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 수업》- 박중언
《노후 수업》이라는 말이 고상한 제목이라는 생각도 드는 게 우리 나이쯤 되면 ‘존엄하고 안전한 노후’를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에 와닿는 말 같다는 생각이 든다. 책은 그런 노후를 위한 태도·방법 등을 담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 박중언(한겨레 신문기자) 선생은 노후에 예상되는 위험 요소와 대비 방법은 무엇인지 일본에 머물면서 고령화 사회의 실상을 목격한 것을 바탕으로 삶에서 경험하고 실천한 내용을 담았다고 머리말에서 말했다. ‘2020년 통계’에 따르면, 2018년 한국의 노인 빈곤율(중위소득 50퍼센트 이하)이 43.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중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자유롭고 건강하며 편안한 나이 듦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묻고는 저자는 다음 세 가지를 당부했다. 첫째, 나이 듦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모르는 노후는 몇 배나 두렵다.”둘째, 새로운 지식을 바탕으로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어야 한다. 우선순위를 바꾸지 않으면 삶의 방식은 변하지 않는다. 셋째, 가장 작고 사소한 것부터 행동에 옮긴다. “더 늦기 전에 당장!”앎과 실천 사이의 문턱을 낮추고 시행착오와 비용을 줄여서 나이 듦의 여유를 누릴 수 있게 한다. 그런 점에서 책은 모든 사람을 위한 ‘노후 매뉴얼이자 가이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노후에는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에는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나머지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가늠키 어렵다. 아마도 이 책에 그 해답이 있을 것 같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듯 내가 잘 나갈 때보다는 힘들고 허덕일 때 진정한 친구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게 된다. 화사한 꽃과 열매들을 버리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을 때 진정한 의미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은 시인이 아니라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20년 전쯤에 도쿄 근처에 살 때 나는 전철에서 숱하게 많은 노인들을 보았다. 고령화가 우리보다 먼저 진행된 나라이니 노인이 많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은 우리보다 국민소득이 3배 가까이 높았는데도 왜 노인들이 불행해 보였을까. 불편한 느낌, 속된 말로 꿀꿀해 보였다. 한국인인 나는 나이 들면 어떻게 될까. 마흔도 되기 전에 가졌던 의문이다.”
저자는 올해인 2023년 정년퇴임을 한다고 한다. “이제 후반전에 들어서는 내가 감히 인생을 다 아는 듯이 충고나 가르침을 늘어놓는다면 주제넘는 일일 것이다. 멋있는 노후를 보내는 고수들이 강호에는 적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자신의 경험과 연구, 동시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버무려 읽는 이가 받아들이기 쉽게 전하는 중개자의 구실에 충실하려고 한다.”또한 책에 담은 내용을 스스로 되새김하는 지침으로 삼으려고 한다고도 했다. 책 읽으면서 한가지라도 변화가 생긴다면 책은 소임을 다한 것이라며 인생 2라운드의 ‘출발’을 외친다.
우리 모두 아는 것처럼 행복의 방정식은 ‘가진 것과 갖고 싶은 것’ 또는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의 비율로 구성된다. 가진 것이나 할 수 있는 것이 크고 갖거나 하고 싶은 게 작을수록 행복해진다. 나이가들면 전자를 바꾸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모든 것을 줄이는 것에서 행복의 지름길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위나 앞을 바라보면 욕망이 풍선처럼 부풀어 노후 불안과 불행에 기름을 붓게 되고 그것이 심해지면 후회를 넘어 자학이 되기도 한다. ‘나는 그동안 도대체 뭐하고 살았나?’면서 자신의 일생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지독한 우울을 낳기도 하고 ‘난 괜찮아!’하면서 자신을 다독여 보려고도 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많은 준비를 했더라도 무시로 찾아오는 울화와 열패감을 다스리지 못하면 자유로운 노후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주변을 들러보면 퇴직 이후에 재취업이나 창업에 뛰어드는 경우를 더러 보게 된다. 하지만 창업은 5년 이상 버틸 확률이 30%도 되지 않는 ‘레드오션’으로 본인과 가족까지 동원해도 인건비조차 건지기가 쉽지 않다. 개척정신이 강한 미국인들은 창업을 ‘스몰 비즈니스’라 하여 존중하지만, 미국은 취업인구 중 자영업자가 우리의 4분의 1 수준인 6% 정도다. 일본도 11%에 불과하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창업과 재취업 여건은 다른 나라보다 열악하다. 역대 정부 모두 일자리 창출에 팔을 걷고 나섰지만, 어려운 난제로 창업은 중장년 퇴직자에게 어떤 비전처럼 보이나 현명하고 신중한 판단이 요구된다.
지난 2016년 정년이 60세로 높아지면서 베이붐세대의 대표 격인 58년 개띠부터는 혜택을 좀 더 봤다. 임금피크제로 월급이 깎이긴 해도 회사를 몇 년 더 다닐 수 있었다. 노후 소득의 관점에서 정년 1년 연장은 퇴직 후 2-3년 간의 수입을 번다. 정년 연장 논란은 언제든지 제기될 수 있다. 정년을 연장하면 청년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비난을 사고, 법원이 육체노동 가능 연한을 65세로 판결했다고 회사들이 정년 연장을 스스로 해줄 리는 만무하다. 정년과 맞물리는 것이 연금 지급 문제인데 정년을 맞고도 연금을 지급 받지 못하는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연금 고갈 우려 또한 해결이 쉽지 않다. 난제가 하나둘이 아니다.
고령인구가 늘어나면 정부는 노인복지 수준을 낮추려는 유혹을 제기하기 마련이다. 2020년 노인 기준을 65세에서 70세 하자는 의견이 보건복지부에서 나왔다. 지하철 무임승차는 빠지지 않는 메뉴다. 노인복지에서 투입 대비 효과가 없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약간의 지원으로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나이 든 사람에게 주는 지하철표가 치료비와 약값을 줄이는 데 기여하기도, 건강보험 재정을 튼실하게 하기도 한다. 이는 자녀 세대에게 부담을 들어주는 길이기도 하다.
노후를 악몽으로 바꿔놓는 것은 ‘건강파탄’이다. 스스로 움직이기 힘든 것과 자신의 생각과 의지가 작동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전자는 육체적, 후자는 정신적 이상의 극단이다. 둘 다 혼자서는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거동불능과 치매로 이어지는 이 두 가지를 피하면 그래도 견딜만한 노후라 할 수 있다. 제 몸을 건사하지 못하는 것에는 뇌경색·뇌출혈로 몸 한쪽이 마비되거나 고관절 등 뼈가 부러져 자리보전을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뇌의 혈관이 막히거나(경색), 터져(출혈) 생기는 마비증상이 중풍이다. 뇌졸증을 비롯한 뇌혈관 질환은 암-심장질환-폐렴에 이어 한국인의 사망원인 4위다. 혈관 막힘은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진행되기 때문에 평소에 건강관리가 중요하다. 나이 들면 혈관이 약해지고 혈관과 피속에 찌꺼기가 많아진다. 50대 이후에 주로 발생하고 나이가 열 살 늘어날 때마다 발병 확률이 2배로 높아진다고 한다. 뇌졸중의 주범은 혈액 속 콜레스테롤과 중성지방이 많은 고지혈, 고혈압, 당뇨가 원인이다. 담배, 술은 건강유지를 위해 끊거나 줄여야 하는 생활 습관이다. 상식 수준의 건강관리만 잘하면 뇌졸증 위험을 줄일 수 있다.
흔히 노인의 걱정 순위 1위로 치매로 꼽는 경우가 많다. 모르고 당하면 겁이 나지만, 알고 당하면 그리 겁먹을 일은 아니다. 그동안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의 치매는 대부분 알츠하이머로 시작되는데, 뇌 속에 베타아밀로이드 같은 단백질 찌꺼기가 쌓이거나 타우단백질에 이상이 생겨 발병한다. 이들 물질로 신경섬유가 병들고 죽은 세포가 늘어나면서 뇌 기능이 떨어지는 것이다. 기억 이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하는 경도인지장애를 거쳐 치매로 변하는데, 유전적 요인이 20%, 잘못된 식습관 등 후천적 요인이 80% 정도로 알려져 있다. 암 등 다른 것에 비하여 유전적 요인이 낮다는 것은 잘 대비하면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도인지장애를 거쳐 매년 10∼15%가 치매환자로 바뀐다고 하는데, 2006년 역학조사에서 우리나라 경도인지장애 환자가 160만을 넘고, 그중 65세 이상 고령자는 다섯 명 중 한 명꼴이었다. 치매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중앙치매센터는 2019년 65세 인구의 10%인 79만 명이 치매환자라고 추정했고, 2050년에는 300만이 넘을 것으로 전망했다. 치매가 늘어난다고 모두가 ‘벽에 똥칠’하는 중증 환자인 것은 아니다. 중증의 비율은 15% 정도로 결국 65세 이상 100명 가운데 1.5명이 중증인 셈으로 절대적인 수치라고 할 수는 없다. 게다가 중증은 85세 이상 초고령자에서 많이 나타난다. 환자의 60% 정도는 비교적 가벼운 채매수준이라는 것이다. 예방과 조기진단·치료에 힘쓴다면 중증치매로 고통받는 기간이 길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다.
책에는 노인이 노인을 돌보아야 하는 부모부양 또는 나이 들면서 어느 한쪽의 배우자를 돌보아야 하는 경우, 자녀와의 관계, 노인의 성 문제와 친구 관계 등에 대한 조언을 많이 내놓고 있다. 특히 은퇴 직후는 ‘부부싸움에 필요한 에너지가 넘쳐 이혼의 최적기’라는 말에 공감이 가기도 한다. 배우자와는 되도록 관계 증진에 도움이 되는 것만 함께하는 쪽이 마찰을 줄이고 존재감은 키우는 방법이다. 여행, 산책, 영화관람 등이 여기 해당한다. 각자 나름대로 하는 것들이 있어야 서로 들려줄 얘깃거리도 생기기도 한다. ‘따로 때때로 같이’… 은퇴자 600명을 조사했더니 하루 평균 네 시간 안팎을 배우자와 함께 지내며 시간을 늘리기보다 줄이기를 원하는 쪽이 더 많았다고 한다. 자녀양육과 밥벌이 부담이 사라지고 결혼의 속박이 느슨해질 때 부부관계는 성숙해진다. 누군가의 남편 또는 아내라는 존재가 지우는 짐을 내려놓고 자신의 바람대로 살아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 바로 이때다.
젊은 시절에는 이런 관계를 생각하기 어렵다. ‘죽고 못 살듯’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차갑게 식는다. 강한 독점욕과 소유욕은 상대만의 공간이나 독립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는 상대를 좀체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 결혼과 이혼 양쪽 극단만 있을 뿐, 그런 점에서 나이들어 생기는 적절한 거리는 부부관계를 다시 냉정히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청량제가 될 수 있다.
친구는 어떤가? 예전에 어울렸던 기억이나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인연만으로 관계를 계속 이어가기는 쉽지가 않다. 업무를 매개로 맺은 관계는 퇴직과 함께 대부분 사라진다. 조사에 따르면 친구가 평균 10명, 마음을 터놓는 사이는 네 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한 시니어비즈니스 전문가는 ‘노후의 친구는 가족’이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 다니는 동안에는 친구를 그저 그런 존재로 여긴다. 바쁜 일이 많으니 따로 시간을 내는 게 썩 내키지 않는다. 그러다 퇴직하면 시간은 넘쳐나는데 씁쓸하게도 친구는 떠나고 없다. 시간과 친구를 맞바꾼 셈이다. 우정을 통해 얻는 행복이 가장 비용이 적게 든다고 한다. 우정에는 돈이 아니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우주에서 나의 존재는 방 안의 먼지 한 톨에 지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와 똑같은 사람은 우주에 다시 없다. 내가 죽어도 세상은 아무런 변화가 없겠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우주의 소멸과 다름없다. 내가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고 움직이는 지금은 영원히 다시 올 수 없는 시간이다. 지금이 중요한 이유다. 나이를 먹어서 좋은 것이 있다면 그동안 나를 구속해온 것이 무엇이든 간에 미련 없이 그것을 벗어던질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런 용기와 지혜를 갖고 자신만의 색채로 빛나는 시니어들이 우리 주변에는 드물지 않다. ‘나 담게 나이 듦’을 위해, ‘나는 왜 그렇게밖에 살지 못했는지 모르겠다’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 확실히 나의 길을 가야겠다. - 2023.4.8.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