많다. 어쩌면 그것들이 축복을 상징하는 나무였다지만, 어찌되었건 그 무화과는 이상하게도 무려 삼 년 동안이나 열매를 맺지 못하기에 베어 버리잖다. 비유 본질은 그토록 회개를 부르짖었지만 변화가 없었단다. 선민 유대인도 회개하지 않으면 포기하신다는 걸까? 위기의 무화과나무는 신앙인 모두의 상징일 수도. 예나 지금이나 많은 이가 겉으로는 율법에는 좀 충실하지만 속은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
말은 진리를 외치지만 정작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은 정말 못 알아본다. 그분을 믿는다는 우리도 예수님을 실제 느끼며 신앙생활을 하는지? 그렇지 못하다면야, 그들과 하등 다를 바 전혀 없을 게다. 다시 주어지는 회개의 그 기회는 정녕 은총일 게다.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나는 이에게는 늘 관대한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그 기회를 거절하는 이에게는 엄격하신 분이시리라.
하느님 손길에 우리 약점과 상처를 겸허히 맡길 때, 분노에 찬 마음의 얼음이 하나 둘 녹여 깨지고 가슴에 웅그린 그 회개의 움직임이 비로소 시작될 게다. 하느님 자비는 우리 상상을 뛰어넘는다. 그분은 지은 죄보다 더 큰 자비를 꼭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를 없애시려고 구원에로 초대하셨다. 죄로 연민에 빠진 우리 모두를, 더 회심할 기회를 주시려고 기다리신다.
사실 회개는 하느님 자비를 체험하게 해 주는 은총의 샘이다. 우리는 주님 포도밭에서 그분 은총으로 살지만, 종종 열매다운 열매를 못 맺는다. 해마다 좀 더 나은 삶을 살겠다는 다짐에도, 조금도 더 나아지지 않은 채 그대로이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또 기다리신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그분께서는 늘 이렇게 용서하시며 기다리신다. 우리는 이제는 정말 더 나아져야 할게다.
어쩌면 올리브 나무도 마찬가지이지만 무화과나무는 척박한 데서도 잘 자라고, 특별히 거름을 주지 않아도 열매 맺는 효자나무이다. 특별히 거름이 필요 없는 무화과나무에 거름 준다는 것은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보살핀다는 뜻일 게다. 신앙인들은 계속해서 회개하는 이들이다. 어느 누구도 회개의 필요성에서 제외될 수 없으며, 은총의 시간이 남았지만, 그 시간은 마냥 지속될 수없는 제한된 시간임을 명심하자. 이렇게 질기게도 더 나아지지 않는 우리를 두고 그래도 자비와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시는 그분께, 그야말로 천만 번 감사뿐 무엇이 달리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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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에페소서에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현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고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우리 각자의 구원으로 끝나지 않으며 하느님의 우주적인 계획 안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우리의 속량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에페 1,10)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지 창조 이전부터 이러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계획은 교회를 통하여 이미 드러나고 있습니다.
4장 이후로는 이러한 교회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하여 줍니다.
교회는 인간적인 덕들을 실천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서 일치하여야 합니다(어제 독서).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실천하는 것은 한 분이신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에서는 교회 안의 여러 직무도 같은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려고 주어지는 것임을 말합니다.
눈을 크게 뜨고 멀리 바라봅시다. 최종 목표는 만물이 그리스도 안으로 수렴되는 것입니다.
이 커다란 계획 안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장하고, 우리 각자도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4,13) 다다르기까지 성장합니다.
어중간한 삶에 만족하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4,1) 살아가야 한다고 할 때 그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도달하라는 부르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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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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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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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은 틈만 나면 우리 때문에 아버지께 비는 연민과 측은지심의 주님이십니다!
올봄에 심은 무화과 묘목들을 돌봐주다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밭에 심은 무화과나무 한그루 비유가 현장감 있게 다가옵니다.
과일 나무를 심는 밭주인 입장에서 가장 간절히 바라는 바는 무엇일까요? 너무도 당연하겠습니다.
묘목이 빨리 자리를 잡고 무럭무럭 성장해서 풍성한 소출을 거두는 것이겠지요.
저희도 매실나무 밭에 무화과나무 열 그루를 심었습니다. 나름 여기 저기 묘목 심는 방법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서 정성껏 심었습니다.
물도 듬뿍듬뿍 주고 거름도 넉넉하게 주며 어서 빨리 묘목이 자리 잡기만을 학수고대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두 그루만 남기고 나머지 8그루는 말라죽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남아있는 두 그루에 지극정성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양질의 퇴비도 추가로 뿌려주었습니다.
무성해진 잡초도 제거해주었습니다.
정성 탓이었는지, 조금씩 자리를 잡고 잎도 무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심어놓으신 한 그루 무화과나무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바는 밭주인의 마음과 똑같습니다.
어떻게든 자리를 잡고, 깊이 뿌리를 내리고, 웬만한 강풍에도 쓰러지지 않는 튼실한 나무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니겠지요. 잎만 무성한 나무가 아니라 탐스런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는 실속 있는 무화과나무로 성장하는 것일 것입니다.
겉은 멀쩡한데, 결실이 없는 나무가 부지기수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결실 없는 나무 중에 한 그루입니다.
이런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께서는 재배인에게 똑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루카복음 13장 7절)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언제나 우리 편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한번만 선처해주실 것을 신신 당부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를 잘 변호하고 감싸 안아주실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고 계십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 동안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복음 13장 8~9절)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명백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와 죄인인 우리 인간 사이에 서셔서, 배은망덕과 고집불통의 명수인 우리를 어떻게 하면 하느님 아버지께 잘 말씀드릴까 고민하고 노심초사하시는 분이십니다.
틈만 나면 우리 때문에 아버지께 비는 연민과 측은지심의 예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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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하였는데, 그 죽은 사람들이 무슨 특별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 앞에 올바로 서 있지 못하면 망할 것이라고 하신다. 항상 회개하여 그에 맞갖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무화과나무 비유를 말씀하신다. 주인은 무화과나무를 포도원 안에 심었다. 그리고는 열매를 맺었는지 해마다 살펴보지만,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자 그 나무를 베어버리라고 한다. 3년이면 무화과나무가 성숙한 나무로 자라 열매를 맺을 만한 시간이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잘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땅만 차지하고 영양분만 없애며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하는 나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더 그냥 두시지요.”(8절).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포도 재배인은 아드님이시다. 그분은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1요한 2,1)이시며, 우리를 가꾸시는 정원사시다. 끊임없이 해로운 것들을 잘라내시고 거룩한 씨앗들로 우리를 채우시어 당신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항상 아버지 하느님께 이렇게 기다려 주시기를 청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를 벌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기다려 주시는 분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회가 나에게 계속 허락될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진정 주님과 이웃을 위해, 나의 구원의 결실을 위해 보람 있는 많은 결실을 보도록 해야 한다.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나무가 심어진 자리에는 아마 다른 나무로 교체될 수도 있다. 아주 열매를 잘 맺는 나무가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을 거두어 다른 사람에게 주실 수 있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거기서 맺는 열매로 복된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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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죄로부터의 회개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늘 복음은 ‘회개’가 주제입니다.
회개는 무엇으로부터 돌아서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결심입니다.
무엇으로부터 돌아서야 할까요? 우리가 지은 죄일까요? 아닙니다.
죄에서 회개하려면 영원히 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더 근본적인 게 회개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회개의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멸망하리라고 하십니다.
마치 삼 년 동안 열심히 거름을 주며 가꾸던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결국엔 잘리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무화과나무는 ‘믿음’과 관련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몸을 가린 것이
무화과나무 잎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을 잃었을 때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자신을 가렸습니다.
무화과나무에서 잎은 믿음이 없음을 상징하고 열매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회개는 ‘믿음’과 관련됩니다.
특별히 나 자신을 믿는 삶에서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회개해야 했던 것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이 아니라 뱀을 믿었다는 것이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한 행동에서만 회개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회개한 삶이 아닙니다.
이를 잘 나타내주는 영화가 ‘밀양’입니다.
영화 ‘밀양’은 회개에 대한 의미를 성찰하게 해줍니다.
분명 전도연 씨는 믿음을 갖게 되어 용서해 주기 위해 자기 아들을 유괴 살인한 범죄자를 찾아갔습니다.
자신도 잘한 것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시골에 와서 돈 많다고 떠벌리고 다녀서 결국 아들이 유괴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괴범은 평온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납니다.
그리고 교회를 다시 나가지 않게 됩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자기도 죄가 있었다고 회개했지만,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죄로부터의 회개를 넘어서 ‘나’에게서 회개해야 합니다.
나에게서 회개하지 않고 죄에서만 회개하려는 것은 여전히 내가 죄를 짓지 않을 힘이 있다는 교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가 죽지 않는 한 나는 여전히 하느님과 대적하는 자가 됩니다.
나를 믿지 않고 나를 죽이는 봉헌이 되어야지 회개지 내가 한 행위에서 아무리 회개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나의 부정’과 ‘하느님 인정’이 바로 회개입니다.
나의 믿음에서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으로 돌리는 게 회개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오늘 복음을 다시 살펴봅시다. 갈릴래아 사람들은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다가 빌리도에게 살해당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제물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바치는 제물 때문에 자신이 깨끗해진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제물을 바친다고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물을 바치면서도 여전히 나를 믿을 수 있습니다.
제물에는 나를 신뢰하는 마음이 못 박혀 그 피가 섞여 있어야 합니다.
그게 안 되니 그런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제물이 주님께 무슨 가치가 있어서 주님께서 그 제물 덕분으로 나를 깨끗하게
해주어야 하거나 무언가 나에게 해주어야 한다고 믿으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제물로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내가 죽었는데 무엇을 바랍니까?
그냥 받은 것에 감사해서 앞으로도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마음으로 봉헌해야 합니다.
실로암의 탑이 무너져서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로암은 파견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곧 세례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세례는 받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죽은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열여덟을 ‘여섯 + 여섯 + 여섯’으로 보고 있습니다.
666. 짐승의 숫자입니다.
‘세속-육신-마귀’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탑은 ‘자아’입니다.
결국, 주님의 뜻으로 씻기만 하면 깨끗해지는 실로암이 있는지 자기를 믿었기에 그 자신에 깔려
죽게 될 것이란 뜻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은총은 주님 무상의 선물입니다.
실로암과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자격이 있어서 그런 은총을 받는다고 믿거나 세속-육신-마귀를 탑처럼 세워놓고 은총을 받으려 한다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나를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앵그리스트맨’(2014)은 인생의 모든 게 불만인 헨리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유일한 아들은 자신이 원하는 공부가 아닌 춤을 배운다고 해서 연을 끊었고 아내와도 별거 중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자신과 비슷하게 인생을 비관하는 의사에게 뇌동맥류라는 판정을 받습니다.
언제든 뇌혈관이 터져 사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참 열이 받은 주인공은 도대체 그러면 얼마나 사느냐고 묻습니다.
의사도 자신에게 다그치는 그 사람이 싫어서 그냥 ‘90분’이라고 말해버립니다.
곧 터지니 정밀검사를 받자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뛰쳐나가 마지막 90분 동안 해야 할 일을 찾습니다.
세 가지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는데 첫 번째는 아내와 화해하는 것, 두 번째는 아들과 화해하는 것, 세 번째는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보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갔더니 다른 남자와 있었고, 아들은 전화를 받지 않고, 동창은 단 한 명 나왔는데
어렸을 때 여자친구를 뺏긴 것 때문에 당장 죽을 사람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뇌가 터지든 말든 이젠 살고 싶지 않은 주인공은 다리에서 뛰어내립니다.
하지만 주치의는 주인공이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 재빨리 그를 구합니다.
그리고 지금 혈관이 새고 있으니 병원으로 가자고 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뛰어내릴 때 이미 자존심까지 죽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아들이 춤 연습하는 곳으로 가기로 합니다.
그리고 2년 만에 처음으로 용기를 내서 아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용서를 청합니다.
어렸을 때 아들과 함께 췄던 춤을 춥니다.
주인공은 수술하고 8일을 더 삽니다.
그러면서 아내와도 친구와도 화해합니다.
봉헌은 바로 헨리가 물로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내 힘으로 무언가 해 보려는 것이 아닌 주님께 맡기는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이렇게 더는 나를 믿지 않겠다는 회개는 참된 봉헌으로만 표현됩니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지 않는다는 말은 끝내 나를 믿겠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믿을 때 가장 먼저 믿게 되는 게 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봉헌이 나를 믿지 않는다는 결심입니다.
선악과가 그렇게 봉헌되어야 했습니다.
선악과의 봉헌은 더는 뱀을 믿지 않고 주님을 믿는다는 신앙표현입니다.
그 때문에 회개는 봉헌과 직결됩니다.
이 선악과가 구약에서는 십일조가 되었고 예수님도 내라고 말씀하셨고 미사 때 빵과 포도주로 봉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끝끝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어떻게 될까요?
오늘 예수님은 무서운 결말을 제시하시며 참된 회개의 표징을 봉헌으로 표현하라고 재촉하시는 것입니다.
회개는 내가 나를 의지하지 않겠다고 내 피를 제물에 섞어 봉헌하는 것이고, 주님의 성사에 위탁하겠다고 내 자아의 탑을 무너뜨려 교회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 봉헌에 내 피를 섞고 그래서 내 힘을 빼고 교회의 성사에 위탁합시다.
이것이 회개의 표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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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바로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2-3)"
당시 사람들은 어떤 참사가 발생하면 그것을 천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살해당한 갈릴래아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이었기 때문에 천벌을 받아서 죽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천벌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라는 예수님 말씀의 뜻은, "그 사건은 '천벌'이 아니라 빌라도라는 개인이 일으킨 살인 사건일 뿐이다.
그러니 죽은 사람들은 천벌을 받고 죽은 것이 아니라 범죄의 피해자들이다."입니다.
예수님 말씀에는 죽은 사람들이 의인인가? 죄인인가? 에 대한 판단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의인들도 있었을 것이고, 의인이 아닌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들은 회개하지 않아서 그렇게 멸망했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그 사건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처벌이 아니지만, 최후의 심판은 '그런 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회개하여라."입니다.
1) 최후의 심판은 '갑자기' 시작될 것입니다(루카 12,46).
회개하지 않고 방심한 채로 살던 사람들은 그때서야 회개하려고 하겠지만,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닥치기 때문에 회개할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2) 최후의 심판은 전 우주적인 일이고,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닥칠 것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고, 피해서 숨을 수 있는 곳도 없습니다.
3) 최후의 심판은 인간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섭고 끔찍한 일이 될 것입니다.
멸망하게 될 죄인들에게는...
(구원을 받게 될 의인들에게는 그날이 행복한 날이 될 것이고.)
그러니 모든 사람이 '지금 바로' 회개해야 합니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4-5)."
이 말씀의 뜻은 앞의 말씀의 뜻과 같습니다.
탑이 무너져서 사람들이 죽은 일은 '사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고는 죄인들에게 내린 천벌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최후의 심판 날이 되면,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큰 일'이 벌어져서 사람들이 많이 죽게 되면, 혹시 하느님의 심판이 아닐까?, 또는 혹시 종말의 징조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랬다가 시간이 좀 지나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노아'가 겪은 대홍수의 경우, 그 일은 분명히 하느님의 심판이었지만 종말은 아니었습니다.
인류 전체가 멸망하긴 했어도 '노아'와 그의 가족은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종말과 최후의 심판은 인류 전체가 대상입니다.
누구는 당하고, 누구는 피하고, 누구는 구경하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또 따로 살아남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슬퍼해 줄 사람도 없고, 기도해 줄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함께 당하게 될 일이니 장례식도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 자체는 그렇게 되는데, 심판이 마무리되면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어지게 될 것입니다(루카 17,34-35).
그때에는 멸망한 사람들 때문에 슬퍼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 때의 멸망은 '영원한 소멸'이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지금'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가르침입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8-9)."
'올해'는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지금'입니다.
'내년'은 종말과 심판이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그런데 '회개를 할 수 있는 올해라는 시간'이 언제까지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종말과 심판이 이루어지는 내년'이 언제 시작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미루지 말고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면,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보고 겪으면서도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는 죽음과 상관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죽음이 아주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의지로 자신의 수명을 정할 수 있다는 것인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일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인생이 허무한 것은 아닙니다.
무의미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의 인생만 허무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고, 회개하고, 잘 준비해서
그것을 얻게 되는 사람의 인생은 허무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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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카 13,1-9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오늘 복음의 핵심 주제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마음을 고쳐먹고 돌아서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하지요. 그런데 무엇으로부터 돌아서야 할까요? 내가 지은 죄에서 돌아서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족하고 약한 존재인 나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씩, 종류도 이유도 양상도 다양한 죄를 짓고 사는데, 죄로부터 돌아서는데에만 신경을 쓰다보면 내가 꾸준히 나아가야 할 참된 방향을 잃어버린 채 수많은 죄들 사이를 방황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뜻을 따름으로써 구원받는데에 가장 큰 문제는 나 자신을 믿는 교만입니다. 그 교만 때문에 나태함과 안일함에 빠져 죄를 짓게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함부로 믿음으로써 그를 ‘원수’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을 믿는 교만에서 돌아서서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마음을 바꾼다는 건 정말 쉽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바뀌는 게 사람 마음이라지만,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지만, 그렇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마냥 시시각각 바뀌는 건 그 때 그 때의 취향과 호불호일 뿐,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근본적인 마음가짐은 잘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그래서 바뀌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마음이 그 생각을 따라오는 게 더디기에, 우리는 그 속도 차 때문에 ‘본의 아니게’, 알면서도 여러 잘못을 저지르게 되지요. 그러면서도 머리로는 알겠는데 생각처럼 잘 안된다고, 이런 내가 정말 답답하고 어리석게 보이겠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걸 어떻게 하느냐고 책임을 회피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보내시는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그 비유를 보면 포도 재배인은 3년이나 기다렸음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내려는 주인을 만류하며 이렇게 말하지요.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우리에게 한 번이라도 구원받을 기회를 더 주시기 위해,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 아버지께 전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어렵게 얻은 마지막 기회를 놓쳐서는 안될 겁니다. 여기서 ‘올해’라는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을 가리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쁨이라는 거름을 주시고 용기와 힘을 낼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며, 믿고 기다려주시는 지금 이 시간을 우리는 절대 허투루 흘려 보내서는 안되겠지요.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지금 즉시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려 그분께서 바라시는 뜻을 열심히 헤아리고 실천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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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사도 바오로만큼 교회가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라는 사실을 잘 설명한 분이 있을까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는 다양하지만 모두가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다는 이 설명은 그 무엇으로도 이해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지요.
그 지체의 다양함이 지금 우리에게도 연결되어 살아 있게 하는 것이지요.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 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에페 4,11-12)
성장한다는 것은 어느 한 곳에 고착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지요. 어린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부족한 상태에서 다 나은 성숙한 상태로 넘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성장한다는 것은 불완전한 ‘온갖 풍랑에서 흔들리고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혼란스러움에서 안정되고 완성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루카를 통한 복음 말씀을 요약하면 빌라도가 제물을 바치려고 하던 사람들을 죽인 이야기와 실로암 탑이 무너져서 깔려서 열여덟 사람들이 죽은 슬픈 이야기에 대한 설명과 포도밭 주인과 재배인간의 대화 이야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빌라도에게 피살된 사람들이나 실로암 탑에 의해서 희생된 사람들이 다 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님께서 설명하십니다.
그 말씀 끝에 주님께서는 사실 갑자기 당한 죽음 못지않게 기억해야 하는 것은 사실 회개 하지 않은 사람들의 말로가 그 사람들보다 더 불행하다고 주님께서는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당장 일어나 일만 보지만 사실 믿는 이들은 하느님 앞에 정의와 사랑을 실천해야 하고 실천하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고 회개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어서 연약한 인간을 위해서 위로의 말씀을 해 주십니다.
포도밭 주인이 보니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를 보고 재배인에게 그 나무를 없애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재배인은 주인에게 청하지요.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루카 13,8-9)
인간은 하느님의 획일적은 정의대로 심판하신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있겠어요? 자비와 인자하신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우리의 잘못을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감사해야하지요.
우리는 종말의 때가 언제 나에게 닥칠지 모릅니다.
그래서 회개보다는 그 날 그 날 살아가는 세상의 일들에 묻혀서 정신 없이 지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회개라는 것을 나중으로 미루는 것이지요. 그래도 하느님은 당장 회개를 이행하지 못하고 잘못을 반복하는 우리를 그래도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어린이의 미성숙한 때를 지나서 신앙의 성숙하고 완성된 삶을 살 수 있도록 회개 하는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 우리의 죄를 누우치고 회개한다는 것은 사실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숙으로 향하면서 혼란의 시기도 어둠의 시기를 거치면서 원숙된 신앙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혼란스러움도 받아들이며 주님께서 기다리시는 그 사랑을 통하여 좀 더 실한 열매를 맺는 무화과 나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의 부족함과 죄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자비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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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는 길 : “아이고 애 아빠라 살아 있어요"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은퇴 공동 사제관을 나서면 예전에 본당에서 사목을 할 때, 자주 들렸던 정든 공소 마을을 지나게 됩니다. 과거 한 본당에 있을 때, 이 공소 한 교우 집에서 겪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구정을 며칠 지난 어느 날 원주 기독교 병원 중환자실에서 그 공소의 한 교우가 병자성사를 청 하는 연락을 본당에 했습니다.
서울에서 부인과 아이들을 데리고 설 쇠러 온 아들이 고향에 왔다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눈길을 건다가 그만 미끄러졌는데 하필이면 그 자리가 길가에 풀을 빈 언덕 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단단한 쑥대에 한쪽 눈을 찔리 고 만 것입니다. 급히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는데 대수롭 지 않게 여겼던 상처가 더 나빠져서 중환자실로 옮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찔린 눈으로 파상풍군이 들어가 실명이 되더니 빠르게 뇌까지 번졌던 것입니다.
종래에는 생명이 위독해지며 갑자기 죽음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병원을 떠나며 그의 가족이 급히 본당 에 연락해서 이 소식을 전하며 병자성사를 청했던 것입니다
병원에서 공소 마을로 가는 거리보다 본당에서 가는 것이 더 가깝다는 계산에 여유 있게 먹던 점심을 마저 하고 그곳으로 출발했습니다. 부지런히 운전을 해서 공소를 지나 산 밑 그 교우의 집으로 가고 있는데 몇몇 교우들이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들이 저를 알아 채고는 '신부님, 좀 빨리 오시지 그랬어요? 애 아빠가 신부님 엄청 기다리다가 그만 하늘나리에 갔어요.'라고 말 하는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엄청 미안하기도 하고 안타깝더라구요. 좀 더 가다가 그 집 아래 공터에 차 를 세우고 올라갔더니 가족과 몇몇 교우들이 침통한 분 위기에서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애 엄마가 저를 보더니 신부님 그이가 그만 죽었네요. 라며 슬피 우는 것입니다.
시신이 모셔진 방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갔더니 뒤따라 온 부인이 천으로 덮여진 시신 앞에서 '여보, 당신이 기 다리던 본당 신부님 오셨어.'라며 더 높은 소리로 목 놓아 또다시 우는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저도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부인이 "아이고 애 아빠가 살이 있어요."라며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얼굴에 가렸던 천을 벗기니 애 아빠가 눈을 뜨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가까이 간 저를 그가 쳐다보더니 손을 꼭 를 잡는 것입니다. 말은 못 하지만 듣는 것 같아 서둘러 병자성사를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얼마 있다가 다시 눈을 감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더니 바로 죽음을 맞는 것입니다. 그 시간은 본당 신부가 꾸물대며 늦었던 약 7분에서 10분 정도의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그 집에서 머물다가 다시 본당으로 되돌아오며 부끄러움을 없애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문득 제자들이 안식일에 주님과 함께 밀밭을 지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제자들은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는데 이 모습을 바라보던 바리사이들이 안식 일 법을 운운하며 비난을 퍼붓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 께서 다윗과 동료들이 허기졌을 때 놉에서 사제 아히멜 렉이 내어준 봉헌된 빵으로 그들의 목숨을 구한 이야기 를 상기시키며 제자들을 옹호하십니다.(마태 12,1-5: 1사무 21.4-7) 주님의 지극한 사랑이 제자들의 허기를 채워주십 니다.
"주 하느님, 당신만이 저의 희망이시고 제 어릴 때부터
저의 신뢰이십니다."(시편 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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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
사랑의 응답으로서의 회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2. 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회개는 우리의 영원 생명과 직결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인간은 대부분 생존의 몸부림 속에 점점 그분의 사랑과 순수함으로부터 멀어져갑니다. 따라서 먹고사는 일 이상으로 주님께 되돌아가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으면 빌라도에게 희생당한 갈릴래아 사람들이나 실로암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사람들처럼 멸망할 것이라고 하십니다(13,2-5). 불행을 죄의 결과로 보았던 유다인들과 바리사이들의 인과응보적 사고를 거부하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그런 재난을 당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원의 무화과나무를 비유로 회개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다른 나무보다 좋은 땅에 심어 놓고(13,6), 열매를 맺기에 충분한 기간인 삼년 동안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돌보았는데도 그에 합당한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재배인에게 그 나무를 잘라버리라고 합니다(13,7). 그러나 포도원 재배인은 주인에게 일 년만 더 기다려보고 그래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때 잘라 버리자고 청합니다(13,8-9).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나의 죄에도 불구하고 회개하도록 한없는 자비로 기다려주십니다. 그럼에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많은 것을 지녔다 해도 영혼의 파멸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회개하지 않는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악습과 죄를 일삼고 나쁜 욕정과 자기 육신의 나쁜 욕망들을 쫓아다니며, 주님께 약속한 것들을 지키지 않고, 육적인 욕망과 세속의 걱정과 현세 삶에 대한 근심에 빠져 세상을 육신적으로 섬기는 이들은”(1신자편지 2,3-6절) 소경이요 저주받은 자들이며, 쓰디쓴 죽음을 맞고 세상을 떠나게 되고 벌레들이 그들의 시체를 먹어 버릴 것이다(1신자 2,7.9.14.18).
회개란 자신을 주인으로 여기면서 육적인 것에 기우는 마음을 돌이켜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육적인 것에 마음을 쓴다 함은 하느님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것으로 가득 차 있기에 성령이 그 안에서 활동하실 수 없습니다. 영의 사람이 되려면 성령께서 내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하시도록 자신을 비우고 개방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주 죄를 지으면서도 그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남의 탓으로 여기기까지 합니다. 이제 우리의 잘못과 죄를 인내로이 참으시고 회개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베풀어 주시는 주님의 넓은 자비를 깨달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이 가을은 진정으로 현세의 명예와 재물과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가기에 좋은 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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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우리의 회개를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루카 13,3)"더 큰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3,5)
이스라엘 백성은 천재지변이나 사고, 병고 등이 하느님 진노의 결과라 여겼습니다. 이런 변을 당한 이들이 부정하거나 죄를 지어서 받는 벌이라 믿었지요. 예수님께서 그들의 편견에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5)
사고는 누구나 겪을 수 있습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햇빛과 비가 허락되듯이, 고통도 마찬가지지요. 차이가 있다면 비극적 사고에서 의미를 끌어올리느냐 무너지느냐에 달려 있을 겁니다.
"멸망"
무조건 자신이 옳고 완전하다고 여기는 이들은 사고나 불운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자기가 잘못한 일이 없는데 이런 고통을 겪는 건 부당하다고 여겨 분노의 대상을 찾다 찾다 결국 신에게 증오를 쏟아내기도 합니다. 무너진 육신과 재산의 손실에 더해 영혼까지 휘청거리지요.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멸망"은 단순히 외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반면 끊임없이 회개라는 이들, 즉 스스로 용서받은 죄인임을 인식하는 이들은 고통이 닥쳐올 때 자신을 더 삼가고 살핍니다. 하느님께서 일부러 우리를 괴롭히는 존재가 아니심을 잘 알기에 괜한 분노로 힘을 빼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겪는 고난의 원인을 숙고하고 의미를 찾아나갑니다. 회개한 이들은 외적으로는 타격을 입을망정 영혼은 더 큰 생명력으로 더욱 단단해집니다.
"그럼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루카 13,9)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잘라 버리라는 포도원 주인에게 포도 재배인이 청합니다. 자신이 거름을 주며 돌보겠다고 시키지도 않은 일을 자청하면서까지 만류하지요. 그에게서 멸망할 위기에 처한 생명에 대한 연민과, 자신의 희생과 사랑의 노력이 나무의 생명력을 회복시키리라는 낙관, 그리고 신뢰의 마음을 동시에 봅니다. 바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 대해 가지고 계신 마음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의 성장과 완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에페 4,15)
죄인들의 모임인 교회는 겉으로 불완전하고 지지부진하고 결점투성이처럼 보여도 본질적으로는 이런 목표를 지닙니다. 구성원 각자가 지닌 부족함과 불결함, 죄악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에페 4,13) 다다를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저마다 아무리 큰 죄인이어도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그렇게 계획하셨고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아무리 추상같은 진리도 사랑으로 전할 때 진정성이 전달됩니다. 진리는 단호해도 따듯하고, 단순해도 포용적이기 때문이지요.
"모든 면에서 자라나"
성장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 육의 생명을 떠날 때까지 끊임없이 성장하고 자라며 변화해 가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의 일치와 성숙"(에페 4,13 참조)이 곧 회개의 열매인 성장입니다. 저마다 받은 은총과 역량에 따라 성장의 속도는 다르지만,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끊임없이 쇄신하고 변화하는 회개로 불리움받았습니다.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비록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 같은 존재일망정 이 희망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포도 재배인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희망을 버리지 않으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 둘레의 땅을 허물고 거름을 채워 주십니다. "살아남아라!"(에제 16,6) 하시는 주님의 간절한 마음이 들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자라나고 있습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루카 13,8)
포도 재배인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 년의 유예를 청하십니다. 그렇다면, 딱 일 년이 지났는데 성과가 없으면 뽑혀 버릴까요? 아마도 우리가 회개하여 열매를 맺을 때까지 이 유예는 매년 갱신될 것이고, 어쩌면 마지막 날까지 반복될지도 모릅니다. 그분은 열매에 앞서 우리 존재를 더 염려하시고 연민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해 돌아서는 회개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앞당깁니다. 이것이 주님의 자비가 아무리 커도 마냥 회개를 미룰 수 없는 이유입니다. 회개하는 이에게는 그 어떤 고통도 멸망의 빌미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장하고 변화하는 거름이 될 것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뱡향 전환, 돌아섬, 회개는 무엇인지 주님께 여쭙고 귀기울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루하루 매일 조금씩이라도 성장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충만함을 나누시려고 우리에게 말씀과 성체로 거름을 주며 더 애타게 간절히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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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6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교회 공동체의 무너짐을 막는 삶
<2024.10.26> 아침을 여는 묵상 (애 4:11~22절)
❝교회 공동체의 무너짐을 막는 삶❞
❚ 교회의 죄악을 징계하셔서 영광과 존귀를 상실하게 하시지만, 결국 회복시켜 가실 하나님을 기대합시다.
✔ 교회의 몰락을 어떻게 막을 수 있습니까?
➲ 교회의 몰락은 지도자들이 회개함으로 막을 수 있습니다(11~16절).
시온의 모든 것이 뿌리째 뒤흔들릴 정도로 그 피해가 극심했던 이유는 여호와께서 분을 발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왕들과 모든 백성들은 시온의 멸망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1~2절). 이처럼 세상을 놀라게 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정작 외부 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문제 때문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의 부패와 죄악에서 멸망의 원인을 찾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책망하는 의인들을 성읍 안에서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13절). 결국 그들은 백성들과 이방이들에게 배척을 당하는 역설적 상황을 보게 됩니다(15절). 하나님은 죄를 범한 지도자들을 열방으로 흩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들을 돌보지 않으셨습니다(16절). 하나님의 공의를 들어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의 부패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들로부터 얼굴을 돌리셨습니다.
‘...저리 가라 부정하다, 저리 가라, 저리 가라, 만지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끊어진 교회는 그 영광과 존귀함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조롱당하며 짓밟힘을 당하게 됩니다. 오늘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이 이런 것이 아닌가 하는 씁쓸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와 같은 교회의 몰락의 주요 원인은 바로 목회자의 부패와 교회의 리더십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잘못된 신앙관 때문임을 인정합니다. 청지기로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를 위해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 자신의 유익과 만족만을 바라고, 정작 우리에게 맡겨진 일과 사명에 대해서는 소홀히 여기고 있지 않은지 우리 자신을 반성해 봅니다. 교회 공동체가 무너지지 않도록 목회자들을 위해 그리고 교회의 리더십들을 위해 끊임없는 중보가 필요할 때입니다.
➲ 교회의 몰락은 헛된 것들을 멀리함으로 막을 수 있습니다(17~20절).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17절). 시온의 멸망의 또 다른 원인으로 역사의 주권자요, 우리 인생의 참된 주권자가 되시는 하나님 대신에 애굽을 의지하여 자신들의 생명을 보장받으려 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거듭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을 권유하였지만, 결국 지도자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고 헛된 것들, 구원하지 못할 나라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헛된 것들의 도움을 바라다가 결국 그들은 스스로 함정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바벨론은 독수리보다 빨리 쳐들어와 그들을 공격하여 멸망케 하였습니다(20절).
‘사면초가’의 위기에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세상의 방법과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간구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크고 작은 수 많은 문제들에 직면합니다. 개인과 교회를 위기에서 건져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인위적인 어떤 조직이나 세상의 이론으로 교회 내의 문제를 풀어갈 수 없습니다. 성경적 방법으로 해결하지 못하니 세상 언론이 개입을 해서 교회내의 문제를 지적하고, 비리를 파헤치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무너지지 않도록 교회는 다시 복음 앞에 서야 합니다. 나 역시나 하나님만이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심을 다시금 마음 깊이 새기고, 헛된 것에 내 신앙과 삶을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 교회의 몰락은 악한 권세들을 제거함으로 막을 수 있습니다(21~22절).
암담한 현실에 대해 탄식하던 시인은 이제 작은 희망의 빛을 본 사람처럼 희망을 노래합니다. 그것은 유다를 대적한 대표적인 이방 나라인 에돔의 멸망 예고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자손들로서 혈연적 관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떤 이방 민족보다 더 이스라엘에 대해 적대적 관계에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 나라의 허물을 드러내시고, 반대로 딸 시온의 대해서는 형벌을 끝내시고 다시 회복시키실 것을 보여 주십니다.
이 땅을 살아갈 동안 겪는 모든 것에는 한계가 분명히 정해져 있습니다. 불신자들의 삶이 세상에서 한시적으로는 형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지만, 그러나 그들의 죄악에 대한 결과는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공동체의 몰락을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분명 문제를 일으킨 악한 마음을 가진 자들을 구별하여 내실 것입니다. 교회가 소망이 없다고들 생각하여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래도 교회는 희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중보하고 더더욱 바른 복음을 세상 속에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정체성을 생활 속에 드러내야 합니다. 주께서 다시 오시겠다 약속하신 그 말씀을 소망하며, 믿음 안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오늘부터 만나는 중학생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직간접적으로 전할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님을 깨달아 회개의 자리로 나아갈 뿐 아니라 헛된 마음과 생각들을 멀리하고, 악한 권세들을 무너뜨림으로 오직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편지로 살아갈 수 있기를(애 4:11~22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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