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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太宰 治) 1909~1948
1. 다자이 오사무의 전반적 생애
다자이는 1909년 일본 아오모리현 쓰가루군에서 지역 유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츠시마 슈지(津島修治)로,
그의 성씨로 미루어보아, 다자이의 집안이 쓰시마에서 이주했다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는 아오모리에서 평탄하게 소학교와 중학교를 거쳤으나, 중학생 무렵 아버지가 사망했고,
이 무렵부터 다자이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다자이는 당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타고 들어온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했으며,
이는 도쿄대학 불문과에 입학했음에도 계속되었다. 그는 대학에 입학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시도하였으나,
그의 출신 성분은 부르주아였기에 실패하고 만다. 사실 이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하게 된 것도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고
나서 그의 선조들이 부정한 방법으로(고리 대금업을 했었다.)재산을 모았다는 점이 부끄러웠기에 그랬다고 추측된다.
우리들 입장에서는 "뭐 그런걸로?"라는 반응이 나올 수 있겠지만, 이 때 다자이는 15세 무렵이었으니까 한참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을 때니까--; 요즘의 중2병과 비슷한 케이스라고 보면 될라나.
하여튼 다자이는 도쿄대학 불문과에 입학했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그는 프랑스어에 대한 지식도, 소질도 없었다는 것.
당연히 강의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고, 학구열 또한 식어만 갔다. 어째 수포자 양산 코스와 비슷하다.
그는 식은 학구열을 공산주의 운동에 쏟아부었고, 결국 다자이는 출석 일수의 부족으로 도쿄 대학에서 제적당한다.
다이쇼 시대의 자유주의 열풍과 서양화를 보여주는 노래 도쿄 부시. 이 선율은 대한 독립군 군가로도 사용되었다.
영상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여성의 교복으로 세일러복이 보급되기 시작했으며, 구기 종목이 들어오고, 서양의 영화가
상영되는 등, 그 이후 전시 일본과 동일한 국가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다이쇼 연간 (1912년~1926년)과 쇼와 초기에 불었던 자유주의 바람을 말한다.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와 중국의 신해 혁명 성공 등으로 인해 일본 내에서 민주주의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사실 일본에서의 민주주의 논의는 거슬러 올라가 1880년대 후반의 입헌 개진운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민 내각인 사이온지 내각이 들어서면서 일본에도 자유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군부는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느 사이온지 내각을 무너뜨리고 카츠라 타로를 내세운 내각을 새로 새웠으나
중의원 오자키 유키오나 이누카이 츠요시(2.26 정변 당시 사망한다. 마지막 말은 "일단 대화로 풀어보세....")를 중심으로
비판적인 여론이 생성되어 헌법을 지키라는 호헌 운동이 전개되었고, 그 결과 카츠라 내각은 두달만에 붕괴하고
입헌 정우회의 야마모토 곤노효에가 이끄는 내각이 성립하였으나, 뇌물 공여 사건이 터지면서 내각은 무너지고 만다.
그 이후 성립된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은 영국의 동맹국 자격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고, 국제 공조 열풍이 불면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한층 심화되었다. 이 자유 열풍을 타고 '덴노는 하나의 기관에 불과하다'는
덴노 기관설과, 23년 일본 공산당이 수립되었으나, 다이쇼 덴노가 사망하고, 쇼와 덴노가 즉위할 무렵 덴노가 저격당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이에 책임을 지고 야마모토 내각은 총사퇴하고, 후임 가토 내각이 들어서면서
투표권을 '일정액 이상 납부하는 만 25세이상 남성'에게만 부여함으로써 자유주의 열풍을 꺾었고, 러시아에서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수립된 것을 계기로 치안 유지법을 적용하여 공산당과 기타 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들을 탄압한다.
이후 일본은 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급속도로 군국주의로 기울었고, 결국 중일전쟁과 진주만 습격-원폭투하-일본 항복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에 불을 붙인다.
쇼와 시대의 곡인 '청년 일본의 노래'.
도쿄 부시에서 볼 수 있었던 자유와 서양화의 물결 대신 군국주의와 국수주의의 바람을 살펴볼 수 있다.
제적 직후 실의에 빠진 다자이는 친하게 지내던 술집의 여급과 가마쿠라에서 정사(情死)를 기도하나,
여급만 죽고 다자이 홀로 살아남는다. 이 사건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그의 자전적 소설인 인간 실격에서도 중요히 다루어진다.
이후 전업 작가로 등단한 다자이는 1933년 단편 '열차'를 발표하고, 1935년 '역행'을 발표하여 제1회 아쿠타가와상 수상 물망에 오르나, 실패하고, 1936년 발표한 만년(晩年)이 수상 후보작 물망에 올랐으나 결국 수상에는 실패하고 만다.
이에 다자이는 심사위원들을 까는 글을 발표했고, 빡친(....)심사위원들의 건의로 그 이후 그가 아쿠타가와상 후보작에
오르는 일은 없었다.
1936년 그는 친구의 소개로 야마나시현에 머무르면서 그곳의 여교사와 결혼하게 되었고, 이 시기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안정되었던 시기로 이곳에서 양작을 다수 써낸다. 그 대표작이 38년 발표한 일본의 국민소설 '달려라 메로스'.
다자이의 친구와의 외상값 에피소드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다자이의 수작(秀作)으로, '기다리는 사람이 힘들까,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 더 힘들까'라는 내용은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져 있다.
초단편 소설 '여학생'또한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여학생의 하루를 아주 담백하게 그려낸 소설로,
당시 문단에서는 '여자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사실감있게 묘사할 수 있을 리없다.'는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이렇게 진짜같은 여고생의 일상을 시꺼먼 남정네가 쓸리 없어!
실제로 '여학생'은 다자이가 자주 들르던 세탁소집 딸의 일기 내용을 베꼈다는 추측도 있다. 뭐, 진실은 저편에.
이 시기 발표한 '쓰가루(津軽)'에서 당대 최고의 소설가 시가 나오야를 정면으로 깠고, 시가 나오야 또한 분개하여
서로를 대차게 깠었다. 사실 소설의 성향을 보면 정 반대긴 하다. 다자이가 염세주의적인데 비해 시가는 이상주의적.
다음은 다자이가 평한 시가 나오야.
일본의 어느 50대 작가에 대한 질문을 받고는 "그다지 좋지 않아"라고 그만 무심결에 답해버렸다. 최근 그 작가의 과거 작품들이 어찌 된 영문인지, 거의 숭배에 가까울 정도로 도쿄의 독서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았다. '신'이라는 묘한 호칭을 사용하는 사람도 나타나서, 그 작가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그 독서인의 취미의 고상함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는 이상한 풍조마저 생겨났다. 정작 그야말로 응원이 오히려 그 사람에게 폐가 된다는 식으로 그 작가는 아주 곤혹스러워하며 쓴웃음을 짓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예전부터 그 작가의 기묘한 권세를 보고 쓰가루 사람의 어리석은 마음에서 "천한 놈이다.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라고 혼자 흥분하여 순순히 그 풍조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최근에 그 작가의 작품을 대부분 다시 읽어보고 '훌륭해!'하고 생각했지만 특별히 취미의 고상함은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야비한 점이 이 작가의 장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히려 야비한 점이 이 작가의 장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려진 세상도 구두쇠 소시민이 별 의미 없이 거드름을 피우며 상황에 따라 울고 웃는 것이다. 작품의 주인공은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해 때때로 '양심적'으로 반성을 하지만 그런 부분은 특히 진부하고 그런 불쾌감을 주는 반성이라면 차라리 하지 않는 쪽이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문학적' 미숙함에서 벗어나려고 해서 오히려 그것에 빠져버린 것 같은 좀스러움이 느껴졌다. (다자이 오사무. 서재곤 譯.『쓰가루·석별·옛날이야기』. 문학동네, 2011 : P.60~61)
후에 다자이가 자살한 뒤,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시가 나오야는
"나를 그렇게 신랄하게 깔 정도로 몸과 마음이 안 좋았다는 걸 알아차렸어야 한다. 거기에 맞대응한 내가 어른스럽지 못했다."고 후회했다. 근데 이거 은근히 자기 높이는 것 같은데
엄혹했던 전쟁도 두 발의 원폭으로 끝났다. 일본의 항복은 그에게 큰 충격을 준 듯하다. 종전 직후 쓴 소설에선
일본의 패전에 대한 그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다. 나는, 그저 부끄러웠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다." - 소설 '고뇌의 연감'
"졌다, 졌다고들 말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망한거야. 멸망해버린거야" - 소설 '불꽃놀이'
이런 문장을 가지고 다자이를 '군국주의의 주구'로 모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그렇게 까지 해석할 필요는 없을것이다.
일단, 다자이 본인도 신체적 이상으로 인해 입대하지 않았다는 것만 기억해두자.
1947년 몰락한 화족을 다룬 장편 '사양(斜陽)'과 단편 '비욘의 처(ヴィヨンの妻)', '탕탕탕(トカトントン)'을 발표하면서
그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하지만 당시 '사양'은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의 "화족의 언행이 현실과는 맞지 않는다"는 호된 비판을 들었고, 미시마는 이 작품을 계기로 다자이빠에서 다자이까로 전직했고, 다자이가 자살한 직후에는
"그런 지랄맞은 성질때문에 자살한거다. 라디오 체조나 냉수마찰만 해도 낫는 병을 가지고 온 세상에 지만 힘든것마냥
지랄할 때부터 알아봤다." 라는 폭언을 퍼부었다. 그러는 지도 자살했다.
1948년, 그는 불후의 명작 '인간 실격'과 '벚꽃(桜桃)'를 발표하고 미완의 장편 소설 '굿바이'를 남긴 채 정부(情婦)와
함께 상수로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그가 투신한 이유는 아직까지 정확하지 않으며, 그의 시신은 신기하게도 그의 생일날 발견되었다고 한다.
2. 다자이 오사무의 문학
사실 전반적 생애 부분에서 다룬 내용이 많기에 그다지 많이는 하지 않고 '인간 실격'과 그의 기독교적 가치관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다자이는 처음 성경을 정독하고 나서 '성경은 최고의 문학작품'이라 여겼다. 다만 그는 신앙적인 의미로써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자아 성찰의 도구로 받아들였으며, 불안한 정신 상태를 구속하기 위한 절대자를 갈구했었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단편 소설 '직소(駈込み訴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공교롭게도 동시기의 일본에서는 이와 같은 태도가 유행이었던듯 하다. 시마자키 도손, 아리시마 다케오 등 당대의
문인들도 다자이와 비슷하게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공교롭게도 그들 또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대표작이자 수작으로 꼽히는 인간 실격. 위 사진은 데스노트의 작가 오바타 타케시가 그린 것이다.
인간 실격은 다자이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이 다수의 견해이다. 실제로 그의 생애 전반부가 소설 속에 녹아있으며,
특히 가마쿠라에서의 정사 시도 또한 매우 자세히 묘사되어 있어 이 사건이 그의 심리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있다.
인간의 희노애락을 느끼지 못하는 주인공 요조에게 다자이 자신을 투영한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다만 주의할 점은 요조와는 다르게 실제로 다자이는 잠시나마 안락한 삶을 구가했던 적이 있다는 것.
'다자이가 이렇게 불쌍하게 살다 죽었구나ㅠㅠ'로 받아들이는건 좀 어폐가 있을 것이다. 위에 서술한 대로 다자이는
'여학생'이나 '달려라 메로스'등의 재밌는 단편또한 다작했다. 만일 인간 실격으로 우울해 졌다면 다자이의 다른 작품을 통해 그 우울함을 떨쳐내자!
다자이는 일본 문학계에서 '데카탕스 문학'의 대부로 꼽힌다. 데카탕스 문학이란 '사물의 망가져감에서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찾는'문학 사조의 하나인데, 종전 직후 절망적인 일본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반대로 일본의 국운이 날로 욱일승천 하던 시기에는 시가 나오야를 위시로 한 이상주의 소설이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데카탕스 문학의 분위기는 인간 실격에 나오는 요조와 호리키의 동의어 맞추기 놀이에서 볼 수있다.
"이봐, 이 세상에서 가장 꽃 답지 않은 건 뭐지?"
"여자"
"그럼 여자의 동의어는?"
"내장"
"내장의 반의어는?"
"우유"
이러한 데카탕스적, 퇴폐적 문학 사조는 전후 일본 문학의 출발점이 되었고, 후에 사카구치 안고 등과 함께
전후 무뢰파의 한 축을 담당한다. 현재 일본에서의 무뢰파의 현 위치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정도라고 볼 수 있겠다.
3. 대중매체에서의 다자이 오사무
일본의 서브컬쳐 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문학 소녀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인간 실격을 비롯한 다자이의 작품을 접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죽고 싶은 광대'편에 등장한 다케다 치아가 인간 실격의 주인공 요조를 모티브로 삼는 캐릭터로 희노애락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에서 사건이 비롯된다. 명작 라노벨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니 관심있는 사람은 일독을 권한다. 여담으로 이 작품 덕에 일본에서 그다지 유명하지 않던 작품이 재조명 받기도 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프롤레타리아 문학 작가 고바야시 다키지가 쓴 '게공선'.
쿠메타 코지의 작품 안녕 절망선생. 작품 내 개그는 상당히 재밌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혐한적 요소라던가 우익적 요소는
그저 웃고 넘기기엔 좀 그렇다. 각설, 이 작품의 주인공 이토시키 노조무가 바로 인간 실격의 요조를 모티브로 한 주인공으로. 말 끝마다 '절망했다!'를 붙인다. 실제로 작가는 다자이를 존경한다고 하는데, 영 좋지 않는 부분만 본 받은것같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자.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애니라고 하시니 혹시 최상단 영상을 말씀하시는 듯해서 사족을 달자면,
다이쇼야구소녀 입니다.
(BACCANO님께서 언급하신 두 작품도 애니가있긴 하지만, 본문에서는 애니로 나온게 윗작품 하나라서...)
마지막 짤은 절망선생이고 그 위에 짤은 문학소녀입니다.
둘다 재믜긔 ㅋㅋ
문학소녀는 예상했지만... 왜 반쪽달은 안나옵니까! 반쪽달 무시하나요!
반쪽달에 인간 실격 나오는 부분은 후반부라서 큰 비중이 없잖아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나 미야자와 켄지라면 모를까.
김태권 작가님 트위터 플픽이 다자이 오사무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