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길을 가다 과일가게에서 반가운 과일을 만났다. 머리숱이 없는 필자의 이마처럼 껍질이 반들반들한 사과 ‘홍옥(紅玉)’이다. 젊은 사람들은 홍옥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봤을 수도 있겠지만, 필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홍옥과 국광이 대표적인 사과였다. 그런데 후지(부사)라는 품종이 등장하면서 사과 시장을 석권했다. 지금은 홍로 같은 다른 품종도 나와 접전을 벌이고 있다. 물이 많던 국광은 자취를 감췄지만 그래도 홍옥은 9월 중하순에 등장해 한 달 남짓 시장에서 볼 수 있다.
사과의 다이어트 효과는 장내미생물 조성에 영향을 준 결과임을 시사하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반들반들한 껍질과 특유의 신맛과 향을 지닌 ‘홍옥’은 일제시대부터 1970년대까지 국내 사과시장을 대표하는 품종이었다. 지금은 명맥만 남아 가을철 잠깐 볼 수 있다. - 강석기 제공
새빨갛다 못해 검은 기운까지 느껴지는 반들반들한 껍질이 먹음직스러운 홍옥이지만 막상 한 입 베어 물면 굉장히 시고(향기조차도 새콤하다) 상대적으로 단맛이 덜 하다. 따라서 후지나 홍로처럼 시지 않고 단 사과에 익숙한 요즘 사람들에게는 홍옥이 인기가 없는 것 같다. 필자 집에서도 필자만 홍옥을 먹는다. 그렇다고 필자가 유별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찾는 사람이 있으니 매년 가을 잠깐이나마 홍옥을 시장에서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하루 사과 하나면 의사를 멀리 한다’는 영국 속담도 있듯이 사과는 건강을 상징하는 과일이다. 유기산과 비타민C, 폴리페놀, 펙틴을 비롯한 식이섬유까지 몸에 좋다는 성분은 조금씩 다 들어있다. 사과의 여러 이점 가운데 하나로 다이어트 효과도 있다. 사과는 물이 85% 정도인데다 소화가 안 되는 식이섬유가 많아 같은 무게의 다른 식품보다 칼로리가 낮다. 따라서 포만감은 주면서도 살이 안 찐다는 것. 아울러 식이섬유가 변비를 완화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단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1인당 사과 소비량은 감소추세라고 한다. 사람들이 먹고살만해지면서 과일소비량이 늘어 사과도 1995년 1인당 연간 15.9㎏으로 정점을 찍었지만, 그 뒤 시장개방으로 다양한 과일을 접하게 되면서 7.6㎏(2012년)까지 줄어들었다고 한다. 사과 하나를 200g이라고 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루 하나는 고사하고 일주일에 하나도 안 먹는 셈이다.
●식이섬유 풍부해 장 건강에 좋아
학술지 ‘식품화학’ 최신호에는 사과의 다이어트 효과를 다른 관점에서 조명한 논문이 실렸다. 즉 포만감 대비 칼로리가 낮은 게 이유라는 기존 열역학적 관점이 아니라 장내미생물의 조성에 영향을 주는 프리바이오틱스(prebiotics) 역할에 주목한 것. 프리바이오틱스는 장내유익균의 먹이가 되는 성분을 말한다.
필자는 몰랐지만 사실 사과가 프리바이오틱스로 작용한다는 연구결과는 이미 2010년 학술지 ‘혐기성생물(Anaerobe)’에 발표됐다. 즉 2주 동안 매일 사과 두 알씩 먹게 했을 때 비피도박테리아와 락토바실러스 등 유익균이 늘어났다는 것. 또 대변 속의 암모니아와 황화합물의 농도는 줄어들었다. 즉 똥냄새가 순해졌다는 말이다. 당시 연구자들은 사과 식이섬유의 하나인 펙틴이 이런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이번 연구에서 미국 워싱턴주립대 지울리아나 노라토 교수팀은 위의 관점을 확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즉 사과가 대장에 있는 장내미생물에 영향을 미친다면 이는 위나 소장에서 소화가 되지 않아 대장까지 온전하게 도달한 성분이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즉 식이섬유와 함께 항산화 기능으로 잘 알려진 페놀류(발암물질 페놀이 아니라 폴리페놀 같은 성분)를 포함해 알아보기로 했다.
본격적인 실험에 앞서 성분 분석을 한 일곱 가지 품종. 연구자들은 이 가운데 식이섬유 등의 함유량이 가장 높은 그래니 스미스를 선택했다. - Food Chemistry 제공
흥미로운 건 본격적인 실험에 앞서 먼저 사과 품종별로 위의 성분 함량을 조사한 것. 즉 미국 태평양 연안 시장에 나와 있는 일곱 가지 품종을 분석해 그 가운데 위의 성분을 가장 많이 함유한 사과를 대상으로 다음 실험을 진행했다. 후지 말고는 다들 낯선 이름이지만 아무튼 분석 결과 ‘그래니 스미스(Granny Smith)’라는 품종이 1등으로 나왔다.
연구자들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사과에서 소화가 안 되는 성분의 프리바이오틱스 기능을 알아봤다. 즉 날씬한 쥐와 뚱뚱한 쥐의 대변을 얻은 뒤 이를 배양해서 장내미생물의 조성을 분석한 것. 쥐는 물론 사람에서도 살찐 정도와 장내미생물 조성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날씬한 쥐와 뚱뚱한 쥐의 대변을 배양했을 때 장내미생물 조성이 다를 것으로 추측했다. 그리고 소화 처리를 한 사과 추출물(위와 소장을 통과한 상태에 해당)이 장내미생물 조성에 미치는 영향을 보기 위해 뚱뚱한 쥐 대변을 배양할 때 사과 추출물을 각각 1%와 2%를 첨가하고 24시간 뒤 여러 미생물의 게놈을 한꺼번에 분석해 장내미생물의 조성을 비교했다.
그 결과 뚱뚱한 쥐 대변 배양액과 날씬한 쥐 대변 배양액의 장내미생물 조성은 차이가 있었다. 한편 뚱뚱한 쥐 대변을 사과 추출물을 포함한 배양액에 배양했을 때 장내미생물 조성이 날씬한 쥐 대변 배양액에 더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즉 배양액에 사과추출물을 더할 경우 어떤 미생물은 더 잘 자라게 하고 어떤 미생물은 생장을 억제하는데 그 결과가 날씬한 쥐 대변의 미생물 조성과 비슷해지는 것.
예를 들어 날씬한 쥐나 사람에서 많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 비피도박테리아나 엔테로코쿠스, 대장균(무해한 균주)의 비율이 늘어났다. 연구자들은 “위와 소장에서 소화되지 않은 사과의 식이섬유와 페놀화합물이 비만으로 변화된 장내미생물 조성으로 인한 대사질환을 예방하는 데 도움일 될 것”이라며 “비만으로 교란된 장내미생물의 균형을 찾게 해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부록: 한국 능금의 씁쓸한 역사
7가지 품종 가운데 식이섬유가 가장 적은(물론 큰 차이는 아니지만) 후지가 주류인 우리나라에서도 품종별로 성분을 조사해 위와 같은 실험을 해본다면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신맛이 강하고 단맛이 덜한 홍옥이 후지보다 수치가 더 양호할 것 같다. 문득 ‘일본 품종(후지)이 우리나라 사과들(홍옥, 국광)을 몰아낸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홍옥이나 국광(國光)이라는 이름이 일본풍인 것 같기도 하다. 일본 품종끼리의 경쟁이었나?
도서관에 가보니 경북대 농업경제학과 이호철 교수의 ‘한국 능금의 역사, 그 기원과 발전’이라는 책이 있어 읽어보니 꽤 흥미로웠다. 필자의 추측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면 둘 다 아니었다. 다만 홍옥과 국광이 일본 이름인 건 맞다. 즉 후지의 한자(富士)를 우리말로 음역해 부사로 읽은 것과 마찬가지다.
홍옥과 국광 모두 일본이 아니라 서구에서 개발된 품종이다. 홍옥의 원래 이름은 ‘조나단(Jonathan)’으로 그 기원에 대해서는 다음의 설이 유력하다. 즉 레이첼 히글리라는 여성이 미국 코네티컷주의 한 지역에서 사과씨를 모았는데 1804년 이를 심어 자란 나무에서 열린 사과가 독특한 풍미를 지녀 이를 남편의 이름을 붙여 조나단이라고 불렀다는 것. 즉 홍옥은 자연적으로 나온 품종인 셈이다. 19세기 조나단이 일본으로 건너가 홍옥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20세기 초 한반도로 넘어온 것.
한편 국광 역시 원래 이름은 ‘랠스 제넷(Ralls Genet)’이고 역시 미국이 기원으로 18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인 에드몽 제넷이 토머스 제퍼슨에게 묘목을 줬고 제퍼슨이 다시 버지니아주의 묘목업자 캘렙 랠스에게 건네 이를 심은 게 시초라는 것. 그리고 이 품종에 두 사람의 성을 따 랠스 제넷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흥미롭게도 후지는 국광과 레드 딜리셔스(Red Delicious)라는 품종을 교배해 얻어진 품종이다. 1930년대 말 일본 아오모리현 후지사키의 농림수산성 과수시험장에서 만든 후지는 1962년 시장에 나왔고 그 뒤 승승장구해 현재 사과의 왕이 됐다. 레드 딜리셔스를 먹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국광과 레드 딜리셔스의 장점만이 발현된 품종인 것 같다.
책을 보다 소위 ‘능금’이라고 부르는 토종 사과에 대한 부분을 읽고 좀 놀랐다. 책 제목에 우리가
익숙한 사과 대신 능금을 쓴 건 저자의 의도였다. 즉 원래 능금이 널리 쓰이는 용어였는데 1960년대를 지나며 역전이 돼 사과라는 이름이 쓰이고 능금은 우리 재래종을 지칭하는 말로 축소돼 굳어졌다는 것.
중앙아시아의 야생 사과나무에서 딴 다양한 크기와 색상의 사과. - 미국 농림부 농업연구소(USDA-ARS) 제공
오늘날 우리가 먹고 있는 다양한 품종의 사과는 모두 ‘말루스 푸밀라(Malus pumilla)’라는 종이다. 이 식물의 원산지는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추정되는데, 수천 년에 걸쳐 서쪽으로는 유럽, 동쪽으로는 중국과 한반도까지 퍼졌다. 그런데 동북아시아, 즉 만주지방과 한반도를 원산지로 하는 또 다른 사과 종이 있었으니 바로 ‘말루스 아시아티카(Malus asiatica)’다.
책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말루스 아시아티카를 ‘林檎(림금 -> 능금)’이라고 불렀고 말루스 푸밀라를 ‘柰(내)’라고 불렀다. 이렇게 한반도에는 두 가지 종의 사과가 있었지만 토종인 말루스 아시아티카가 더 흔했다. 그러다 중국에서 개량된, 빈과(蘋果)로 불리는 사과(말루스 푸밀라로 보임)가 17세기 후반 한반도에 소개되면서 숙종이 북악산 뒤 자하문 밖 일대에 심게 했고 다른 곳에서도 재배되기 시작했다. 구한말 자하문 밖 과수원에 봄이 오면 빈과나무 20만 그루에서 핀 사과꽃으로 장관을 이뤘다고 한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서양선교사들이 서구의 개량 품종을 하나 둘 들여오고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 농민들이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서구에서 개량된 사과를 도입했다(홍옥과 국광이 대표적인 품종이다!). 그 결과 빈과와 토종 능금(말루스 아시아티카) 재배는 몰락의 길을 걷고 마침내 사라졌다고 한다. 필자가 추억에 잠겨 매년 가을이 오면 기다리던 홍옥, 아니 조나단이 한반도에 진출한 일본 제국주의의 선봉대로 토종 사과들이 사라지는데 일조했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sukkika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