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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 문학관 & 삼봉 기념관 탐방
2020년 1월 18일,청암 문학 작가 협회 방 효필 이사장의 초청으로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원정리에 위치한 청암 문학관을 찾았다.
원정리라는 마을은 평택에서도 가장 오래돤 600년의 역사를 지닌 유서깊은 마을중 하나로써,이 마을은 독특하게도 방씨 일촌 마을이라고 하며,마을 어귀에 들어서니 '충효정신이 살아있는 효자마을'이란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필자가 찾아간 이 날은 때마침, 청암문학 2020년 신년회 및 정기총회를 갖기위해, 청암문학 임원진 및 회원 다수가 자리를 함께하여 년중 사업계획 및 추진사항에 대한 회의가 개최되고 있었다.
방 효필 이사장은 팽성읍 원정리에서 출생하여,오랜동안 대학교수(공학박사)로 재직하셨던 분으로써, 그동안 인연된 문인들과 교류하며 다양한 문학활동을 통해 다져진 기반위에, 고향 향리에 문학관을 건립하기에 이르렀으며,동시에 꾸준히 문학작가협회와 향리 발전을 위해 기여한 공로가 지대한듯 싶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인원은 약 30명쯤 되었는데,가까운 평택 지역에 거주하는 분들도 계셨지만,서울이나 충남 천안,홍성등지에서 오신분도 있었고,멀리는 경남창원에서까지 올라오신분도 있어 대단한 열성들이 엿보였다.
참고로 청암문학 작가협회를 잠시 소개하자면,이사장 방 효필,회장 박 미자,부회장은 조 태연,최 일숙씨가 맡고 있으며,홍보,섭외,출판,기획,음악분과등의 이사진과 감사,고문단과 지도위원이 있는가 하면,사무국장은 박 미숙씨가 맡고 있단다.
반면 지부 현황을 보면,서울,대구,광주,제주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처에 24개 지부 조직이 갖춰져 있고,중국 길림성에도 지부를 두고 있어 해외에까지 그 손길이 뻗치고 있다 하겠다.
회의는 가급적 시간을 단축시켜 조속히 마무리하고,준비된 부페식 오찬회를 가진 다음,인근 지역에 있는 삼봉기념관을 답사하는 문학기행에 들어갔다..
삼봉 기념관은 조선 개국의 1등 공신으로 손꼽는 정 도전의 숨결이 남아 있는곳으로써, 기념관은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에 위치하고 있었는데,이곳은 공교롭게도 용인시와 안성시,평택시가 서로 교차되는 삼각지점에 자리하고 있었다.
필자는 지난해 우연히 용인에 있는 포은 정 몽주 선생의 묘소를 찾은바 있었는데,정 도전과 정 몽주의 묘소와 기념관이 지척해 자리하고 있다는게 참 기묘한 인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청암문학관 전경
문학관 정자
방 효필 이사장
청암문학 박 미자 회장
단체 기념촬영
청암문학 화이팅을 외치며....
마을 입구에 있는 이정표
충효정문
충효정문과 600년된 느티나무
보리 서말과 느티나무 전설이 기록되어있다.
이 느티나무는 옛날 방씨 문중에서 충신 방 덕룡장군이 임진왜란때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긴 공을 기리기 위해 심었던 나무라고 하며,정원리 마을 역사를 고스란히 지켜온 수호목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 자리에 함께 있는 충효정문은 방 덕룡장군과 손자 방 일찬,그리고 또 다른 후손 방 이흠,방 시중 네분의 빼어난 충효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삼봉 기념관에 도착하여...
삼봉기념관/문헌사/희절사 안내판
건너 편 보이는 산 위에 삼봉 정도전 가묘가 있다.
영상 화면에서 잡은 정 도전 가묘
정도전이 저술했다는 <불씨 잡변>
고려시대 이어온 승불사상이 이조시대 승유사상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역활을 했을듯 싶다.
문헌사
삼봉교육관
ㅡ정도전의 초상
삼봉 정도전은 어떤 인물이었나?
정도전은 고려말, 조선초 10여년간 개혁의 주체로서, 또한 조선건국의 이념을 제공한 이론가로서 개국공신 중 첫 손가락에 꼽히는 인물이라 할수 있다.
정도전은 형부상서 정운경과 우연의 따님을 부모로 하여 3남 1녀중 장남으로 경상북도 영주에서 출생하였으며,그의 본관은 봉화(奉化),자는 종지(宗之),호는 삼봉(三峯),시호는 문헌(文憲)이다.
그의 아버지 정운경은 평생 청렴하던 당대의 청백리였다. 정도전은 어머니의 신분때문에 여러차례 곤란을 겪었는데, 어머니는 말단 무관 우연의 서녀였다. 우연의 부인은 김전 이라는 승려가 여종과 정을 통해 낳은 여인이었고, 이 여인이 정도전의 외할머니인 것이다
이러한 어머니의 미천한 출신배경때문에 정도전은 관직 허가증을 얻지 못하는 곤경에 처했었고,여러차례 정도전을 반대하는 무리로 부터 공격을 받았다
정도전은 공민왕 9년(1360) 19세의 나이로 국자감시에 합격했다. 정몽주가 장원급제 하였고, 목화로 의류혁명을 일으킨 문익점도 이때 함께 급제했다. 정도전은 고지식하고 청렴하여 대인관계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고도 전한다.
정도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법전인 '조선경국전' 을 편찬해 경국대전의 기초를 쌓았고, '불씨잡변'을 통해 불교를 비판 숭유억불의 정책을 이어 나갔다.
정도전은 몸이 비대하고 각기병에 시달리고 있어서 병법에 해박함에도 불구하고 직접 병사를 지휘할수는 없었다.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때 60대 초반의 나이로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었다.
경복궁의 마스터플랜을 세울때 무학대사는 인왕산(서쪽)을 등에 진 동향궁을 주장했으나,결국은 정도전의 의지대로 남향궁으로 지어지게 되었다.
이때 무학대사가 북악산을 주산으로 한 남향궁을 지을 경우 일어날 갖가지 풍수적 예언과 경고를 남긴 것이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무학은 예언하기를, 영천 무악재 고개에는 3천 선사가 수도할 것이라고 했는데 거기엔 일제강점기에 3천명을 수용하는 서대문형무소가 생겼고,낙산 아래에서 인재가 쏟아져 나온다고 했는데, 나중에 서울대가 자리잡았고 정승대감들이 터를 잡고 살기도 했다
또한 서쪽은 인왕산이 너무 강해 군부가 장악하게 된다고 했는데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는가 하면,동쪽 낙산은 너무 약함을 걱정했는데 임진왜란, 한국전쟁때 적군이 동대문으로 입성했다고도 한다.
남쪽에서 한양을 내려다보는 관악산은 병오가 낙맥한것이기 때문에 경상도 정권이 득세하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밖에도 왕십리의 전설을 갖고 있는 무학대사는 풍수의 논리에서나, 정치적 파워게임에서도 정도전에게 패배를 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은 결국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으니 정도전과 무학대사중 누가 더 상수였을까...??
새 왕조 조선의 설계자/정 도전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에 역사의 중심에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꿈꾸던 성리학적 이상 세계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끝내는 정적의 칼에 단죄되어 조선 왕조의 끝자락에 가서야 겨우 신원 되는 극단적인 삶을 살았다.
정도전의 집안은 본래 경상도 봉화 지역이 향리였다. 고려 시대까지 향리는 우리가 아는 조선조의 향리와는 그 격이 달라, 지방의 토착세력을 말한다. 정도전 집안은 경상도 봉화지역의 토착세력인 셈이다. 부친 정운경의 뒤를 이어 과거에 급제한 정도전은 22살 때 충주 사록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또한 정도전은 공민왕의 유학 육성 사업에 참여해 성균관 교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몽주∙이숭인 등도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정도전에게 시련의 시작이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우왕이 즉위하였는데, 우왕이 재위하던 때는 정도전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이인임 등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하였고, 결국 원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정도전은 오늘날의 전라도 나주에 속해 있는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정도전은 그곳에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목격하고는 위민의식(爲民意識)을 키웠다.
정도전이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들녘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그 농부는 정도전을 보고 당시 관리들이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락과 근심, 시정의 득실, 풍속의 좋고 나쁨’에 뜻을 두지 않으면서 헛되이 녹봉만 축내고 있다며 질책하였다. 촌로의 이러한 발언은 정도전에게 백성을 위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기 충분하였을 것이다. 결국 그가 제시했던 민본사상은 허울 좋은 이름뿐이 아니었다. 실제 백성의 삶을 목격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진정성이 담보된 것이었다.
천명을 읽고 장자방을 자처하다
계속된 정치적 시련에 대장부의 거대한 야망이 꺾일 만도 하지만, 오히려 정도전은 더욱 강해졌다. 관직에 다시 등용된 정도전은 전의부령, 성균좨주 등의 관직을 지내다가, 이성계의 추천으로, 성균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성균대사성은 성균관의 책임자를 말하는데, 당시 학계를 주도하는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사실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은 그보다 앞선 1384년(우왕 10년)에 이루어졌다.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정도전이 여진족 호발도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함경도에 있던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가면서부터였다. 이성계의 군대를 본 정도전은, 이성계가 자신의 포부를 실현해줄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리고는 군영 앞에 서 있던 노송에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겨 놓았다.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푸른 산 몇만 겹 속에 자랐구나 /잘 있다가 다른 해에 만나볼 수 있을까/ 인간을 굽어보며 묵은 자취를 남겼구나. 이 시에 대해 조선 초에 만들어진 [용비어천가]에서는 정도전이 이미 천명의 소재를 알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정도전은 평소 취중에 “한나라 고조가 장자방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이용하였다.”라고 말하고는 하였다. 한고조를 이성계에 대비한 것인데, 그렇다면 결국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했다는 말이 된다. 한 대장부의 거대한 야망을 느끼게 한다.
조선 왕조를 설계하다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면서 정도전의 야망은 급물살을 탔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때 고려 조정에는 한편에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세력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정도전, 조준과 같이 급진적 개혁세력이 있었다. 이성계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그는 이미 급진적 개혁세력의 맹주가 되어 있었다.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 의해 선지교(후일의 선죽교)에서 피살되면서 그를 추종하는 세력은 궤멸하였다. 그야말로 이성계 천하가 된 것이었다.
경복궁 및 도성의 자리를 정하는 새 왕조의 설계자 역할을 수행
정몽주가 피살된 후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세력의 움직임이 가속화되어 드디어 1392년, 5백 년 고려 왕조는 역사 속에서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조선 왕조가 들어섰다. 조선이 개국된 후 정도전의 활약은 눈부셨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과정을 비롯해 현재의 경복궁 및 도성 자리를 정하였고, 수도 건설 공사의 총책임자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수도 건설이 마무리되면서는 경복궁을 비롯한 성문의 이름과 한성부의 5부 52방 이름도 지었다. 서울을 구성하던 각종 상징물에 의미를 부여하였는데, 대부분 유교의 덕목이나 가치가 담긴 표현이었다. 서울이 수도로서의 의미만이 아닌 유교적 이상을 담은 곳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조선경국전]을 지어 태조에게 올렸다. 이 책은 조선의 통치 규범을 제시한 것으로 후일 조선의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이 나오게 되는 출발이었다. 이 책에서 정도전은 자신이 꿈꾸던 요순시대를 건설하기 위한 거대한 정치 구상을 제시하였다. 요순시대처럼 임금과 신하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왕도정치를 전면적으로 표방한 것이었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며 권력의 핵심에 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가 주창한 요동정벌 문제는 조선과 명나라의 주요한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당시 명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표방하였다. 다만, 여진과 제휴한다든지, 요동에 진출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특히 요동 진출 문제와 관련해서 정도전은 명나라에서 보면 요주의 인물이었다. 정도전은 태조에게 외이(外夷 : 중화질서 속에서 중국 이외의 민족을 지칭하는 개념)로서 중원에 들어가 왕이 되었던 사례가 있음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중국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도 중원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표현이었다.
급기야 1394년(태조 3년)에 이른바 ‘표전문사건’이 일어났다. 표전문이란 표문과 전문의 합칭으로, 조선이 중국의 황제와 황태자에게 보내는 공식 문서를 말한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조선에서 파견된 유구와 정신의가 가지고 간 표문을 문제 삼았다. 유구 등은 결국 명나라에 구속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문제가 된 표문의 작성자로 정도전이 지목되었다. 명나라에서는 당장 정도전의 소환을 요구하였다. 명나라의 요구를 둘러싸고 조선 조정에서 설왕설래하였다. 논의 결과 표문을 작성한 사람은 정총이고, 전문을 작성한 사람은 김약항이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사지로 정도전을 보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정총은 병을 이유로 가지 않고 김약항만이 명나라로 가게 되었다.
명나라의 요구가 거세었지만, 정도전이 가지 않은 것은 아마도 정치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 같다. 당시 정치를 주도하던 조정 관리들이 대부분 정도전 계열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후일의 태종 계열인 하륜만이 정도전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조정의 결정에 따라 김약항이 파견되었으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 명나라에서 다시 정도전을 압송하도록 요구하였다. 이때도 역시 정도전은 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국내에 있으면서 진법(陣法) 훈련을 강화하며 요동정벌을 위한 제반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병 혁파를 둘러싸고 왕자 및 공신들과 갈등을 초래하였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 정도전과 이방원
정도전은 개국 후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에 관여하였다. 태조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는 신의왕후 한씨이고, 둘째가 신덕왕후 강씨였다. 신의왕후 소생 아들로는 방우∙방과(정종)∙방의∙방간∙방원(태종)∙방연 등이 있었다. 이들은 신덕왕후 소생의 아들보다도 아버지 태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공도 많았다. 그런데 정도전이 이를 다 무시하고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하였던 것이었다.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살해함으로써 조선 건국이 가속화되는 계기를 만들었던 이방원 등 첫째 부인 한씨 소생들의 불만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더구나 사병 혁파 문제로 서로 갈등을 보이던 중 1398년(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였고, 정도전은 이방원이 이끄는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도전은 조선초 내내 신원 되지 않다가 고종 때 관직이 회복되었다.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건국 초에 설계 등에 참여한 정도전의 공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제1차 왕자의 난 발생 원인은 개인적인 불만이 표출된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방원과 정도전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이상의 차이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국가체제를 어떻게 편제하고 운영할 것인가의 차이인 것이다. 정도전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꾀하는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표방하였다면, 이방원은 그와는 달리 강력한 왕권에 바탕을 둔왕조국가를 지향했기 때문이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에서 현실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사림들이 집권하게 되면서 정도전이 꿈꾸던 이상 세계가 구현되어 갔으니, 정도전의 꿈은 꿈에서 그친 것이 아니리라.
문화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며....
삼봉 정도전의 친필 병풍
ㅡ한양도성 설계도
한양도성은 무학대사가 터를 잡았다면,청사진을 펼친 설계자는 삼봉 정도전이었다.
ㅡ한양도성 성곽도
보신각을 중앙에 두고 동서남북 4대문이 펼쳐진다.
이곳 4대문을 중심한 한양 도성 성곽을 한바퀴 도는 것만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완주하는데 몇년씩 걸렸다고들 말하기도 하는데,한양도성 답사는 무척 매력적인 우리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필자는 한양 도성 전체를 답사해보면서, 참으로 놀라운 역사를 펼쳤다는것을 실감해볼수 있었다.
대원군 시절 경복궁 재건축시 삼봉의 업적이 재평가되어 신원이 복위되는 교지
삼봉기념관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