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기(中期)의 융성(隆盛)
문종(文宗)의 세(世)는 건국(建國)한지 이미 일백삼십여(一百三十餘)이오 외(外)로는 북변(北邊…)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이 쌓인 후(後)에 국경(國境)에 큰 일이 없고 내(內)로는 문화(文化)가 발달(發達)하고 도로(道路)를 열어서 교통(交通)을 편리(便利)하게 하니 물론(勿論) 당시(當時)의 교통(交通)은 지금과 같이 어떠한 산곡태산(山谷泰山)이든지 우마차(牛馬車)가 통행(通行) 할 수 있는 도로(道路)가 아니오 소위(所謂) 평지(平地)의 도로(道路)도 겨우 우마차(牛馬車)가 통행(通行)할 수 있음에 불과(不過)하고 산로(山路)에는 보행인(步行人)이나 태우마(駄牛馬)가 행(行)할 정도(程度)이니 지금 각지(各地)에 남아있는 구로(舊路) 폐로(廢路)가 곧 그 시대(時代)의 유물(遺物)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當時)에는 군사(軍士)가 행진(行陣)할 때에는 군사(軍士)들이 무거운 식량(食糧) 전구(戰具)같은 것을 지는 외(外)에 태우마(駄牛馬)의 열(列)이 천리(千里) 이천리(二千里)를 잇닿았다 한다. 그러나 문종(文宗)때는 성종(成宗) 이후(以後) 각(各) 주요(主要) 도로(道路)에 비로소 원(院)을 두어 행인(行人)의 숙소(宿所)로 쓰는 정책(政策)을 그대로 이어오고 산곡험산(山谷驗山)에도 대개(大槪) 도로(道路)를 만들어 종전(從前)에 비(比)하여 교통(交通)이 훨씬 편리(便利)하여졌다.
건국(建國) 초기(初期)로부터 신라(新羅)와 후백제(後百濟)의 유민(遺民)이 항상(恒常) 반항(反抗)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음으로 문종(文宗)은 외방(外方)에서 반항(反抗)하는 사상(思想)이 있는 유력(有力)한 향리(鄕吏)의 자제(子弟)를 서울에 와서 머물게 하니 이것을 기인(其人)이라 하고 기인제(其人制)가 생긴 이후(以後)로 외방(外方)의 인심(人心)이 점차(漸次) 안정(安定)되고 이 기인제(其人制)는 후일(後日)의 경주인(京主人)의 근원(根源)이 된 것이다.
문종(文宗)의 세(世)는 고려(高麗) 일대(一代)를 통(通)하여 가장 좋은 태평(太平)시절(時節)을 이루었고 고려(高麗)도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왕위(王位) 계승(繼承)의 좋은 법(法)을 받아 유군(幼君)을 세우지 아니하고 왕위(王位)를 아들에게만 전(傳)함이 아니라 형제(兄弟) 상전(相傳)하는 뜻이 적지 아니하더니 선종(宣宗)이 그 아들 헌종(獻宗)에게 왕위(王位)를 전(傳)하니 헌종(獻宗)은 황구(黃口) 유아(幼兒)라 국정(國政)을 감임(堪任)할 능력(能力)이 없고 모든 행정권(行政權)이 그 신하(臣下)의 손에 의(依)하여 좌우(左右)되니 왕(王)의 숙부(叔父) 숙종(肅宗)이 정부(政府)를 전복(顚覆)하고 왕(王)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王)이 되니 이것은 이조(李朝)때의 단종(端宗) 사변(事變)과 같은 것이다.
화폐제도(貨幣制度)는 성종(成宗)이 처음으로 창설(創設)한 뒤로 잘 행(行)치 못하였고 대현국사(大賢國師) 의천(義天) 같은 이도 주전(鑄錢)의 실행(實行)을 주장(主張)하니 숙종(肅宗)이 왕(王)이 된 후(後)로 이 정책(政策)을 강력(强力)히 추진(推進)하여 주전관(鑄錢官)을 두고 주전(鑄錢)을 만들어 주요(主要)도시(都市)에서 쓰게 하니 이때의 전면(錢面)에는 해동통보(海東通寶)를 비롯하여 해동중보(海東重寶) 동국통보(東國通寶) 동국중보(東國重寶) 삼한통보(三韓通寶) 삼한중보(三韓重寶)등(等)으로 쓰이었으며 또 一斤重의 銀으로 我國地形을 본뜬 甁을 만들어서 돈으로 쓰니 이 銀甁은 그 模樣을 좇아서 활구(濶口)라 하였으며 이 외(外)에도 쇄은(碎銀) 소은병(小銀甁) 같은 것도쓰였다.
숙종(肅宗)이 화폐제도(貨幣制度)를 확립(確立)하려고 한 것은 당시(當時) 산업(産業)이 발달(發達)하여 국내(國內)에 물화(物化)의 유통(流通)이 많을 뿐만 아니라 외국무역(外國貿易)이 또한 늘어가는 까닭이었다. 이때 고려(高麗)는 대륙(大陸)세력(勢力)과 항상(恒常) 무력(武力) 교섭(交涉)을 가지고 있으되 한 편(便)으로 벽란(碧瀾예성강)나루를 통(通)하여 송(宋)나라와 흑수(黑水) (지금의 北滿州) 일본(日本) 유구(琉球)(오끼나와 부근) 섬라(暹羅)(타이랜드)등(等) 여러 나라와 또 멀리는 대식국(大食國)(중동지방)의 상인(商人)들과 평화(平和)로운 무역(貿易)을 계속(繼續)하였고 저쪽에서 들어오는 물건(物件)은 주(主)로 비단, 책(冊), 문방구(文房具), 약재(藥材), 향료(香料), 다(茶), 대모(玳瑁), 서각(犀角) 등(等)이며 이 쪽에서 나가는 것은 동(銅), 은(銀), 포목(布木), 인삼(人蔘), 우황(牛黃), 호피(虎皮), 지(紙), 화문석(花紋席), 나전(螺鈿), 자기(磁器) 등(等)이었다. 고려자기(高麗磁器)는 천하(天下)의 절품(絶品)으로서, 또 고려(高麗)의 견지(繭紙)는 고려(高麗) 특산품(特産品)으로써 당시(當時) 송(宋)나라에서 대환영(大歡迎)을 받았던 것이다.
서남해중(西南海中)에 있는 탐라(耽羅)는 지금의 제주도(濟州道)인데 고초(古初)에 형제(兄弟) 삼인(三人)이 석혈(石穴)중(中)에서 살더니 그 후(後)에 여자(女子)와 우조(牛鳥)와 각곡(各穀) 종자(種子)를 실은 배가 해변(海邊…)에 와서 닿음으로 삼인(三人)이 여자(女子)를 분취(分娶)하고 성(姓)은 각각(各各) 고(高) 부(夫) 양(良)으로 정(定)하고 농사(農事)지으니 인구(人口)가 차차(次次) 늘어가서 한 독립국가(獨立國家)가 되었고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비로소 백제(百濟)와 통(通)하였다. 신라(新羅)통일(統一) 후(後)로부터 고려(高麗)에 이르기까지 한 속국(屬國)으로 조공(朝貢)하고 있더니 숙종(肅宗)은 이를 내지(內地)와 동일(同一)하게 만들고 고려(高麗)의 정치(政治)를 펴기 위(爲)하여 국호(國號)를 폐(廢)하고 군(郡)을 만드니 이때로부터 탐라(耽羅)는 국가(國家)에서 보내는 관리(官吏)가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인성(人性)이 강한(强悍)하고 종전(從前)의 왕자(王子) 계통(系統)이 지방(地方)의 세력(勢力)을 가지고 있어 국가(國家)에 대(對)하여 반란(反亂)이 자주 일어났다.
고려(高麗)초기(初期)로부터 국가(國家)의 운명(運命)을 예언(豫言)한 소위(所謂) 비결(秘訣)이 유행(流行)하였는데 그 비결(秘訣)에 목(木)자(子)가 득국(得國)하여 한양(漢陽)에 도(都)한다는 말이 있었음으로 이씨(李氏) 성(姓)을 가진 자(者)가 음모(陰謀)를 꾸미는 일이 종종(種種)있었다. 숙종(肅宗)은 한양(漢陽) (지금의 서울)에 이본(李本)을 많이 심고 장성(長成)함을 기다려 윤관(尹瓘)으로 하여금 작벌(斫伐)케 하여 이씨(李氏)의 왕기(王氣)를 제압(制壓)한다고 한 일까지 있었으니 고려(高麗)의 정치(政治)는 비결(秘訣)의
힘의 작용(作用)이 적지 아니하였고 이 비결(秘訣)은 이조(李朝)의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것으로서 당시(當時) 고려(高麗)의 민간(民間)에도 비결(秘訣)의 힘의 영향(影響)이 가장 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