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심경 100 /황벽희운 선사 1 /고승은 어디 갔는가
黃蘗運禪師가 曾散衆하시고 在洪州開元寺이러시니 裵休相國이 一日에 入寺하야 見壁間畵相하고 問院主云호대 壁間에 是什麽오 主云 高僧이니라 休云 形儀는 可見이어니와 高僧은 向甚麽處去오 主가 無語한대 休云 這裏에 莫有禪和麽아 主云 有希運上座하니 頗似禪和하야늘 休가 遂召師하야 擧前話似之한대 師曰但請問來하라 休云 形儀는 可見이어니와 高僧은 向甚麽處去오 師召相公한대 公이 應諾이어늘 師曰高僧이 在者裏로다 公이 於言下에 領旨하니라
황벽희운 선사가 일찍이 대중들을 흩어 보내고 홍주 개원사에 살았는데 배휴 상국이 하루는 절에 들어와서 벽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보고 원주에게 물었다.
“벽에 그려져 있는 것이 무엇인가?”
원주가 말하였다.
“고승입니다.”
“형상은 볼 수 있으나 고승은 어디를 갔는가?”
원주가 아무 말을 못하였다.
배휴가 말하였다.
“여기에 선사는 없는가?”
“희운 상좌라는 이가 있는데 아마도 선사 같습니다.”
배휴가 드디어 황벽 선사를 불러서 앞에서 원주와 같이 하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황벽 선사가 말하였다.
“다만 묻기만 하라.”
배휴가 말하였다.
“형상은 볼 수 있는데 고승은 어디에 갔습니까?”
황벽 선사가 “배상공!”하고 부르니 배상공이 대답하였다.
황벽 선사가 말하기를,
“고승이 여기에 있네.”
배상공이 그 말에 크게 깨달았다.
해설 ;
황벽희운(黃蘗希運,?-850) 선사는 당나라 때 스님으로 백장(百丈) 선사의 지도를 받고 현지(玄旨)를 통달하였다. 시호는 단제(斷際)이다.
흔히 황벽단제 선사로 알려져 있다. 복건성(福建省)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려서 홍주 황벽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어릴 때부터 지기(志氣)가 왕성하였다.
이마에 작은 혹이 있었고, 음성이 우렁찼으며 7척이나 되는 거구였다고 한다. 농사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10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따라 고향 근처의 황벽산에 있던 절을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이때 그는 어떤 큰스님으로부터 법문을 듣고 발심하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소년 희운은 앉으나 서나, 밤이나 낮이나 골똘히 생각에 잠기다가 마침내 열흘째 되는 날 집을 나와 절을 찾아가 비로소 출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종릉(鍾陵)의 용흥사(龍興寺)와 848년에는 배상국(裵相國,791-870)의 청으로 완릉(宛陵)의 개원사(開元寺)에도 머무르면서 찾아드는 학인들을 제접하였고 황벽산에서 열반에 들었다.
문하에 중국의 임제종(臨濟宗)의 개조(開祖)인 임제 의현(義玄) 선사가 있고, 그의 법어는 배휴(裵休)가 집대성하여 황벽산단제선사 전심법요(傳心法要) 1권과 완릉록(宛陵錄) 1권을 남겼다.
또한 배휴(裴休,791-870)라는 거사는 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참고가 될까하여 좀 자세히 부연한다.
그는 중국 당나라의 관리로 선불교에 관심이 많았다. 규봉 종밀 선사와 황벽 희운 선사에게 사사하였고 그들의 저술에 서문을 썼다. 회창 년간 폐불(廢佛)사건 때는 위앙종을 만든 위산 영우 선사를 찾아내어 동경사에 모시기도 하였다.
그가 황벽 희운 선사를 만난 역사적인 사건인, 즉 위에서 소개한 일화는 '황벽형의(黃蘗形儀)'라는 화두가 되어 여러 화두집에 수록되어 있다.
신당서(新唐書) 107권에 전기가 실려 있는데, 전기에 따르면 맹주(孟州) 제원(濟源)에서 출생하였고, 자는 공미(公美)이다.
진사시험을 치러 현량방정(賢良方正)에 뽑힌 뒤 여러 관직을 거쳐 병부시랑 영제도염 철전운사, 중서문하평장사, 선무군절도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소의(昭義)와 하동(河東) 등 여러 곳의 절도사로 일하였다. 74세에 입적하고 태위(太尉)에 봉해졌다.
문장이 뛰어났고 글씨를 잘 썼는데 글씨는 특히 해서체에 능하였다고 한다. 교양이 깊고 성품이 온화하며, 특히 불교를 공부하여 술과 고기를 멀리하고 책을 편찬하고 어록과 서문을 많이 썼다.
이처럼 배휴는 학문과 행정능력을 두루 갖춘 인물이면서도 불교에 귀의한 불교신자였다.
특히 선종에 귀의한 분으로 유명하여 여러 선사들의 어록에 일화를 남겼다.
규봉종밀(圭峰宗密:780∼841) 선사와 황벽희운 선사에게 사사하여 두 고승의 저서에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당나라 무종(武宗)이 일으킨 회창(會昌,841∼846)의 폐불사건 때는 속세에 숨어 사는 위앙종의 개조 위산영우(潙山靈祐,771-853) 선사를 찾아내 위산 동경사(同慶寺)에 모시기도 하였던 분이다.
<직지>에 인용한 배휴 상국과의 대화는 대단히 유명하여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된다.
상국(相國)이라는 벼슬은 고구려의 대막리지, 신라의 태대각간처럼 특수직으로서 당시 중국에서 최고의 관직이었다.
상국은 일반 관리들이 최고로 오를 수 있는 승상의 위치보다 한 단계 더 높았고, 주로 개국공신이나 황제를 옹립한 신하에게 이 작위를 수여했다.
전한 때는 고조 유방이 자신의 개국공신인 승상 소하에게 이 직위를 신설하여 승진시켰고, 이후 조참에게도 제수하였다.
그 이후 360년 동안 폐지시켰다가 후한 말, 동탁이 헌제를 옹립하여 스스로 상국이 되어 이 직위를 부활시켰던 벼슬이다.
아무튼 천자 다음가는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이 사찰을 참방하였다. 절을 관리하는 원주로서는 당연히 사찰의 이곳저곳을 안내하였을 것이다.
크고 작은 법당들을 다 돌아보고 나서 아마 마지막으로 조사각(祖師閣)에 들렸다가 위와 같은 불교사에 길이 빛나는 명언을 남겼던 것이다.
사람을 대신해서 영정이나 사진을 모셔두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사진은 여기에 있는데 그 사진의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을 할 것인가?
시장에나 이웃에 갔다고 대답할 것인가? 또는 회사에나 아니면 미국에라도 갔다고 대답할 것인가? 진정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며 누구인가?
사진의 그 사람은 누구며, 그를 묻는 사람은 누구며,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는 사람은 누구며, 대답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또한 누구인가? 이 글을 쓰는 나는 누구이며, 이 글을 읽는 나는 또한 누구인가? 어떤 대답도 그것은 주변을 헤매는 일이다.
중심의 일은 아니다. 글을 읽고 글을 쓰는 나를 주시하라. 묻고 대답하는 나 자신을 주시하라. 일체 사물을 보고 일체 소리를 듣는 나 자신을 주시하라. 그곳에 답이 있다.
황벽 선사가 배휴를 부르자 배휴가 “예”하고 대답하였다. 황벽 선사가 말하였다. “수백 년 전에 돌아가신 고승이 여기 있어 대답하네.” 존재하는 것은 절대 현재인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일 뿐이다.
그도 나고 너도 나고 나도 나다. 지옥도 극락도 지금 여기 나다. 시방세계와 과거 현재 미래가 지금 여기 나다.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 아수라, 성문 연각 보살 불 4성(聖) 6범(凡) 모두가 지금 여기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