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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재위 1724~1776)의 치세는 불안하게 출발했다. 아무도 그가 조선왕 가운데 최장기간인 51년 6
개월 동안 보위에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가장 큰 이유는 경종(재위 1720~1724)
독살설이었다. 말 많은 정객들이 영조가 경종을 독살하고 보위를 차지했다는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
린 것이다. 경종‧영조의 부왕인 숙종은 인경왕후‧인현왕후‧인원왕후 등 세 왕비를 두었지만 모두 왕자
를 출산하지 못했다. 그참에 상굿도 조선 왕실 최고의 악녀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후궁 장희빈이 숙
종의 장남(경종)을 낳아 보위를 이었다.
영조는 후궁 숙빈 최씨 소생으로 경종의 이복동생이었는데, 장희빈이 낳은 차남과 최씨가 낳은 영조
의 동복형 삼남이 요절한 덕에 일찌감치 세제(世弟)로 책봉되어 있었다. 굳이 경종을 독살하지 않아
도 자연스럽게 보위를 이을 후계자였다는 얘기다. 경종은 즉위 직후부터 오랜 병고 끝에 보위에 오른
지 4년 4개월 만에 병사했다. 사서에 나와 있는 증상으로 보아 콜레라가 아니었나 싶다. 또 다른 불안
요소는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무수리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무수리는 궁녀들의 침식을 돌봐주
는 하녀였다. 최씨는 을 중의 을이었으니, 그 소생인 영조를 보는 사대부들의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
던 것이다. 모두가 서얼(庶孼)을 천시하는 조선의 왜곡된 가치관에서 빚어진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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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이 어떠했든 주상을 이처럼 폄하하게 된 실질적인 원인은 조선을 망친 그놈의 당파싸움이었다.
인조반란(1623년)으로 실권을 장악한 서인들은 숙종 대에서 장희빈을 지지하던 남인들이 완전히 몰
락하면서 권력이 더욱 막강해지자 내부분열을 일으켜 소론과 노론으로 갈라졌다. 당파싸움은 현재도
마찬가지여서, 2018년 9월 말 현재 우리나라에는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제일야당인 자유한국당 외
에도 정의당을 비롯한 26개 정당이 난립해 있다. 생산적인 일은 전혀 하지 않고 평생 천박한 입만 나
불거리고 먹고사는 자들이 그처럼 많다는 얘기다.
노론은 영조를 지지한 자들이고 소론은 경종을 지지하던 자들이었다.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은 소론
을 완전히 몰아내고 권력을 독점했다. 그러자 소론 과격파들이 똘똘 뭉쳐 권력을 되찾기 위해 갖은
모사를 꾸몄다. 경종 독살설을 널리 퍼뜨리는가 하면,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던 남인들을 끌어들여 반
란을 도모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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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맞서 노론 강경파들은 소론의 씨를 말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임금까지 우습게 여기기 시작했다.
분노한 영조는 재위 3년(1727) 노론 강경파들을 대거 파직하고 그 자리에 소론 온건파들을 앉혔다.
이를 역사에서는 정미환국이라고 한다. 환국을 통해 기용된 자들이 소론이기는 하되 온건파에 그치
자 반란을 추진 중이던 소론 강경파로서는 일시에 명분만 상실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반란계획
을 멈추기에는 이미 너무 깊이 추진되고 있었다. 게다가 반란의 실체가 하나하나 드러나 연일 반란
책동자들을 엄벌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영조는 신중했다.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오히려 반란 책동자들에게는 명분만 제공할 우려가 있기 때
문이었다. 3월 15일 수원부사 송진명으로부터 일부 불순분자들의 반란 책동 장계가 올라왔을 때도
영조는 국청을 설치하여 장계에 거명된 자들을 잡아다 문초하자는 중신들의 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이때는 수원부사의 정보가 정확하여 실제 반란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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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부사 송진명이 장계를 작성하고 있던 3월 14일 밤, 이인좌는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청주성으로
잠입했다. 장례식을 가장하여 상여에 무기를 숨긴 채 조용히 입성한 것이다. 이인좌는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의 9대손으로 노론에 의해 실각한 인물이었다. 날이 밝자 이인좌는 원수부를 급습하여 절도
사 이봉상, 군관 홍림 등을 죽였다. 이인좌는 스스로 대원수라고 칭하며 수하인 권서봉을 청주목사
에, 신천영을 충청병사에 임명했다. 이어 관곡을 풀어 청주 백성들을 위무하고 삼남에 공개 격문을
띄워 지원병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3월 16일, 급보를 받은 영조는 총융사 김중기를 순토사로 삼아 군사를 움직였다. 군사들이 수상한 움
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고변이 잇달았지만 반란의 주모자가 누구인지, 병력은 얼마나 되는지, 군사들
이 어디로 몰려가는지, 구체적인 반역의 내역은 파악할 수 없었다. 심지어 영조는 3월 16일 현재 이인
좌가 청주성을 점령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3월 18일이 되어서야 청주목사 박당으로부터 청주성
이 역적 이인좌에게 점령당했다는 장계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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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는 기세를 올리며 안성으로 진격했다. 곳곳에서 소론의 무고를 믿고 영조를 우습게 여기고 있
던 수령들이 반군에 합류하여 날로 세가 불어났다. 와중에도 도순무사 오명항이 파악하는 정보는 비
교적 정확했다. 그는 반군 몰래 먼저 안성으로 군사를 잠입시켜 대기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모른 채
대포를 쏘며 기세당당하게 안성으로 진입하던 이인좌의 반군은 관군이 쏘아대는 신기전에 무수히 희
생을 당하며 허겁지겁 청룡산으로 숨어들었다.
오명항은 반군의 간자를 잡아 반군이 400여 명에 불과하며 그들이 청룡산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
아냈다. 오명항은 계속 정확한 정보로 반군을 추격하여 연전연승했다. 관군의 추격을 받고 달아나던
반군은 앞쪽을 가로막는 순토사 김중기의 복병에 걸려 큰 타격을 받고 뿔뿔이 흩어졌다. 오명항은 죽
산에 있는 일단의 반군도 진압했지만 이인좌를 사로잡지는 못했다. 이인좌는 절간으로 피신했다가
중들에게 사로잡혀 오명항 앞으로 끌려왔다. 이인좌는 고문에 못 이겨 반군 관련 정보를 모조리 실토
한 뒤 3월 27일 처형되었다. 이인좌의 진술 덕분에 전국에서 반군에 가담하기로 약조했던 모든 관계
자들도 일망타진되었다.
박영규의 「조선 반역실록」 소개 끝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내외만 달랑 살아가는 고령자 의 3식 해결이 쉽지 않아 택배 음식문화가 형성되어 해결하고 있는 노부부의 얘기를 직접 들었습니다. 실로 이해가 가는 처지 였습니다. 끼니마다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드는일이 성가시고 사먹자니 질리고 이런 불편을 해소하는 길이라며 점심은 나와서 사먹고 아침.저녁을 배달로 해결하고 있다는 80 중반 노부부의 변 이었습니다. 참 편한 세상이자 편한 공감을 얻고 있는 현대 생활사 입니다. 3한4온의 순리가 없어진지 오래된 연일 영하권의 날씨 입니다. 즐거운 일상 맞이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