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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동포교육지원단 동포생활수기 공모작품 최우수상
도전! 중국어강사
글 • 노계선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 6시 10분에 눈을 떴다. 긴장한 탓인지 늘 알람소리보다 10분 정도 먼저 잠에서 깬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눈을 붙이고 싶은 달콤한 유혹을 물리치고 몸을 일으켰다. 요즘은 늘 수면 부족 때문에 머리가 몽롱하다. 낮잠을 잔다고 해도 밤에 자는 깊은 잠 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런 중에도 오늘이 월급 들어오는 날이라는 생각에 작은 행복감이 밀려왔다. 얼마나 될까, 달마다 기대를 해도, 달마다 기대에 못 미치는 학원 월급이지만, 그래도 이날은 무척이나 기다려지는 날이다. 빨리 움직이자,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씻고 챙겨서 나가면 7시쯤 전철을 탈 수 있다. 7시가 이른 시간이라고 하지만, 전철 안에는 늘 빈 좌석이 없다. 모자라는 잠을 전철 안에서 보충하는 사람들, 이어폰을 끼고 뭔가 듣고 또 보는 사람들, 손거울을 들고 열심히 치장하는 젊은 여성들…. 전철안의 풍경이다. 이렇게 이른 새벽부터 움직이는 나라가 가난할리 없지.
그러나 역으로 이렇게 움직이지 않으면 국물도 차려지지 않는다는 냉정한 현실도 그 속에 공존한다. 몇 개월 전 학원 강의를 금방 시작했을 때에는 6시 50분에 시작하는 첫 강의를 하기 위해 5시 50쯤 전철을 타군 했는데 그 시간에도 전철은 초만원을 이루곤 했다. <빨리빨리>로 대변되는 한국의 생활 절주에 몸을 맡겼다는 사실을 이른 아침부터 확인한다.
학원까지는 35분 정도, 역에서 빠져나와 학원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숨을 고르고 40분부터 곧장 강의에 들어간다. 늘 그렇지만 첫 수업은 지각하거나 아예 수업 빠지기를 밥 먹듯 하는 수강생이 태반이고, 꾸준히 몇 개월을 견지하는 수강생은 많지 않다.
직장인들은 혹시 전날 야근에다 술자리라도 있었다면 새벽 이른 시간에 일어나는 것이 쉽지 않고 <부엉이족>이 되어버린 젊은 학생들은 새벽 이른 시간에 일어나는 자체가 불가능하여 새벽 첫 시간은 신청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오늘도 퇴직하고 취미생활로 중국어공부를 시작했다는 어르신 한 분에게 열심히 강의를 했다.
이렇게 하루 시작된 강의는 10분, 30분 혹은 1~2 시간 간격으로 오전 내내 이어진다. 30분 쉬는 9시쯤에는 아침이라 하기에는 늦었지만 뭐든 요기를 해야 하고 중간에 10분 정도 쉬는 시간은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물을 떠오고, 복도에서 마주치는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누다보면 금세 지나간다.
점심시간은 2시간, 중국에서 온 강사들은 대부분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집에서 도시락을 싸오거나 간단한 간식거리로 식사를 때운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되는 강의는 수강생이 없는 관계로 폐강이 되었다. 4시 40분 강의까지 몇 시간을 쉴 수 있다는 얘기다. 몸이 쉬는 건 좋으나, 월급 받을 때를 생각하면 마냥 좋아할 수도 없는 일이다.
지난 7, 8월에는 방학기간이라 학원으로서는 성수기였는데 그때에는 3시간짜리 오후 강의까지 했는데 쉴 틈이 거의 없어 하루하루 몸은 녹초가 됐었다. 그래도 학원에 근무한 이래 가장 많은 월급을 받고 그 여름날의 피곤함을 한방에 날려버렸던 기억이 있다.
저녁 강의는 보통 8시 30분이 되어야 끝난다. 날마다 적은 날은 5~6시간, 많은 날은 7~8시간 강의를 하는 셈이다. 강의 준비까지 포함하면 그 이상의 시간을 강의에 매달리게 된다. 서서 말만 대여섯 시간을 한다는 것이 체력적으로도 무척 부담되는 일이다.
목이 쉬기가 일쑤이고 종아리는 늘 묵직하다. 그래도 밤 10시까지 강의를 했던 첫 몇 개월에 비하면 지금 수준으로 강의 시간이 줄어든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20대 동료강사들은 학원에 들어와서 몇 개월이 지나도 여전히 새벽 강의, 밤 강의를 도맡아 한다. 그것은 새내기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 의례같은 과정이었다.
오전 강의를 마치고 점심시간이 되자 부랴부랴 월급 통장을 확인했다. 지난 달 했던 강의들을 헤아려 보고 내심 기대하면서 통장을 확인했는데 금액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습관적으로 실망감이 밀려왔다. 할인혜택을 받은 학생, 중간에 들어온 학생들의 수강료에 따라 월급은 내 기준에 훨씬 못 미치는 128만원.
방학기간인 7, 8월을 제외하고 1년 가까이 달마다 이 지경이니 몸과 마음이 함께 위축된다. 시간당 강의료가 1만원도 안된다니 식당에서 서비스를 하거나 공장에 가서 일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순간 화가 나기도 했다.
그래도 명색이 강사이고 지식을 전수하는 직업인데 최소한의 자긍심도 가질 수 없다. 학원에 수강생이라도 많으면 조금 더 받을 수도 있을 텐데, 수강생이 적다보니 그런 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 학원에서 기업강의 의뢰가 들어오면 나에게 우선 기회를 주어 다른 강사들보다 조금은 더 받은 것이 이 수준이었다.
소득을 늘리기 위해 지난달부터 돌파구를 마련하기 시작한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거듭 들었다. 내 자신을 적극 홍보하고 그동안 학원 강의 경험을 바탕으로 학원 강의와 기업 강의, 개인과외를 병행하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이 들어 적극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업 강의를 주선해주는 컨설팅회사에 이력서를 보냈고, 주변 지인들한테 SNS 를 통해 중국어 개인과외를 한다고 홍보를 했다. 고마운 친구들이 인터넷에서 홍보도 해주어 한 달 사이에 기업 강의와 개인 과외 의뢰가 하나, 둘 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덕분에 시간이 없다고 미루어두었던 중국어 교육자료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다. 내가 아는 것과 그것을 체계적으로 전수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잘 알기 때문에 중국과 한국에서 잘 정리된 문법책을 구해서 내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하고, 학원 교재 문법도 정리하고 있다.
이런 작업을 하면서 내가 어쩌다 한국 땅에 와서 중국어강사가 되었는가 하는 생각을 하군 한다. 유치원부터 심지어 대학까지 조선어 공부만 해온 내가 중국어 강사를 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부푼 꿈을 안고 언론인이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국영 방송국에서 기자, 아나운서로 일하면서 자긍심으로 한껏 부풀어있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있는 자리에 대해 고맙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모든 것이 당연한 것으로만 여겨졌고 자신감이 넘쳤던 시기였다.
그래서 어느 날, 방송국을 그만둘 때에도 큰 미련 같은 건 없었다. 더 의미 있는 일을 찾아 나선다는 확신이 바탕에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10년 전 중국의 동북지역에는 목숨을 걸고 탈북한 수많은 북한 이탈주민들이 숨어 지내고 있었고 그들의 처지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누군가 그들을 도와야 했고 그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생각에 그 일을 나의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탈북자 지원 단체의 요청을 받아들여 방송일을 그만 두고 탈북자 지원활동에 나섰던 것이다. 물론 당장의 방송일 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라 선택한 것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선택은 20대의 젊은 혈기라 쳐도 용감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후 같은 뜻을 가지고 함께 일하던 한국인 동료와 결혼을 약혹하고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요란스럽게 결혼식도 올렸고 중국에서 동북3성을 넘나들며 사업도 크게 벌여봤다. 그 사업의 이윤의 대부분은 탈북자 지원 사업에 쓰였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훌쩍 10년이 흘렀고 강산도 변했다. 2012년 뜻밖의 사건으로 남편을 비롯한 여러 북한인권 활동가들이 중국에서 체포되어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나 역시 남편을 따라 한국에 올 수밖에 없었다.
중국에서만 살 것 같았던 우리 부부에게 한국행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것 이었다. 아무런 준비가 없이 맞닥뜨린 한국의 현실은 저만치 큰 무게로 내 온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었고, 40대를 바라보며 낯선 한국 땅에서 외톨이가 되어버린 듯한 나의 현실과 지난 10년을 서글픈 마음으로 돌아보아야 했다.
맨 주먹으로 한국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불혹의 나이를 바라보며 녹녹치 않은 대한민국 서울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젊은 날의 패기, 나의 꿈,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뜨거운 열망….
그 모든 것이 사라진 듯하여 절망스러울 때도 있었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 끊임없는 번뇌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에게는 중국어라는 무기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나는 대학 전공이 조선어과(한국의 국어국문과에 해당)였기 때문에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조선어로만 공부를 한 사람이다. 대학에서도 필수과목 몇 개를 제외하고는 전공과목도 조선어로 공부를 했다.
그래서 솔직히 중국어로 의사소통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일 뿐이지 중국어랑 그렇게 친하게 지낼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한국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면서 먹고 살라는 하나님의 뜻은 선뜻 이해도 안됐고 납득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한국에서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40대를 바라보는 나이라 어디에다 원서를 내기도 어려웠고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나마 눈높이에 맞는 직업은 중국어강사인 듯 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당장 일을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강사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첫 월급을 받았을 때의 허탈감은 잊혀지지 않는다. 112만원. 월급 명세서를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처음에 원장님한테서 들었던 월급기준과 일치한 강의는 한 과목밖에 안 됐다.
한 수업 당 한 달에 19만원이라고 알았는데, 사실 매일 한 시간씩 수업을 해야 19만원이었던 것이다. 평균 한 강의 당 19만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작 월급 명세서를 받아보니 어림도 없었다.
그 기준에 맞는 수업은 단 한 과목, 월·수·금, 화·목·금, 격일로 진행된 강의는 강의 당 18만원, 주말마다 진행된 3시간 30분짜리 강의는 15만원에 불과했던 것이다.
원장님은 가장 높은 시급을 이야기 했고, 나는 모든 강의를 그 시급에 맞춰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한 허탈감이 몰려왔다. <영혼이 맑은 사람>이라던 원장님의 말씀도 순간 조롱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건 정해진 학원의 월급 기준일 뿐, 나 한사람이 따져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었다. 현실을 직시하고 빨리 적응하자, 버티다보면 좋은 날이 오겠지 라는 생각으로 보낸 시간이 이제 거의 1년이 되어간다.
지금도 처음 학원을 찾아 면접을 봤던 날의 정경이 눈에 선하다. 원장님 사무실을 찾아 엘리베이터도 없는 중국어학원 6층을 터벅터벅 올라가다가 5층을 잠깐 지나치는데, 복도라고 할 것도 없고 오밀조밀 닭장같이 엉겨 붙은 교실들을 보며 숨이 턱턱 막혀왔다.
가장 큰 교실이라 해봐야 책상 20개, 대개는 10개 안팎의 책상을 놓고 한국의 사교육 시장은 치열한 경쟁속에서 굴러가고 있었다. <환영합니다, 한국의 사교육시장에 발을 들여놓은 것에 대해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학원 원장은 인사말과 함께 한국 특히 서울의 중국어 사교육시장에 대해 장황하게 소개했다.
모든 새로운 분야에 발을 들여놓을 때는 의례 두려움이 따른다. 이 나이에 제대로 적응이나 할 수 있을까,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방송국 경력을 높이 사면서 유명강사로 키워주겠다는 원장님의 뜬구름 잡는듯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부터 앞섰다.
십 수 년을 이 치열한 한국의 사교육현장에서 중국어교육에만 목숨 걸어온 선배 강사들도 많은데, 후발주자로서 내가 중국어 명강사가 된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중국어강사 시장에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있는 것일까. 아는 만큼은 그 누구에 못지 않게 잘 가르칠 수 있다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중국어강사가 되어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가르치는 모든 것은 백지장에서부터 출발해야 했다.
한국에 와서 주변의 지인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중국어 강사로 일한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용케도 적응하여 이제는 학원에서 제법 인정받는 강사가 되었다. 지난 2월부터 11월까지 나만 믿고 따라온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나에게 격려와 힘이 되는 학생들도 있다. 한 달 단위로 흘러가는 학원 강의에서는 수많은 수강생들을 만난다.
가끔은 쉽게 친해져서 정말 나의 학생이라 느껴지는 수강생들이 있는가 하면 또 가끔은 눈길 한번 제대로 마주치지 않고 낯선 모습으로 한 달을 그냥 지나치는 인연도 있다.
오늘도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 두 명의 수강생이 있다. 한명은 퇴직하고 배워둔 중국어를 잊어버릴 가봐 다시 학원을 찾으셨다는 분인데, 강의를 시작해서 며칠 후 나한테 조심스럽게 이런 질문을 해오시는 거였다. <어떻게 돼서 중국에서 아나운서를 하셨던 분이 학원 강사를 하십니까?> 나는 처음에 그 질문의 뜻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얼버무렸다.
나중에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니 아나운서라는 경력을 살려 한국에서 방송 쪽 일도 해볼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았다. 방송국 아나운서 경력은 10년 전쯤 일이고 그 경력도 짧아 한국에서 내세울 만한 것이 못되고 나는 그저 당장 취직하는 것이 급했다고 얘기를 드렸더니 학원에서 강의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꿈을 잃지 말라고 격려해주셨다.
꿈, 어느 한 때는 듣기만 해도 마음 설레였던 그 단어가 머리 속에 다시 떠오르니 순간, 어느새 멀어진 내 꿈과 쫓기듯 한국에 왔던 지난 일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생각들이 썰물처럼 밀려왔다. 아프지만 직시해야 하는 현실, 그리고 시시각각 내가 살아있음을 환기시켜준 분이라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데 오늘은 가방에서 슬그머니 종합 영양제를 꺼내주시면서 너무 무리하지 말고 건강 챙기면서 일하라 격려해주신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국 타향에서 누군가로부터 오는 이런 관심은 사람을 무척 감동시킨다. 다른 한명은 지난 2개월간 hsk(한어수평고사) 5급 시험 준비 과정을 들은 학생이다. 오늘 갑자기 연락이 와서 hsk 5급 시험을 봤는데 좋은 성적이 나왔다며 모두 선생님 덕분이라며 고마움을 전했다.
워낙 기초가 좋았고 성실해서 각별히 정이 갔었는데 높은 점수로 합격했다니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람쥐 채바퀴 도는 일상에 지칠 때가 많지만 나를 선생으로 받아주고 정을 보내는 이런 수강생들 때문에 힘을 내군 한다.
서울 생활이란, 화려하고 또 치열했다. 돈이 있으면 누릴 곳도 많고 가질 수 있는 것도 많지만, 내 능력이 허락되지 한 눈앞의 모든 것은 그저 그림 속의 떡이다. 나는 날마다 조금 더 많은 것을 얻고, 성취하려고 부지런을 떨고 그 속에서 소소한 즐거움, 행복을 찾아보려고 애를 쓴다.
다 알아듣는 듯 하지만, 도처에 모르는 말이 널려있고, 인간사 다 비슷하지 뭐, 그러다가도 낯선 한국의 풍경에 눈이 돌아가기도 한다. 당장 학원 월급이 낮다는 걸 알고 시작했지만, 막상 닥쳐온 현실은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수록 나만 더 비참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그 옛날의 방송국 기자, 아나운서도 아니고, 탈북자들을 위해 일하는 인권활동가도 아니다. 이 땅에서 나는 불러주는 곳에 가서 열심히 중국어를 가르치고 일한만큼 얻으며 그것에 고마워해야 하는 중국어강사일 뿐이었다.
내 자신의 과거에 매여있을 수록 내 발걸음은 더욱 더디어지고 옛날의 영광을 떠올릴수록 나는 더 작아질 수밖에 없다. 낯선 이 땅에서 나를 알아줄 사람이 그 누가 있으랴, 오로지 내 실력으로 나의 존재를 다시 증명하는 수밖에….
학원 월급은 적지만 기업 강의, 개인과외가 늘어나면 조금씩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며 학원을 나섰다. 시리도록 눈부신 서울의 밤거리가 나를 반겨준다.
전철역, 버스 역에는 퇴근 후 술한잔 걸친 사람들로 넘쳐난다. 웃고 떠들고, 또 가끔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면서 우리 모두는 하루를 살아냈다. 나도 그 사람들 속에 있다.
또 한해가 저물어간다. 내년에는 보다 자신감을 갖고 중국어강사라는 이 영역에서 실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나만의 영역을 확대해 나갈 것이다. 중국동포라는 편견을 딛고 낯선 한국 땅에서 정착하기 위해서는 온갖 도전과 시련을 감내해야 한다. 모든 걸 이겨내고 해마다 조금씩 더 단단해진 모습으로 내 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부터 하나, 둘 쌓아올리고 또 그렇게 하나, 둘 딛고 서다보면 어느새 한국인들과 어깨 나란히 경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때에는 곧고 든든한 뿌리가 이 땅에 깊이 내려져 있는 거 아닐까 기대해본다.
<끝>
@동포세계신문(友好网報) 제329호 2014년 12월 23일 발행 동포세계신문 제329호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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