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열며
위대한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뒤뜰에 있는 큰 바위를 보았습니다. 반은 땅 속에 묻혀있고 반은 나와 있어서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돌을 보면서 ‘쓸모없는 돌이 왜 여기에 있어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느냐’고 불평과 불만을 터뜨렸지요.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돌 속에 다윗이 들어있다. 다윗이여, 나오라.”
미켈란젤로는 그때부터 수 만 번의 정을 쪼아가면서 거대한 돌을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조각상인 다비드 상으로 변신시켰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그 쓸모없는 바위만을 보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바위 안에 있는 다윗을 보았고 그 다윗을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전 세계인들이 인정하는 걸작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세상은 주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으로 그 어떤 것도 소중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겉모습만을 바라보고 쉽게 단정하고 포기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를 비롯해서 많은 이들이 중요한 것을 찾지 못하고, 헛된 것만을 쫓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중요한 것을 바라보라고 강조하여 말씀하시지요.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 그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 아니며, 그래서 감탄할 필요도 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세상의 종말에 대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이 말씀에 사람들은 걱정이 되었는지 어떤 표징이 나타 나냐고 묻지요. 예수님은 답변하세요.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종말 언제 올지, 그 정확한 시기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의 추측이나 계산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 부분은 하느님께만 맡겨진 것이기에 우리가 굳이 그 종말의 때를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하여 주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것이지요.
어느덧 11월이라는 시간도 끝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달력을 바라보면서 한 것도 없는데 시간이 참 빨리 간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의 빠름만을 한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보다는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을 생각만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주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의 계명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세가 주님을 따르는 것이고, 종말을 준비하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빠다킹신부
세상의 종말
-서현승 신부-
약 15년 전쯤에 한바탕 ‘휴거’ 소동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묵시적 표현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세상의 종말을 예언하며 준비되고 선택된 이들만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 하늘로 들어올려져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이었죠.
세기가 전환되는 때였던 지난 1999년에도 예언가들의 말을 빌려 한바탕
사이비 종말론이 극성을 부리더니 요즘에 또 다시 인류의 대재앙설이 회자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인류의 고대문명을 이루었던 마야인들에 의해서 예언된
해인 2012년을 전후로 여러 생태 환경적 요인들로 인한 지구의 파국을 거론하고 있는 형국이죠. 지난 종말론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2012년 대재앙설은 종교적
종말론의 관점이 아닌 상당히 과학적인 근거들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 정도입니다.
문득 오늘 복음에서마저 세상의 물리적 종말을 예언하는 듯한 예수님의 말씀은
딱 오해받기 쉽겠단 생각이 듭니다. 세상의 종말을 내심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필요한 말씀들로만 ‘취사선택’해서 인용하기 좋은 말씀들이죠.
개인적이든 공동체적이든 종말은 언제고 올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시작이 있었다면 끝이 있는 것은 당연지사이니까요. 오히려 저는 그러한 ‘끝’이
있기에 언젠가는 끝날 모든 것에 대해 미련을 갖지 않고 영원한 것을
그리워해야 할 이유가 생긴다고 여겨집니다. 누군가가 말했다는 세상의
종말 앞에서도 사과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그 마음은 영원에 대한 소망과
그 실현이 이미 지금 시작되고 있다는 깨우침에서 비롯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
-정애경 수녀-
연중 제34주간은 교회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간이다. 이제 며칠 후면 새해를 맞이하게 된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교회의 전례는 세상의 종말과 그 징조에 대해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화려하게 장식된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이고, 종말의 끔찍한 표징들이 있을 것이며 당신을 사칭한 자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세상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님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종말은 오지 않았다. 제자들이 예수께 언제 그러한 때가 오겠느냐고 묻자 예수께서는 종말의 징조에 대해 말씀하시면서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하신다. 우리의 현실이 마치 종말로 치닫는 징조로 보이지만 예수님은 그런 징조에 속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도대체 무엇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하느님께서는 종말로 치닫는 인간의 잘못에 대해 경고는 하시지만 그것으로 인한 세상의 종말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속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나의 구원과 관계없는 것에 속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 안에서 겪는 나의 참담한 상황, 곧 직장을 잃고 병으로 고통 받으며 경제적인 이유로 가족이 해체되고, 범죄와 무질서로 사회가 무너지고, 테러와 전쟁으로 무고한 이들이 생명을 잃고, 지구 온난화로 인한 심각한 자연재해 현상`…. 이러한 표징들 안에서도 결코 이 세상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은 심판자이시지만 그 이전에 우리를 살리고자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이시다.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들어줄 것이다. 나는 자비하다.”(탈출 22,26)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여러 표징이 나타날 때 그것을 인간의 잘못에 대한 심판의 때로 알아듣기보다는 다시 주어지는 새로운 구원의 시작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곧 그러한 안목을 가질 수 있도록 오늘 우리의 믿음을 촉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이며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이다.(2코린 6,2 참조)
우리 자신의 종말에 대한 묵상
-한영일 신부 -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어제에 이어 오늘도 저와 함께 복음 말씀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초점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반듯이 종말이 있을 것이며 우리 자신의 종말 즉 죽음에 직면할 때 우리가 한 일에 후회없이 만족할 수 있도록 이 세상에서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야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 자신의 종말에 대해 함께 묵상해 보도록 합시다. 옛날에 땅 갖기를 좋아하는 욕심쟁이가 있었습니다. 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땅을 꼭 사곤 했습니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는 그를 불렀습니다. "네 소원이 무엇인가?"
"예, 땅을 많이 갖는 게 소원입니다." "그러면 네가 좋아하는 땅을 선물로 주겠다. 여기 이 말을 타고 하루동안 마음껏 달려라. 네가 탄 말이 밟고 지나간 땅은 모두 주겠다."
이 욕심쟁이는 신이 나서 다음날 아침 새벽부터 말을 몰고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지고 밤이 되도록 쉬지 않고 말을 달린 욕심쟁이가 돌아왔습니다. 큰 땅 부자가 된 그를 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부러운 눈으로 자기를 쳐다보는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던 욕심쟁이는 긴장이 풀려 말에서 떨어져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이런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사람의 땅은 이 나라의 절반이나 될 뻔했지만 지금 그의 땅은 한 평의 무덤 밖에 없도다.'
우리는 권력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남에게 인정받고 뻐기고 싶은 욕심, 마음껏 놀고 싶은 욕심, 좋은 집, 좋은 차, 갖고싶은 욕심 등등 하루를 살아가면서 온갖 종류의 욕심이라는 두 글자의 유혹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 욕심을 잘 조절하여 잘 다스리는 것이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길이요 덕인이 되는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종말이 올 때 쯤에는 무서운 일들과 기근과 전염병, 지진 등 굉장한 징조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 개인의 종말에 대해서는 무슨 징조가 없을까요? 애청자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저도 모르겠습니다. 죽어 본일 없이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형님이 네 분이나 계셨는데 세 분은 이미 작고하시고 한 분은 메리놀 병원 중환자실에서 한 달이 넘도록 투병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제 느낌에 형님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아마도 자기 삶의 종말을 예견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삶에서 벗어나 늘 깨어 준비하는 생활을 하기를 주님께서는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원숭이를 잡는 이야기로 오늘 묵상을 마치겠습니다.
원주민이 자그마한 조롱박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밤과 땅콩 같은 것을 가득히 넣어 가지고 해가 질 무렵에 그걸 커다란 나무에 튼튼히 매달아 놓았습니다. 밤이 되자 뭔가 먹을 것을 찾아 헤매던 원숭이가 나무에 올라 이 조롱박을 발견하고 조롱박 안에 먹을 것이 들어 있는 것을 안 원숭이는 얼른 그 안에 손을 넣었습니다. 조롱박에는 간신히 손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었고 이 구멍을 통해 원숭이는 손을 조롱박 속에 넣어 땅콩과 밤을 집었습니다. 그렇지만 구멍이 작아서 땅콩과 밤을 집은 손은 빠지지가 않았습니다. 손을 빼려 안간힘을 쓰지만 손이 빠질 리가 없었습니다.
어느덧 아침은 밝아 오지만 땅콩을 잡은 원숭이의 주먹은 빠지지 않고 있습니다. 원주민들이 다가와 미련한 원숭이를 사로 잡았습니다. 주먹에 든 먹을 것만 놓으면 손이 빠질텐데 - 그리고 목숨도 건질 수 있었을텐데 - 안녕히 계십시오 내일 또 뵙겠습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통해
-오 마리아 수녀-
지난 여름 미국에서 카트리나라는 무서운 허리케인으로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재난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그 일이 미국에서 일어났는데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재난을 당했다면 제3세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얼마나 더 큰 재난이 있었을까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나라도 지난 추석에 충청도에 뜻하지 않은 폭우로 농경지가 모두 물속에 잠겼을 때 한 농부가 뉴스 인터뷰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뭐, 할 수 있습니까? 하느님이 하시는 일인데요.” 천재지변 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할 수 있는가. 과학이나 어떤 준비로도 당해낼 수가 없었던 이런 체험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오늘 복음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즈음 어떤 징조가 나타나겠는가고 묻는 장면을 본다. 예수께서는 그때를 말씀하시지 않고 다만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며 끝날이 곧 온다고만 하셨다. 아마도 이것은 언제나 준비하고 있으란 말씀이신 것 같다. 나 역시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통해 그런 징조를 보기보다는 어떤 외부적 큰 사건을 통해 주님을 알고 싶어하는 것 같다. 좀더 내 맘을 예민하고 섬세하게 들여다보며 마음을 닦고 그분의 움직임에 반응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런 우화가 있다. 두 사람이 굴뚝을 청소했는데 한 사람은 얼굴에 까맣게 검댕이 묻어 있었고 또 한 사람은 깨끗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굴뚝 청소를 끝내고 얼굴을 닦으러 간 사람은 검댕이 묻은 사람이 아니라 깨끗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상대방 얼굴에서 검댕을 보는 순간 자기 얼굴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진정 자기가 무엇을 했는가를 생각하며 그후에 일을 준비하고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 전상규 신부-
예루살렘 성전은 실제로 기원 후 70년경에 성전 파괴라는 재앙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단순한 역사적인 비극이었을 뿐, 세상의 종말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군가 자칭 그리스도라 하더라도 속지 말라고 경고 하셨고,
전쟁과 반란의 소문을 듣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겉모습을 보고 감탄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누구보다 먼저 그것의 허무한 끝을 보셨습니다.
아름답고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이는 성전이 파멸되어 없어지듯이,
세상 모든 것에는 다 끝이 있습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모든 것도 변하고, 늙어가고,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도 언젠가는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끝 날이 언제 올지는 예수님만이 아시고, 우리가 아는 것은
오늘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인은 막연히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의 종말이 있지만,
그 종말을 날마다 준비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끝이 있기 때문에, 그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오늘에 의미부여를 할 수 있고,
그래서 더욱 소중한 오늘입니다.
오늘은 영원히 단 한번밖에 오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을 어떤 믿음으로, 어떤 마음으로 사랑하며 살았는지
세상 끝날 주님께서 물어보실 시간이 바로 오늘입니다.
“세상이 유지되는 밑바탕에는 주님께만 최종적인 희망을 두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홍성만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두고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를 하는 몇몇 사람을 향해, 찬물을 끼얹는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이에 그들이, 이러한 일이 언제, 그리고 어떠한 표징으로 나타나겠느냐는 질문에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이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반드시 먼저 벌어지고 말 '그러한 일'들이 현재의 세계 역사 속에서 누누이 일어나고 있지만 '바로 끝이 아니다'라는 말씀과 함께 '속지 말고 뒤를 따라가지 말며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씀에 시선을 집중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헤쳐 나가지 못할 것만 같은 어두운 이 세상이지만, 주님께 궁극적인 희망을 두며, 속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이 세상은 유지가 됩니다. 이렇게 세상이 유지되는 밑바탕에는 주님께만 최종적인 희망을 두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나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암혹의 시기마다 성인ㆍ성녀들이 탄생했음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주님만 희망을 두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풍요로운 마지막 날
-김현영 신부 -
오늘의 성경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시면서 세상의 마지막 날이 오기 전 여러 가지 징표에 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리스도교를 표방하는 여러 종파에서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면서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던 사건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헌납하고 마지막 날을 기다렸지만 지도자들이 예고하였던 그 어떤 사건도 표징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허탈하게 공황 상태에 이른 추종자들에게 계산이 잘못되었다는 등의 변명을 일삼다가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간 여러 사건들을 접하면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루가 21:8)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고 표방하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제대로 믿고 따르지 않는 것과 그러한 잘못된 지도자들이라고 칭하던 사람들의 거짓된 언행만을 따르고 성경의 말씀을 소홀히 하는 추종자들 모두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굳이 ‘참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 즉, 사랑의 복음 말씀에 기초하여 세상의 삶을 올바로 살아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어 당신의 목숨까지도 내어놓으셨던 하느님의 사랑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세상에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은 언젠가는 올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개인의 삶이 끝나는 날 즉,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순간이 될 것이고, 세상에는 어느 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가 참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서로 서로를 사랑하여 미움과 질투 그리고 싸움과 전쟁이 사라질 때, 이 세상이 바로 천국이라 여겨질 때가 세상의 마지막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때에는 더 이상 지상의 삶이 필요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요?
먼저 나부터 출발하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루 하루의 삶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이 날은, 어제 죽어간 사람이 그토록이나 더 갖기를 갈망했던 내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노라면, 나의 오늘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하루가 더 주어진다면, 사과나무를 심는 것보다 더 하고 싶은 일, 즉, 나를 사랑해준 이들에게 ‘고맙습니다’, 나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에게 ‘미안합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하지 못했던 그 말 ‘사랑합니다’라고 진정으로 전하고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이요 기회입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갑자기 들이닥친 생애 마지막 사건에 초연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매 순간 기쁨을 살 수 있다면 인생 전체를 기쁨의 바다에서 유람할 수 있을 것이며, 나의 기쁨으로 다른 이들에게 희망을 선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이 세마디가 세상에서 미움도 질투도 갈등도 전쟁도 없앨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 아내, 남편, 부모, 자식, 형제들, 동료들, 이웃들에게 여러분이 먼저 이 말들을 고백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풍요로워 질 것입니다.
신뢰심과 인내심 갖기
-백광현 신부-
언젠가 불후의 명작 ‘벤허’를 본 적이 있습니다. 벤허가 잡혀 배를 젓는 노예가
되어 해전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해전은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치열했습니다. 게다가 벤허가 탄 배도 말이 아니었고 얼핏 보기에 그들이
패배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전세를 가늠하기 어려웠을 때 그 배를 지휘하던
지휘관은 그들이 패배한 줄 알고 자살을 결심합니다. 그 때 벤허가
자살을 하지 못하도록 노로 지휘관의 머리를 쳐서 기절시킵니다.
한참 뒤에 지휘관이 깨어났을 때 그는 승전보를 듣게 됩니다.
그가 기절한 사이에 전세는 역전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가끔 우리에게 불리한 현실에 직면할 때 상황에 따라서
우리의 패배와 실패를 쉽게 속단해 버리고 포기하는 경향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속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악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계획이 아니라 그분의 계획에 온전히 맡기고 살아갈 때
패배나 실패처럼 보였던 상황이 바뀌어 더 큰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이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신뢰하고
인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늘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나를 허무는 것들
-강영구 신부-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 너희가 성전을 바라보고 있지만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날이 올 것이다.”
그대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습니다.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를 무너뜨리는 무서운 적인지도 모르고 함께 삽니다.
정말 무서운 적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독소가 온 몸에 퍼져서 죽음에 임박해서야 알게 됩니다.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때가 늦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적이 아닙니다.
설사 적이라 해도 눈에 보이는 것은 쉽게 이길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있으면서 나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은 아름다운 돌과 예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겉모습은 견고하고 아름답지만 무너질 위험에 처해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과 견고함에 도취되어 안으로부터의 허물어짐을 감지하지 못하는 성전이 안타까워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눈물 흘리면서 한탄합니다.(루가 19,41)
하느님의 사람 예수님의 눈에는 성도(聖都) 예루살렘의 폐망이 훤히 보입니다.
AD66년 로마의 황제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완전히 파괴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린 것은 로마 제국이 아닙니다.
내부로부터 이미 다 허물어진 예루살렘을 로마제국이 발로 찼을 뿐입니다.
독선과 오만으로 하늘을 외면하고,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욕망과 아집이 예루살렘을 무너뜨렸습니다.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겸손한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오늘 내 삶의 동기와 지향은?
-박상대신부_
어제 복음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동전 두 닢이라는 과부의 헌금(루가 21,1-4)이 과연 자신의 가진 것 모두를 바친 것인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당장은 알기 어렵지만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다. 그 ‘언제’란 바로 종말 때의 심판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종말까지 갈 필요는 없다. 누구보다 자기 스스로가 자신이 행한 행동의 동기(動機, motive)와 지향(志向, intention)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바치는 헌금의 가치는 헌금하는 자의 마음이 결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늘 제3자의 시각과 판단이다. 부자가 넉넉한 가운데서 많이 바치고 자랑스럽게 뽐내는 행동과, 과부의 경우처럼 가난한 사람이 어려운 가운데서 가진 모든 것을 바치고도 부끄러워 미안해하는 행동은 겉으로만 보이는 제3자의 인식이다. 그러나 부자와 가난한 자의 그 속마음과 사정을 제3자가 어떻게 알겠는가? 따라서 제3자의 인식에는 분명히 모순(矛盾, contradiction)과 불일치(不一致, discrepancy)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종말의 공심판이 필요한 셈이다.
교회 전례력의 마지막 주간(화~토요일)에 들려주는 매일미사의 독서와 복음말씀은 모두 세상종말에 관한 내용이다. 독서는 홀수 해의 경우, 다니엘서(1-7장)의 말씀을 듣고, 짝수 해의 경우에는 연중 제33주간 월요일부터 34주간 토요일까지 요한 묵시록(1-22장)의 말씀을 듣게 되며, 복음으로는 루가복음 21장을 듣는다. 모든 내용이 종말론적이고 묵시(?示) 문학적인 성격을 아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종말과 묵시적 성격이란 세상이 이제 그 마지막에 직면하여 드러내거나 맞이하게 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말한다. 계시(啓示, revelation)라는 개념이 ‘시작’과 관련하여 새로운 것과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는 단어라면, ‘종말’과 ‘묵시’와 관련하여 드러나거나 맞이하게 될 일들을 대표하는 개념은 현현(顯現, epiphany)과 폭로(暴露, apocalypse)라는 단어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의 종말을 선언하는 대변화, 죽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 생자(生者)와 사자(死者)에 대한 그분의 심판, 그리고 종말 후의 내세(來世)에 관한 일 등이다.
성서(聖書)상 종말과 묵시문학적 유형으로는 구약의 다니엘서(BC 160년경)와 신약의 요한묵시록(AD 100년경)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구약시대 말기에 편집된 묵시문학적 작품들은 ‘에티오피아어 에녹서’, ‘희년서’, ‘시빌라의 신탁’, ‘열두 족장의 유언’, ‘모세의 승천기’, ‘솔로몬의 시편’, ‘제2 에즈라서’, ‘시리아의 바룩서’ 등 그 규모가 실로 방대하다. 묵시문학의 발생원인은 이스라엘이 외세의 지속적인 침략에 의해 주권(主權)을 잃고(BC 721년 북왕조 멸망, 587년 남왕조 멸망과 유배생활, 333년부터 알렉산더 대왕과 희랍의 지배, 63년부터 로마제국의 지배) 의기소침한 가운데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주권회복을 야훼 하느님이나 그분의 사자(使者) 또는 메시아에 의탁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묵시문학은 천지창조부터 세상종말까지의 환란과 난세의 역사를 다루면서 종말사건과 내세를 통한 통렬한 개벽(開闢)과 역전(逆轉)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염원하던 개벽과 역전은 없었고, 한 가닥 독립전쟁(AD 66-70)의 시도마저 여지없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 대가로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이스라엘 자존심의 상징인 성전까지 불타고 말았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께서도 공생활 마지막 시점에서 세상종말과 관련하여 묵시문학적 가르침을 주셨다.(마태 24,1-25,46; 마르 13,1-37; 루가 21,5-36) 그러나 예수님의 종말교훈은 이스라엘의 염원이나 묵시문학자들의 생각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것은 구약의 묵시문학적 염원과 예언의 성취자로 예수께서 이미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도래는 단지 ‘사람의 눈으로 오는 것을 볼 수 없을 뿐’(루가 17,20)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임재(臨在)하여 있는 하느님 나라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끝나는 것도, 가짜 그리스도의 출현이나 반란과 전쟁, 기근과 전염병이나 지진과 우주적 징조로도 끝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왜 공관복음들이 제각기 예루살렘성전의 파괴, 종말의 시작, 큰 재난의 예고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최후 만찬을 앞둔 시점에 배치하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다.(마태 24장; 마르 13장; 루가 21장) 예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파스카의 성삼일)을 목전에 두고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면서 당신의 몸으로 이루어질 신약(新約)의 새로운 성전을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돌과 사람들이 갖다 바친 예물로 인해 겉으로만 화려한 성전을 보고 넋 나간 듯이 감탄하지 말고, 그 성전 안을 맑은 눈과 마음으로 들여다보며, 자신의 성전을 내적 아름다움으로 채우는 일이다. 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당하는 불행의 결과만 놓고 땅을 치며 통곡할 것이 아니라 그럴수록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침착하며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헛되고 표면적인 가치나 사상, 특히 부(副)나 재물이나 돈 같은 맘몬(Mammon)이나 우상을 따르지 말고, 오직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과 가르침을 귀 기울여 듣고 마음에 새겨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종말보다 오늘 내 삶의 동기와 지향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가 21 5-11)
-유 광수신부-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 질 때가 올 것이다."
오늘 복음은 이 세상이 끝날 때 어떻게 될 것인가를 미리 알려 주는 말씀이다. 이 세상도 언젠가는 끝나는 날이 올 것이고 인간도 누구나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안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죽음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지에 대해서 늘 관심을 갖고 살아간다. 언젠가는 반드시 올 세상 끝 날은 그리고 나의 죽음은 불행한 일이거나 슬픈 일이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들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 뿐이다. 즉 그 동안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안개 속에 쌓였던 신비스런 세계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 뿐이다. 따라서 세상 종말이 온다는 것은 비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기쁨일 수도 있고 완성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정몽준 후보와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 치열한 경선 끝에 마침내 단일화를 이루워져서 그 동안 말도 많고 문제도 많았던 일들이 하나로 정리되고 일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듯이 나의 죽음은 그리고 세상 종말은 굳이 불행한 일이거나 비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마침내 우리가 바라던 때가 되어 모든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단일화가 두 사람 중에 하나가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있었듯이 나의 죽음 후에 올 세계가 그리고 세상 종말에 일어날 일들이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이 누누히 말씀하셨던 것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종말에 가서 일어날 일들은 지금 현재 나의 삶과 무관한 전혀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의 현재의 삶의 결산이 종합적인 평가가 될 것이다. 즉 지금 내가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열심히 살았으면 상을 받을 것이고 아무리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살았다면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끝을 향해 가고 있다. 반드시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 세상이 올 것이다. 아니 우리는 매일 낡은 것을 보내고 새로운 날을 맞이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는 것이며 하루 하루 지나가듯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언젠가는 모든 것이 다 완성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시간을 물을 흘러보내지 않고 고여있게 하면 반드시 썩듯이 매순간 영원을 향해 흘러가는 현재의 시간을 흘러가는 리듬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변화되지 않고 마치 영원히 살 것 같이 현재의 것들에 집착되어 있다면 새로워지지 않고 마침내 썩을 것이다. 따라서 루가는 종말과 현재의 삶이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계획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역사 속에서 실현시키신다. 즉 죽음과 부활이라는 서로 대립되는 삶을 통해서 구원 계획을 보여주시고 실현시키신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위해서 먼저 죽으셨다. 즉 이 세상을 그리고 나의 죽음을 심판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세상 종말이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라고 묻는 질문에 "너희는 잘못 이끌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 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겁내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바로 끝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세상 종말에 가서 갑자기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 오셨고 그분의 심판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 자신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듯이 우리가 나와 이웃의 구원을 위해 죽지 않으면 세상 종말에 영광스럽게 부활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심판하는 것은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2,19-20)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삶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살도록 불리움을 받은 이들이고 그것을 증명하도록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이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라고 말씀하셨듯이 세상 끝 날에 그리고 나의 죽음에서 영광스럽게 부활하려면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삶은 오늘 내가 걸어가야 할 삶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삶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온갖 사치와 화려함으로 자기 자신을 꾸미며 사는 삶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으나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어제 복음에서 이야기한 부자들 즉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라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생명까지 다 바친 예수님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바로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주님께 예물로 다 바친 가난한 과부이다. 그래서 가난한 과부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델이라고 말한 것이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 이 세상도 인간의 운명도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 또한 이 세상의 惡도 善도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이 모든 것을 증명하고 심판할 것이다. 즉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진 낡은 성전은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나듯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즉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파괴되듯이 그렇게 피괴 될 것이다. 새로운 성전은 물질적인 것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루가 20,17)라고 말씀하셨던 십자가 위에 세워진 성전만이 남아 있을 것이며 승리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 제물에 또는 자기 자신 위에 성전을 짓는 사람들이 아니라 모퉁이 돌 즉 십자가 위에 성전을 짓는 사람들이다. 십자가 위에 성전을 짓는 사람은 세상 종말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가에 대해서 굳이 궁금해할 필요도 없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이미 승리가 보장된 삶을 살고 있고 또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된 하늘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