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의 선풍
원제 : Blowing Wild
1953년 미국영화
감독 : 우고 프레고네세
음악 : 드미트리 티옴킨
주제가 : 프랭키 레인
출연 : 게리 쿠퍼, 바바라 스탠윅, 안소니 퀸
루스 로만, 워드 본드, 이안 맥도날드
후안 가르시아
'황야의 선풍' 제목만 보면 영락없는 서부극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남미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현대물입니다. 자동차가 다니고 석유를 시추하는 내용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서부극과 아주 유사합니다. 말탄 악당들이 나오고 그들과 총격전을 벌이고. 즉 그 당시 성행했던 아메리칸 웨스턴의 내용과 형식에 남미와 현대라는 배경만 입힌 내용입니다. 시작부터 말타고 소총을 든 무리들이 행진하는 장면도 영락없는 서부극입니다.
'황야의 선풍' 은 게리 쿠퍼, 바바라 스탠윅, 안소니 퀸 등 불후의 배우들이 출연하는 50년대 흑백영화입니다. 배우들의 레벨이 대단하지만 마치 그런 거물 배우들이 프라타임을 틈타 출연한 듯한 평범한 영화입니다. 영화를 촬영하면서 게리 쿠퍼와 안소니 퀸은 아카데미 주연상, 조연상 수상을 하게 됩니다. 즉 그들의 입지가 높을 때 지극히 평범한 영화에 출연한 것이죠. 1950년대 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스튜디오가 아닌 현지 로케를 감행한 영화입니다. 멕시코에서 촬영을 했지요. 감독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우고 프레고네세, 비교적 생소한 이름인데 미국 영화도 몇 편 연출한 인물이고 '황야의 선풍' 외에 조안 폰테인 주연 '데카메론 야화', 스튜어트 그랜저 주연의 '해리 블랙' 같은 개봉작들이 있습니다. 그다지 유명하기 않은 남미계 감독이지만 제법 유명한 배우들을 캐스팅한 영화들이 있다는 게 이례적입니다.
가상의 남미의 어느 지역, 석유 시추를 위해서 유정을 임대한 두 남자 제프(게리 쿠퍼)와 더치(워드 본드), 하지만 그곳은 수시로 산적떼들이 출몰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의 유정에도 산적떼들이 출몰하여 돈을 요구하다 협상이 안되니 유정을 모두 날려버립니다, 졸지에 무일푼이 된 두 남자, 직업을 구하려고 마을에 오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니트로 글리세린을 운반하면 돈을 주겠다는 신사가 나타납니다. 위험한 폭발물이고 비포장의 울퉁불퉁한 도로임에도 두 사람은 돈을 위해 승낙을 합니다.
무일푼, 알거지의 남자 둘이 트럭을 몰고 니트로 글리세린을 운반한다....어디서 본 듯한 익숙한 내용이죠. 네, 이브 몽땅 주연 '공포의 보수'입니다. 불과 1년전 등장한 프랑스 영화와 유사한 작품일까요? 여기까지는 그런데 니트로 운반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떡밥입니다. 그냥 공동 주연처럼 등장한 '조연배우' 워드 본드를 잠시 퇴장시키기 위한 카드에 불과하죠.
다음날 일찍 니트로를 운반하기로 한 두 사람, 하지만 쫄쫄굶은 더치는 배가 고파 강도짓을 하다가 오히려 두들겨 맞는데 알고 보니 그는 옛 동료인 파코(안소니 퀸) 였습니다. 파코는 여러개의 유정을 운영하는 인물로 제프와 더치는 그의 유정에서 일을 했었지요. 둘을 다시 만난 파코는 반가워하며 자신의 거처에 데려가고 함께 일하자고 제안힙니다. 애초부터 목숨을 건 니트로 운반을 꺼려했던 더치는 은근 그걸 바라지만 웬일인지 제프는 그냥 니트로를 운반하자고 합니다. 그건 바로 파코의 아내 마리나(바바라 스탠윅) 때문이지요.
제프가 어느날 갑자기 파코의 유정을 떠난 건 마리나 때문이었습니다. 제프를 사랑한 마리나, 그리고 마리나를 사랑한 파코, 파코는 유정으로 성공하여 마리나와 결혼할 생각이었지요. 제프는 어떤 이유인지 마리나를 피해 떠났고 명목은 독립된 유정을 운영하는 것이었을 뿐, 마리나는 돌아온 제프를 반기지만 제프는 마리나를 애써 피합니다. 결국 니트로 운반에는 성공하지만 더치가 부상을 입고 입원하고 돈을 주기로 한 악덕업자는 채권자들에게 시달리는 건달이었고 결국 여전히 무일푼 상태의 제프는 파코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파코는 무능한 현장 책임자를 해고하고 제프를 그 자리에 앉힙니다. 제프는 유능한 유정 전문가였지만 다시 시작된 마리나의 추파를 맞닥드려야 했고, 이후 파국의 결말이 다가옵니다.
게리 쿠퍼와 안소니 퀸이 형제같이 절친한 친구이자 사장, 직원 고용관계지만 한 여자를 둘러싼 삼각관계의 운명적으로 묘한 관계가 됩니다. 가장 믿고 신뢰하는 친구를 아내가 사랑한다.... 마치 독일영화 '무관의 제왕'에서의 왕, 왕비, 주치의의 관계와 유사하죠. 이런 이야기는 비교적 흔한 편이죠. '삼각관계와 그로 인한 불륜'은 영화의 주된 소재 중 하나죠.
여복있는 배우 게리 쿠퍼는 바바라 스탠윅 외에 우연히 마을에서 만난, 오갈데 없는 무일푼 여자 돈리(루스 로만)와도 연인같은 관계가 됩니다. 그녀와 벌어지는 스토리도 영화의 한 축을 담당하지요. 처음에 게리 쿠퍼의 동업자로 공동 주연처럼 등장한 워드 본드는 일찌감치 '부상하차' 를 하면서 영화의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총격전 장면도 나오기 때문에 액션, 로맨스, 드라마가 모두 결합된 영화지만 이런 작품이 잘 만들면 웰라운드 영화가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액션, 로맨스, 드라마 모두가 빈약한 그냥 잡탕같은 작품이 되는데 이 영화가 그렇습니다. 적당한 액션의 재미와 적당한 4인의 로맨스, 그리고 유정드라마 라는 다각도의 내용이 담겨 있지만 그다지 임팩트가 없습니다. 똑같이 석유시추를 소재로 한 '자이안트'에 비해서 로맨스나 드라마가 빈약하고 두 남자와 두 여자를 등장시킨 석유시추 드라마 '붐 타움' 과 비교해도 한참 빈약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게리 쿠퍼나 안소니 퀸, 바바라 스탠윅 같은 일급 배우들이 출연한 개봉작인데도 한참동안 잊혀진 작품으로 머무른 것 같습니다.
게리 쿠퍼는 늘 그렇듯 진지하고 용감한 남자 주인공이고 안소니 퀸은 우정을 중시하는 쾌활한 남자, 바바라 스탠윅은 남편따윈 안중에도 없고 옛 연인의 등장을 반기며 그에게 대시하는 사랑에 눈 먼 여자를 연기합니다. '로하이드' 'O.K. 목장의 결투'로 유명한 프랭키 레인의 미성의 주제곡이 인상적인데 가사의 내용이 마리나를 잊지 못하는 한 남자의 독백같아서 영화의 내용과 약간 어긋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못 잊는 대상은 남자가 아니라 마리나인데. 아니면 실제로는 사랑하지만 일부러 피하는 게리 쿠퍼의 심리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영화의 후반부에 갑자기 '황야의 7인'을 방불케하는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약간의 액션재미를 주긴 하는데 그럼에도 로맨스 영화로도, 드라마 장르로도, 액션물로도 모든 것이 2% 부족한 영화입니다.
ps1 : 게리 쿠퍼와 안소니 퀸은 촬영도중 아카데미상을 수상하여 기분 좋게 서로 촬영에 임했겠습니다. 영화내내 안소니 퀸이 유난히 즐거운 모습이 많은데 실제로 그랬겠습니다.
ps2 : 제프의 또 다른 여인 역을 연기한 루스 로만은 그리 유명한 배우는 아닌데 게리 쿠퍼와는 3년전인 1950년 '초연의 달라스'에서 함께 공연한 바 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커크 더글러스와 공연한 '챔피언'이 있지요. 게리 쿠퍼의 쉬어가는 영화 두 편에서 각각 연인으로 출연하네요. 두 편 다 그냥 연인이 아니라 애매한 연인
ps3 : 배경은 가상의 남미인데 촬영은 모두 멕시코에서 했습니다.
ps4 : 원제인 Blowing Wild 는 직역하면 '거칠게 부풀어 터지는 것' 인데 유정에서 석유가 솟구쳐서 하늘로 치솟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혹은 화산이 폭발해서 나오는 것도 해당되겠죠. 영화에서 그 제목이 프랭키 레인의 가사로도 등장하는데 사랑의 열망이 터져 나오는 것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개봉제에서는 '선풍'이라는 요즘은 잘 안쓰는 말이 나오는데 그 당시 '선풍을 일으킨 질투' ''선풍을 일으키는 여자' '선풍대위' 등 영화에서 선풍 이라는 단어가 가끔 쓰였습니다.
[출처] 황야의 선풍 (Blowing Wild, 53년) 로맨스와 액션을 겸비한 석유 채취극|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