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14: 13-16
도망한자가 와서
1. 본문 13절은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 입니다.
이제 모세가 이 장의 두 번째 부분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종에 대하여 생각하시고 그에게 아브람을 구원자로 주어 적군들의 손에서 구출을 받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여러 가지 의문이 일어나게 됩니다. 아브람 개인으로서 왕들을 대항하여 그의 가족들을 무장시켜서 공식적인 전쟁을 수행했던 것이 과연 합법적인가? 입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의 능력을 부여받고 전쟁터로 나간 것과 같이 동시에 하늘나라의 명령으로 인도되어서 그가 받은 소명의 한계를 범하고 넘어가지 않게 하셨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새로운 것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그분의 특별한 소명이라고 간주해야 됩니다 그는 이미 그곳의 왕으로 창조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땅의 소유가 미래의 시대로 연기되긴 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주신 권세에 대하여 괄목할 만한 증거를 제공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권능에 대하여 분명한 증거를 제공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비슷한 서두를 모세의 경우에서 읽게 됩니다. 거기에서는 모세가 자신을 이스라엘 민족의 복수자이며 구원자로 공개하여 제시하기 전에 애굽인을 죽였던 사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피지배자들은 자기들을 대항하여 어떤 무력이 사용될 때마다 자신들을 무장된 군대로 보호받기를 원하는 자들은 이 사실에서는 그들 위하여 어떤 법칙을 만들 수는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 다음에 우리는 동일한 아브람이 여기서와는 달리 끈기 있게 견디고 있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며, 그리고 그의 심령을 자극시켜 충분히 화나게 했던 피해를 복종하는 마음으로 참을 성 있게 견디어 내는 아브람을 보게 됩니다. 더욱이 아브람이 전혀 경솔하게 시도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계획이 하나님에 의하여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머지 않아 멜기세덱의 칭송에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전쟁이 성령의 특별한 지시를 받으면서 그에 의하여 수행되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어느 누가 여기서 예외를 들면서 아브람이 정복자들에게서 그들의 노획물과 포로들을 다시 빼앗아서 소돔사람들에게 완전히 회복시켜 주었을 때 사실상 그는 합법적인 것의 한계를 넘어 갔다는 것을 주장하고 그 당시에는 소돔사람들은 모든 것을 그의 보호에 의탁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즉 그분의 인가(認可)에서 추론한 대로 하나님이 이 일에 그의 인도자와 통치자이신 것으로 보이고 있기 때문에 그분의 은밀한 심판에 관하여 우리가 논쟁을 한다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소돔 사람들의 이웃들이 황폐되고 멸망되었을 때 하나님은 소돔의 정착인들이 더욱 더 극심한 심판을 당하도록 운명지으셨던 것입니다. 그들 자신들이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사악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죄에 대한 충분한 징계를 가하신 후에 하나님은 그분의 증인 아브람을 일으켜 그들이 도저히 멸망할 수 없게 하시려고 구출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이 특이한 제안은 아브람이 일으킨 전체 전쟁보다 더 강조된 전례로 만들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동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소돔에서 살육이 일어난 사실을 아브람에게 전해준 그 전달자에 관하여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경건한 사람이었다고 추측하고 있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약탈당하고 도망쳐 온 자로서 아브람의 인간성에서 동정을 기대하고 그에게 왔다고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제시하고 있는 의견대로 아브람이 강을 건너 왔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그를 히브리인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설명할 수 없으나 그가 ’에벨‘의 자손이라는 사실에서 그렇게 불려지고 있다는 것은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계승된 명칭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성령님이 명예롭게도 그 종족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족속이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2. 본문 13절 끝에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간이 경과되자 아브람은 그 땅의 왕들과 언약을 세우며 사귐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사람의 영웅적인 덕성이 그곳 사람들로 하여금 절대로 그를 멸시해서는 안될 사람으로 존경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나그네가 아니고 우거하는 자가 아니었다면 그에게 권속들이 상당히 많았으니 만큼 그가 왕들의 수효에도 계수 되어 왕 취급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시적인 일들에 관련된 언약으로 그런 일을 통하여 그의 평화를 제공하셨으며 그리고 그 민족들과 절대로 혼합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더욱이 이 모든 거래가 하나님의 명령에 의했다는 것은 다음 사실에서 쉽사리 추리해 낼 수가 있느니 이를테면 그를 돕는 자들은 큰 모험에도 전혀 주저하지 않고 막강한 힘을 가지고 승리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네 왕들을 공격하러 나갔던 사실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당시의 상태에 의하면 강한 왕들이었습니다. 확실히 하나님의 은밀하신 충동이 없으면 그들이 떠돌이 나그네에게 그토록 극진한 호의를 베풀어 준다는 것은 거의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3. 본문 14절은
“아브라함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 십팔 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입니다.
모세는 전쟁이 일어난 원인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그의 혈육을 포로에서 구출해 내는 것을 설명합니다. 한편 우리가 전에 언급한 것, 즉 그는 경솔하게 무기를 가지러 가지 않고 그것들을 자기를 그 땅의 주인으로 세워주신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온 것들로 여겼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왜 고대 해석가가 그 말을 ‘아브람이 훈련된 그의 종들을 계속하여’ 라고 표현하고 있는지 그 말씀 자체에 관하여 우리는 모릅니다. (뤼크)라는 말은 칼집에서 칼을 ‘뽑다’ 또는 ‘빼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모세는 이 종들을 (카니킴)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많은 자들이 추측하는 대로 군사적인 목적을 위하여 교육을 받고 훈련된 자들로서 부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이 아브람 자신의 권위로 성장하였으며 어린 시절에서부터 그의 훈계를 받고 그것으로 고취되어 왔기 때문에 그의 신앙으로 자극을 받고 그의 후원을 받음으로 그들은 더 용감하게 싸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이야말로 그를 위해서는 어떤 위험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던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가족 군대에서 우리는 주목해야 될 것이 있으니, 그것은 거룩한 족장의 근면성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복입니다. 그 복으로 그 가족은 통상적이며 일반적인 방법을 초월하여 부쩍 증가되었던 것입니다.
4. 본문 15-16절은
“⑮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왔더라” 입니다.
여기 아브람의 가신들은 마치 기드온의 300면 장병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말은 아브람이 자기 집 군대와 함께 혼자서 적군에게 돌진해 갔다는 의미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와 그의 세 동맹국들이 그들의 군대를 나누어 적군들에게 보다 엄청난 공포를 주었던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제3 부류에 속한 자들은 그 구절이 적군들 가운데로 돌입해 들어가는 것을 묘사하는 히브리인 식의 표현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두 번째의 주해를 옹호합니다. 이를테면 그는 각각 다른 방향에서 적군에게 침략해 들어갔다는 말이며 갑자기 그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일으켰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의 시간적인 상황이 이 견해를 유리하고 있으니 그것은 밤에 그들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그와 유사한 용기에 대한 예들이 불경스런 역사에서도 언급되고 있긴 하지만 그와 같이 소수의 무리를 이끌고 감히 그가 승리감에 취해 용기백배해 있는 수많은 군대를 공격했다는 사실은 온전히 하나님의 호의 때문이었다고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