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분 기도 260715. 죽음과 윤회에 대하여
요세비
여기 저기서 자료를 가져오고, 편집하고 저의 이야기를 넣고 하다 보니 이야기가 좀 깁니다. 천천히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우리들에게는 '윤회'라는 말이 친숙하게 들린다. 그러나 윤회 사상은 여러 종교와 민족에게서 도 많이 나타난다.
원래 윤회의 뜻은 인도계통의 종교에서 나온 말로 산스크리트어로 ‘정처 없이 헤매다’ 빙글빙글 돈다’ 는 뜻이다. 이것을 중국에서 번역하면서 바퀴 륜 자와 돌 회자를 써서 윤회라고 했던 것이며 뜻으로는 환생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윤회라 하면 죽고 난 뒤 다시 태어나는 것, 또 이승에서 죄를 지으면 다음 생에서 개나 돼지로 환생하므로 착하게 살아야 하는 근거 중 하나로 생각한다. 하지만 불교 철학의 과학성과 합리성에 매료됐던 사람들은 이 윤회 사상 앞에서 당혹스러워 한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며, 게다가 축생으로까지 환생한다고 하는 이 윤회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해인사 주지인 현응 스님이 펴낸 ‘깨달음과 역사’(해인사 출판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스님은 우선 사람들이 윤회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윤회란 말은 본래 불교 언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윤회의 개념은 불교 이전 고대 인도 종교 사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부처가 살던 기원전 6세기경 인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생명은 한 번 죽음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며 끝없이 재생한다’고 믿고 있었다 한다.
윤회란 변화를 뜻하는 말이며 그 내용은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이다. 현 상태에서의 안주와 좌절을 거부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뜨거운 윤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라고 했다
불교에서는 해탈을 하면 윤회의 고리가 끊긴다고 한다. 그러므로 윤회는 이생에서의 결과에 의해 생기는 담보가 된다. 이때 해탈이 되면 부처가 되는 것이며 그것이 불교에서의 교의이다. 극락왕생이라는 내세의 세상은 방편이지 추구할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 불교의 본질이다. 이 말을 빌리면 극락에 태어나도 득도하지 못하면 열반에 들지 못하며 이는 연속되는 괴로움의 한 모습일 뿐이다 라는 것이다. 윤회의 수레를 돌리는 이유는 욕심, 욕망 때문이며 이를 버리는 현세의 태도가 내세의 결과를 보장한다고 가르친다.
윤회에는 문제점이 있다. 차별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서는 그 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윤회를 사용하기도 했다. 선업을 쌓으면 더 존귀한 신분으로 태어나고 악업을 쌓으면 내세에서는 더 비천한 존재로 태어난다고 하면서 선업에 대한 자가당착적인 가스라이팅 식의 주입을 하였다.
현재의 사회적인 차별과 지금 현재의 절망스러운 상황과 대우를 당사자 본인의 탓만으로 돌리는 데 이용되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가뜩이나 전생의 죄는 기억나지도 않는데, 나쁜 환경에서 태어나면 이번 생에도 또 죄를 짓게 되고 결국 다음 생에도 더 나쁘게 태어나기를 반복할 확률만 높아진다. 이쯤 되면 그냥 계속 죄짓고 살고, 계속 나쁘게 태어나게 만드는 시스템과 뭐가 다른 가 싶다는 의견이 있기도 합니다.
또한 사회적 약자를 향해 ‘전생의 업보’ 라며 조롱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다. 나무위키에서 인용한 사례인데 1999년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글렌 호들이 '인과응보' 개념을 설명하려다 가 무심코 "장애는 전생의 과오 때문"이라고 말해서 여론이 분노하기도 했고, 2015년 네팔 대지진 때는 그 재난 속에서 산모가 가까스로 구출되어 아이를 낳아 소중한 생명이라고 미담 기사로 실렸는데, 많은 비공감을 받은 댓글이 "너 네들 죄를 지으면 다음 생에 저렇게 태어난다"라는 어그로성 댓글이었다.
윤회설이 종교적인 면이 강하여 태생적으로 개선이 힘들다는 것이다. 보통 주류 종교는 '선(善)을 추구하고 악(惡)을 멀리하라' 라고 가르치고, 그러기 위해서 선하게 살면 이러한 보상이, 악하게 살면 저러한 대가가 기다리고 있다고 설명한다. 인도 계통 종교는 이를 '윤회설'로 설득하는 것인데, 무슨 죄를 지었든지 간에 랜덤으로 태어난다고 말하면 그 종교의 설득력은 땅에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보상도 같고 대가도 같다면 굳이 믿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윤회설에서는 자아 · 기억은 다음 생에 이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기억나지도, 알지도 못하는 전생의 죄 때문에 현생에서 고통받아야 한다는 불합리한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다. 전생과 전생의 죄가 기억난다면 '내가 벌을 받아 이렇게 태어났구나' 라고 생각하고 참회라도 할 수 있지만, 기억도 안 나는 일이라면 불가능하다.
과학계에서는 환생개념이나 윤회설이 ‘인간의 공정 심리’에서 기인하였다고 본다. 정해진 물질의 소유가 공정하지 않아 생존에 민감하게 진화했다고 보면서 공정하지 않은 상황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려면 반드시 그 이유에 대해 명확한 인과관계가 필요하게 되는데 그 원인이 타고난 육체 능력이나 지능, 부모의 지위와 같이 그저 태어날 때 랜덤으로 선택되는 것들이었고, 대부분의 인간들은 불공정의 원인이 고작 '운'이었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 상황이 공정하다고 납득하기 위해, 또는 지배층이 피지배층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사실 내가 이런 부모 밑에서 이렇게 태어난 건 뽑기처럼 돌린 게 아니라 내가 과거에 한 선행과 악행의 결과다.' 라는 논리를 만들어 단순한 확률에 인과 관계를 끼워 맞췄던 것이다. 그 결과 불공정을 불공정이라 인식하지 못하게 돼 차별 타파를 위한 노력 의지가 약화되는 부작용도 생겨났다.
먹을거리와 일용품이 부족한 빈곤하고 불평등한 사회 체계에서는 삶이란 괴로움의 연속이므로 삶의 재생, 즉 다시 태어나는 것을 싫어했다. 그것이 ‘다시 태어나지 않는 삶’ 에 대한 동경을 낳았고, 그것으로 부터 다시 윤회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해탈 사상이 생겨났다는 설명이다. 이런 해탈은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고행이나 제사 같은 종교적 수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윤회의 부정적인 입장에서 보면 윤회가 실제로 존재한다 한들 현생에서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즉, 윤회가 존재하느냐 아니냐 가 현생을 살아가는데 영향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실제로 존재하더라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뜻이다.
내가 전생에 누구였는지, 어떤 업보 때문에 현생이 누구로 태어났는지는 전생의 자신이 행한 일을 알아야만 의미가 있다. 현생의 업보에 따라 죽어서 극락 혹은 지옥을 가는 것은 행동에 관한 보상 심리가 적용된다. 하지만 내가 전생에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했어도 전생 당시의 기억과 감정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현생 내내 고생만 하다가 다음 생애 금수저로 태어난다고 해도 결국 새롭게 태어난 자에게 전생의 자신은 현생의 나와 관련 없는 남의 일일뿐이다. 가끔 영혼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 중에서 테세우스의 배(대상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이론으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테세우스 편 23장 1절에 나오는 형이상학적 문제의 하나로 배의 판자를 하나씩 뜯어내 다 고쳤는데 이 배가 테세우스의 배인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한 논제. 요세비 주) 이야기를 꺼내면서 영혼은 같고 신체만 달라졌을 뿐인데 완전히 다를 수가 있냐고 반문하기도 하는데 전생이 현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전생과 현생은 별개의 삶이다. 가령 당신이 전생에 전범 또는 흉악범이었는데 처벌받기도 전에 사망했다가 환생했고, 당신이 전생에 처벌을 제대로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해서 현생에서 처벌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이전 생에서의 가족, 친구를 환생 후엔 다시 못 만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환생 이후의 삶이 비참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다만 생각하기에 따라 완전한 소멸보다 전생의 기억을 모두 잃더라도 차라리 다른 생을 경험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환생이 좋을 수도 있다. 결국 믿느냐 안 믿느냐는 자기 자유. 다만 그걸 남에게 납득시키려고 강요하지는 말자. 어느 정도는 사후 세계에 대한 환상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환생을 주장하는 불교에서 유회는 대부분 긍정적으로 인식되지만 교의(敎義)에서는 부정과 긍정의 사이를 오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미래의 나는 완전하게 동일한 기억과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동일한 인물이 아닌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모든 개체들은 변화한다. 그러므로 나라는 존재를 정의한다면 어느 한 순간에도 ‘동일한 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自我)가 아닌 무아(無我)사상을 역설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아라는 것은 자신의 의식세계라고 말할 수 있으며 욕망, 욕심의 대표적 언어라고 보면 되겠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에서 비록 과거, 현재, 미래의 '나'는 모두 다른 '나'이지만, 어떤 '나'이든 상관없이 생명체는 항상 고통을 싫어하고 행복을 추구한다. 전생의 기억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모든 생명체가 고통을 멀리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다. 따라서 비록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 1년 후의 '나', 10년 후의 '나', 노년의 '나', 다음 생의 '나'가 모두 동일하지 않은 존재라 할지라도 지금 순간의 행복만을 추구하지 않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고 대비한다.
이렇듯 언제나 행복을 추구하는 생명체에게 윤회·환생과 인과의 원리는 행복을 얻고 고통을 피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윤회와 인과의 원리를 알게 되면 지금 순간의 행복만을 위해 비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 미래에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게 된다. 따라서 윤회와 인과의 원리를 아는 사람은 인과율에 따라 선(善)을 행하고 악(惡)을 멀리하는 도덕적인 삶을 살게 되고, 그 결과 이번 생과 다음 생까지 좋은 과보를 얻어 부, 명예, 건강, 장수 등 세속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첫댓글 바르게 살라고 유명한분들이 말씀하신 설로만 믿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