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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김씨 인터넷 종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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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김해김씨 탁영 김일손선생의 자계서원
김영광 추천 0 조회 219 13.11.26 12: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서면 서원리는 청도천을 앞에두고 뒤로는 세월에서 뻗어내린 내룡이 사뿐이 내려앉은 곳에 위치 한다.

한때,청도 소싸움축제를  서원천변에서 열려 서원천변은 많이 알려져 있다. 이곳에 탁영김일손 선생의 자계서원이 있다. 자계서원은 탁영선생님의 고귀한 충절이 묻어있는 곳이고 또한 청도팔경중 하나다.

 

청도군 자료에 의하면  (자계서원의 앞을 흐르는 냇물은 청도천인데 이 냇물은 앞내 또는 운계라 하였다 한다. 옛날 탁영 김일손이 무오사화를 당해 참화를 입었을 때 이 냇물이 3일동안이나 거꾸로 피빛으로 흘렀다 하여 그 후부터 자계라 하였는데 수면이 거울 같고 보름달이 물에 비치는 그림자 는 하늘의 달같이 황홀했다.)

 

(동쪽 와룡산 기슭의 연못을 얼싸안은 서원의 모습은 시정에 넘치는 아름다운 월경이다. 지금은 냇가의 모습도 물결도 달 라졌으나 맑은 하늘에 둥실 뜬 보름달이 비춰주는 서원과 와룡산은 옛 경치 그대로여서 자신도 모르게 시상에 잠기게 하는 청도팔경의 하나 자계제월 이다.)

 

 

 

▲서원천변에서 바라보는 자계서원 입니다.

▲자계서원 보인당 입니다.

 

점필재 김종직 문하에서 공부.탁월한 문장, 중국 학자들도 칭송

 

탁영은 그의 고조가 터를 잡아 살아오던 청도 이서면 서원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471년 8세 때 부친(金孟)으로부터 소학을 배우기 시작했고, 15세에 단양 우씨를 부인으로 맞았다. 탁영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14~15세 때 주자통감강목을 읽었는데 옛사람들이 입조(立朝:벼슬생활)하여 충언과 직론을 펴며 기개와 절개를 굽히지 않은 대목을 접할 때마다 거듭거듭 감탄했다”고 말했다.

 

17세 때 형(梅軒 金驥孫)과 함께 밀양의 점필재 김종직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이 때부터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등과 함께 교유하며 학문을 닦았다. 점필재는 탁영에게 “자네는 시문에 있어서 능하지 않은 데가 없다. 나의 의발을 전할 사람은 자네 이외에 아무도 없다. 후일 문병(文柄: 대제학)은 반드시 자네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탁영은 “나는 18세 때 한창려(韓昌黎)의 문장을 읽고 기뻐했다. 손은 잠시도 쉬지 않고 열린 입은 글 읽기를 멈추지 않았는데 1천회에 이르도록 계속했다. 그런 연후에 문장에 진전이 있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그의 문장들은 자유분방하고 웅장하며 박식해 물 흐르듯 했다. 막히거나 거침이 없어 보는 사람이 마치 대양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중국 사람들은 이러한 탁영에 대해 ‘이 사람은 동국의 한창려’라고 칭송했다. 한창려는 당나라 대문호로 당송 8대가 중 한사람인 한유(韓愈: 768~824)다.

 

1486년에는 생원시 1등·진사시 2등으로 합격한 데 이어 식년(式年) 문과 초시(初試)에 장원하고, 시제(試題)가 ‘중흥책(中興策)’이었던 복시(復試)에서도 1등으로 합격했다. 복시 고시관이었던 사가(四佳) 서거정이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번 방(榜)에서 장원한 김모는 틀림없이 비상한 인물이다. 그의 언론을 들으면 추상같이 삼엄하고, 그의 문장을 보면 대해와 같이 왕양(汪洋 : 문장의 기세가 좋고 큰 모양)하다. 우리는 이제 조정을 위한 인물을 얻었다”고 했다.

 

향시로부터 문과 급제까지 6번의 시험에서 연달아 수석을 차지하면서 그의 명성도 자자해졌다. 한편 그는 4년 전 두 형과 같이 문과에 도전했으나 형들에게 장원급제를 양보하고자 아프다는 핑계로 시험장을 빠져나왔고, 형들은 1등과 2등을 차지했다. 탁영의 또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자계서원 청마루에서 남산을 바라보면 남산이 낮아보입니다.

  ."

존덕사로 들어가는 유현문입니다.

임금이 수상 감으로 키우려고 했던 인재

 

탁영은 문과 급제 후 10년 남짓 벼슬생활을 하면서 언관직(言官職)이나 인사직(人事職)과 같은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그리고 본인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춘추관직(春秋館職)·예문관직(藝文館職)·경연직(經筵職)을 늘 겸임하게 했다. 탁영에 대한 신뢰를 말해주는 일이다.

 

1490년 승정원 주서(注書) 겸 예문관 검열(檢閱)에 제수되자 그 두 직책을 겸직한 예가 없다며 세차례 소를 올려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492년에는 이조좌랑의 부름을 받고 상소를 통해 다음과 같이 청했다. “옛말에 ‘40세는 되어야 벼슬살이에 힘쓸 수 있다’고 했는데 …지금 신은 나이 30 미만이온데 화려한 요직인 翰苑(예문관), 玉署(홍문관), 사관과 이조전랑 등을 거치면서 승진해왔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청선(淸選)이라고 합니다. 신이 무슨 재능이 있어 이 분에 넘치는 직책들을 감당하겠습니까. …속히 신의 직임을 교체해 물러나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10년의 여가를 주시어 독서함으로써 수도하고 학업의 발전을 얻은 다음에 종사하게 하여 주소서.” 임금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처럼 각별한 신뢰로 탁영은 한림과 사관직에 6년간이나 있었으며, 그간의 기사(記事)는 시정(時政)의 득실, 인신(人臣)의 충간(忠奸)을 직필하는데 춘추필법을 본받아 거리낌 없이 행하였다. 군자들은 양사(良史)라 칭송했으나 소인배들은 매우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알고 있는 바를 말하지 않음이 없었고, 말하게 되면 다 말하지 않음이 없었다.

 

1494년 탁영의 능력을 알고 아껴주던 성종이 승하했다. 성종은 탁영에 대해, 경연에서 참찬관(參贊官) 조위(曺偉)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김일손은 문장과 학문이 모두 뛰어나며 재능과 기량을 겸비했고… 또한 지략이 넓고 깊어 가히 낭묘(廊廟:의정부)의 직책을 맡길 만하다.

 

나는 그의 언론을 듣고자 누차 백부(栢府:사헌부)의 요직을 맡긴 바 있고… 비록 다른 관직에 제수하더라도 반드시 경사(經史: 홍문관과 춘추관)의 직임을 겸하도록 했는데 장차 보상지관(輔相之官: 수상)으로 크게 쓰고자 함이다. 그런데 다만 그의 나이가 젊어 그의 뜻은 크고 성품은 너무 준엄하며, 기상은 너무 날카롭고 언론은 심이 곧으며 행적은 너무 고상하니 마땅히 그의 노성(老成)을 기다려 쓸 수밖에 없구나

 

 

보인당에서 바라본 영귀루

탁영선생이 직접 심은 은행나무 수령이 510년입니다.

탁영 김일손 선생은 무오사화로 능지처참 당해

 

이에 앞서 1490년 사관으로 사초(史草)를 닦으면서 스승 김종직이 1457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수록했다. 김종직이 1457년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단종을 초나라 의제(義帝)에 비유해 항우(項羽)에게 죽은 의제를 조상한 글이다. 탁영은 사기를 초하면서 그 전말을 기록하고 이 조의제문을 실었다.

 

1489년(연산군 4년) 성종실록을 편찬하는데 마침 이극돈이 춘추관 감사(監事)가 되어, 탁영이 사초에 자신의 비행을 빠짐없이 수록한 것을 확인하고 세조조(世祖朝)의 정사편(政事編)에 수록된 조의제문을 빌미로 유자광, 윤필상 등과 함께 직언을 일삼는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을 부추겨 무오사화라는 대참사를 일으켰다.

 

이 사화로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고 탁영과 권오복, 권경유는 능지처참(凌遲處斬)을 당했으며, 수많은 사림파 인물들이 유배를 가고 파직을 당했다.

 

 

탁영 시호(文愍) 교지. 보기드물게 금박을 섞어 만든 붉은 장지를 사용했다.

탁영이 처형되던 날 그의 고향 청도 운계(雲溪)의 물이 3일간 핏빛으로 변했다 하며, 그 이후로 운계를 자계(紫溪)로 불렀다 한다.

 

한편 탁영의 두 번째 부인 예안김씨(당시 31세)는 탁영이 능지처참을 당한 후 3년 내내 베옷을 벗지 않고 정성과 예를 다했으며, 지나친 슬픔으로 피골이 상접해지고 부축해야만 겨우 기동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탈상하는 날 탁영의 조카 대유(大有)가 호남에서 당도하자 “나는 자식이 없으니 너의 아우 대장(大壯)으로 하여금 너의 계부(季父) 제사를 받들게 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내가 죽거든 꼭 나를 너의 계부 유해 옆에 묻어다오"라고 말했다. 말을 마친 뒤 통곡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자리에 누워 운명했다. 탁영이 운명한 날이었다.

 

탁영 사후 9년 뒤인 1507년(중종 2년) 이극돈의 관작은 추탈하고 김종직, 김일손, 권오복 등의 가산을 다시 돌려주라는 명이 내렸다. 1512년에는 통훈대부 춘추관 직제학 겸 예문관 응교, 춘추관 편수관 증직 교지가 내렸다.

 

 

 

                                  탁영선생은 운계정사에서 후학들에게 학문을 전수했습니다.

 

▲탁영선생 문하생들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 영귀루

‘탁영 불천위’이야기

 

탁영종택은 10년 전부터 불천위 제사를 기일(음력 7월27일) 초저녁에 지내고 있다. 탁영 18세 종손 김상인씨(1949년생·포항 거주)의 부친이 유언으로 초저녁 제사로 바꿀 것을 주문한 것에 따른 것이다.

 

종손의 부친(1990년 별세)은 자신의 시신을 화장할 것, 초저녁 제사로 바꿀 것, 100일 만에 탈상할 것 등을 유언으로 남겼다. 종손은 “화장 유언은 모친의 요청으로 실천하지 못하고 묘를 썼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화장할 것이라고 밝혔다.탁영종택(청도군 화양읍 토평1리)의 사당에는 불천위인 탁영 내외 신주만 봉안돼 있다.

 

다른 종가의 경우 불천위 제사 때 원근의 후손과 다른 문중 사람들도 참석하는 것에 비해, 탁영 불천위 제사에는 옛날부터 종택이 있는 마을의 후손들만 참석한다. 참석 제관은 20여명. 묘제 때는 150~200명 참석한다. 그리고 제사를 사당에서 지내고 출주(出主)를 안하는 점도 차이가 있다.

 

한편 불천위 제사를 위해 1988년 문중 후손들이 영모회를 결성해 운영하고 있다. 33명이 회원으로 있고, 불천위제사 제수비와 종택관리비 등을 지원한다.

 

김상인 종손은 “‘나는 밖에서는 요즘 것을 취하고 안에서는 옛것을 취하고자 한다(余欲內今而內古)’는 말씀을 남긴 탁영 선조의 생각처럼 시대 변천에 따라 종가문화도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탁영 불천위는 탁영을 기린 자계서원이 1660년에 사액을 받으면서 사불천위에서 공불천위로 바뀌었다고 한다.

 

 

자계선원 전경이다. 제일뒤 건물이 존덕사로 절효,탁영,삼족당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자계서원을 둘러싸고 있는 고풍스러운 나즈막한 흙돌담.

김일손 약력

△1464년 청도 출생 △1478년 성균관 입학 △1480년 밀양의 김종직 문하에 입문 △1486년 문과 수석 합격 △1488년 운계정사 건립 △1490년 조의제문 사초 수록 △1491년 진하사(陳賀使) 서장관으로 명나라 연경에 가서 소학집설(小學集說) 구해와 보급 △1494년 이조정랑 △1498년 무오사화로 운명 △1660년 자계서원 사액 △1830년 이조판서 증직 △1834년 시호 문민(文愍: 博文多見曰文 使民悲傷曰愍)

 

       선조들의 발자취를 더듬고자 부산에서 열차를 타고 청도역에서 택시타고온 21살의 학생으로 김해김씨 73대손 이랍니다.(지팡이를 든 할아버지는 자계서원을 관리 하시는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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