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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4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루카 21,12-19
죽음과 가까울 때 성령께서 충만히 오시는 이유: 명의는 작은 병에 움직이지 않는다
어제 복음은 세상 종말이 언제 올 것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직 죽음을 현재화하여 자신을 좀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두고 사는 것이 나에게 매우 유익합니다.
그러면 어차피 죽기 때문에 조금 더 생존하기 위해 세상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신 안에 생존을 위한 세속적인 것들이 아니라 ‘사랑’을 채우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죽음을 현재화하여(Memento mori) 살다 보면 당연히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을 가지면 하느님은 성령을 주십니다.
죽음을 이기게 하는 힘은 성령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원한다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사는 것이 좋고 그렇게 성령님께서 오시면 내가 주님을
증언하는 사람이 됩니다.
자주 말씀드리는 김용태 신부님의 서품 준비 피정 중에 있었던 체험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마지막 이전에 항상 당신 제자들이 박해를 당하게 될 텐데 그때 성령의 힘으로 주님을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란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김용태 신부가 사제가 되기 위한 한 달 피정을 하던 중에 자신의 마음에 “순교를 할 수 있느냐?”라는 주제가 떨어졌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마지막 후손으로서 이 주제는 어렸을 때부터의 평생 화두였습니다.
이냐시오 묵상이기 때문에 상상으로 순교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이슬람 테러범들이 등장하였고 지독한 고문 기구들이 있었으며 배교하지 않으면 드릴로 머리를 뚫어서 죽이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참아보려 했지만, 순교 직전에 매번 기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부제들은 다 이 과정을 통과하였지만, 김 부제만은 사흘이 지나도 머리로 뚫고 들어오는 그 드릴의 칼날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피정과 서품을 포기할까 생각도 하였습니다.
이젠 마지막이란 마음으로 밤에 혼자 성체조배를 하러 올라갔습니다.
다시 같은 묵상을 하였습니다.
또 드릴이 머리로 오고 또 포기하려고 할 때 즈음, 온 방 안이 사랑으로 가득 차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바닷물을 담아보겠다고 그렇게 애썼던 잔이 바다에 빠진 느낌과 같았습니다.
그분의 사랑으로 자신이 온통 채워지는 느낌이었고 주님께서 뒤에서 꼭 안아주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며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고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빛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순교 다음의 세상이었습니다.
이 은총을 체험한 후에 순교를 받아들일 힘이 생겼습니다.
이 체험은 사제로 살아가는 내내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만약 김용태 신부가 며칠 동안 계속 죽음을 현재화하는 두려운 상황을 묵상하지 않았다면 이런 은총이 주어졌을까요?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온전히 주님을 증언하는 사제도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은 죽음의 현재화이고 그런 노력을 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성령님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매순간 당신을 증언하는 힘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매 순간 주님을 증거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이미 죽음 이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는 수도자나 성직자와 같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며칠 전에 1년 전 남편을 뇌종양으로 여읜 아내와 20살 먹은 딸이 찾아왔습니다.
외국을 돌아다니며 살아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갑자기 암이 찾아왔고 1년 10개월의 투병 끝에 사망하였습니다.
연년생 고3 여동생과 중학생 남동생을 둔 맏딸 카타리나는 외국에서 생활하다 갑자기 아버지의 병환으로 한국에 들어올 수밖에 없어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머니의 권유대로 일단 대안학교에 입학하기로 하였는데 시간도 없고 어찌하다 보니 개신교 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여동생과 자신, 단둘만이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어느 날 수련회에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개신교 학교이기 때문에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카타리나는 사진 찍는 일을 하며 약간 그런 기도회를 바라보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무슨 말이라도 하며 기도를 해보려 했습니다.
당시에 맏딸이라는 부담과 아버지가 아프시지만, 어머니가 아버지로 인해 고생하는 것을 보며 이럴 바에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시는 게 나을 거 같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생은 미술과 같은 특기가 있지만 자신은 앞으로의 삶이 조금은 막막한 상태였습니다.
이때 김용태 신부님과 같은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 친구 말로는 성령께서 쑥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성령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과 위로에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선생님이 와서 귀에 대고 계속 기도를 해 주셨고 그 기도 말이 꼭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하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담대해질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죽음을 목전에 둔 이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십니다.
성령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것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하시는 것입니다.
죽음만큼 강한 적도 없다면 하느님은 그 강한 적을 이기게 하실 때 가장 보람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감정은 점점 식어만 갔습니다.
무언가 모를 불안과 죄책감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이길 힘을 얻었지만 죽음 이후를 극복할 힘은 남아있지 않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미사를 가서 성체를 영하고 기도를 바치려 하는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기도가 안 되어 그냥 눈을 뜨려는데 환시와 같은 것을 봅니다.
빛과 같으시고 엄청나게 크셔서 감히 바라볼 수 없는 예수님께서 서 계시고 그 앞에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 품에 안겨있는 아기처럼 행복한 모습의 아버지셨습니다.
하염없이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맏딸로서의 부담, 그리고 아버지가 빨리 죽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던 죄책감, 또 외국에서 생활하다 우리나라 들어와서 느껴야 하는 청년으로서의 막막함 등을 주님께서는 성령으로서 극복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베로니카는 자신이 그렇게 운 이유를 말하며 엄마까지 위로합니다.
앞으로도 절대 주님을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지금은 동생과 함께 싱가포르로 대학을 가려고 준비 중입니다.
황창연 신부님의 강의 중에도 성당에서 봉사 열심히 하던 형제가 갑자기 봉사하고 집에 가던 중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어머니가 아이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를 때 아버지가 아이 꿈에 나타나서 천국 앞까지 같이 걸어갔던 이야기를 오히려 해 주어서 어머니가 놀랐다는 이야기도 같습니다.
죽음 앞에 선 사람에게 주님은 힘을 주십니다.
죽음을 이길 힘은 성령뿐입니다.
하느님은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죽음을 극복하려고 하는 이에게 오십니다.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명의가 굳이 약국에서 사 먹어도 낫는 병을 고치겠다고 그 집에 방문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가장 큰 일, 곧 죽음을 이기는 일을 하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음을 현재화하고 그 고칠 수 없는 병을 극복하려 한다면 주님은 분명 성령을 주시어 이 세상에서 끈기 있게 당신을 증언하는 사람으로 만들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을 현재화하여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은총이고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24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루카 21,12-19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를 대신해서 진심 어린 사과 한 마디만 해주기 바랍니다!
우리나라의 현대사에 치유 불가능한 깊은 상처와 좌절과 수모를 안겼던 학살자요 군부 독재자가 세상을 떴습니다.
끝끝내 잘못했다,
내 탓이다, 용서를 빈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오욕의 세월 뒤안길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그에게 인간이기를 바랐던 우리의 기대가 허황된 것이었던가 봅니다.
그 오랜 세월, 그 숱한 기회를 족족 발로 차버리고, 끝끝내 인간이기를 포기한 그의 죽음이 참으로 불쌍하고 안타깝습니다.
그는 어찌 그리도 90평생 초지일관, 일편단심 동물처럼 살아왔는지 놀랍습니다.
죽기 일보 직전까지도 자기만의 그릇된 신념과 정신세계에 빠져, 끝끝내 사과를 거부한 그의 뇌는
참으로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국과수에 감정을 의뢰해 봐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그도 밉지만 그의 주변에서 얼쩡거리며 집단적 광기를 지속해온 측근들, 가족들, 배우자, 자녀들의 금수만도 못한 모습 앞에, 분노를 넘어 깊은 슬픔이 다가오는 하루였습니다.
측근들과 배우자, 자녀들,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지금의 전국민적 분노를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다른 망언으로 안 그래도 쓰라린 깊은 상처에 굵은 소금을 끼얹지 말기 바랍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를 대신해서 진심 어린 사과 한 마디만 해주기 바랍니다.
평생토록 걷지 말아야 할 악인의 길을 걷다가, 끝끝내 회개하지 않고 세상을 떠난 자의 죽음은, 남아있는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정말 큰 것 같습니다.
마치 이 땅 위에서 영원히 살 것 같았던 그였지만, 어느 날 갑자기, 소리소문없이 죽음의 천사가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주님께서는 떠날 준비가 조금도 되지 않은 그를 데려가셨습니다.
결국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우리나라 역사 속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민주화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버린 군부독재자, 국민의 생명을 수호하는 본분을 망각하고 국민에게 발포한 정치군인, 희대의 살인마, 상습 고액체납자, 단돈 29만원, 왜 나만 갖고 그래, 끝끝내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거나 회개하지 않은 금수(禽獸)만도 못한 인간...
그러나 밥 먹듯이 수시로 가슴치고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날 주어질 은총과 축복은
엄청날 것입니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복음 21장 19절)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11월 24일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베트남의 순교성인들을 기리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믿음을 촉구하십니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의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루카 21,13-14)
에수님께서 제자들이 앞으로 겪게 될 박해 상황을 감추지 않고 설명하십니다. 회당과 감옥에 넘겨지고 끌려갈 것이며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죽임을 당하게 될 수도 있다고요.
이때 제자들이 명심할 점은 미리 인간적으로 뭔가를 하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증언의 기회에 자기 언어로 섣부르고 장황한 변론을 준비하기보다,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 담아 주실 그분의 말씀을 기다리라는 뜻일 겁니다. 그런데 즉흥보다 사전 준비에 철저한 성향이라면 다소 긴장이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제 이 문제는 성향의 문제에서 믿음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8-19)
박해와 죽음 이야기까지 나왔는데도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거라 하시니 모순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머리카락"이라는 말을 쓰실 때는, 우리 힘으로 희거나 검게 할 수 없는 하느님 주권을 의미하고(마태 5,36 참조), 또 이미 아버지께서 우리 머리카락까지 다 세두실 만큼 우리가 그분께 귀하고 사랑스런 존재임을 가리킬 때입니다.(마태 10,30 참조) 설령 육체적으로 고통과 시련을 겪게 되더라도, 주님을 믿음으로써 온전히 구원되리라는 뜻입니다.
제1독서는 어제 등장했던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의 아들 벨사차르 임금 때의 일화입니다.
"하느님께서 임금님 나라의 날수를 헤아리시어 이 나라를 끝내셨다는 뜻입니다. ... 임금님을 저울에 달아 보니 무게가 모자란다는 뜻입니다. ... 임금님의 나라가 둘로 갈라져서, 메디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주어졌다는 뜻입니다."(다니 5,26-28)
다니엘은 적대국에 끌려간 유배자 중 하나입니다. 아무리 지혜가 출중하고 신통력이 있어도 목숨과 안위를 부지하기 위해서는 할 말, 안 할 말은 가려야 하는 처지지요.
하지만 다니엘은 주님의 집 기물로 술을 마시고 피조물을 신으로 찬양하던 임금에게 하느님께서 내리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풀이해 줍니다. 난데없이 글씨가 나타난 이유는 벨사차르 임금이 인간의 목숨을 손에 잡고 계시며 모든 길을 쥐고 계신 하느님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이면서요.
다니엘은 임금에게 하느님께서 이 나라를 끝내셔서 메디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넘어갈 것이라고, 또 임금은 구원받기에 모자란다고 숨김없이 아룁니다. 다니엘은 독서를 듣는 우리가 가슴 졸일지언정,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하느님께서 떠올려 주신 말씀을 숨기거나 감추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 속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라시는 바가 다니엘 예언자의 태도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 담대함과 용기는 언변과 지혜를 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의 크기이고 신뢰의 무게겠지요. 이 믿음과 신뢰가 충실함으로 표현되는 것일 테고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 각자가 지닌 믿음의 무게를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아직 오지도 않은 일을 미리 앞당겨 두려워하지 말기를, 그리고 권력이나 재산, 신분 등의 인간적 자원에서가 아니라 바로 그 믿음 덕분에 담대하고 용기 있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고 살아가길 바라십니다. 주님께서 사람과 사건, 말씀과 자연으로 우리 각자에게 써 보내시는 권고에 늘 깨어 있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알타반의 말씀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