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98
6월24일[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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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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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9WL7kCDyZI
[서울대교구 이주형 세례자요한 (사목국 성서못자리 담당)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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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수도자들의 모델이요 이정표 세례자 요한!>
좀 의아스럽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성인(聖人)들에게도 등급이 있습니다. 어떤 성인은 대성인(大聖人)으로 분류되어 교회 전례 안에서 대축일로 경축합니다. 축일을 앞두고 9일기도까지 바칩니다. 그러나 어떤 성인은 전례 안에서 이름만 기억할 정도입니다.
보통 성인들은 세상을 떠나신 날, 다시 말해서 하늘나라에 입국하신 날을 축일로 정해 한번만 기억합니다. 그러나 어떤 성인은 여러 번에 걸쳐 축일을 경축합니다. 성모님이나 수제자 베드로 사도, 바오로 사도, 그리고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세례자 요한이 그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도 축일로 정해 기억하지만, 오늘같이 그의 탄생도 경축합니다. 그만큼 세례자 요한은 교회 안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대성인이었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는 다리 역할에 충실했는가 하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길을 닦는 선구자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복음서에 드러난 세례자 요한의 행적을 통해 우리는 그가 얼마나 예언자로서 충실한 삶을 살았는지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오로지 주님의 길을 닦는데 온 힘을 다하기 위해 그는 결혼조차 포기하고 홀로 살았습니다. 지극히 겸손했으며 철저히 순명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시는 주님을 재빠르게 알아보기 위해 늘 깨어 있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술이나 산해진미나 세상의 좋은 것들을 철저히 멀리하고 광야 깊숙한 곳에서 극단적 청빈 생활을 해나갔습니다. 오늘날 우리 수도자들의 모델이요 이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세례자 요한의 삶에서 두드러지는 측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는 거대한 불의와 구조적인 악 앞에서 절대 침묵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단호하게 예! 라고 할 것은 예! 라고 하고, 아니오! 라고 할 것은 아니오! 라고 말했습니다.
예언자로서의 삶, 말만 들어도 왠지 그럴 듯 해보입니다. ‘있어’보입니다. ‘나도 그렇게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있어 보입니다.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 예언을 들으려고 몰려 들었겠지요.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품위 있고 장엄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환호는 하늘을 찌르겠지요. 추종자들은 늘 나를 큰 스승으로 떠받들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언자들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과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전해야 할 하느님의 말씀에 담긴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위해 밤샘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참전달자로 계속 존재하기 위해 부단히 화려한 도시를 떠났습니다. 황량하고 고독한 광야로 계속 깊이 들어갔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보십시오. 그의 나날은 그야말로 ‘초근목피’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주식은 날아다니는 메뚜기였습니다. 음료수는 전혀 가공되지 않은 들꿀이었습니다. 그가 걸치고 있었던 의상을 보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무슨 원시인입니까? 낙타털옷에 가죽띠입니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기 위해서였습니다. 맑은 정신으로 계속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결한 영혼을 계속 소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확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온통 만연해 있는 세상의 죄악과 타락 앞에 당당히 맞서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끝도 없는 자기 비움의 삶, 뼈를 깎는 자기 통제의 연속, 자아 포기, 자기 연마, 자기 부정의 나날이 세례자 요한의 삶이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에 목숨 걸고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철저한 겸손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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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tWBQIb9cA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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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주의: 행복할까?>
오늘은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 탄생의 특이한 점은 세례자 요한이 태어나기 전부터 하느님 뜻에 봉헌된 나지르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의 이름을 천사가 일러준 대로 요한이라고 지으며 처음에 의심했던 즈카르야까지도 아들의 사명의 협조자가 됩니다. 그러자 그동안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였다가 입이 풀려 주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 뜻을 따르는 이를 긍정하고 도와주기만 해도 그 사람의 수준이 하느님과 친밀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즈카르야가 귀와 입이 풀렸다는 말은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전에는 아무리 외쳐도 하느님께 목소리가 닿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자격을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이 의로움은 양심의 자유에서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나뭇잎으로 몸을 가렸으나 주님 앞에 나설 수 없었습니다. 의로움은 오로지 하느님 자비에서 옵니다. 그리스도를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입고 의로워진 이는 그 받은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신도 자녀를 그렇게 하느님 자녀로 만들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양심은 ‘정의’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유튜브 ‘오리를 엄마로 착각한 길잃은 강아지’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어미를 잃은 강아지는 착해 보이는 오리에게 다가갑니다. 오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강아지를 태우고 돌아다닙니다. 강아지가 안정됩니다. 강아지는 오리를 어미처럼 따릅니다. 시간이 흘러 강아지는 꽤 자랐습니다. 오리는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오리는 새끼들을 잘 돌보지 못합니다. 그러자 개가 대신 새끼들을 돌봐줍니다. 받은 게 있으니 주는 것입니다.
모기들은 알을 낳아주는 데까지만 받았습니다. 그래서 알을 낳고 그만입니다. 개는 두 달 이상 어미가 돌봐줍니다. 그렇게 받은 만큼만 해 줍니다. 인간은 20년 동안 그렇게 합니다. 그래야 양심의 자유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 자녀가 되었다면 언제 양심의 자유를 누릴까요? 나의 자녀도 하느님 자녀로 만들 때입니다. 나의 자녀가 신앙이 없고 하느님 뜻에 자기를 봉헌하지 않았음에도 마음이 평화롭다면 나 자신이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고마움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카베오 하권 7장에는 일곱 아들을 낳은 어머니가 나옵니다. 이 용감한 어머니는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코스 4세가 자신의 일곱 아들을 고문하고 처형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녀는 아들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굳게 지키라고 말하면서 하느님의 율법에 충실할 것을 격려했습니다. 그녀는 그들에게 영원한 보상과 부활의 희망을 상기시켰습니다. 만약 자녀에게 생명을 구하라고 했다면 어머니는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 “나는 너를 하느님 자녀로 낳았는데, 너는 네 자녀까지도 하느님 자녀로 만들지 못했느냐?”라고 혼이 날 것입니다.
우리나라 미혼 남녀 15%는 자신은 비혼주의라고 하고 51.7%는 비혼을 생각 중이라고 하며 결혼을 꼭 하겠다는 청년들은 33.3%였습니다. 부모가 나를 키워주었는데도 나는 자녀를 안 키우겠다고 한다면 이제 부모와의 소통이 단절됩니다. 그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를 탄생시키지 못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심이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비싼 핸드백을 들고 맛있는 음식을 찍어 인스타에 올려도 마음은 공허하고 점점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양심의 원리입니다.
오늘 엘리사벳과 즈카르야가 자기 아들을 ‘요한’이라고 짓는 동시에 그들은 아들을 주님 뜻에 바친 것입니다. 주님 뜻에 바친다는 말은 순교자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부모들이 하느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양심의 평화를 얻습니다.
이스라엘은 왜 자녀 출산율이 1위일까요? 구약시대부터 하느님께 자녀를 봉헌하는 것을 내 행복을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사무엘을 주님께 바치기 위해 아들을 청한 한나를 생각해봅시다. 그녀는 처음부터 하느님께 바치겠다는 서원을 하고 아들을 주님께 청했습니다. 아들을 하느님께 바쳐야 하느님 자녀로서의 자신의 마음에 평화를 얻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자녀를 낳음이 없이는 하느님 자녀로 태어난 자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음을 명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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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다른 성인의 축일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혹시 아시는지요? 그렇습니다. 다른 성인들은 세상을 떠난 날을 축일로 지냅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공덕을 쌓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가경자, 복자, 성인’의 순서를 거쳐야 합니다. 증인이 있어야 하고, 성인의 전구를 통해서 ‘표징’이 드러나야 합니다. 한국은 그런 과정을 거쳐서 103위의 성인과 124위의 복자를 신앙의 증거자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다른 성인과는 달리 태어난 날을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태어난 날을 축일로 지내는 분은 성모님과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는 태어난 날을 축일로 지내는 예수님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도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도 성령에 의해서 마리아에게 주어졌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이름도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서 엘리사벳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세례자 요한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요한이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율법과 계명에 따라서 속죄의 예식을 거치고, 제물을 바쳐야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데, 요한은 세례를 받으면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든 획기적인 죄의 사함을 받는 예식이었습니다.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갔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역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하였고, 달릴 길을 충실히 달린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습니다. 나는 오셔야 할 그분이 아닙니다. 나는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광야의 목소리 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겸손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을 지내면서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충실함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갈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부러워하면 지는 거라고 합니다. 남의 떡을 부러워하기 보다는 나에게 주어지는 사명에 충실하면 좋겠습니다.
‘나 중심의 생각을 상대방 중심의 생각’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좀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은 철저하게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축일도 그런 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축일은 여름이 긴 하지에 가깝습니다. 하지가 지나면 여름은 점차 짧아집니다. 예수님의 축일은 겨울이 가장 긴 동지에 가깝습니다. 동지가 지나면 낮은 점점 길어집니다. ‘성소 후원회’ 임원 연수 때입니다. 강사 신부님은 제가 예전에 본당 신부님으로 모시던 분입니다. 저는 신부님을 소개해 드리면서 ‘제가 신부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제가 그런 말을 할 줄 알고 ‘끈 없는 신발을 신고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제 말을 유쾌한 유머로 받아 주시는 신부님은 역시 저보다는 한 차원 높으신 분이셨습니다.
슬픈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한없이 슬플 수 있습니다. 구약을 마치고, 신약을 시작하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도 그렇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중에는 가장 위대하다는 말을 들었던 세례자 요한은 ‘살로메’의 춤 값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중에 가장 위대한 세례자 요한을 기억하고 있으며, 사랑과 공경을 드리고 있습니다. 예전에 휴대폰 광고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할 때면 잠시 꺼 놓으셔도 좋습니다.’ 늘 켜져 있어야 하는 휴대폰도 소중한 사람과 있을 때면 꺼도 좋다는 광고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하느님의 더욱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지금 좀 서운해도 참을 수 있습니다. 지금 좀 속이 상해도 웃을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 무너질 때라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수많은 성인 성녀들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하셨고, 재물보다는 가난함을 택하셨고, 모욕과 멸시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예언자 되어, 주님에 앞서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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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57-66.80: 아기 이름은 요한이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이다. 탄생일을 축일로 지내는 성인은 성모님 외에 요한 세례자 한 분이다. 세례자 요한은 “여드레째 되는 날”(59절) 할례를 받는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 받은 할례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날 모든 피조물이 죽음에서 풀려나는 것을 예시한다. 요한이란 “하느님의 은총” 또는 “은총을 지닌 자”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요한이 장차 선포할 복음의 은총, 그 은총을 세상에 내리실 주님을 가리킨다. 또한 즈카르야가 요한의 이름을 확인해 주고 입이 열려 말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한 것은 그 아기의 이름이 지닌 힘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아버지에게 목소리를 되찾아 주었고, 사제에게 말하는 능력을 회복시켜 주었다. 가브리엘이 잠근 것을 갓난아기가 열었다. 요한이 태어나 할례를 받았을 때, 그의 아버지는 예언자요 사제가 되었고, 말이 쓸모 있게 되었다.
아이를 못 낳는 태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잉태된 기적 같은 출생은, 죽은 세상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깨우는, 회개를 외치는 요한의 설교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요한이 할례를 받고 이름을 받았을 때,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65절) 한다. 그것은 가문에서는 사용하지도 않던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부가 고집하는 것과 성전에 들어갔다가 나온 즈카르야가 언어장애인이 되었다가 요한이 할례를 받던 날,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이 “오시는 분”(묵시 1,4)을 위해 그 길을 닦고, 준비하는 것임을 공공연히 말하면서 사신 분이다. 성인은 그 누구에게도 옳은 것을 말할 때는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주장한 분이다. 이 때문에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분은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성령을 가득히 받으셨다.
오늘 복음과 같이 요한은 많은 사람의 축하를 받으며 탄생했지만, 주님의 모습과 같이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됨을 볼 수 있다. 결국에는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선구자로서 외롭고 힘든 삶이었음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삶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의 삶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삶이었음과 같이 우리의 삶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어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게 해주는 삶이 되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축일을 맞이하여, 우리 자신도 세상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결심하며 그분과 같이 굳센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언제나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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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교회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기념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겸손은 우리에게 특별한 본보기가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이었지만(마태 11,11 참조),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마르 1,7 참조)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사람임을 잊지 않았습니다.(마르 1,3 참조) 예수님께서 세례 받기를 청하시자, 자신이 감히 할 수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그분 뜻에 순종하며 세례를 베풀었습니다.(마태 3,14-15 참조) 그분께서는 커지셔야 하고, 자기는 작아져야 함을 아는 겸손한 사람이었고(요한 3,30 참조), 마침내 자신의 말처럼 작아져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마태 14,3-12 참조)
진정한 겸손은 나약하고 불리한 처지에 놓여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으로 나약하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참된 겸손을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주님을 등에 업고 자기를 내세웁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맡은 봉사 직무가 곧 자신의 권위가 되고, 하느님 말씀에 대한 지식과 교회 생활에 대한 경험들로 자신을 위한 봉사를 하게 됩니다.
그 반면 참된 겸손은 내적으로 강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덕입니다. 하느님께 의탁하면서 얻게 되는 내적인 힘은 자유롭게 자신을 낮출 수 있습니다. 주님께 의탁함을 힘으로 삼은 겸손한 사람은 주님께 첫자리를 내드리고 자신은 그 뒤에 설 줄 압니다.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다른 이를 위하여 드러나지 않는 봉사를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겸손을 보여 준 세례자 요한의 전구를 통하여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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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보라는 예수님은 안 보고...>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루카 1,57-58)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3-66)
1) 우리 교회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요한의 탄생은 메시아 강생의 예고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탄생을 경축하는 것은, 사실은 ‘메시아 강생’을 경축하는 것이고, 이 대축일의 진짜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요한 1,6-8)
이 말은, 세례자 요한을 깎아내리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은 참 빛이신 분’(메시아이신 분)이라고 증언하는 말입니다. <옛말에 “달을 보라고 가리키는데,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왜 손가락만 보느냐?”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보라고 가리키는데, 보라는 예수님은 안 보고 요한의 손가락만 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나를 보지 말고, 그분을(예수님을) 바라보아라.”라는 뜻입니다.
구원은 요한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옵니다. 따라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는 말을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나타내는 말로만 생각하는 것은, 생각이 짧은 것입니다. 물론 세례자 요한이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은 자신의 겸손을 드러내기 위한 말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집중하라는 권고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기가 있어야 할 위치를 제대로 알고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하느님의 구원사업에서 자기의 위치가 어디인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등장하시면 자기는 물러나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겸손이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2) 세례자 요한의 사명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왜 메시아 앞에 세례자 요한을 보내셨을까? 그냥 메시아께서 곧바로 활동하셨어도 되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효율성을 생각하면, 세례자 요한이 없었어도 상관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모든 사람을 회개시킨 것도 아니고, 요한 덕분에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 활동을 쉽게 시작하실 수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한 5,33-36)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활동이 구원 사업의 필수 요소는 아니었다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이면서, 동시에 하느님께서 메시아 예수님보다 예언자 요한을 먼저 보내신 것은 ‘사람들에 대한 배려’ 라는 것을, 즉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쉽게 메시아를 믿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배려라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3)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세례자 요한의 활동이 필요했겠지만,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에게는 필요 없지 않은가? 왜 우리 교회는 아직도 세례자 요한과 그의 활동을 중시하고 있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대답은 단순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명을 완수하고 떠났지만, 그의 ‘회개 선포’는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회개 선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업이 아직도 진행 중인 것처럼, 요한이 선포한 ‘회개 선포’도 아직도 진행 중인 일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의 구원과 멸망이 완전히 확정될 때까지는, 우리는 계속해서 요한의 회개 선포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루카 3,7ㄴ-8ㄱ)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루카 3,9)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 것이다."(루카 3,16ㅁ-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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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세례자 요한이 탄생합니다. 우여곡절을 거쳐 세상에 탄생합니다. 복음서에는 그의 탄생이 매우 놀라운 일로 묘사됩니다. 먼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그 이유입니다. 이웃과 친척들에게,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 엘리사벳이 출산하였다는 사실은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음을 뜻하기에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그의 아버지 즈카르야입니다. 요한의 탄생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한 예고부터 시작됩니다. 탄생 예고 이후에 천사가 예고한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즈카르야는 벙어리가 됩니다.
요한이 태어나고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기록되고서야 그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면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면서 이 이야기를 화제로 삼습니다. 만일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나면 요한의 탄생이 놀라운 것은 그의 부모 엘리사벳과 즈카르야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탄생이 놀라운 마지막 이유가 등장합니다. 그의 탄생과 관련된 소문과 함께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이 던져지면서, 엘리사벳도, 즈카르야도 아닌 요한이 특별함의 이유가 됩니다. 복음사가는 그의 탄생이 특별한 이유가 바로 요한 자신임을 알려 줍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자비와 기적을 통해서 세상에 태어난 특별한 인물,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런데 그는 더 큰 특별함과 놀라움을 위하여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코 복음 1장 7절) 자신이 지닌 특별함에도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스스로 낮춘 겸손한 세례자 요한입니다.
우리도 요한만큼은 아니지만 매우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탄생도 특별하고 놀라웠습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님을 위하여 겸손하게 우리 자신을 낮추고자 노력한다면, 세례자 요한을 닮아 가는 한 걸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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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님]
제1독서는 주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부르시고 선택하셨음을 전합니다. 그를 통해서 온 백성을 당신에게 모으실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을 알리시고 모든 민족들에게 빛을 전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의 빛’이시며 ‘계시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이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환히 드러납니다.
제2독서는 바오로가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유다인들에게 설교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다윗과 같은, 아니 다윗보다 더 위대한 그들의 주님, 메시아가 나오기를 고대하였습니다. 그분께서 바로 온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에 앞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요한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며 자신을 낮추고, 우리 가운데 찾아오신 구원의 말씀이신 예수님께 자리를 내어 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전합니다. 그의 이름 ‘요한’은 주님의 천사가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에게 미리 알려 준 것인데, 하느님께서는 요한을 통하여 많은 이를 하느님께 다시 돌아오게 하시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런데 즈카르야는 이를 믿지 않았고, 그 결과 말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아기가 태어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식에서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에 순종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씁니다. 이렇게 즈카르야가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는 순간, 그는 다시 말을 하게 되어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그 뒤 주님의 손길에 따라 성장한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루카 3,4)가 되어 예수님의 길을 미리 닦아 모든 사람이 그를 통해서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합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고, 모든 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이끕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잘 아시며 참으로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세례자 요한의 삶은 시작부터 끝까지 오로지 모든 이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채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님을 전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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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김승훈 가브리엘 신부님]
<신앙의 살아있는 이정표, 세례자 요한>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사도 13,25)
세례자 요한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참 익숙한 대표적인 언사입니다. 바오로는 오늘 전례 안에서 선포된 독서에서 또 다른 사실을 전해줍니다. 이때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 자신의 ‘사명을 다 마칠 무렵’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의 이 고백을 통해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무엇보다 먼저, 세례자 요한은 ‘그 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어머니의 태중에서 ‘즐거워 뛰놀며’(루카 1,44)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이후에도 그분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식별하고, 이를 선포합니다. 신앙의 첫 번째 조건은 이와 같이 예수님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음은 신앙 안에서 맡겨진 사명을 받아들이고, 그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나긴 구원 역사 안에서 예언자들이 행했던 중요한 일을 세례자 요한에게도 맡기십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세례자 요한은 그분의 길을 마련하는데 전력을 다합니다. 사람들의 질시와 공격, 권력의 탄압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광야에서 묵묵히 사명을 수행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가 지녀야 했던 굳센 마음과 내적인 준비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덕목입니다.
끝으로는 그가 지녔던 겸손한 태도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는 여정의 순간에 많은 이가 그를 따르고 존경을 표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 앞으로 돌립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드러내며, 하느님 앞에 내어놓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시기 위해 가장 필요한 태도일 것입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의 삶은 그 자체로 ‘신앙의 살아 있는 이정표’입니다. 이러한 삶의 여정을 본받으며,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네 삶의 매 순간을 돌보아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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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1,80)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크게 기념하고 대축일로 지내는 까닭이란 아마도 그분의 탄생 자체가 그리스도교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아침기도 찬미가에서는 “한 개의 화관으로 장식된 성인, 또 다른 성인들은 두 개의 화관` 요한은 더욱 많은 꽃이 꽂혀진 세 개의 화관으로 장식되도다.”라고 칭송합니다. 여기서 세 개의 화관이란 눈처럼 깨끗하게 죄 없으신 동정의 화관, 사막의 개척자이며 크신 예언자의 화관 그리고 훌륭히 믿음 지킨 순교의 화관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마11,9)이며,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11,11) 하고 인정하셨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관해서 오늘 복음의 핵심은 10개월째 벙어리로 살아온 아기 아버지 즈카르야가 서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1,63)라는 표현에 담겨 있습니다. 이 구절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1,61)란 사람들의 의문에 대한 대답이며 우리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실로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신다.’란 뜻으로 아기와 그 아기의 사명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분명히 드러내 보이는 표지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이49,1ㄷ) 하고 성서에 언급하듯이 하느님 뜻으로 말미암아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함으로써 바야흐로 은총과 자비의 때가 시작됨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분위기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앞서 알리는 전주곡과 같습니다.
주님의 손길로 보살핌을 받고 성장한 요한은 예수님을 두고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하며”(요3,30),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루3,16)라고 하느님의 시선에서 자신의 위치(=이것이 곧 겸손이다.)를 알고 사신 분이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1,36)라고 소개하며 자기 제자들이 그분을 따라가도록 인도합니다. 그는 이처럼 기꺼이 제자들이 참된 길을 걸어가도록 빗겨 섰던 겸손한 분이셨습니다. “나는 그분이 아니다”(사13,25)라는 고백은 예언적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새겨들어야 할 고백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몰려왔지만, 자신이 메시아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가도록 빗겨 서신 분이십니다. 우리 모두 분명 “그분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지만, 때론 내가 그분인 듯 타인의 가는 길을 가로막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그를 본 사람들이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1,65)라고 생각한 것처럼 오래전에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 대로 그는 광야에서 “하느님 나라가 곧 도래하리라.”라고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말씀이신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확성기였습니다. 만일 그가 하느님의 소리가 아닌 자기 말을 했다면 그의 소리는 생명이 없는 헛소리였거나 잡소리로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탄식처럼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49,4) 하고 토로한 것과 다름없는 빈 깡통, 빈 껍질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과 관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깊이 자각했고 자신의 소명을 충실히 실행했기에 생명을 닮은 소리가 되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다가올 새 세상을 맞이하고 준비시켰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마음처럼 우리 역시 자신 삶의 자리에서 진리를 선포하고 행동으로 실천할 때 우리는 쓸모 있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이 될 것입니다. 세상의 온갖 유혹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답게 사는 길이 바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참된 예언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렇게 살았던 근본적인 원동력은 바로 하느님, 예수님과 관계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자신의 사명을 깨닫기 위해서 오래도록 고독과 침묵 가운데 머물러 있었기에 그의 입술에 진리가 쏟아져 나왔음을 잊지 맙시다.
어느 시인이 세례자 요한에 관해서 이런 글을 남겼다고 하는데 저자의 이름을 잘 모르겠네요. “내가 커지면 주님이 오실 자리가 없어지고, 내가 아우성치면 주님의 작은 음성 들을 수 없으니, 작아져 비로소 향기로 남은 그 사람처럼 나도 자꾸 낮아져, 거친 들판에 작은 들꽃으로 피어 있고 싶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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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심리학자들이 쥐를 대상으로 실험했습니다. 서로 다른 환경의 기다란 두 통에 쥐를 각각 한 마리씩 넣었습니다. 한 통은 깜깜했고, 다른 통은 뚜껑에 바늘구멍을 뚫어 빛 한 줄기가 들도록 했습니다. 빛이 전혀 통하지 않는 통의 쥐는 세 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빛 한 줄기만 비치는 통 안의 쥐는 무려 서른 시간을 견뎠습니다.
이 실험의 결과는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깨달음을 줍니다.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둠만이 가득한 곳에서 살맛이 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안 좋은 상황에서도 희망을 안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빛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 덕분에 희망을 충분히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빛이 되라고 하십니다. 나의 인생을 비칠 빛만 찾지 말고, 스스로 빛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빛으로 다른 이가 희망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에 우리 역시 또 다른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 현실이 힘들어도 내일은 조금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품어야 합니다. 빛이신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라고 불리는 또 다른 빛도 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빛이기에 가능합니다.
오늘은 오실 주님을 준비한 요한 세례자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으로 이웃과 친척 모두 기뻐합니다. 단순히 나이 많은 엘리사벳이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요한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느님께서는 자애로우시다.’라고 하지요. 그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지금 갓난아기인 요한 세례자에게, 그리고 요한의 명명식 때 아버지 즈카르야에게 내려서 불신으로 말하지 못했던 그가 혀가 풀려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즈카르야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했던 것은 하느님 찬미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깨달았기에 찬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자비를 깨달은 사람은 모두 기쁨 속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 줄기 빛이신 하느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 역시 나의 이웃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야 합니다. 나만 받아야 할 빛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받아야 살 수 있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또 그 희망을 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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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그분은 커지셔야 합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주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 억압받는 이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도구 역할을 하심으로써 그들을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요한은 주님을 가리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요한3,30)고 하였고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루카3,16) 하시며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높이고 앞세웠습니다. 자신에 대해 침묵하고 주님의 영광을 말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처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그리고 윗사람은 윗사람대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대로 자기주장이 커가는 세상입니다. 물론 자기 소신을 표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소신을 내세운다기보다는 살지도 못하면서 자기 소리만 키우고 기대하며 강요함으로써 서로의 관계를 힘들게 하는 세상입니다. 내가 더 크고, 더 앞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흔들어 떨어뜨려야 내가 올라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세상이 아닌가 합니다. 여당 대표로 나서는 사람들의 주장이 꼭 그렇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요한처럼 철저히 자신의 역할을 알고 행동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요한은 오직 주님을 증언하고 주님을 앞세우는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많은 사람이 요한을 존경하고 따랐지만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사람들이 주님을 향하도록 인도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는 말씀이 살아있었습니다. 우리도 철저히 주님을 가슴에 담고 그분을 위해 산다면 우리의 주변은 참으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상대방이 커질 기회를 제공할 때마다 요한의 삶을 통해 하느님 안에 머물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아버지 즈카르야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이었습니다. 친척들은 아기에게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젊은 날에 아기를 낳지 못하는 돌계집(石女)이라고 손가락질받던 엘리사벳은 자기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손길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도 잠시 벙어리가 되는 아픔을 통해, 깊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니 다른 이름을 선택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기는 하느님께서 주셨고 성장하여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은총을 받았으며 더군다나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은혜에 감사하고 나를 구원하시는 주님을 증언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내가 만나는 사람을 더 크게, 그리고 우선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기쁨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의 섬김을 통하여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말)
이제부터 쓸데없는 말은 절대 안 할 거야.
말이 많아서 도움 되는 일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얘,
내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한번 들어 볼래?(이규경)
***
우리는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말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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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세례자 요한을 그리며>
루카 1,57-66.80 (세례자 요한의 출생)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세례자 요한을 그리며>
꺼져가는 생명의 끝자락 힘겹게 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늙은 부모의
마지막 희망의 불꽃이었던 요한!
그러나 당신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버지의 이름조차 가지지 못하고
부모와 갈라서야 했던 외톨이였습니다.
뭇사람의 존경 받는 가문의 영광도
주님 섬기는 사제의 안정적인 지위도
당신의 몫은 아니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늦둥이 외아들
하지만 따스한 부모의 품이 아니라
거친 광야가 당신의 보금자리였습니다.
여린 살갗 보드라운 천으로 감싸는 것은
당신에게는 생각할 수 없는 사치요,
단지 성긴 낙타털옷만이
당신을 거칠게 보듬을 수 있었습니다.
부드러운 빵과 맛난 살코기
몸과 마음을 유혹하는 달콤한 포도주는
결코 당신과 어울릴 수 없는 호사 일뿐
메뚜기와 들꿀에 당신은 생명을 맡겼습니다.
제 생각을 펼치지도
제 목소리를 내지도 않으며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내기 위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이기에
당신은 있으면서도 없어야 했습니다.
두려움 없이 주저함 없이
탐욕을 채우려 혈안이 된 이들에게
위선과 가식을 옷 입은 이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당신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준엄한 질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생애 첫 순간부터 평탄치 않은
비범한 당신의 삶의 여정에 이끌려
수많은 이들이 당신께 찾아와
살기 위해서 머리를 숙이며
오시기로 한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당신께 투사하였습니다.
그러나
메시아의 자리를 탐하라는 사탄의 유혹은
당신께는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고
살기 위해 당신을 찾은
무수한 이들을 참으로 살리기 위해서
당신은 스스로를 죽이고 죽였습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마침내 동생의 아내를 탐한 부정한 압제자의
썩은 냄새 진동하는 흥겨운 술판의
싸구려 노리개가 되어 목이 잘리는 순간까지
당신은 한없이 작아짐으로써
정의의 주님을 드러내었습니다.
당신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주님을 품음으로써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당신은 사라졌지만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 닮은 많은 이들을 통해서
오늘도 찬란히 부활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탄생과 삶과 죽음을 기억하는 오늘,
당신의 추하고 속된 세상과의 단절을 본받아
주님과 온전히 하나 되기를,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운 당신의 비움을 본받아
주님으로 온 삶을 채울 수 있기를,
헛된 명예를 내던져버린 당신의 낮춤을 본받아
주님을 온 누리 모든 이에게 들어 높이기를,
부정과 불의에 맞섰던 당신의 정의로움을 본받아
주님의 정의를 온 몸으로 당당히 선포하기를
겸손한 마음으로 다짐하며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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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섭리의 삶, 겸손의 삶, 감사의 삶”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예수님말고 이렇게 탄생 대축일을 지내는 성인은 요한 세례자뿐입니다. 새삼 성 요한 세례자가 우리 교회에 얼마나 독보적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오늘 입당송과 화답송 후렴도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성 요한 세례자 요한임을 알려줍니다.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그는 빛을 증언하러 왔다.”<입당송>
“오묘하게 지어 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화답송 후렴;시편139,14ㄱ)
이어지는 시편 내용도 은혜롭습니다.
“주여,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계시나이다.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옵시고, 멀리서도 내 생각을 꿰뚫으시나이다.”(시편139,1-2)
24절까지 이어지는 시편139장은 참 깊고 좋은 묵상자료가 됩니다. 성인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님을 봅니다. 하느님 탐구와 나의 탐구는 함께 갑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간이 무엇인지 아무리 물어도 하느님 없이는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필생 평생공부가 하느님 공부임과 동시에 참나를 아는 공부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여정을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이라고도 합니다. 하닮의 여정에 오늘 옛 어른이 좋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느긋한 걸음이 가장 멀리 가니 먼 길을 앞당길 수 유일한 길은 지치지 않는 것이다.”<다산>
“주저하는 준마보다 꾸준히 가는 둔마가 낫다.”<사기>
죽어서만 순교가 아니라 살아서도 순교적 삶을 사는 우리들입니다. 삶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입니다. 한결같이, 끊임없이 지치지 않고 가는 우보천리(牛步千里; 우직한 소의 걸음으로 천리를 간다는 뜻, 한결같은 노력의 자세를 뜻함), 호시우행(虎視牛行;호랑이의 시선으로 멀리보고 소처럼 우직하게 걷는다는 뜻)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저는 소띠요 우직하게 날마다 '참으로 살기 위하여' 소처럼 몸으로 강론을 씁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오늘 성 요한 세례자 대축일을 맞이하여 저절로 떠오르는 질문입니다. 짐승들처럼 생각없는, 무의미한 반복의 일상을 살 수는 없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을 따라, 주님을 섬기며, 은총의 도움에 힘입어 참나를 실현해가야 합니다. 이런면에서 우리 가톨릭교회의 성인들은 참 좋은 삶의 좌표가 됩니다.
성인이 되라 불림 받아 성화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성인 축일 때마다 기억하고 기념할 뿐 아니라 우리 또한 성인이 되려는 각오를 새로이 해야 합니다. 성 요한 세례자가 우리 성화의 여정에 참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첫째, 섭리의 삶입니다.
성인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께 불림받은 귀한 존재들입니다. 하느님의 선물들이요 하느님 섭리안에 그 고유의 사명을 지니고 있으니 이런 의식은 정체성의 형성에 결정적입니다. 우리는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기에 생각없이 함부로 막 살 수는 없습니다. 아마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다음 이사야 말씀에서 자신의 신원을 거듭 확인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이스라엘 대신, 내 이름을 넣으면 그대로 우리의 신원이 됩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의 영예로운 성소라는 것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말씀도 우리에겐 새로운 힘이 됩니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네가 나의 종이 되어,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세례자 요한,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 모두 각자 고유의 제자리에서 주님의 종으로,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주님의 빛으로 살라고 불림받은 귀한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든든한 배경이,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시는 주님은 우리 삶의 존재이유가 되는 분입니다. 이런 주님만이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과의 깊은 관계를 위해 평생 기도와 말씀 공부의 수행은 필수입니다.
둘째, 겸손의 삶입니다.
가장 쉬운 것이 남판단하는 일이요, 가장 힘든 것이 자기를 아는 것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무지에서 벗어나는 일이 평생과제입니다. 자기를 아는 것이 겸손이자 지혜입니다. 바로 주님께 돌아오는 평생 회개를 통해 참 나를 아는 겸손에 이르게 됩니다. 회개와 겸손은 함께 갑니다. 바로 이런 겸손의 모범이 세례자 요한이요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가 잘 증언합니다.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형제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파견되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세례자 요한입니다. 겸손의 아름다움, 겸손의 매력, 겸손의 향기, 겸손의 진실, 겸손의 사랑, 겸손의 용기, 겸손의 지혜입니다. 겸손은 우리 인품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 존재의 향기는 바로 겸손의 향기,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우리에게 파견되신 구원의 말씀, 예수님을 닮을수록 겸손과 온유입니다. 예수님이 있어 세례자 요한이듯 예수님 있어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 세례자 요한의 자랑이듯, 세례자 요한, 예수님의 자랑이어라. 예수님, 우리의 자랑이듯, 우리는 예수님의 자랑이어라.”
새삼 우리 삶의 여정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 겸손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성덕의 잣대가 겸손입니다.
셋째, 감사의 삶입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관계 속의 더불어의 존재들입니다. 고립단절이 지옥입니다. 관계는 존재라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하느님과 인간의 혼신의 노력을 다한 합작품의 결과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입니다. 엘리사벳 단독행위가 아닙니다. 복음 서두가 저절로 감사의 마음이 들게 합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함께 기뻐하였다.”
오늘날의 비극이자 불행은 이런 함께 기뻐할, 참 좋은 인정을 지닌 마을 사람들이, 친척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을의 자리에 고립단절의 아파트 숲이 들어서니 더불어의 삶은 날로 악화되고 온갖 질병도 늘어갑니다. 세례자 요한의 작명과정에 연루되는 사람들도 한둘이 아닙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것인가?”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아기는 자라면서 굳세어졌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작명은 마을 사람들 모두의 경사이자 기쁨이었고, 즈카르야 엘리사벳 부부는 물론 후에 이런 상황을 전해 들었을 세례자 요한 마음 깊이 각인된 하느님께 감사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세례자 요한의 생애가 답을 줍니다.
1.섭리의 삶입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자녀, 빛의 자녀로서 사명을 다하는 섭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2.겸손의 삶입니다.
늘 주님앞에서 주님과 함께 주님을 따르며, 주님과 이웃을 섬기며 사는 겸손의 삶입니다.
3.감사의 삶입니다.
모두가 은총이요 감사입니다. 이렇게 관계 속에 더불어 살 수 있음에 하느님께, 이웃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 섭리에 충실하며 매사 겸손하고 감사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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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진짜 헛수고는?>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헛수고.
저는 헛수고를 정말 싫어합니다. 물론 저만 그런 것이 아닐 겁니다.
제가 자주 듣는 얘기 중의 하나가 포르치운쿨라 행진과 전에 산청 성심원에서 했던 포르치운쿨라 축제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인상이 많이 남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 얘기를 하면서 그것이 없어진 것이 아쉽다고, 지금 새로 프란치스칸이 된 분들에겐 그런 체험이 없어서 안 됐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수천 명이 모여서 그런 축제를 할 수 있었던 것이, 그리고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좋은 기억과 감명으로 남았다는 것이 한편 저의 보람으로 남지만 그것이 없어진 것은 다른 한편 헛수고로 남습니다.
그래도 이런 것은 하나의 일이랄까 행사일 뿐이고, 전국적인 축제는 없어져도 어쨌거나 여기저기서 축제를 지내니 이 프란치스칸 운동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헛수고로 끝난 것은 아닙니다.
제가 더 헛수고로 느끼는 것은 사람 농사입니다. 수도원 안팎에서 인재를 양성하려고 한 저의 노력이 열매 맺지 못하거나 그런 노력이, 비록 일부에게서지만, 인정받지 못하거나 오히려 비난받을 경우, 무척 마음이 아프고 헛수고 느낌이 들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헛수고 느낌은 정말 제가 세속적이라는 표시이고, 그런 면에서 이런 헛수고 체험은 많을수록 좋을지도 모릅니다.
분명하지요. 이런 헛수고 느낌은 저의 노력과 수고가 세속적으로 인정받고 보상받고 싶은 욕망과 욕심이 아직도 있다는 표시가 아닙니까?
그러니 오늘 이사야가 얘기하는 헛수고 느낌은 제게 필요하고,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이나 다른 성인들과 비교하면 헛수고 체험을 오히려 더 많이 하고 더 크게 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그의 수도회 개혁 노력이 반대와 박해로 보상받고, 성 프란치스코도 자기가 시작한 운동이 제자들에게서 반대를 받았지요.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은 어땠습니까? 자기의 제자들은 다 자기를 떠나 주님의 제자가 되고 자기의 목숨은 한낱 계집의 앙심 때문에 날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제 생각에 성인과 범인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범인은 이 헛수고가 헛수고 체험으로만 남지만 성인은 이 헛수고 체험이 하느님의 보상 체험으로 넘어갑니다.
그렇습니다. 보상이 없는 수고가 헛수고입니다.
그런데 진짜 헛수고는 이 세상에서의 수고가 헛수고 체험으로만 남고, 그 이상의 하느님 보상 체험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헛수고 안에서 발생하는 하느님과 하느님 체험이 없다면 진정 가련합니다.
어쨌거나 우리의 노력이 하느님에게서 보상받지 않고, 세상에서 보상받으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세례자 요한이라는 거울을 통해 성찰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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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그의 이름은 요한.'" (루카1,57.63)
<선구자가 되자!>
오늘 복음(루카1,57-66.80) '세례자 요한의 출생과 요한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전하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탄생일을 축일로 지내는 성인은 성모님(9.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외에 세례자 요한(6.24) 한 분입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은총' 또는 '은총을 지닌 자' 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아주 밀접한 관계 안에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세주이신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예언자'이며, '선구자'입니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예언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주어진 사명'은 '주님께서 오실 길을 미리 닦아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예수님 세례 사건에도 함께 했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세례를 위한 모범으로써,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사도 13,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매일 우리에게 오십니다. 예수님 오심에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이 했던 일, 곧 주님께서 오실 길을 미리 잘 닦아놓는 회개를 나 자신과 너에게 선포하는 '선구자'가 됩시다!
언제나 나 자신의 신분과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 신분에 맞는 사명에 충실합시다! 그리고 겸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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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MIrkPh-QV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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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 66)
무더위 속에
맞이하는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끊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인간의 셈법과
하느님의 자비는
언제나
다릅니다.
무엇보다도
넘치는 하느님의
은총이 있었습니다.
지극한 사랑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본마음이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통해
드러납니다.
사랑과 구원으로
엮어지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삶의
진정한
기쁨입니다.
우리 앞에
내려앉은
아기의
탄생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는
탄생입니다.
한 사람을 통해
점점 밝아지고
한 사람을 통해
점점 어두워집니다.
하느님 친히
요한
세례자를 통해
희망이 되십니다.
하느님이
아니셨다면
불가능한 일들이
우리의 삶에
이루어집니다.
하느님밖에는
딱히 물어볼
대상이 없습니다.
성 요한
세례자의
탄생은
가장 값진
세례로
이어지며
주님을 드높이는
피의 순교로
예수님을
드러냅니다.
온전히
하느님을 드러내는
성 요한 세례자의
탄생을 기뻐합니다.
하느님께
올려지는
탄생입니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는지를
묻는
새로운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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