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년 유현덕(劉玄德) ※
지금으로부터 약 1800여 년 전.
중국 유주의 탁현이라고 불리는 고을에 집이라고는 삼십호 정도 되는 가난한 마을인 누상촌(樓桑村) 이 있었다.
마을의 형편은 거의다 움막 같은 초가집 뿐이었으나 마을 이름이 가리키 듯 마을 한편 구석에는 다른 곳에서는 좀체 볼 수
없는 거대한 아름드리 뽕나무 한 그루가 있어서 초라한 마을 모습을 그나마 상쇄시키고 있었다.
초여름 어느 석양무렵,
등에 바랑을 짊어지고 손에는 육환장(六環杖) 지팡이를 짚은 칠십이 다 된 탁발승(托鉢僧)이 마을을 지나다가 발을 멈추고 뽕나무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나무의 밑동이 워낙 탐스럽게 생긴데다가 가지는 사방으로 가지런히 축늘어져 흡사 제왕이 타고 다니는 연(輦)처럼 위엄이 있어 보이고,
타는 듯 붉게 물든 석양 노을이 찬연히 비치는 가운데 때마침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나뭇잎들이 흔들리며 고기의 비늘처럼 황금빛으로 번득이는 것이었다.
"허어, 그 뽕나무, 참 잘생겼다.
마치 천자(天子)가 타고 다니는 수레같이 생겼구나...!"
늙은 탁발승은 뽕나무를 우러러 올려다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마침 그때, 뽕나무 밑에 있는 초가집에서 소년 하나가 나오는데, 나이는 열 서넛 되었을까 ?
귀가 조롱박처럼 크고 눈이 샛별처럼 빛나며, 시원해 보이는
키도 또래의 아이들 보다 커보이며, 양 팔의 길이는 무릎을 닿고도 남을 만한 예사스럽지 않아 보이는 소년이었다.
노승은 그 소년의 얼굴을 무심코 바라보다가 속으로 흠칫 놀랐다.
방금전 감탄하며 바라보던 뽕나무도 잘생겼지만, 소년의 얼굴은 칠십 평생에 처음 보는 귀골(貴骨)이었기 때문이었다.
"얘, 이 뽕나무가 너희 집 뽕나무냐?"
노승이 무심코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네, 저희 집 뽕나무올시다...
그런데 스님은 어디 먼데서 오셨습니까?"
소년은 생김새 만큼이나 말씨도 온순하거니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공손하기 이를데 없었다.
노승은 갑자기 형용하기 어려운 어떤 느낌이 몰려와서 소년에 대해 캐묻고 싶어졌다.
"음... 나는 떠돌아 다니는 탁발승이로다. 방금 나온 저 집은 너희 집이더냐?"
노승은 육환장을 살짝 들어 소년이 나온 집을 가리켜 보였다.
"네, 저희 집입니다."
"너는 언제부터 저 집에 사느냐?"
"자세히는 모르지만, 할아버지 때
이 집으로 이사를 왔다고 합니다."
노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년에게 다시 물었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성은 유(劉)가이고, 이름은 비(備)라
고 하고, 자(字)는 현덕(玄德)이라고 합니다."
"음, 성이 유씨란 말이지?"
노승은 소년에게 성을 다시 한번 되새겨 묻고, 내심 어떤 생각이 들었든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의 성이 유씨라면, 생김새로 보아서 이 소년은 이미 망해버린 후한(後漢) 황실의 종친(宗親)이 틀림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얘, 현덕아 ...그런데 너는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냐?"
노승은 소년에게 계속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서당으로 밤글을 읽으러 가는 길입니다."
"음, 그래야지. 네 나이 때에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크게 중요한 일이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고맙습니다."
유비 소년은 노승에게 정중하게 머리를 수그려 보이며,
"날이 저물어 가는데, 스님은 오늘밤을 어디서 주무시렵니까?"
하고 뜻하지 않게 묻는 것이 아닌가?
노승은 유비 소년의 느닺없는 질문에 내심 크게 경탄하였다.
의례 이 나이 또래의 소년이 늙은 길손의 잠자리를 걱정해 주는 것은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처지이니까, 가다가 날이 저물면 아무데서나 자지"
"그래도 나이가 많으신 분이 따뜻한 곳에서 주무셔야되지 않겠어요?"
"집이 없는 떠돌이 중이 어찌 잘 곳을 가리겠느냐. 집에서 재워주는 사람이 있으면 집에서 자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형편이 닿는대로 잘 수밖에 없지. 왜, 네가 오늘밤 나를 어디 재워 줄 데가 있느냐?"
"저희 집에서 주무셨으면 좋겠지만, 저희 집은 방이라고는 누추한데다가 어머니와 단 둘이 살거든요."
"음, 마음을 써 주어 고맙구나.
그런데 아버지는 무엇을 하시느냐?"
"아버지는 제가 어릴 때 돌아가셨고요.
지금은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며 생활을 하는고 ...? "
노승은 보기 드문 귀공형의 소년의 형편이 매우 궁금하였다.
그러자 소년이 곧 대답하는데,
"아버지때부터 돗자리를 팔아서 생활을 했는데 지금은 어머니가 돗자리를 만드시고, 제가 뒷 수발도 해드리고 가끔 시장에 내다 팔아 생활을 하고 있지요.
그러다보니 저희 집은 누추합니다. 저기 고개 위에 보이는 집이 우리 서당이에요.
서당방은 넓고 방이 깨끗하니까, 주무실 곳이 없으시면 서당에서 주무시고 가세요.
제가 지금 모셔다 드릴까요?"
"고맙구나. 빤히 보이는 집을 나 혼잔들 못 찾아가겠느냐? 너는 어서 서당으로 가 보아라.
나는 여기 나무를 더 살펴보고 가겠다."
노승은 그렇게 말을 하고,
"아이 다리야 ! 다리가 아파서 좀 쉬어가야 하겠는걸!" 하며 뽕나무 그늘아래 있는 바위에 걸터 앉았다.
유비 소년은 그제서야 서당쪽으로 걸어 가면서 이 집 저 집으로 돌아다니며, 친구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었다.
노승은 멀어져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허어, 소년이 생김생김이 예사롭지 않군...! 게다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흡인력 있는 인성(人性) 또한 훌륭하고, 저 아이는 장차 크게 될 인물이 틀림없구나...!)
노승은 그렇게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날이 더 어두워질 때 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사방이 어둑해지자 노승은 무거운 몸을 지팡이에 힘주어 일으켰다.
그리고 유비 소년이 가르킨 대로 하룻밤 신세를 지기 위해 서당으로 향하였다.
이렇게 서당으로 찾아가니, 방안에서는 아이들의 글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 오는데, 오십을 넘은 듯 싶은 중늙은이가 마당까지 마중을 나오며 노승을 반갑게 맞아 준다.
"어서 오십시오 대사님 ! "
"지나가는 동냥중을 웬일로 이렇게 반갑게 맞아주시오?"
노승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사람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국궁배례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이 서당을 지키는 서당지기
올시다.
조금 전에 유비 소년이 저더러, 대사님 한 분이 찾아오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저녁을 대접해서 편히 쉬시게 도와드렸으면 좋겠다고 말하더군요."
"허어, 그 소년이 그런 부탁을 하더라구요?"
노승은 내심으로 다시 한번 감탄하였다. 그 소년이 오가다 만난 아무것도 아닌, 동냥중인 자기에게 이렇게까지 마음을 써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음...마음을 쓰는 것이 보통이 아니로다.)
노승은 혀를 차며, 서당지기 방에서 융숭한 저녁 대접을 받고 밤잠을 자려고 서당방으로 들어갔다.
이 서당은 당대의 유명한 노식(盧植)
이라는 사람이 후학(後學)을 양성하던 서당으로서, 당시 노식은 나들이를 떠나고, 접장(接長: 반장)인 유비 소년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서오십시오. 스님 ! 아랫목을 비워 놓았으니 오늘 밤은 아랫목에서 편히 주무십시오. 저녁은 잡수셨습니까?"
유비 소년은 노승을 다시 만나자, 머리를 정중히 수그려 보이며 말했다.
"응 ! 먹었네. 자네에게 여러 가지로 고맙네. 내 걱정은 말고 어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게 ! "
유비는 열 서너 살밖에 안 되는 소년이었지만, 노승은 아까와는 달리, 저도 모르게 <해라>를 아니하고 <하게>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
잠시 뿐이었지만 그만큼 소년의 인품에 감동이 컷던 것이다.
아이들이 글을 읽는 동안 노승은 아랫목에 누워서 조는 듯 자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유비 소년이 사서 삼경중에 시경(詩經)의 한 편을 먼저 읊조리고 어린 아이들이 따라 하는데, 그 실력이 가히 만만치가 않았다.
노승은 속으로 깜짝 놀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 보았다.
(호오, 글을 가르치는 아이나 공부를 하는 아이들이 한결 같이 똑똑하구나... ! )
노승은 속으로 감탄해 마지 않으며(다음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