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여자
원제 : City Girl
1930년 미국영화
감독 : F. W. 무르나우
촬영 : 어네스트 팔머
출연 : 찰스 패럴, 메리 던칸, 데이비드 토렌스
이디스 요크, 구인 윌리암스, 앤 셜리
톰 맥과이어, 리처드 알렉산더
'도시여자'는 1930년 빌헬름 무르나우 감독의 작품입니다. 이 시기는 이미 유성영화가 도래했지만 무르나우 감독은 무성영화로 만들었습니다. 이후 폭스사에서 임의로 사운드를 입혀 유성영화 버전을 만들었는데 무르나우 감독은 매우 싫어했다고 하지요. 무성영화 감독에서 유성영화 감독으로 성공적 변신을 한 인물들도 많지만 이렇게 무르나우나 채플린 처럼 무성영화 방식을 선호한 인물들도 제법 있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단순히 F. W 무르나우 감독의 영화라는 이유만은 아닙니다. 사실 언제 어떤 영화를 보게 될 줄은 저 자신도 모르죠. 수천분의 일 보다 더 낮은 확률이고, 소장하고 있는 영화 외에도 '신작' '재감상' 등의 변수들이 많이 있는거죠. 즉 어떤 영화가 선택되어 감상하게 되는 건 정말 만 분의 일 확률의 간택이지요. 명감독들도 수백명들이 있고. 특히 1930년의 무성영화가 선택될 확률은 지극히 낮겠지요. 아무리 1927년 '선라이즈' 같은 불후의 걸작을 만든 무르나우 감독이라고 하더라도요. '도시여자'가 고화질로 복원되었고, 한 여성이 도시가 아닌 '농촌'에서 밀짚모자를 쓰고 밀을 들고 있는 포스터가 왠지 확 끌렸습니다. 더구나 IMDB 평점 7.7 이라는 놀라운 점수도 그렇고. 아무튼 그렇게 되어 '간택'된 영화입니다.
'선라이즈' 만큼은 아니지만 꽤 재미있고 볼만한 영화입니다. 제가 F. W. 무르나우에게 제대로 관심을 갖게 한 영화는 '선라이즈'인데 많이 유명한 '노스페라투'나 '마지막 웃음'을 봤을때는 그냥 소문만큼 대단한 느낌은 못 받았거든요. '도시여자'는 '선라이즈' 보다 3년 뒤에 나온 작품입니다.
제목이 '도시여자'인데 왜 농촌에서 찍은 듯한 모습이 포스터일까요? 정확히 말하면 '도시에서 온 여자'라고 해야 맞습니다. 케이트(메리 던칸)는 대도시의 카페에서 일하는 종업원입니다. 그녀의 하루하루는 매우 고단하고 바쁘죠. 북적거리는 카페에서 종일 서빙을 해야 하지요. 추근대는 남자 손님, 커피, 스낵 등을 내어오고 치우고 설거지하고...피곤하고 고단한 삶이죠. 어느날 이 카페에 젊고 잘생긴 남자손님이 오는데 렘(찰스 패럴)이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추수한 밀을 팔러 도시에 온 청년입니다. 며칠 그 카페에 들른 렘과 케이트는 친해지고 서로에게 이끌립니다. 그야말로 번개같이 사랑에 빠진 경우죠. 렘은 아버지가 엄명한 가격에 밀을 팔지 못하고 밀값이 더 폭락하기 전에 어쩔 수 없이 낮은 가격에 팝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기대와 다른 가격으로 밀을 팔아치운 그는 케이트와 결혼신고를 하고 집으로 데려옵니다. 복잡하고 고단한 도시의 삶을 벗어나 평화로운 농촌에서 렘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를 기대한 케이트.
하지만 이런 두 사람의 기대는 둘이 렘의 집인 시골농장에 오면서 산산히 부서집니다. 어머니와 렘의 여동생은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지만 렘의 아버지는 케이트를 쌀쌀맞게 대합니다. 카페 종업원이라는 신분을 영 마땅찮아 한거죠. 그리고 밀을 싸게 판 렘도 꾸짖고. 이렇게 가부장적 아버지에게 꼼짝도 못하는 렘에게 실망한 케이트, 그리고 추수를 도울 남자들이 도착하는데 그들 역시 거칠고 투박한 모습입니다. 여성에게 힐끔거리고 집적대는 수컷본능도 도시 남자들과 다를 게 없고. 케이트는 그들에게 식사를 배달하고 여전히 고된 삶을 또 이어가죠. 평화롭고 깨끗한 시골의 낭만은 없고 렘은 유약하기 짝이 없고.
갈등의 정점은 케이트가 손을 다친 남자를 치료해주면서 벌어집니다. 그는 케이트에게 함께 그곳을 떠나자고 꼬드기고 그런 모습을 본 렘의 아버지는 문란한 여자가 맞다고 몰아세우고 렘까지도 케이트를 의심합니다. 거기다 일꾼들과 렘의 아버지는 갈등이 고조되고....결국 케이트는 모든 것에 실망하여 떠나려고 합니다.
옛날 영화들의 특징이랄 수 있죠. 갈등이 최고로 고조되고 막장까지 가는 듯 하다가 갑자기 한순간에 싹 해결되는. 이 영화도 그런 방식입니다. 그야말로 '이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다'라는 상황까지 가기 직전에 간신히 위기가 수습되고 서둘러 끝나는. 뭐 다분히 그런 통속적 내용인데, 그것보다는 대사없이 카메라와 배우의 움직임에 크게 의존하는 무성영화의 아기자기한 특징과 그런 단촐한 재미가 보는 내내 넘치는 영화입니다. 분주히 카메라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 풍경, 그리고 배우의 표정연기. 촬영과 배우의 표정, 몸짓연기가 꽤 중요한 무성영화의 구성을 꽤 꽉 차게 연출한 영화입니다. 카메라맨 어네스트 팔머는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는데 그는 유성영화 시절에도 '혈과 사' 나 '부러진 화살(개봉제는 피묻은 화살)' 등으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인물입니다. 도시의 분주함, 농촌의 평화로움과 투박한 모습을 카메라에 잘 담아 영화의 상황과 분위기를 전달합니다.
무르나우 감독의 후기작에 속하는데 독일 태생인 그는 1927년 '선라이즈'로 할리우드에 입성하여 대뜸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으면서 성공적 미국 진출을 했습니다. 이미 몇 개의 걸작으로 영화사에 역사를 남긴 감독이었는데 불과 43세의 나이로 1931년 세상을 떠났지요 그가 좀 더 오래 살아서 30년대 할리우드에서 유성영화들을 몇 편 더 만들었다면 훨씬 불후의 거장으로 남았을 수 있는데 정말 아쉬운 요절입니다. '마지막 웃음' '노스페라투' '선라이즈' 등 이미 그를 유명하게 만든 작품들이 있는데 이후 하나하나 복원되는 작품들은 그의 작품들은 그의 작품을 더 보고자 하는 영화매니아들의 관심을 받기도 합니다. '도시여자' 역시 고화질로 복원된 그의 작품이며 후기작이지요. 이런 영화들을 보면 무성영화 시절에도 관객이 영화에 열광한 것이 당연하다고 느껴집니다.
결혼하여 남의 아내가 된 여자는 결국 남편이 가장 든든한 편이 되주고 지켜줘야 믿고 행복해질 수 있다 뭐 그런 귀결인 영화이고 엄격하고 가부장적인 듯 하지만 그래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알는 시아버지의 모습은 과거 우리나라식 가부장적 권위주의 남성과는 많이 다른 모습입니다. 괴팍한 느낌의 시아버지에게 처음부터 기죽지 않고 대들며 기싸움하는 며느리의 모습도 우리나라와는 많이 다르고.(왕과 폭군의 차이 갔습니다.) 유성영화 초기 시절에 만든 유성영화보다 더 재미난 무성영화입니다.
ps1 : 예나 지금이나 정말 많이 고생하고 또한 정말 꼭 필요한 직업이 농부입니다. 농부가 없으면 어떻게 우리 입에 먹을 것이 들어갈까요?
ps2 : 1930년대 당시 카페 여종업원을 꽤 천박한 직업으로 여기는 풍토가 있었나봐요. 시골의 지주가 전형적인 그런 생각을 하니. 아니면 시골 지주의 자부심이 높은 시대였는지.
ps3 : 밀을 수거해가는 중간 도매상이 없이 지주의 아들이 직접 도시에 밀을 팔러 가는 것을 보면 중간마진 없이 '직거래'의 장점을 살리는 것일까요? 우리나라 같이 좁은 나라도 농수산물 유통이 매우 복잡한데 컴퓨터,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그 거대한 미국에서 굉장히 단순한 방식으로 농산물 유통을 하네요. 바로 도시의 업자에게 직접 넘기니.
[출처] 도시여자 (City Girl, 30년) F. W. 무르나우 후기작|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