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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7. 묵상글 ( 연중 제30주일. - 자비만 받고 구원은 받지 않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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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7. 연중 제30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0.27 05:36
- 자비만 받고 구원은 받지 않는?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점은 눈먼 이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구원하시는 분은 당연히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눈먼 이가 구원받기까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 과정의 시작은 말할 것도 없이 청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레미야서는 구원을 주십사고 이렇게 청하라고 합니다.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
그리고 오늘 복음의 눈먼 이는 청하라는 예레미야서의 권고대로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원받으려면 이렇게 예언자의 권고를 듣고 그대로 청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청하는 눈먼 이와
잠자코 있으라며 꾸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청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가 있다는 얘기이고,
지금 우리 가운데서도 청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이가 있습니다.
눈먼 이는 볼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자비를 청하는 데 반해
우리는 눈멀지 않은 것 때문에 청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봅니다.
볼 수 있다고 하여 자비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한번 자문해봅시다.
볼 수 있어서 자비를 청하지 않는 사람과
볼 수 없기에 자비를 청하는 사람 사이에 누가 옳고 누가 궁극적으로 행복합니까?
하느님 자비가 필요하다고 믿고 청하는 사람이 옳고 행복하지 않습니까?
반대로 눈이 멀지 않은 것 때문에 하느님 자비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청하지 않는 사람은 눈멀지 않은 것 하나 때문에 불행하지 않습니까?
제가 이렇게 자문하는 것은, 제가 그런 사람일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이 나이에도 다른 분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성인병이 하나도 없고,
그래서 하느님 자비를 간절히 구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진정 두렵습니다.
그런데 더 두려운 것은 건강하기에 자비를 구하지 않는 것보다
구원을 청하지 않는 나는 아닐까 하는 점입니다.
사실 자비를 청하는 것과 구원을 청하는 것은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열 나환자가 같이 자비를 청해 치유 받았지만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치유만
받고 입 싹 닦은 데 비해 이방인 하나만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감사드렸지요.
자비를 받아 치유 받은 유대인들은 치유만 받고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고
그래서 자비를 받았지만 구원받지는 못했습니다.
치유의 자비를 받고도 치유만 발생하고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에게 하느님은 구원자가 아니라 치유자 또는 의사일 뿐입니다.
그리고 치유만 받고 아홉 유대인처럼 입 싹 닦고 제 갈 길을 갈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병원에 가 돈 내고 치유 받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지,
그것으로 인해 의사와 평생 인연을 이어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치유의 자비와 함께 구원자 하느님을 만난 복음의 바르티매오는
오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주님을 따라서 길을 나섭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끝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의 본보기이고,
자비도 받고 구원도 받는 사람의 본보기입니다.
그래서 자비만 받고 구원받지는 못하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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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7. 연중 제30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새 영세자가 하느님의 은혜를 많이 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새 영세자의 기도를 잘 들어주신다면서 말입니다. 단순히 새 영세자에 대한 축하한다는 의미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그럴 수 있겠다 싶습니다.
새 영세자는 하느님을 소유할 줄 모릅니다. 6개월간 교리를 받았지만, 아직도 모르는 것투성이기 때문에 소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느님 곁에 있을 뿐입니다. 아직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하느님 품 안에 있는 것으로도 기뻐합니다. 순수하게 하느님 품 안에 있으니, 하느님을 영적으로 만나고 그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더 커다란 은총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새 영세자와 달리 오랫동안 성당을 다니셨던 분은 하느님을 소유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저것을 요구합니다. 이제까지 했던 기도와 묵상, 봉사, 희생 등의 시간을 이야기하면서,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품에 머물려고 하기보다, 하느님을 소유하려 합니다. 자기 생각으로 만든 가짜 하느님을 만날 뿐입니다. 이런 가짜 하느님께는 아무리 요구해도 당연히 들어주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 크신 하느님의 소유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곁에서 존재하시면서, 우리가 그 안에 머물라고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종종 자기가 만든 가짜 하느님을 남에게 강요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게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니야.”라면서, 자기만의 가짜 하느님을 상대에게 강요합니다.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칩니다. 그는 볼 수 없으니 예수님 곁에 머물 수가 없어서 용기 내어 외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의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습니다. 예수님을 위한다는 이유를 내세우면서, 그가 예수님 곁에 머물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매오를 부르셨고,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갑니다. 겉옷을 벗어 던졌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으로 그는 족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말로만 예수님을 찾았던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 의지도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보게 되자마자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
하느님을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당연히 우리가 그분의 소유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바르티매오처럼 우리 마음속 의지가 새로운 삶을 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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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나는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것도 많다. 나는 유일한 한 명이다(헬렌 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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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7. 연중 제30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연중 30 주일, 10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드러내줍니다.
<제1독서>는 <예레미아 예언서> ‘위로의 책’(30-31장)의 핵심부분입니다. 바빌론 유배 중에 있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아는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어, 그들을 모아들이어 곧은길을 걷게 할 것인데, 그들 중에는 눈 먼이, 다리 저는 이 등도 있으리라고 말하면서(예레 31,7-8), 이렇게 위로합니다.
“그들은 울면서 오리니 내가 그들을 위로하여 이끌어 주리라.”(예레 31,9)
<제 2독서>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을 아론의 혈통을 넘어선 초월적 직분을 지닌 멜키시댁과 같은 영원한 사제로 선포됩니다(히브 5,1-6).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지 장님 바르티매오의 치유를 통해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눈먼 이의 치유’는 어둠 속에 있는 이가 빛을 보게 되는 것을 표상하는데, 예언자들에 따르면 메시아의 표지 가운데 하나입니다(이사 35,5; 시 146,8; 마태 11,5). 그렇다면, 누가 ‘눈 먼 이’인가?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이’(4,13; 7,18),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8,18),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완고한 이’(6,52; 8,17), ‘따로 설명해 주어도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9,32)이요,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는 예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가에’ 앉아 있습니다. 혹 지금 우리도 ‘가야 할 길 가’에 그냥 앉아 있지는 않는지요?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 47)
그분이 지닌 메시아의 권능을 믿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11,1) 예언서의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다.
사실, “다윗의 자손이시여!” 라는 외침은 용기 있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당대의 정치, 종교, 사회 지도자들이 배척했던 예수님을 감히 ‘큰 소리로’(마르 10,48) ‘메시아’로 고백하는 목숨을 건 장엄한 신앙고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눈 뜬 이들’이 보지 못한 ‘눈을 감은 장님’이 더 잘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장님인 그는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동전그릇도 버려두고 볼 수도 없으면서도 “겉옷을 벗어버리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갔습니다.”(마르 10,50).
그렇습니다. 이제 움츠리고 둘러쓰고 있는 위선과 기만의 옷을 “겉옷”을 벗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움츠리고 나 자신을 가리고 있는 ‘겉옷’은 무엇일까?”
저에게는 하느님의 일을 가리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게 하는 ‘내 생각’이 바로 ‘겉옷’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나 자신의 이기심’이 바로 던져버려야 할 ‘겉옷’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제 생각과 이기심의 ‘겉옷’을 벗어버리고
당신을 옷 입게 하소서! 당신의 몸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눈 먼 거지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빤히 아시지만, 우리 자신이 그것을 알도록 ‘우리의 진정한 원의’를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 대한 믿음’을 보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당신께 대한 진정한 믿음으로 청하기 원하십니다. 당신을 신뢰하고 의탁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기를 원하시는 것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진정 원해야 하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는 이미 성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거지 장님은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51)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린애가 잃어버린 엄마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어 하듯이, ‘하느님을 보고 싶은 것’이 바로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아닐까요?
그리스어로 ‘보다’(αναβλεπω)라는 말은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다시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이 눈을 뜨기 위해서는 ‘항상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 곧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눈이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할 것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어놓으신 그분께서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걷어내고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하여 백인대장처럼, 우리가 “참으로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습니다.”(마르 15,39)라고 고백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곧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그분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될 때, 우리의 영적인 눈이 뜨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영적인 눈’이 열릴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 ‘새롭게 본다.’는 것은 ‘빛의 세계로 나아감’을 의미합니다. 곧 ‘빛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눈’입니다. 다름 아닌 믿음의 눈이요, 믿음으로 세상과 형제들을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
이제는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르티메오처럼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서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는 까닭입니다.
아니 마음이 완고하여 태양을 보지 않으려 한 까닭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 막을 걷어 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된 당신 사랑을,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주시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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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7. 연중 제30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의 눈을 뜨게 되기를 바랍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자비를 입으시길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던 바르티매오의 청을 들어주셨듯이 우리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시리라 믿으며 주님의 사랑으로 영의 눈을 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대학교에 근무할 때 졸업생의 결혼 주례를 몇 차례 하였는데 고 가밀라라는 학생은 시각 장애인과 결혼하였습니다. 일찍부터 봉사활동을 다니다가 장애인 선생님을 만났는데 7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았고, 부모님의 반대를 극복하고 결혼하였습니다. 자녀 셋을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어제는 아들이 양업고에 합격하였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들의 결혼 주례를 하면서‘육신의 눈보다 영적인 눈을 뜬 배우자를 맞이한 신랑은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눈을 뜨도록 만들어 준 신랑의 사랑을 받아들인 신부도 또한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영의 눈을 뜨면 세상 사람이 생각하는 장애는 결코 장애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 생각하는 그릇된 편견이 장애일 뿐입니다.
우리 눈을 세상의 현상을 드러난 대로 보는 육의 눈, 속을 헤아리는 마음의 눈, 이래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녀야 할 눈은 혜안으로 영적인 눈입니다. 다른 눈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영적인 눈을 지니지 못하면 아무것도 지니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영의 눈을 지니면 모든 것을 소유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내가 나를 바라보는 눈이 있고, 남이 나를 바라보는 눈이 있으며 하느님께서 바라보는 눈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내가 만족하고 많은 사람이 인정하더라도 하느님 눈에 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느님 눈에 꼭 들기를 희망합니다. 육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 하느님의 얼굴이요, 하느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보면,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유다인의 표현으로 자비라는 것은 애간장, 애타는 심정을 말합니다. 호세아서에서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이 마음을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11,18)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애간장이 녹는 안타까움! 이것이 바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이며 사랑입니다. 바르티매오는 바로 그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자신의 바람을 밝혔을 뿐 아니라 바람을 이뤄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을 큰 소리로 고백한 것입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겉으로 보면 눈먼 사람은 바르티매오였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하면 눈먼 사람은 주변 사람입니다. 이웃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잠자코 있으라”고 외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마르8,18)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위신,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눈먼 거지의 절박한 사정에 공감하며 그를 도왔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영의 눈이 뜨지 못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는 자기를 낫게 해 줄 분이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애타게 불렀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심정으로 발버둥 치듯이 그렇게 절박하고 간절하게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했고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자비를 입었습니다. 이러한 애절함과 믿음의 은총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옛말에 “마음의 바탕이 밝으면 어두운 방에서도 푸른 하늘을 볼 수 있고, 생각이 어두우면 환한 햇빛 속에서도 악마를 만나게 된다”(채근담).고 했습니다. 이웃을 향한 마음이 열려 있고 또 사랑을 하면 우리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에 무관심하면 그 자체가 어둠이요, 그 삶은 악마의 삶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고 또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럼에도 사랑을 살지 않는다면 스스로 하느님을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후 심판의 기준을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31-46).라고 하시며 이웃 사랑의 실천에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으로 눈을 떠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바르티매오를 불러오도록 명하시자 사람들은 태도를 바꿔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에게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합니다. 바르티매오는 그 소리를 듣고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습니다.” 겉옷은 그의 모든 재산입니다. 낮에는 햇빛 가리개요, 던져주는 돈을 받는 돈주머니요, 밤에는 이불입니다. 그를 감싸주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던져 버렸습니다. 이 시점에서 겉옷은 오히려 장애가 될 뿐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버리지 않고는 이웃에게 관심을 기울일 여유는 늘 없게 마련입니다. 내 것을 희생해야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모처럼 맞은 휴일 쉬고 싶지요. 당연합니다. 하고 싶은 것 해야지요. 그래서 돈도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재촉하시면 일어서야 합니다. 사랑이 나를 부르면 바르티매오처럼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생각하고 말고 할 것이 아닙니다. 이것저것 다 따져보고 언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꼭 잡으시길 바랍니다. 축복의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오늘 착한 목자 수녀회 수녀님들이 오셨는데 기회입니다.
바르티매오는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 간청은 “영적으로 눈 뜨게 해 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영으로 눈을 떠서 주님을 본다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큰 영광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영적인 눈을 떠 주님께서 계시는 집과 주님의 영광이 깃드는 곳에 마음을 두고 마침내 주님의 얼굴을 꼭 마주하시면 좋겠습니다. 한 주간, 먼저 내가 눈먼 이라는 것을 깨닫고, 간절함으로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며 구원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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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7. 연중 제30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달라스 지역에 어쩌다 ‘우박’이 내릴 때가 있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 우박을 보지는 못했지만, 우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박이 내리면 차량과 지붕에 피해가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우박이 내린 후에는 지붕 공사 업자들이 무상으로 검사를 해 준다고 합니다. 검사 후에 문제가 있으면 유상으로 고쳐 준다고 합니다. 보험이 적용되면 큰 어려움은 없겠지만 생활의 불편함은 감수해야 합니다.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지는 걸 막거나, 피할 수 없다면 그것도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원망한다고 우박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게도 우박과 같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10년간 별 탈 없이 쓰던 노트북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보통은 전원을 껐다 켜면 되는데 이번에는 그런 정도의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지붕 공사 업자와 같은 본당 청년이 있어서 노트북의 검사를 맡겼습니다. 고마운 청년은 노트북을 검사한 후에 몇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배터리가 팽창해서 위험하기에 배터리를 교체해야 한다고 합니다. 10년 된 노트북이기에 프로그램을 바꾸고, 용량을 키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프로그램을 바꾸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예전에 있던 자료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다른 자료는 다른 노트북에 있어서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다만 최근에 준비했던 강론과 강의 자료들이 없어져서 아쉬웠습니다. 내년 2월에 있는 ‘신앙강좌’ 강의와 10일 정도의 강론이 없어졌습니다. 이것도 제게 내린 우박이라고 생각합니다. 피할 수 없으면 받아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 시간이 있고, 강론도 다시 준비하면 됩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더 좋은 강의와 강론을 준비하도록 기회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자료는 없어졌지만, 그것을 준비했던 저의 노력과 시간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노트북도 새로 마련했고, 자료는 가끔 외장 하드에 저장하면 됩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라는 말이 있지만 그래도 고치면 좋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임께서는 당신 찬미를 즐기라 재촉하시고, 당신을 향하도록 우리를 만드셨으니,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불안합니다.” 우리의 건강에, 우리의 사업에, 우리의 가족에게 우박이 내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 의탁하면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받아들일 것과 피할 수 있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큰 우박을 맞았던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티메오의 아들 바르티메오라는 눈먼 거지의 이야기입니다. 눈이 멀었던 바르티메오는 일을 할 수 없기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눈이 먼 것에 대해서 세상을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눈이 먼 것에 대해서 부모를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르티메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오웅진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얻어 먹을 수 있는 힘만 있었도 은총입니다.” 열심히 얻어먹던 바르티메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걷게 해 주셨고,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셨고,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는 사람을 듣게 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눈도 뜨게 해 주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바르티메오에게도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르티메오의 앞을 지나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르티메오는 큰 소리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말렸지만 바르티메오는 더욱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이 자손이신 예수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메오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바르티메오는 평생의 소원을 말씀드렸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바르티메오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소경이 아니었습니다. 바르티메오는 운명처럼 우박을 맞아서 소경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르티메오가 죄인이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르티메오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드디어 바르티메오는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보고 싶은 일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르티메오는 다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바르티메오는 세상을 보는 육체의 눈을 뜬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르티메오는 영원한 생명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뜬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영적인 눈을 뜰 수 있도록,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이렇게 청하면 좋겠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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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7. 연중 제30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무엇을 간절히 원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만약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눈앞에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차지하려고 하겠지요? 누구나 그럴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눈먼 사람이 이런 입장이지 않았을까요?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매일 앉아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눈이 안 보이면 귀가 발달한다는 말을 다들 아시지요?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그를 설레게 했을 것입니다.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라는 사람을 만나야겠다. 내게 희망은 이제 그것밖에 없겠다.’ 그런데 또 소문이 들립니다. 그 예수라는 사람이 지금 마을로 들어오고 있다는 소문 말입니다.
그가 눈을 뜨기 위해 무엇을 했을까요? 약을 사서 써보기도 하고 용한 의원에게 가보기도 했겠지요? 다른 신에게 재물을 바치고 기도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 소용없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희망이라고, 이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리를 지릅니다. 얼마나 멀리 있는지 모르기도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지릅니다.
그렇게 그는 주님을 만났고 그래서 나았습니다. 그가 원한 것은 주님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믿은 것은 ‘예수는 나를 고칠 수 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대는 주님께 무엇을 원하십니까? 원하는 것을 얻고자 열심히 기도하고 계십니까? 그런데 순서가 조금 잘못되었다는 생각 안 드십니까? 먼저 주님을 만나야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주님 앞에서 소리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다시 내게로 돌릴 수 있습니다. 간절한 마음과 믿음이 우리의 기도를 이루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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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버거
얼마 전 오랜만에 ‘롯⭘리⭘’에 들렀습니다.
얼마만인지 그 마지막이 기억나지도 않았습니다.
어릴 적 참 좋아했던 햄버거
그래서 지금 몸매가 햄버거가 됐지만요.^^
문을 열고 들어서니 옛 기억이 새록새록 올라왔습니다.
그때 그 시절 제게 최고의 햄버거는 ‘데리버거’였습니다.
기억 속에 있는 ‘데리버거’를 주문했습니다.
잠시 기다린 후 버거를 받아 들었습니다. 그때 든 생각은 이것입니다.
내가 커져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참 많이 작아졌다. ‘데리버거’
그 시절엔 제가 몸도 작고, 손도 작고, 입도 작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어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로 안 되겠군! ^^
희망합니다. 몸이 커진 만큼 마음도 커졌기를…. 제가 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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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7. 연중 제30주일. 키엣 대주교님.
믿음이 은총의 시작입니다
볼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눈먼 거지의 어둠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물리적인 어둠 속에 사는 사람
볼 수 없기에 갇힌 삶을 살고 있습니다. 빛의 아름다움과 세상의 경이로움을 알 수 없고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도 볼 수 없습니다.
마음까지 어둠에 갇혀 사는 사람
그가 보는 세상은 온통 검은 색이고 사람들 모두 검은 색 옷을 입고 검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매일 먹는 밥 역시 검은 색입니다.
어둠의 장벽으로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
언제나 그 자리에 있건만 그를 의식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께 달려갈 수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뿐인데 그것마저 제지를 당합니다. 평생 어둠이라는 감옥에 갇혀 사는 그에게 어둠의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문은 없습니다.
사회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그를 주님께서 불러 주셨습니다.
희망과 믿음의 빛
주님을 만나기도 전에 그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자 마자 ‘희망’이 생겼습니다. 또한 오직 주님만이 자신을 어둠에서 구해줄 분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만을 듣고, “구세주이신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 역시 주님을 만난다는 기쁨으로 들떠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주님께서 바로 구세주라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믿음의 빛’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눈먼 거지는 비록 눈은 멀었지만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모든 위협과 장애를 극복하고 주님을 외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사랑의 빛
주님께서는 혼잡한 군중 속에 웅크리고 앉아 소리치는 눈먼 거지의 소리, 비록 삶에 지쳤지만 믿음에 가득 찬 그의 소리를 들으시고 애정이 넘치는 소리로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이 같은 사랑과 관심으로 자신을 불러주고 기다려 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직 눈을 뜨지 못했지만 마음은 이미 유성과도 같이 빛나고 있었기에 한 걸음에 주님께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에게 빛이 되었습니다.
희망과 믿음, 사랑의 빛은 나의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섬기는 주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입과 눈으로만 주님을 섬기고, 진실된 마음은 부족하기에 아직 어둠에 갇힌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기에 나의 소망 또한 주님께 전달되지 못하기에 지치고 힘든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은 지 돌아봐야 합니다.
주님을 진실된 마음으로 믿을 때 믿음의 빛이 나의 삶, 나의 길을 비춰줄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희망이 나의 삶을 따뜻하게 비춰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예리꼬의 눈먼 거지를 보십시오. 주님과 함께 한다면 희망과 사랑의 빛이 넘쳐나는 행복한 삶이 될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예리꼬 눈먼 거지의 삶 속에 드리워졌던 어둠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2. 무엇이 그의 어둠을 없애 주었습니까?
3. 나의 인생에 드리워진 어둠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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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7. 연중 제30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개안(開眼)의 여정
“주님과의 살아있는 만남이 답이다”
오늘 복음은 복음서의 요약같습니다. 상징들로 풍부하며 복음의 위치도 아주 적절합니다. 예루살렘 상경 여정중에 일어난 일이며 이어지는 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또 오늘 복음 앞에는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과 부활의 예고가 있었으니, 예수님의 예루살렘 여정은 십자가의 길 여정임을,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이르는 파스카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오늘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신 일화 바로 앞의 일화입니다. 두 경우의 대조가 참 극명합니다. 앞서 제베데오의 두 아들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제가 볼 때 철부지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직제자들의 내적 수준이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실망이 참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와의 만남은 참 신선합니다. ‘길가에 앉아 길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눈먼 거지 바르테매오’는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가난한 인간 실존을 상징하는 듯 강열한 느낌을 줍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우리는 모두 ‘길가에 앉아 길이신 주님을 찾고 기다리는 눈먼 거지’일 수 있습니다.
눈먼 거지였지만 영혼의 눈은 주님을 찾는 열망으로 환히 열려 있던 바르티매오였습니다. 꼭 기억해야 할 이름,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자 전광석화, 응답하는 바르티매오입니다. 주님을 찾는 열정의 반영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참으로 절박한 가난하고 겸손한 이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바칠 단 하나의 기도가 있다면 이런 자비송뿐입니다. 이런 자비송으로 미사전례를 시작한 우리들입니다. 바로 바르티매오와 같은 열망으로 미사참례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바르티매오의 영적 통찰력이 놀랍습니다.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영혼의 눈은 활짝 열려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바로 히브리서가 잘 설명해줍니다. 사람의 아들이자 하느님의 아들인 분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무지하여 길을 벗어난 이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는’ 대사제가 되신 예수님이요, 하느님께서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나를 낳았노라.”하고 인정하신 분입니다. 참으로 바르티매오의 영적 통찰은 정확했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부르짖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간절히 열렬히 찾아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이것은 올바른 충고가 아닙니다.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자비송 기도를 바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바르티매오의 간절한 자비송 기도에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말씀하십니다. 만류하며 방해하던 이들이 우군이 되어 그를 격려하는 말마디도 은혜롭습니다. 그대로 미사전례에 참석한 우리 각자에 대한 말마디처럼 들립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용기를 내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자주 쓰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일어나라는 말씀은 부활을 상징합니다. 운명론적 체념을 떨쳐 버리고 ‘분연히 일어나 다시 부활의 새생명을 살라’는 절호의 구원의 순간입니다.
그는 숙명의 사슬과 같은 겉옷을 벗어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가니 과거와의 결별과 동시에 부활을 뜻합니다. 그대로 미사장면중 주님을 만난 이들의 내적상태에 대한 묘사같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 복음의 절정을 이룹니다. 과연 오늘 짧은 복음은 그대로 미니 복음서로 복음서의 요약같습니다. 앞서 제베데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 대한 물음과 똑같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시공을 초월한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화두같은 영원한 물음입니다.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가 정답을 말했습니다. 삶이 진실하고 간절하고 절박하면 말도 글도 짧고 순수합니다.
“스승님 제가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앞서 야고보와 요한의 청과는 너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역시 우리가 드릴 소원의 청도 이것 하나뿐일 것입니다. 아마 이 두 형제 제자들이 이 경우를 목격했다면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 얼굴을 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잠시 10월 한달 저를 행복하게 하는 두 시를 다시 나눕니다. 피정집 자캐오의 집 3층 제의방에서 바라보는 수도원 배경의 가을 불암산 풍경은 참 장관입니다. 눈앞에 가까이 있는 산이 순간 주님처럼 느껴졌고 흡사 주님을 만난듯한 체험을 했습니다. 여기서 태어난, 찾아온 두 시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하나의 고백에 이어 엊그제 또 하나의 고백입니다.
“늘
앞에 있는 산
늘
앞에 있는 당신
이
행복에 삽니다”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을 바라볼 때 마다 ‘살아 있는 주님’을 만나듯 고백하며 되뇌는 두편의 시로 요즘 많이 행복합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복음의 절정이요 제1독서 예레미아 예언의 실현입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가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육신의 눈이 열림이 상징하는 바, 마음의 눈, 영혼의 눈, 믿음의 눈입니다. 저는 지체없이 강론 제목을 ‘개안의 여정’이라 정했습니다. 멀쩡한 육신의 눈을 지녔어도 무지에, 탐욕에 눈먼이들, 눈뜬 맹인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개안의 여정’, 이 복음을 대할 때 마다 늘 정하는 제목입니다. 우리 삶은 계속 눈이 열려가는 개안의 여정이면 좋겠습니다. 육안의 시력은 감퇴해도 영안의 시력은, 심안은 시력은 날로 좋아져야 너그럽고 자유로워지는, 풍요롭고 행복해지는 삶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유일항 처방이 바로 개안의 여정입니다.
개안은 만남입니다. 진리이자 생명이신 주님과의 만남은 물론 주변 모두를 새롭게 만나는 것입니다. 개안은 회개입니다. 개안과 동시에 이뤄지는 회개입니다. 개안은 깨달음입니다. 눈이 열려가면서 깨달음의 진리들이 뒤따릅니다. 개안은 방향입니다. 바르티매오는 눈이 열려 주님을 따름으로 희망의 길이 열리고 희망의 방향이 주어졌으니 이제 방황과 표류는 끝났고 희망의 순례자로 살면됩니다. 그러니 개안의 은총은 얼마나 지대한지요!
말그대로 오늘 복음은 예레미야 예언의 실현입니다.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
예레미야의 기도가 그대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실현됩니다. 시편 저자도 화답송을 통해 구원의 기쁨을 함께 합니다. 그대로 바르티매오는 물론 우리의 고백과 기쁨을 대변합니다.
“주님이 큰 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유배후 해방의 기쁨을 맞이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바르티매오와 함께 우리도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며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개안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날마다의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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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7. 연중 제30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외길>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마르 10,52)
그대의 길을
가시게나
그대의 뜻대로
보지 못하던 것을
다시 보게 되었으니
당신만을 따라
걸으렵니다
당신의 뜻대로
보지 않았던 것을
다시 보게 되었으니
그대의 길을
가시게나
그대의 뜻대로
듣지 못하던 것을
다시 듣게 되었으니
당신만을 따라
걸으렵니다
당신의 뜻대로
듣지 않았던 것을
다시 듣게 되었으니
그대의 길을
가시게나
그대의 뜻대로
느끼지 못하던 것을
다시 느끼게 되었으니
당신만을 따라
걸으렵니다
당신의 뜻대로
느끼지 않았던 것을
다시 느끼게 되었으니
그대의 길을
가시게나
그대의 뜻대로
부르지 못하던 것을
다시 부르게 되었으니
당신만을 따라
걸으렵니다
당신의 뜻대로
부르지 않았던 것을
다시 부르게 되었으니
그대의 길을
가시게나
그대의 뜻대로
사랑하지 못하던 것을
다시 사랑하게 되었으니
당신만을 따라
걸으렵니다
당신의 뜻대로
사랑하지 않았던 것을
다시 사랑하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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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7. 연중 제30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 30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리코의 눈먼 거지 소경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온전히 치유되는 과정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리코 소경의 믿음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믿음의 표본과 교훈을 줍니다.
믿음이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은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그리스도, 지금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서 출발합니다. 절대적 존재이며 우리 존재의 근원이며 사랑의 구체적 선물은 바로 ‘당신’이라 부를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런 믿음이 영혼안에 뿌리를 내리고 깊이 퍼져 가면 갈수록 하느님 사랑도 영혼 안에다 뿌리를 내리고 깊숙이 퍼지기 마련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뜻이 일상 생활속에 내재되어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이해의 빛을 우리에게 줍니다. 이 빛이 없으면 우리는 일상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이해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믿음을 통한 이 빛을 통해서 일상안에서 분별하는 법을 배우고 천리안 같은 성령의 지혜로 사물을 보는 법을 배워서 성령께서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가시는지 직감할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을 가질 때 인간은 그 믿음이라는 옷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은 온갖 다른 덕보다 뛰어나서 강력하고 교활한 악에 대항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사랑과 희망과 함께 가장 중요한 덕으로 희망과 사랑과 더불어 행동으로 드러내 보이는 최상의 덕입니다.
믿음의 여정을 걸을 때 십자가의 성 요한의 표현처럼 감각의 밤을 만납니다. 감각의 밤은 인간의 외부감각이 정화되는 것으로써 세상의 매력에 눈이 어두워진 상태를 말합니다. 이 믿음의 길에서 우리 신앙인들이 할 일은 성 프란치스코의 삶처럼 십자가상의 그리스도께서 부르시는 소리에 진솔하게 응답하여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으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참된 신앙에서 아주 멀어지게 되고 믿음의 성장이 정체되고 맙니다. 그래서 믿음의 성장을 위해 일상안에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자신의 생활을 그리스도의 생활에 맞추어 나가려는 항구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이 믿음의 여정을 항구히 걷다 보면 겸손과 그리고 항구한 기도의 열매를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겸손은 자기식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것을 중지하고 먼저 자신의 과오부터 겸허히 들여다 보게 합니다. 완전한 믿음의 행위는 완전한 겸손의 행위로 나타납니다. 남의 눈에 뜨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게 남에게 봉사하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 모르게 남을 위해 선행을 베푸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서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하느님이 그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할수록 믿음이 더 깊어지고 믿음이 깊어질수록 더 기도하게 됩니다. 이런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하게 되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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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성 게오르겐베르크-피히트/티롤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일어난 고귀한 성혈의 기적 사건
오스트리아-1310년
이러한 조사의 결과에 따라 그 성혈에 경배하는 일이 허락되고 권장되었다. 한편 수도원장 카스파르 2세 (Kaspar II)는 흰 대리석으로 된 아름다운 감실을 제노바로부터 가져와서 그 감실 속에 성혈을 모셨는데 작은 성광 위에 있는 유리 실린더 중앙에 그 성혈을 조심스럽게 모셨다.
이 때부터 그 성혈에 기도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났다. 수많은 독실한 크리스찬들 가운데 그 성혈을 조배하기 위해 많은 고위 성직자들도 참석했는데 이를테면 트리스트(Triest)의 주교인 요하네스(Johannes), 브릭센 (Brixen) 의 주교인 게오르그(Georg), 바이에른의 공작이자 퀼른(Koln)의 대주교인 루페르트(Rupert), 쉼제(Chiemsee)의 주교인 프리드리히(Friedrich) 등등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요하네스와 게오르그는 이단들을 없애기 위해서 그 성혈 앞에서 주기도문과 성모송을 바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400일 동안 대사를 베풀어 주었다"
복음주의자들의 두 번째 기록판에는 교회분열의 시대에 그 성혈이 진실한 믿음을 보존하도록 어떻게 도와 주었는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1593년 티롤(Tirol) , 즉 인탈레 지역에서의 루터파의 교리가 곳곳으로 확산되고 진실한 신앙이 억압받게 되자 성 게오르겐베르크의 신부님들은 곳곳에서 신앙강론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신부들은 강론을 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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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7. 연중 제30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우리도 준비된 물음을 가졌는지 /
박윤식 [big-llight] 241026. 20:49 ㅣNo.177085
하느님을 믿는 우리라지만, 우리 역시 가진 것을 잃고 나서야 믿음의 소중함을 깨닫고 한다.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시각 장애인만큼 느끼는 이가 있을까? 그들은 얼마나 세상을 보고 싶어 했을까? 그들은 다른 이에게 온전히 의지해야 살 수 있는 무능하고 불쌍한 이일 게다. 눈이 멀쩡한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받은 축복에 대해 얼마나 감사드리며 살고 있는지? 그리고 눈먼 이들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과연 어느 정도만큼 헤아리는지?
예수님께서 군중과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인 눈먼 거지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에, “다윗의 자손 예수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많은 이가 잠자코 있으라며 꾸짖었지만, 그는 더 크게 “다윗의 자손이시여, 제게 자비를.” 하고 누구나 다 들어보라며 크게 외쳤다. 이는 마치 마지막 절규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그 외침은 확신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는 더 크게 부르짖는다. 이에 예수님께서 가던 길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게. 그분께서 부르시네.” 하고 말했다. 이 부름에 눈먼 바르티매오는 겉옷을 벗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단숨에 달려갔다.
예수님께서는 눈먼 거지에게 “지금 나에게 무엇을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스승님, 다시 보게 해 주십시오.” 하고 준비된 답을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 라고 이르시니, 그 눈먼 이는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치유를 받은 바르티매오는 바로 그분을 따라 길을 나섰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렇다. 예리코의 그 눈먼 거지인 바르티매오의 이 절규는 단순한 부르짖음이 아닌 분명히 신앙 고백이다. 절박한 상황에서 부르짖는 그를,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신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는 이 간청은 비참한 내가 눈 뜰 수 있다는 믿음, 오직 예수님 당신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으시다는 신앙 고백이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렇게 구원은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그 믿음을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이다. 구원은 그에게 잠잠히 있으라고 꾸짖던 이들이 아닌, 예수님 길을 막고 메시아이심을 고백한 그 눈먼 거지에게 주어져다. 용기와 소신으로 필사적으로 예수님께 매달린 눈먼 거지의 믿음을 본받아, 우리도 적극적으로 주님께 나아가 우리 나약함을 드러내도록 기도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 상황에도 티매오의 아들처럼, 우리도 예수님 만남을 준비해야만 한다.
사실 우리도 애절한 그 무엇이 없을 수 없다.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것들이 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풀리지 않을 것 같기에, 그분께 의지하지도 않고서 아예 포기한 믿음의 삶을 산다. 그러기에 우리도 바르티매오처럼 예수님께 나아가면서 의지해야만 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의 길을 가야 하는 이 이유를 모르면 누구나 영적으로 눈먼 이다.
이 확신에 찬 우리 부름에 자비의 예수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그냥 지나치지 않고 오셔서 곧장 물으시리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우리는 정녕 무엇을 바라는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메시아이심을 믿는 우리도 그 눈먼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처럼 준비된 물음을 가져야만 한다. 이게 신앙인의 자세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바로 치유로 구원해 주시리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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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7. 연중 제30주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독서와 복음을 함께 읽다 보니 눈에 띄는 구절이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 구원하소서!”(예레 31,7)라고 외치라고 되어 있는데, 복음에서는 바르티매오가 과연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라고 외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많은 이가 그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였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합니다.
그를 꾸짖었던 이들은 그가 길을 가시던 예수님께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였고, 또 어쩌면 너무 많은 이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며 외쳐댔기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다 상대하실 수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서에서는, “이렇게 외치며 찬양하여라.”(31,7)라고 말합니다.
“구원하소서!”라고 외치는 것이 자신을 도와주시기를 요청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찬양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기에, 그분께 구원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분을 향하여 외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그러한 신앙을 바라셨습니다.
복음에서도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며 외쳤는데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꾸짖는데도 그가 외쳤던 것이 그의 찬양이고 신앙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불러오라고 하시고 사람들 앞에서 그가 자신의 입으로 치유를 청하게 하심으로써, 그의 믿음을 드러내십니다.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고쳐 주실 수 있음을 의심 없이 믿고, 이로써 그를 꾸짖던 사람들 앞에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다시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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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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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7. 연중 제30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눈먼 거지가 예수님을 부릅니다.
그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부릅니다.
이 칭호는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부분에서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르는 칭호로 사용됩니다.
즉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환호하며 다윗을 언급합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이 기다려온 메시아임을
고백하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았습니다.
메시아 시대가 오면
눈 먼 이가 볼 수 있다는 성경 구절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막아도
예수님께 청합니다.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강한 만큼
메시아를 기다리는 마음도 강했습니다.
그 강한 희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누가 그를 막을지라도
그는 그 희망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눈 먼 사람들은
대부분 거지로 표현됩니다.
보이지 않기에 무엇을 할 수 없고
그래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구걸 뿐이었습니다.
더욱이 다른 병은 치유되는 경우가 있지만
눈 멀음은
하느님에 의해서만
또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즉 치유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구걸이 쉽지 않지만
치유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
그를 더 힘들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희박한 가능성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치유해 줄 메시아를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것이라 희망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그를 예리코에서 만난 것이
그 희망의 결과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예리코는 예루살렘과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분명 메시아는
다윗의 도성인 예루살렘으로 오실 것이기에
그는 예리코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가능성이 거의 없는 곳
그곳에서 가능성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희망을 꺾지 않을 때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그 희망을 이루어주십니다.
나의 부족한 믿음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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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7. 연중 제30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새 삶을 향한 눈먼 이의 열정, 적극성, 간절함은 하늘까지 움직였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때로 우리가 결코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장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질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도무지 탈출구가 없을 때, 울부짖고 몸부림쳐도 헤어날 방법이 없어 보이는 그런 절박한 순간을 맞이합니다.
돌아보니 저도 그런 순간이 몇 번 있었습니다.
사방이 높은 절벽으로 둘러 쌓여 있는 기분, 아무도 도와줄 사람 없는 듯한 외로운 처지,
차라리 이쯤에서 삶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드는 절박한 순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 그 역시 딱 그랬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목숨이 붙어있었지만, 호흡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사실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너무나도 끔찍했던 여행길, 길고도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느라 그의 영혼과 정신은 죽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에게 제대로 된 사람 대접해주는 사람 한 명 없었습니다.
어디가나 천덕꾸러기요 애물단지였습니다.
사람들은 대놓고 그를 향해 손가락질했습니다.
평생에 걸친 그의 삶은 모욕과 멸시, 천대와 비아냥거림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렇게 바르티매오는 존재하지만 존재를 부정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바르티매오를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구걸을 위해 하루 온종일 길가에 앉아있어도 관심 가져주는 이가 단 한명도 없었는데, 기껏해야 동전 한 닢 깡통 속에 던져주는 것이 다였는데,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를 가까이 부르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자상하게 이것 저것 물어봐주십니다.
측은지심 가득한 음성으로 이름은 몇 가지를 물어보겠죠? 이름이 뭐냐?
언제부터 이렇게 됐냐? 사는 곳은 어디냐?
오늘 예리코의 눈먼 이는 우리가 좀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 삶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결국 우리가 구원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정확한 모범 답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그는 목이 빠지게, 정말 간절하게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마치 구조를 기다리는 난파선처럼, 구급차를 기다리는 응급환자처럼,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한번 따라가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강렬히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또 그의 예수님을 향한 기대감, 믿음은 또 얼마나 컸었는지 모릅니다.
그의 안테나는 오로지 한 방향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만나 뵙고 말겠다는 강한 열의, 그분께 도움을 청해보겠다는 열의, 그분은 반드시 나를 더 나은 삶에로 이끌어주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 그 능동성, 적극성이 그의 외침 안에 들어있습니다.
“예수님,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 부르짖음이 얼마나 컸던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갑작스런 외침, 돌발 상황 앞에 사람들은 당황한 나머지 조용히 좀 하라고 나무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단 한 번의 기회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욱 큰 소리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절박하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새 삶을 향한 눈먼 이의 열정, 적극성, 간절함이 드디어 하늘에 닿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와 만나십니다.
시각 장애로 인해 비참하고 혹독했던 그의 지난 삶을 다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 따뜻한 목소리로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기다렸다는 듯이 눈먼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예리코에서 그러하셨듯이 우리 앞에 멈추셔서 우리 얼굴을 내려다보시며, 우리의 인생 전체를 바라보시며 똑같이 질문 하나를 던지실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오늘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오늘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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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7. 연중 제30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예리고의 맹인 바르티매오의 치유의 기적은 하나의 “표지”로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앞에 “빛”을 필요로 함을 가르쳐주고 있다. 즉 바르티매오의 되찾은 시력은 우리가 항상 청해야할 신앙의 빛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을 보면 그것을 만들어내지도 못하면서 너무나 쉽게 그 빛을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줄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 빛은 우리가 청하고 받아들일 자세만 되어있다면 하늘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선물이다. 복음에서도 이 같은 사실이 맹인의 치유사화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이 치유사화는 마태오 복음(20,29-34)과 루카 복음(18,35-43)에도 나타나는데 모두가 수난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수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한 것이며, 이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내적인 “빛=밝음”은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맥락은 베싸이다의 소경이 서서히 시력을 찾는 장면을 시작으로(마르 8,22-26),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서의 베드로의 신앙고백(8,27-30)과 예수께서 수난에 대한 예고를 하셨을 때 베드로가 펄쩍 뛰는 장면을(8,31-33) 생각할 수 있다. 신앙의 절정 상태에 있던 베드로조차 하느님의 계획에는 눈이 멀려고 한다. 하느님의 계획들은 결코 어떤 순간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빛에 의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마치 베싸이다의 소경이 서서히 시력을 회복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복음을 보자. 소경 바르티매오는 예수께 절규에 가까운 도움을 청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눈이 멂”으로 당하는 비극적 현실 때문만이 아니라, 예수님이야말로 자기를 구원해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를 부르시자 그는 전 생애를 거쳐 그 순간을 기다리기나 한 듯이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난다. 그의 믿음은 헛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믿음에 대해 강조하시고,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2절) 하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소경은 어떻게 하는가? 그 소경은 눈을 뜨자마자 “예수를 따라 길을 나섰다.”(52절). 이것은 믿음이 그의 눈을 열어주어 그리스도의 사명을 깨닫게 하고 그분을 따라나서게 하였다. 여기서 예수를 보는 데만 호기심이 있고 그 수난에 관해서는 관심도 없는 군중들과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세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고 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47절) 예수께서는 메시아라는 명칭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정치적으로도 위험한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도 받아들이신다.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에 들어섰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성취되어야 할 목적지에 도달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메시아의 비밀이 벗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메시아는 유다인들이 기대했던 그런 의미의 메시아는 아니셨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치유된 소경 바르티매오가 한 것처럼 바로 그 길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불림을 받고 있다. 바르티매오의 치유는 믿음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징표일 뿐이다. 믿음은 그 소경의 경우, 예수의 중재 역할로 그를 낫게 하여 구원하였듯이 우리를 예수님과 결합하여 그분이 가신 희생의 길을 따라가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참된 치유를 베풀어주고 또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해준다.”(R. Schnackenburg, Vangelo secondo Marco, Roma 1973, Vol. II, pp. 125-126).
히브리서는 그리스도를 대사제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구약의 사제직을 무한히 초월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희생제물을 봉헌하는 것이다. 구약의 대사제는 여러 번 그리고 백성들과 자기 자신의 죄를 위해 속죄의 제물을 봉헌했지만(히브 5,3),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기 때문에 단 한 번 희생제물을 바치셨지만 완전한 제물을 봉헌하셨다. 당신 자신을 형제들을 위해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희생적 의지 때문에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 10,10). 여기에 나오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히브 5,6)는 것도 그가 창세기에 나오는 신비스러운 왕이며 사제라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척도는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절대적인 새로움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제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희생에 이르는 그 길을 따르기 위해서는 예리코의 맹인 바르티매오와 같은 큰 믿음의 빛이 필요하다. 우리가 언제나 당신의 신비를 깨달아 알아보고, 베드로와 같이 하느님의 뜻에 눈이 멀지 않도록 하며, 또 그 신비를 우리의 삶으로 실천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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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7. 연중 제30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믿음이 커질수록 청하는 것도 커진다
오늘 복음에서 예리코의 거지 소경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소리 지르기 시작합니다.
주위 많은 이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죄인이 어디 자기의 목소리만
들어달라고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소리 지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경은 멈추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가시던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믿음’이고 믿음이 구원하는데, 그 믿음은 내가 무엇까지 청할 수 있느냐에 결정됩니다.
내가 청하는 것이 세상 모든 사람의 비웃음거리가 될 때 그만큼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애플 컴퓨터 설립자이고 2009년 포춘지 선정 최고의 CEO,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2011년 10월 5일 향년 56세의 나이로 췌장암과 싸우다 사망했습니다.
그가 2005년 스탠퍼드대에서 “늘 갈망하라, 바보스러울 정도로 우직하게(Stay hungry, stay foolish)” 라는 제목으로 졸업 강연하였습니다.
그는 일찍이 큰 뜻을 품었고 친구와 둘이 자동차 장고에서 시작한 사업은 10년 만에 직원 1,000명을 거느린 20억 달러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다 회사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또다시 돌아와
애플을 미국 최대 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때로는 인생이 당신의 뒤통수를 벽돌로 후려치더라도 소신을 잃지 마십시오.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한 것이 나를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늘 갈망하십시오.
바보스러울 정도로 우직하게(Stay hungry, stay foolish).”
스티브 잡스의 종교는 불교에 가깝고 매일 명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참 종교는 그리스도교에 가깝습니다. 무언가를 우직하게 갈망한다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과는 맞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주위 사람들의 비난에도 어처구니없게 망가진 눈을 회복시켜달라는
바르티매오에게 믿음이 강하다 칭찬하셨습니다.
더 불가능한 것을 청할수록 더 강한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주님께 무언가 청했던 것은 주일학교 교사 때였습니다.
한 아이에게 야단을 쳤더니 그 아이가 집에 간다고 가버렸고 저는 성당에 앉아 그 아이가 돌아오기를 기도했는데 기도가 끝나자 잘못했다며 그 아이가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다음은 술 내기였습니다.
이미 2병을 마시고 기도하고 내기하여 각 6병을 마셨습니다.
물론 제가 이겼습니다.
신기한 것은 다음 날도 숙취가 없었습니다.
그다음은 저를 사제로 불러주시면 한 번 나타나 달라는 청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성모님께서 저에게 나타나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음은 박사 논문 발표가 잘 끝나기를 청했는데, 망친 줄 알았더니 교수님들이 다 만점을 준
것이었습니다.
지금 성당에 와서는 어르신들이 많고 교적에 허수가 많지만, 이른 시일 내에 미사 참례율을 두 배로 늘리는 것이었습니다.
3년째 되어가고 있는 지금 거의 이 기도가 성취되고 있습니다.
저는 또 개인적으로 성 아우구스티노처럼 되는 청을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저의 믿음이 성장함에 따라
청하는 것도 커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요안나라고 부산교구 선교사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불쌍한 아이들이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처녀였음에도 아이들을 자녀로 삼아 키우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도망친 엄마 대신 모르는 한 여자에게 엄마가 되어달라고 청하는 아이의 꿈을 모르는 체 할 수 없는 게 인간입니다.
딸이 결혼도 안 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을 보고는 어머니가 쇼크로 사흘 만에 돌아가실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물며 하느님은 어떻겠습니까? 믿음과 함께 나의 청하는 것도 커져야 합니다.
그분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교황님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사람이 그 자매를 찍어누르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요안나 자매는 자신 앞을 이미 지나쳐가는 교황님께 온 힘을 다해 “파파, 파파”라고 불렀습니다.
교황님은 되돌아오셔서 그 자매의 두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믿음은 내가 그것을 청할 수 있고 또 상대는 그 청을 들어줄 수 있는 분임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고 더 큰 것을 청합시다.
이것이 그분을 인정하고 내가 믿음으로 인정받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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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7. 연중 제30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마르 10,46ㄴ-52).”
1) 이 이야기의 맨 끝에 있는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라는 말은, 바르티매오가 단순히 ‘시력 회복’만을 원한 것이 아니라, ‘새 인생’을 원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새 인생’은 ‘새 직업’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신앙인)의 삶’, 또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인생’이었음도 나타냅니다.
만일에 바르티매오가 시력회복만을 원했다면? 그리고 시력이 회복된 뒤에 새 직업을 갖게 되는 것만을 원했다면?
그러면 이 이야기는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치유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에 바르티매오가 어떤 변화도 원하지 않았다면?
살던 대로 살기만을 바라면서, 특별히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면,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었을 것이고, 예수님을 그토록 간절하게 부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즉 그의 인생은 허무하게 끝났을 것이고, 복음서에 그의 이름이 기록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와 새 부대’에 관한 말씀을 하실 때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9).”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했을 때, 또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셨을 때, 그 선포에 관심 갖지도 않고 듣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은 ‘기득권층 사람들’이었다고 보통 생각하는데, 기득권층 사람들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 일반 서민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기득권층 사람이든지 소외계층 사람이든지 간에,
부유한 상류층 사람이든지 가난한 사람이든지 간에, 변화를 싫어하고 거부한 사람들, 그냥 살던 대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회개 선포를 무시했고, 복음 선포를 외면했습니다.
<‘지금의 삶’에 만족해서 그런 경우도 있고, 만족하는 것은 아닌데도 변화 자체를 두려워해서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은 회개하라는 말도 듣기 싫어합니다.
‘쇄신’이나 ‘개혁’ 같은 말도 듣기 싫어합니다.
뭔가 잘못된 것을 고쳐서 바로잡으려고 하면
저항하고 반대하고 박해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갑니다.>
2)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에게 하신 말씀,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에서,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의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5,34).
두 이야기는 겉으로는 차이점이 많지만, 현재 상태에서 해방되기를 간절하게 원했다는 점과
완전히 변화된 ‘새 인생’을 갈망했다는 점은 같습니다.
두 사람의 희망과 간절함에 초점을 맞추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단순한 ‘치유 말씀’이 아니라, 그들이 원했던 ‘새 인생’으로 인도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더욱 굳은 믿음을 갖고 나를 따라라.
그러면 네가 구원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바르티매오의 뒷이야기는 모릅니다.
십자가를 향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나섰기 때문에, 충실한 신앙인이 되어서 ‘새 인생’을 살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그러나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수건으로 예수님의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 라는 전승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여자도 예수님 덕분에 완전히 영적으로 변화되어서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새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신앙생활은 당장 눈앞의 일에 대한 소원이나 빌고, 소원이 이루어지면 만족하는, 그런 생활이 아닙니다.
자신의 인생 전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생활입니다.
<세례식 때 흰옷을 입는 것은 새로 태어났음을 상징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콜로 3,9ㄴ-10).”
신앙인의 신앙 여정에서, ‘새로워지는 것’은 한 번으로 그치는 일이 아닙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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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7. 연중 제30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10,46ㄴ-52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우리는 삶에 어렵고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 하느님께서 그것을 해결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내가 지닌 부족함과 약함을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당신 능력으로 채워 주시기를, 그래서 내 뜻과 바람을 이뤄주시고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없애 주시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그런 기대는 예수 그리스도께도 그대로 투영되지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르티매오도 초반엔 예수님께 그런 기대와 바람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구약 시대부터 메시아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자주 불리던 것으로, 다윗 임금이 이루었던 부강한 이스라엘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습니다. 즉 유다인들은 다윗 임금이 이루었던 위대한 성공과 업적을 그의 자손이 재현해 주리라고 믿었는데, 그런 믿음과 기대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 안에 담겨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던 그가 예수님께 가장 먼저 청한 것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자비’였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루려고만 했던 다른 이들과 달리, 바르티매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명확히 꿰뚫고 있었지요. 병을 치유해 주시는 것도,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도, 빵의 기적으로 궁핍한 이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것도 모두 우리를 보살피시고 살리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음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하느님의 그 자비를 온전히 믿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분 손길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한 채 하느님 말씀에 전적으로 순명하고 따를 수만 있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가장 좋은 것들을 받아누리게 될 터이니 굳이 다른 걸 청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지요. 그래서 큰 소리로 반복해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만 청합니다. 하지만 그런 의중을 알 리 없는 이들에게는 그 외침이 그저 의미없고 시끄럽기만한 ‘소음’으로 들렸기에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습니다. 반면에 예수님만은 그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기에 제자를 시켜 그를 당신 앞으로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다는 말을 들은 바르티매오는 겉옷을 벗어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갑니다. 겉옷을 벗어 던지는 행동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그의 비장한 각오가 분명히 드러나지요.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에게 겉옷은, 특히 가진 게 별로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재산이었기 때문입니다. 낮에는 따가운 햇볕을 가려주는 천막이 되고, 밤에는 매서운 추위를 견디게 해주는 이불이 되는, 어쩌면 바르티매오에게는 ‘전부’나 다름 없었던 것이 바로 겉옷이었을 겁니다. 그런 겉옷을 버리고 주님께 간 것입니다. 얼마 안되는 그 겉옷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데에 걸림돌이 될까봐, 겨우 천쪼가리에 의지하려는 마음 때문에 자기 마음이 주님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향하지 못하고 갈라질까봐 과감하게 내던져 버린 것이지요. 그에게는 이제 아무 것도 없지만 그는 더 이상 ‘거지’가 아닙니다. 과감한 비움을 통해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잘못된 욕망을,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앉아서 남들 위에 군림하고 대접 받으려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쉽고 편한 것만 찾으며 ‘십자가’를 외면하려는 나약한 마음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르시면 지체 없이 ‘벌떡’ 일어나 그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당신 앞으로 나아간 바르티매오에게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모르셔서 물으신 게 아니라, 바르티매오가 마음 속에 품어야 할 참된 갈망이 무엇인지를 일깨우시기 위한 질문입니다. 바르티매오의 소망은 ‘다시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아나블레포’는 ‘위’라는 방향을 뜻하는 전치사 ‘아나’에 ‘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블레포’가 합쳐져서 ‘올려다보다’라는 뜻이 됩니다. 바르티매오는 잃어버린 시력을 회복하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시력을 회복한 그 눈이 다시 그전처럼 세상의 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하늘을,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지 않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삶과 세상을 통찰하며 그 안에 깃든 하느님의 섭리와 신비를 알아보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야 힘들고 괴로운 순간이 찾아와도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희망하며 끝까지 힘을 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도 이 바르티매오처럼 ‘다시 보기 위해서’입니다. 세례 받고 난 후에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 새로워진 시선으로 세상과 삶을 다시 보지 못하고, 욕망과 집착에 얽매인 세속의 시선으로만 바라보려고 하면 아무리 성당에 열심히 다녀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먼저 내가 바라보는 시선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 안에서 새로워져야 내 삶도, 내가 사는 세상도 그분 뜻에 맞게 변화되는 것이지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세상을 다시 보고자 했던 바르티매오는 그 믿음을 통해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듯, 바르티매오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 덕분에 구원받을 기회를 얻었지만 그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누리기 전까지 그의 구원은 아직 ‘미완성’의 상태인 겁니다. 그 구원을 완성시키는 것은 머리로 이해한 계명과 주님 말씀을 삶 속에서 행하는 ‘실천’입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따라가야만, 주님께서 알려주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그 과정에 따르는 고통과 시련을 기꺼이 감내해야만, 그에게 열린 구원의 가능성이 ‘하느님 나라’라는 완성된 상태로 실현되는 겁니다. 바르티매오도 그것을 알았기에 시력을 회복한 뒤에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길을 선택합니다. 어렵사리 얻은 은총과 구원이라는 ‘새 술’을 ‘새 부대’에, 즉 주님 뜻을 충실히 실천하는 새로운 삶 속에 담은 것이지요. 그 ‘새 부대’ 안에서 주님께서 주신 ‘새 술’이 맛있게 익어갈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바르티매오를 본받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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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7. 연중 제30주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예리고의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소경을 치유해 주시는
주님의 대목은 몇 가지의 복음사가의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바로 소경을 고쳐주신 역사적 사건입니다. 둘째는 예리고라는 장소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를 중심으로 제자들을 모으시고 요르단을 따라 하느님 말씀과
기적을 펼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는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수난받는 메시아를 성취하시는 순간이 바로 이곳 예리고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주님에게는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성취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이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이 비로소 열리는 것입니다.
오늘 히브리 서간에서도 이미 설명되었지만 구약의 대사제는 스스로의 잘못을 위해
제물을 봉헌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의 아들로 세우신 대사제가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대사제이시면서 스스로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바로 우리를 위하여 속죄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오늘 독서인 예레미야 예언자는 포로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기쁨과
희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이 광경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눈먼 이와 다리 저는 이, 아이를 밴 여인과 아이를 낳는
여인도 함께 있으리라. 그들이 큰 무리를 지어 이곳으로 돌아오리라.”(예레 31,8)
오랜 포로생활에서 지친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예언자들은 하나같이
예루살렘으로 지파들이 몰려오는 것을 노래합니다.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정치적인
힘이 있어서 언젠가는 민족들의 중심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의 이런 사상을
주님께서는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인간적인 세력으로 사람들이 몰려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던 주님께서 수난 받는 주님 종의 모습에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겸손과 가난으로 바로 사람들에게 참다운 종의 모습을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참으로 당신 자신을 희생으로 바치신 대사제이십니다.
주님의 삶이 바로 모든 이들을 하나로, 평화로 묶어주신 것입니다. 모든 민족들이
이천년 동안 주님의 삶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예리코의 바르티매오 소경의 치유 사건에서 우리 자신을 깨우쳐야 합니다.
그는 주님께 외쳤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어둠에 갇혔던 그가 주님의 사랑으로
눈을 떴습니다.
거지인 그 소경은 긴 기다림이 있었고 사람들의 무시와 어쩌면 자신 내면의 어두움에
갇히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는 눈을 뜨고 빛을 보았습니다.
이제까지 전혀 보지 못했던 이웃 형제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음성으로만 들어왔던 형제들이 비로소 그 진실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영적 눈을 뜨게 우리는 청해야 합니다. 빛 속에서의 형제들을
보아야 합니다. 미움과 어둠에 갇힌 이웃이 아니라 빛 속에서 소중한 이웃의 모습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형제들은 비뚤어진 모습, 어둠에 갇힌 것이 아닙니다.
내 이웃의 소중함을 깨닫고 우리는 그들을 잘못 생각하고 때로는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의 옹졸함, 우리의 어둠을 씻고 영적으로 눈을 뜰 수 있도록 우리의 사랑이신
주님께 간절히 청합시다.
소경 바르티메오의 외침을 우리도 주님께 간절하게 청해야 하겠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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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7. 연중 제30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거룩한 간절함
눈이 보이지 않는 이들은 보통 촉각과 청각이 매우 민감해집니다. 볼 수 없어 단절된 세상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극복하기 위한 간절함과 집중 때문에 다른 감각이 발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발달은 단지 어떤 결핍을 채우기 위한 본능적인 움직임 그 이상의 것입니다. 곧 간절함과 집중에 따른 변화는 생명에의 갈구임에 분명합니다. 예리코의 소경 이야기는 영성생활에서 더 말할 나위 없이 중요한 이런 간절함을 되새기게 해줍니다.
오늘 복음은 예리코의 소경 이야기를 통해서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살아 계시는가를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에 예리코에 들르셨다가 떠나실 무렵 길가에 앉아 있는 ‘눈먼 거지’를 만나 눈을 끄게 해주십니다(10,46).
그 소경은 시각장애와 가난 때문에 마음은 짓눌리고 경제적으로는 궁핍함을 겪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자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10,47-48).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시어,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고는,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10,49-52)
우리에게 이 소경이 지녔던 간절함이 있는지 돌아봅시다. 하느님과의 일치,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은 곧 거룩하고 영적인 관계형성입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이 관계형성은 예수님께서 소경을 불러오라고 하심으로써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도권 이전에 소경의 간절함 부르짖음이 그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소경은 다른 이들로부터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보고, 예수님을 보고 따르기 위해 예수님을 향해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외치지만 현세적 해방자를 기다리던 많은 이들은 예수님과 격리시키려고 합니다. 곧 관계단절위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외치고 결국 예수님과의 관계형성이 시작됩니다. 그의 큰 목소리는 곧 그의 거룩한 간절함을 보여줍니다.
인간생활에서도 늘 사랑과 정의, 평화의 길, 예수님의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는 길을 막고 방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장애를 넘어 하느님과 예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도록 해주는 것은 바로 믿음과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함’입니다. 이 간절함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형성하도록 해주기에 그것은 성사가 됩니다. 이 거룩한 관계가 하느님의 자비와 생명과 치유를 가져다 줍니다.
오늘 하루도 과연 나에게는 그런 간절함이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거룩한 간절함은 하느님을 감동시키고 하느님의 눈을 얻게 됩니다. 또한 모든 사람과 사물과 사건을 관상할 수 있게 해주며 사소한 몸짓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일을 이룰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간절함은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한 몸짓, 정의롭고 인간다운 사회에 대한 갈망으로 표현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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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7. 연중 제30주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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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7. 연중 제30주일.
삶의 현장으로 하나님을 초청하는 삶
<2024.10.27> 아침을 여는 묵상 (애 5:1~10절)
❝삶의 현장으로 하나님을 초청하는 삶❞
❚ 평안이 없고, 안식이 없는 그리고 소망이 없는 삶으로 하나님을 초청할 때 영적 풍요를 누리게 됩니다.
✔ 어떤 삶으로 초청해 드려야 합니까?
➲ 평안이 없는 현장으로 하나님을 초청해야 합니다(1절).
‘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1절). ‘기억하소서.. 살펴보옵소서’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께 나아가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들을 위로하시고,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머물러 있어야 할 성전이 이방인들로 인해 철저하게 짓밟혔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치욕적인 일입니다. 모든 자유 또한 빼앗겨 버렸습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평안은 사라지고, 치욕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평안이 없고, 치욕만 남아 있는 그 현장으로 하나님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평안이 없는 삶의 자리에 주님을 초청해 드림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의 삶을 주목하여 보십니다. 거룩한 성전인 우리의 몸을 사탄에게 빼앗긴 치욕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고생하고 근심하게 하는 것이 본심이 아니시기에 평안이 없는 지금, 주님을 초청하십시오.
➲ 안식이 없는 현장으로 하나님을 초청해야 합니다(2~5절).
하나님을 떠났던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기업과 집들도 다 빼앗겨 버렸습니다(2절). 아버지와 남편을 잃어버린 고아요, 과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3절). 흔하디 흔한 물과 나무들을 가져오는 데도 비싼 값을 지불 해야만 했습니다(4절). 대적들의 압제로 인하여 하나님이 주셨던 안식의 땅에서 이제는 더 이상 쉼을 얻을 수 없는(5절) 상태에 이르렀음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기업’은 여호수아 시대에 정복한 약속의 땅입니다. 이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업으로 그들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약속되었음과 동시에 범죄 할 경우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 받은 곳입니다. 결국 그들의 범죄 함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나 이방 땅에서 또다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과 임재가 사라진 교회는 더 이상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호하심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순간 교회는 영적 부요함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의 삶 속에 불안이 들어오게 됩니다. 삶이 주는 고통스러운 멍에를 메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면서도 마치 고아처럼 늘 불안에 떨며 살아간다면 이는 정말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며, 우리의 삶에 영적 부요함을 공급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참 된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주는 풍요로움 속에서 안식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을 초청해야 합니다.
➲ 소망이 없는 현장으로 하나님을 초청해야 합니다(6~10절).
하나님 안에서 부요함을 누렸던 백성들은 이제 그들이 멸시했던 이방 나라들에게 양식을 구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6절). 이는 결국 조상 때부터 시작된 죄악이 지금까지 계속되었음의 결과입니다(7절). 종과 같았던 이방 나라들에게 지배를 받아야 하는 모욕적인 현실 그리고 양식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며, 극심한 굶주림으로 말미암아 몰골이 비참한 상태(8~10절)에 이르렀음을 탄식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사탄의 세력 앞에서 무기력하게 굴복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망이 사라진 삶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는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닌 나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7절).. 얼핏 보면 자신들이 겪는 이 고난이 조상들 탓으로 돌리는 듯하지만, 16절에서 ‘우리의 범죄’ 때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그들이 걸어온 죄악의 역사가 매우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는 것과 함께 그만큼 하나님의 인내도 컸음을 보여줍니다. 소망 없어 보이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 오랫동안 참아주시고, 기다려 주시고 계신 주님을 초청해 드려야 합니다. 절대 절망의 순간에도 주님을 향한 소망을 잃지 않는 영적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과 멀어져 있는 인생을 살아감으로 하나님이 주셨던 영적 부요함과 안식을 빼앗기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 주님이심을 철저히 인정하고, 주님과 함께 하는 행복한 동행을 이루는 축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애 5:1~10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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