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5일(화)
* 시작 기도
(사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한 가치가 어디 있느냐?
주님...
주 하나님께서는 흙의 먼지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숨)을 불어넣으심으로 그가 사람 곧 생령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그 숨을 거두시면 다시 먼지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인생을 만드신 하나님보다 코를 막으면 숨도 쉬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의지합니다.
내 안에 이런 모습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나는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는 자인 것도 고백합니다.
내가 나 자신을 의지하거나 셈할 가치가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게 하소서.
나의 생명의 주인 되신 우리 주님만 의지하기 원합니다.
따라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나를 드러내는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사오니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주님 때문에 고난과 핍박을 받을지라도 기꺼이 받게 하소서.
그것이 주님의 뜻인 영생을 이루는 첩경이오니 주만 바라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룻 2:17-23
제목 :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1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18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
19 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21 모압 여인 룻이 이르되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하니
22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하는지라.
23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니라.
* 나의 묵상
모압 여인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그의 고향 모압을 떠나 낯설고 물선 땅 베들레헴에 도착하였다.
나오미는 베들레헴 집을 떠난 지 10년 만에 룻과 함께 다시 돌아왔으나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가난한 형편을 파악한 룻은 시어머니에게 보리 이삭이라도 주워오겠다고 말하고 나가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보아스 소유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되었다.
보아스의 배려와 친절로 점심도 얻어먹고 또한 이삭도 부담 없이 마음껏 주울 수 있게 된 룻은 저녁이 되어 주운 이삭을 떨어보니 한 에바 정도 되었다.
한 에바는 성인이 하루 동안 먹을 수 있는 곡식의 양을 나타내는 것으로 ‘오멜’의 10배에 해당한다.
현대의 도량형으로 환산하면 약 22리터로써 12되 정도 되는 양이다.
이는 하루 동안에 이삭을 주운 결과로는 엄청난 양이다.
이렇게 많은 양의 이삭을 주울 수 있었던 데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아스의 친절과 배려 그리고 룻의 성실함이 깃들인 결과일 것이다.
한편 이삭을 줍고 집으로 돌아온 룻을 보고 시어머니 나오미는 묻는다.
“네가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이 질문이 오늘 나의 마음에 울림을 준다.
그 이유는 룻과 같은 가난한 며느리가 하루 종일 이삭을 주워왔다면 그에 대한 시어머니의 일반적인 반응은 ‘어디서 주웠는지, 어디서 일을 하였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주웠는지’에 관심이 있을 것이다.
내가 만약 시어머니라면 아마도 돌아온 며느리를 보면서 이랬을 것 같다.
“어디 보자. 오늘 얼마나 주웠니? 어이구 많이도 주웠구나. 그래 수고 많았다. 어서 가서 쉬거라.”
대체적으로 이런 반응은 과정이나 방법에 상관없이 많이만 얻으면 칭찬하는 경우이다.
사람들은 이런 칭찬을 받을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그래서 다음에 또 칭찬을 받기 위해서 묻지마 전술을 쓰게 될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농촌 시골에서 살았는데 벼농사 보리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추수하여 볏단을 쌓아 놓은 논에서 볏단이 사라지는 일들이 가끔씩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잘 했다고 칭찬을 받게 되면 다음에는 더 많은 칭찬을 받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고 결국 남의 볏단에서 벼나 보리를 한 움큼씩 뽑아 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나오미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얼마나’가 아니라 ‘어디서’에 대한 반응이다.
나오미는 지금 당장 먹을 것이 없는 찢어지게 가난한 자이다.
그런 자의 반응, 곧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는 질문은 의외의 것으로 실로 놀라운 것이다.
이 질문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은 ‘네가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디냐?’, 즉 정체성의 문제이다.
내가 대학원을 마치고 흥국생명에 근무할 당시 고신의료원에서 근무하는 형님을 정말 부러워했던 적이 있었다.
나의 하루의 일과는 아침에 출근해서 미팅을 하고 밖으로 나오면 목적지 없이 어디론가 가야만 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지친 몸을 이끌고 사무실로 다시 돌아오면 종례 미팅을 하고 직원들끼리 빠짐없이 가는 곳이 술집이었다.
끊임없이 내 뇌리를 스치는 생각은 “김종수, 너는 지금 어디에 있니?”라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고신교단에서 직영하는 대학병원인 고신의료원에 근무하는 형님이 부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룻과 나오미의 관심은 서로 달랐다.
룻은 더 많이 줍는 것과 어머니를 잘 모시는 것에 최대의 관심이 있었다면, 시어머니 나오미의 관심은 룻이 어디서 일했는가에 있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나오미를 통하여 룻이 바로 서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밭에서 돌아온 룻에게 하는 나오미의 첫 질문이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인 것이다.
이 질문은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가정 그리고 나 자신을 향하여 주시는 말씀이다.
주님의 교회들아! 너는 지금 사람들이 더 많이 모이고 헌금을 더 많이 하며, 성전(?)을 더 크게 짓는데 관심이 있느냐?
그리스도인 가정들아! 너희는 지금 얼마나 벌었느냐, 자녀들이 얼마나 좋은 성적을 거두었느냐에 관심이 있느냐?
김종수목사야! 너는 지금 교회가 얼마나 크게 부흥했는지에 관심이 있느냐?
솔직히 나는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것들이 최대의 관심사였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 하는 정체성의 문제는 관심 밖이었고 오직 부흥이라는 ‘얼마나’에 최대의 관심을 가지고 목회를 했었다.
당시 김해에서 전도하라고 하면서 작은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을 데려와도 좋다고 가르치는 교회가 있다는 말을 들었었다.
사람들이 기왕이면 큰 교회에 다니면서 문화적으로 누리는 것이 본인들에게도 좋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게다가 새벽에 낯선 교인이 눈에 띄면 부교역자로 하여금 미행하게 해서 집을 알아놓은 다음, 낮에 심방하여 자기 교회에 등록하게 만든다고 한다.
성도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도해서 교인 숫자가 늘어나면 솔직히 그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을 것이다.
목회를 하면서 때로는 그런 유혹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유는 교회 사이즈가 적기 때문에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교인 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부흥일까?
정말 잘 한다고 과연 하나님이 박수를 쳐 주실까?
그저 교회 사이즈가 커지고 재정이 늘어나고 성전이라고 불리는 예배당이 커지는 것에만 우리의 관심이 있어야 되는가?
오늘 본문의 나오미를 통하여 룻에게 하는 질문,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는 바로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애끓는 마음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가 아니라 ‘어디서’의 문제이다.
물론 양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을 어디서 어떻게 얻었는지가 더 중요하다.
자녀들이 90점, 100점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점수를 어떻게 받았는지는 중요도의 차원을 달리 하는 문제이다.
거룩한 낙제라는 말이 있다.
컨닝해서 지금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과연 어디에 서 있는가를 생각하면 컨닝을 버리고 거룩을 택할 수 있다.
그래서 시험 점수가 안 나와서 낙제를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거룩한 낙제인 것이다.
지금은 마음이 아프고 눈물을 흘리지만 그러나 최후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자인 것이다.
부정한 1등과 거룩한 낙제생 중 누가 과연 최후에 웃을 수 있는가?
룻은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보아스가 그저 인심 좋고 마음이 넉넉한 이웃집 아저씨 정도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오미에게 있어서 보아스는 룻을 구원해 줄 구세주요, 메시야이며 그리스도였던 것이다.
이를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보아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오미가 말한 ‘어디서’는 그저 정직하고 착하게 사는 그런 가치관의 문제나 결과만을 따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장소의 문제이며, 그 장소는 다름 아닌 주님의 품이요 아버지의 품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치관의 문제를 말하기 전에 그보다 더 중요한 정체성을 말해야 하는 이유이다.
“오늘 네가 어디서 주웠느냐?”
이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요, 내가 거해야 할 주님의 품이다.
(요 14:20)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다름 아닌 주님의 품속이다.
그곳만이 주의 영광이 임하는 쉐키나의 자리요 주의 날개 그늘 아래인 것이다.
보아스는 룻을 축복하면서 이 쉐키나를 언급한다.
(룻 2: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이 새벽 주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이 자리에 주의 영광이 임한다.
말씀이 있는 자리,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이 자리가 바로 쉐키나의 영광의 자리임을 믿는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게 주신 주님의 영광이 있는 이 자리가 곧 내가 있어야 할 자리임을 믿습니다.
오직 주님의 얼굴을 구할 때 그 자리에 주님이 함께 하시오니 그 자리가 비록 무덤일지라도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참 평안을 누리게 하옵소서.
‘어디서’를 알기 전에 ‘얼마나’에 눈 뜨지 않기를 바라나이다.
주님께서도 주님이 보내시는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던 것처럼, 주님이 계시는 그 자리에 나도 있게 하옵소서.
(눅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행 1: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내가 있어야 할 자리인 쉐키나의 영광이 임하는 자리에 항상 있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