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주의 좋은 글 나누기> 보리암
0812대동문화[한송주의 산사에서 띄우는 엽서]
산사의 새벽 음성공양 받으세요
일전에 도를 좀 닦았다는 어떤 거사로부터 소리공양의 공덕에 대해 들었습니다. 음성공양은 인간의 단전을 자극해 기를 맑고 세게 가꾸어 준다는 요지였습니다.
음성이 공덕을 지으려면 그를 받아들이는 귀가 온전해야 하겠지요.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뜻(意)의 육근(六根) 가운데 이근(耳根)이 제대로 기능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곧 빛깔(色) 소리(聲) 냄새(香) 맛깔(味) 감촉(觸) 의식(法)의 육경(六境) 가운데 성경(聲境)에 민감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중에서 인간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치는 것으로는 보고 듣는 대상인 빛과 소리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빛과 소리 둘 중에서는 무엇이 더 영향력이 셀까요? 답은 소리입니다.
물론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불경에서는 그렇게 말해요.
<능엄경(㘄嚴經)>이라는 경전에 “안근(眼根)은 800가지 공덕을 짓고 이근(耳根)은 1200가지 공덕을 짓는다”고 쓰여 있대요. 눈은 뒤에 있는 것은 보지 못하지만 귀는 뒤에서 들리는 소리도 듣기 때문에 그렇답니다. (별로 그럴듯하지는 않지요, 그렇지요?)
어쨌건 부처님 말씀대로라면, 무어니 해도 서러운 게 ‘앞 못 보는 설움’이라 한 우리 속담도 ‘귀 못 듣는 설움’으로 고쳐야 할 판이네요.
음악이 현대의 우리 삶에 얼마나 맛있는 양념인가 하는 거야 새삼 들먹일 나위가 없는 일이겠구요, 고금동서(古今東西)가 없이 대로부터 음악은 국가운영의 중요한 콘텐츠가 되어 왔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어요.
태평성대의 대명사로 꼽히는 중국의 삼황오제 시절에 국가의 통치이념을 ‘예악(禮樂)’으로 설정했다는 데서 옛사람들의 음악 기호를 단적으로 엿볼 수가 있지요.
<禮記>에 이런 구절이 있네요. ‘大樂與天地同和, 大禮與天地同節.’ 제가 본 책의 저자는 이 대목을 ‘대악은 천지와 더불어 화를 같이하고, 대례는 천지와 더불어 절을 같이한다.’고 새겨 놓았네요. 무슨 의미인지 종잡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제 입맛대로 풀어봤습니다. ‘좋은 음악은 우주의 운행을 조화롭게 만들고, 바른 예절은 우주의 질서를 곧게 세운다.’
꺼칠하고 고리타분한 공자도 음악을 좋아해서 ‘늦은 봄날 친구 대여섯과 함께 강가에서 멱을 감은 후 바람 살랑대는 언덕에서 거문고 타며 시를 노래하는’ 경지를 군자의 낙으로 쳤다고 합니다.
우리 선인들이 몸담아 즐겼던 풍류도(風流道)에도 음악이 빠져있을 수 없는데 여러 말 덜고 지금도 풍류, 풍월, 풍악, 풍물하면 으레 음악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성색을 경계했던 부처님도 음악을 좋아하셔서 음성공양을 즐겨 받으십니다. 우리 국악의 뿌리를 불교음악인 범패에서 찾는 이들도 많구요.
그러고 보니, 온 누리 중생들의 고통을 다 보고 듣는다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상징 관세음보살도 세상 소리를 본다는 의미의 ‘觀世音’이라고 표기하는군요. 이근(耳根)의 공덕이 수승하다는 것을 강조해서였을까요, 아무튼 우연은 아닌 것 같네요.
세상의 소리를 제대로 듣는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민성을 잘 새겨듣는 것은 나랏님의 도리일지니 지도자는 반드시 이근 훈련을 열심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귀는 예민해서 개인에 따라 나이에 따라 감청 기능이 천차만별이라고 하네요.
그래서 ‘강마에’가 있고 ‘똥덩어리’가 있는가 보지요.
인터넷을 뒤졌더니 이런 이야기가 잡히는군요.
‘인간의 가청 대역폭(band width)은 20-20,000Hz라고 하는데, 나이가 들어가면 고주파 영역은 점차 잘 듣지 못하게 된다. 미국 어린 아이들이 선생들이 듣지 못하는 고주파 벨 소리를 휴대전화에 내리받아 두고 마음껏 이용한다고 한다. 아이들끼리는 벨 소리를 들으나, 나이 많은 선생은 이를 듣지 못하니 영악한 아이들에게 제법 재미있는 놀이가 되겠다.’
음성공양의 걸작으로 송광사 새벽예불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새날의 동살이 퍼지기 전 뭇생명이 마악 눈을 뜨고 깨어나는 산사의 새벽은 참으로 장엄합니다. 고요합니다. 거룩합니다.
그 거룩한 적묵을 밟고 수행승들이 하나둘 성소로 모여들어 땅과 하늘과 중생들을 위해 온 몸을 던져 엎드립니다. 정성을 다해 절을 올립니다.
목어와 운판과 범종과 법고를 울려 뭇생명을 깨우며 모든 이들의 행복한 삶을 기원합니다. 깊이 경배합니다.
이윽고 백오십명에 달하는 남성들의 장엄한 합창이 온 산 가득 울려 퍼집니다. 온 산골짜기를 물들여가는 웅장한 바리톤의 코러스는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라 우주의 원음으로 밀려옵니다. 그 감동의 물결은 듣는 이의 고막을 울리고 명치를 울리고 단전을 울립니다. 결국 저 사대의 밑둥에서 환희가 괴어올라 결국 한 줄기 눈물이 되어 흘러내립니다.
예배의 찬송치고 어느 것인들 거룩하지 않으리오만 송광사의 새벽예불은 사물과 예불음의 그 웅혼한 작품성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래서 짬을 내 산사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새벽예불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굳이 예불에 참례하지 않고도 대웅전 밖에서 수행자들의 웅장한 바리톤 음성공양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평생 갖기 힘든 행복감에 젖으실 겁니다.
그럴 틈도 없는 분들은 송광사에서 최근 새벽예불 음성공양을 CD로 담아 대중들에게 나누고 있으니 그것을 이용해도 좋겠구요.
이근(耳根)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마디 법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네요.
부처님은 어느 때 거문고를 잘 타는 소냐라는 제자를 가까이 두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소냐는 음악 공부는 뛰어났으나 마음 공부는 진척이 없어서 고민에 빠져 있었어요.
아무리 나름대로 고행을 하며 정진을 해도 영 소식이 없자 결국 퇴굴심을 내고 저자로 돌아가겠다고 부처님께 사뢰었습니다.
부처님은 소냐를 불러 앉히고 조용히 타일렀습니다.
“소냐야, 너는 거문고를 잘 타지?”
“예”
“거문고를 탈 때 그 줄을 되게 조이면 소리가 어떻더냐?”
“줄을 너무 세게 조이면 소리가 튀거나 줄이 끊어져서 연주가 되지 않습니다.”
“줄을 아주 느슨하게 하면?”
“그야 음이 쳐져서 제 소리가 나지 않지요.”
“마음공부도 그러하다. 너무 혹독하게 자신을 몰아가도 안 되고 너무 느슨하게 스스로를 풀어도 안 된다. 거문고의 줄처럼 적당히 조여야 제대로 공부가 익느니라.”
이것이 그 유명한 ‘조현지법(調絃之法)’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중도(中道)의 중요성을 설한 법말씀이지요.
끝으로 이근(耳根)의 수승함을 다시 한번 새기고 작별하기로 해요.
불가에서는 구업(口業)을 대단히 경계합니다.
그 대신 잘 듣는 것을 매우 소중히 여깁니다.
스님과 신도들의 만남 자리를 가만히 지켜보면 말을 많이 하는 쪽은 대개 신도들이고 스님들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들어주고 어쩌다 한 마디씩 말을 거들고는 합니다.
스님들에게 특별한 지혜를 구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신도들은 말 잘 들어주는 스님에게 자기의 속내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음으로써 위안을 받는 것 같아요.
잘 말하기보다 잘 듣는 게 낫다는 걸 새기면서 우리 이제부터 이근(耳根)훈련에 힘쓰기로 하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