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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4: 17-18
아브람이
본문에서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특이한 왕국의 지도자답게 연합된 왕들의 적군을 무너뜨립니다. 때문에 모름지기 아브람은 그 지역의 왕들의 왕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여전히 하나님을 영원하신 왕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앞에 나아오신 특이하신 왕이요 제사장인 멜기세덱의 영접과 축복을 받고 그분에게 십분의 일을 드려서 그분이 자기보다 높으신 사실을 표시합니다.그리고 이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영원하신 그의 왕으로 인정하고 표시한 것입니다.
1. 본문 17절은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입니다.
비록 소돔왕이 아브람은 자기 조카를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자기의 감사를 표하려고 정중한 예의를 갖추고 그를 나가서 맞았습니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하지 않고 전혀 예기치 않았던 상황이나 계기에서 또는 우연이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혜택을 인정하는 것이 자연스런 예의입니다. 더욱이 아브람의 승리가 이런 방법으로 축하를 받았기 때문에 그 전체적인 일이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더 많은 영광이 돌아가게 됩니다. 모세는 또한 소돔왕이 아브람을 만난 자리를 설명하기를 ‘왕곡’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를 그곳이 그 왕들이 거기서 기쁨으로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왕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불려지고 있는 듯합니다.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왕권 곧 성 삼위 일체이신 그리스도의 왕권을 예시하지 않았겠는가? 생각합니다.
2. 본문 18절은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입니다.
이것은 이 줄거리의 세 가지 주요한 점들 가운데 마지막 내용입니다. 여기에서는 잔치에서 아브람을 즐겁게 해 준 교회의 대부(大父) 멜기세덱이 그의 제사장직권으로 그를 축복해 주고 아브람에게서 십일조를 받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왕이 아브람을 만나러 나왔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의 승리를 유명하게 하시고 그것이 자손들에게 길이길이 기억되게 계획도 하셨다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그러나 동시에 무엇보다도 차원이 높고 월등한 신비가 여기서 암시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존귀한 자리에 앉히신 거룩한 이 족장이 자신을 멜기세덱에게 복종시켰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에 하나님이 그를 교회의 유일한 머리로 세우셨다는 것에 대하여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논란의 여지가 없이 멜기세덱이 그 자신에게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축복하는 엄숙한 행위는 뛰어난 위엄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가 그도 이 일을 제사장으로서 했다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아브람도 제사장이 아니었는가 라고 묻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 앞에서 멜기세덱을 등용시킴으로 그 안에 있는 무언가 특이한 것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전체의 중요성을 더 잘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구절을 정상적인 순서대로 말 한마디 한마디를 검토해 보는 것이 더욱 더 만족스런 해답을 제공해 줄 것입니다. 그는 아브람과 그를 수행한 자들을 자기의 왕권에 속한 손님들로서 영접해 들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축복은 특별히 그의 제사장직에 속한 행위였다는 사실입니다. 살렘의 멜기세덱 왕은 떡과 포도주를 갖고 나와서 자기가 하나님의 제사장이므로 아브람을 축복했다는 식으로 연관지어집니다. 멜기세덱은 지치고 굶주린 군대들에게 왕다운 도량으로 새 힘을 넣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엄숙한 기도의식으로 하나님의 장자이며 교회의 조상에게 축복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 당시에 왕들도 제사장의 직권을 행사하는 것이 태고적의 관습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일이 그 시대에서 특별히 멜기세덱에서 되어진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그의 제사장직을 재가(裁可)해 주실 때에는 보통 일반적인 칭송으로 그가 영예를 받은 것이 아니나 특별한 존귀를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우리는 그 당시에 종교가 얼마나 부패했는가를 알게됩니다. 셈과 에벨의 거룩한 종족의 후예였던 아브람 자신이 자기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함께 미신의 깊은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멜기세덱을 셈이었다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견에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첫 번째로,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렇게 생소하고 애매한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사람을 무명의 존재로 남아있게 계획하시지는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셈이 동방에서 유대로 이사했다는 말은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그리고 그런 류의 주장은 모세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셋째로, 만약 셈이 가나안 땅에 거주했었다면 아브람이 자기의 조상을 찾아뵙고 인사를 하지 않고 모세가 이전에 설명하고 있는 대로 그런 험난하고 곡절 많은 방랑의 길을 헤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가 선언하고 있는 말이 가장 지대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이 멜기세덱이 누구였든 간에 그는 기원이 없이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구름에서 떨어진 자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그가 죽었다는 언급이 없이 사라져 버렸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히7:3). 그러나 하나님의 감탄할 만한 은혜는 알려지지 않은 사람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부패 가운데 있는 그 혼자만이 그 땅에서 정직하고 진지하게 종교를 계발하는 자며 그것을 보호하고 있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렘이 예루살렘이라고 이해되어야 된다는 사실은 쉽사리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만약 누가 그 도시는 평야에 위치해 있다는 것으로 보고 상반된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반대는 하지 않습니다. 이제 멜기세덱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니게 되었으며 그리고 그분의 대표자가 되었는가 하는 사실을 생각해보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이라 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시110:4).
첫째는 여호와께서 그를 왕적인 보좌에 앉히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에게 제사장직의 영예를 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율법하에서 이 두 가지 직능은 너무도 분명하게 구별되고 있어서 왕들이 제사장의 직능을 가로채는 것은 불법이었던 것입니다. 율법은 단호하게 그들이 제사장직에 뛰어드는 것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옛 율법하에서 하나님이 임명하신 것은 이 제사장의 인격 안에 폐기되어야 했던 것이 옳은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는 하나의 낡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제사장직 보다 훨씬 월등한 제사장직이 바로 여기서 지적되고 있었습니다.
그 제사장직은 맹세로서 확증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오기 전에는 모든 것을 지배하시게 될 왕과 제사장 되신 분을 절대로 찾지 못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멜기세덱에게 위엄성의 면에서 대등한 사람은 없으니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를 필적하실 분이며 아니 그보다도 그를 훨씬 능가하실 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의 인격 안에서 그 조상들에게 제시되었다고 추론하게 됩니다. 다윗은 정말로 그 자신이 구상한 유사성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하나님에 의하여 지정되었던 이유를 선언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 왕국이 맹세로 확증되었다는 사실을 공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똑같은 진리가 이전에는 조상들에 의하여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왔었다는 사실은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 말의 전체의 내용을 간추린다면 그리스도는 그렇게 하여 하나님 다음 가는 분이 되실 것입니다. 또한 그분은 제사장으로, 영원한 제사장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되셔야 된다는 사실을 알아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하고 영원한 제사장이 되신 유일한 분이 또한 우리의 구원을 확보해 주시고 그분의 지켜주시는 돌보심으로 우리를 보호하실 무한한 권능을 지니고 계시는 왕도 되십니다. 그분이 그렇게 되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에게 화목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죄값을 치르신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중재하시려고 그런 위치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분의 변호를 의지하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 존전에 담대하게 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확신하거니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또한 그분의 불가시적(不可視的)인 팔에 의지하고 있는 우리는 안전하게 모든 원수들을 이기고 승리하게 된다는 추론이 나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직능을 각각 구별시켜 분리해 버리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산산이 찢어버리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가지의 직능에서 지원을 받는 것을 반쪽만 남겨놓고 다른 반쪽은 박탈한 그들의 믿음을 전복시켜 버리는 결과가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멜기세덱 같이 영원한 왕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사실도 우리가 관찰해 볼 만합니다. 그것은 성경이 그의 종말을 전혀 묘사하지 않으므로 그를 마치 전 시대에 걸쳐서 생존해 있는 자처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확실히 그의 인격 안에서 잠정적인 것이 아닌 영원한 왕국에 대한 비유를 우리에게 묘사 내지는 예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제사장직을 완수하셨으므로, 하나님은 그 한가지의 희생 제물로 우리를 향한 진노를 주시고 진정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화목이 추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심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약에 의해서 신성하게 내리신 영광을 가증스런 신성 모독으로 그리스도를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다른 제사들을 제정하거나 다른 제사장들을 세우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고대의 교회저자들에 의하여 깊고 신중하게 그 중요성을 헤아려 보았기를 우리는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냉정하게 심지어는 그렇게 무식하게 그리스도와 멜기세덱의 사이에 개재되어 있는 유사성을 전혀 다른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떡과 포도주에 비유했겠습니까? 그들은 추측하기를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떡과 포도주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추가하기를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는 떡이 되는 그분의 몸과 그리고 영적인 음료인 그분의 피를 제공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그 사도는 그리스도와 멜기세덱과의 사이에 있는 모든 유사성들을 정확하게 수립하고 특별히 그 모든 점들을 추구하면서도 떡과 포도주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세는 주어진 복과 받아들인 십일조에서 멜기세덱의 명예를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어린양이나 송아지를 드리지 않고 세상의 생명을 바쳤다고 비유로 언급하는 것이 이 논증에 얼마나 적절하게 더 잘 들어맞고 있겠습니까?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가리킴이 논증으로 고대인들의 공상은 충분하게 배척되었습니다. 또한 모세의 말에서도 충분히 알기 쉬운 논박이 제공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께 드려졌다고는 읽지 않고 계속된 한 담화에서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라고 언급되었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관계대명사가 거기서 두 동사에 공통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그러므로 아브람이 포도주로 기운을 차리고 축복으로 명예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누가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떡과 포도주를 드리는 것을 자기들의 미사의 제사로 의곡하고 있는 카톨릭 신자들이야말로 참으로 철저하게 웃기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멜기세덱을 그들과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떡’과 ‘포도주’가 미사에서 드려져야 되는 것으로 반드시 인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순수한 떡과 포도주만 남아 있는데 과연 화체설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이 그들의 제사가운데서 제물로 바쳐졌다고 그들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어떤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은 오직 멜기세덱의 계승자라고 불려지고 있는데 무슨 구실로 그들이 그분을 대신하여 수없이 많은 계승자들을 대치시키고 있습니까?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이 구절을 완전히 박탈할 뿐만 아니라 이성적인 생각도 없이 무조건 지껄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이 세상에서 왕 그 이상으로 높임을 받은 자가 그보다 더 앞서고 높임을 받아야 하는 지도자를 존숭하는 모습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겸비는 그가 하나님을 영원하신 왕으로 인식하는 터 위에서 가능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아 모시고 살면 모든 분야에 건실하고 아름다운 질서가 보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평화로운 삶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